148화
손가락으로부터 이마의 주름살이 느껴졌다.
한평생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황제의 얼굴에 주름살이라니.
어느새 몸 상태가 여기까지 나빠진 모양이었다.
황제가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불길한 느낌이 든 검은 로브의 마법사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황제 폐하. 그러면 저는 여기서 작별 인사를…”
“이리 와라.”
도망치려던 마법사는 황제의 말을 듣자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황제의 말에 서려 있는 힘이 그를 옥좌 앞으로 원하지 않은 걸음을 옮기게 한 것이다.
마법사의 소망과 의지와는 반대로.
그는 도망치고 싶어도 주인의 말을 듣지 않은 자신의 육체를 원망하는 게 최선이었다.
마법사가 다가오자 황제는 그의 목을 향해 입을 열었다.
- 뚝, 뚝.
마법사가 바닥에 쓰러지자 붉게 물든 입가를 놔둔채 황제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만졌다.
이마에 있던 주름살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크흐, 역시 평범한 것들보다는 마나가 듬뿍 들어간 녀석들이 효과가 좋군. 이종족같이.”
붉은 갑옷의 호위 기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정도로는 효과가 오늘도 못 넘길 겁니다.”
“짐도 안다. 그래서 왕국과 제국, 심지어 이종족과 무술 대회마저 이용하려 든 게 아닌가.”
붉은 갑옷 호위 기사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계획대로라면 문제없다는 말이지만 세상일이 계획대로만 돌아가는 게 아니다.
오늘 일만 해도 황제의 신체가 예상보다도 급격히 나빠져 벌어진 일이었다.
역천逆天의 행위.
애초에 300년을 죽지도, 늙지도 않고 사는 인간이 정상적인 존재일 리가 없었다.
있다면 사람이 인간으로 해서는 안 되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자들뿐.
황제는 그렇게 태어난 것도 모자라 남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더 오래 살려는 중이었다.
붉은 갑옷 호위 기사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하늘을 거스른 그런 자들을 몇몇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맞이했던 비참한 최후도 말이다.
이렇게 생각 없이 행동하다가는 조만간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몰랐다.
자신의 일을 비밀리에 수행 중이라 측근이라 볼 수 있는 마법사를 단번에 처리하다니.
물론 붉은 갑옷 호위 기사는 딱히 황제의 행동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파멸의 시간이 더욱 일찍 찾아온다면 그에게는 좋았으니까.
황제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황제는 더욱 무술 대회에 집착하는 모습이었다.
이번 무술 대회가 끝날 무렵에는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날 것이었다.
그게 제국이든 황제든 간에 말이다.
하늘을 거스르는 행동은 그만큼 큰 대가가 따르는 것이다.
***
본선 대진표가 정해진 다음 날.
원래는 바로 출전해야 했으나 김검천은 시드 배정을 받은 몸.
그렇기에 내일부터 대회에 나가면 되었기에 한가했다.
그래서 이야기 끝에 오늘은 본선 참가자라는 확인도 할 겸 본선 대회를 구경가기로 했다.
집사가 쿠퍼에게 뭔가를 넘긴 후 배웅하며 물었다.
“정말로 제가 안내를 안 해드려도 되는지요?”
김검천이 손을 내저었다.
“매번 안내해 줄 필요는 없다. 요 며칠 사이 수도 지리에 나름대로 익숙해지기도 했고.”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여러분들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리에 님은?”
리에 님이라니.
어젯밤 사이 황태자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자신들을 더욱 정중하게 대하는 걸까.
“원래는 놔두고 가고 싶었는데 리에가 고집을 부려서 오늘은 데려갈 생각이야.”
“저런. 황태자 전하께서 아쉬워하시겠군요.”
“그러면 빨리 결혼이라도 하라고 그래.”
“하하,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예전에 좋아하시던 분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셔서요.”
“황태자쯤 되면 여기저기서 손을 뻗치는 곳이 많을 텐데. 의외로 순정파인가.”
“지금까지 한 사람을 잊지 못하는 걸 보면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러면 잘 다녀오십시오.”
김검천 일행이 저택을 떠나자 집사가 중얼거렸다.
“아차, 본선 시작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알려드리는 게 좋았으려나?”
***
느긋하게 걸어서 사람들이 본선 대회장 장소로 향하는 데 쿠퍼가 김검천에게 다가왔다.
“김검천님.”
“무슨 일이지?”
“어제 각자 수도를 돌아다니면서 자기 일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나 같은 경우는 프리와 변두리 영지에서 구출해준 제국인들을 보러 상인 길드에도 갔었고.”
“저도 그렇게 돌아다니는 데 길에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네가 이상하다고 할 정도면 평범한 소문은 아니겠군.”
“예. 조만간 제국 수도에 위기가 닥칠 거라고 하더군요. 커다란 재해가 일어날 거라면서요.”
김검천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무술 대회 본선이 진행되어 한창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에 잠겨 있는 시점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정체불명의 재난 이야기가 퍼지고 있다니.
김검천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샤칸과 루시엘도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샤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게. 여기 인간들은 뭐가 그리 걱정이 많은지 자기 집단의 두목도 염려하더라.”
“두목이라면?”
김검천이 무슨 소리인가 물으니 루시엘이 샤칸의 수염을 잡아당기며 대신 대답했다.
샤칸은 루시엘에게 수염이 잡히자 제대로 반항도 못 한 채 바둥거렸다.
“제국 황제를 말하는 겁니다. 이 난쟁이는 제대로 된 단어도 하나 말 못 하는군요.”
“이 귀쟁이가? 우리 양심적으로 수염은 놓고 말하자고. 넌 목숨을 잡혀 본 적 있냐?”
“하지만 수염을 잡혀 본 적은 없지요.”
드워프인 샤칸에게는 제국 황제도 어떤 인간 집단의 두목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드워프나 엘프들은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이기에 이런 소식을 더 잘 듣고 다닌 것 같았다.
루시엘이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뭘 하든지 이런 소문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만 확실히 이상하긴 합니다.”
“어떤 점이 말인가?”
“어느 곳이든 지배계층, 특히 최고 권력자에 대한 불만은 있습니다. 그렇기에 황제로 끝나면 이해가 가는데 황태자에 대한 불길한 소문마저 돌아다니고 있더군요.”
그러고 보니 지나가는 길인데 목소리를 줄인 채로 모여서 이야기하는 자들이 많았다.
김검천은 미리내를 통해 평상시라면 들리지 않을 소리를 증폭해 들어보았다.
길거리에서 어디에나 있는 평민들로 보이는 자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거 알아? 폐하에게 위해가 닥칠지도 모른다는데.”
“자네도 들었나? 누군가에게 들었는데 이번 무술 대회 전후로 사람도 많이 죽을 거래.”
“그거 아나? 그래서 무술 대회를 연다는 소문도 있더군.”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걸까?”
“흥, 전쟁이라면 오히려 환영이지.”
“맞아. 제국은 무적이고 황제 폐하께서는 초월적 존재시라고.”
“하지만 초월 존재도 결국은 죽거나 소멸하지 않을까?”
“그러네. 우리는 말만 들었지 그 존재를 직접 본 적도 없잖아.”
갑자기 그들의 분위기가 싸늘해지며 입을 닫는 모습이 보였다.
거리 치안을 담당 중인 병사들이 수군거리던 그들에게 다가온 것이다.
안 그래도 평소보다 더욱 많은 사건이 터져서 짜증이 잔뜩 난 상태로.
“거기서 다들 뭐하나? 안 그래도 사람들이 넘쳐 좁은데 멈춰서 통행 방해하지말고 가라고.”
“알겠습니다. 지금 갑니다.”
“다들 뭐하나? 어서 가지.”
병사들 중 한 명이 투덜거렸다.
“에잇, 안 그래도 과학이니 화약이니 하는 걸 단속하라는 임무 때문에 가득이나 일이 많은 상태인데 저런 놈들까지 난리라니.”
여기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인가.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 중에서 화약같이 과학에서 비롯된 힘을 싫어하는 자가 많아 보였다.
하긴 자신들이 다루기 힘든 힘은 독이 든 사과나 마찬가지었으니까.
그런데 흩어져 가는 사람들 중 유독 홀로 움직이는 자의 움직임이 눈에 띄였다.
김검천의 시선이 그를 쫓다가 다시 돌아왔다.
수상한 모습이기는 하나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사람을 미행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지금은 대회 본선을 위해 관람하러 가는 중이기도 하고.
그렇게 도착한 무술 대회 본선이 열리는 장소는 원형의 거대한 건물이었다.
- 우와와!!!
100여미터는 될만한 거리에서 함성이 들려올 정도로 많은 사람을 수용 가능한 장소.
김검천은 그걸 보자 고대 로마 시대의 한 유명한 건축물이 떠올랐다.
“콜로세움? 피와 살이 튀는 대회가 열리는 장소로 정해진 게 이런 형식의 건물이라니.”
우연에 불과한 걸까.
어쩌면 이런 형태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좋아져 만들어진 건지도 몰랐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제국의 콜로세움이 지구의 콜로세움과 너무 닮아 보였지만.
언젠가 지구에서 보았던 콜로세움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다니.
김검천은 지구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이동하다보니 콜로세움의 출입구로 보이는 곳을 지키는 사람이 보였다.
쿠퍼가 주머니에서 외출하기 전 집사가 챙겨준 걸 넘겨주었다.
아마 그게 오늘 대회 표인 것 같았다.
집사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던 김검천은 나중에 뭔가 보답해줄 생각이 들었다.
쿠퍼가 다가와 말했다.
“표가 지정 좌석이라 저쪽 통로로 가면 된다고 합니다. 지정 좌석을 위한 고객을 위해 따로 만든 길이라고 하더군요.”
“여기도 그런 구분은 있는 모양이로군.”
관객의 10%정도만 지정 좌석이고 나머지는 자유 좌석이라 들어가는 길도 다르다고 했다.
자리를 확인하자 김검천이 앞장 섰다.
통로를 지나 나타난 지정 좌석들은 넓직했고 의자 간 거리도 충분했다.
뒤늦게 김검천 일행이 들어섰어도 다른 관객들에게 별 다른 방해 없이 착석할 수 있었다.
서서 움직이기도 힘들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선 자유 좌석과는 달랐다.
쿠퍼가 리에에게 먼저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고르라고 한 다음 말했다.
“지정 좌석이라더니 집사가 꽤 신경써서 골라준 모양인데?”
세이야가 아쉬운 듯 대답했다.
“최고의 자리는 아니지만요. 김검천님에게는 모자라 보이는데요.”
자유, 지정 좌석 외에도 높으신 분을 위한 좌석이 따로 보여서 하는 소리 같았다.
김검천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집사가 충분한 호의를 베푼거니까 괜찮아. 나중에 고맙다고 말해주자고. 응?”
-쾅!
“으아악!”
“저게 뭐야?”
“관객을 위해 마법 방어막이 설치 되어 있지 않은거야?”
자리에 앉으려는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변에서 아우성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걸 확인한 김검천이 고개를 보았다.
하늘에서 100킬로는 되어 보이는 근육질의 전사가 무기와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전사가 떨어지는 건 처음 겪는 일인데? 오늘 기상 예보정도는 미리 들어둘 걸 그랬군. 맞으면 좋을 테니.”
낙하 지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수십여 미터는 될듯한 높이에서 떨어지는 저 덩치와 부딪히면 잘해야 고통없이 죽을 테니까.
추락하는 전사가 있는 위치에 서있는 김검천은 정작 태연한 모습이었다.
김검천은 손 위로 실드를 넓게 펴 사람만한 넓이로 만들어 냈다.
“발 밑과 실드 위로 반중력 기동. 추락으로 인한 상대가 받을 충격의 계산도 부탁해.”
[예상 충격 확인. 반중력 장치 기동.]
김검천은 그 상태로 약간 공중에 떠오른 후 한 손을 내밀었다.
급히 기동한 반중력 장치였기에 충격을 처리 못할 것도 감안한 동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도망가느라 김검천이 무엇을 하는지 안 보였지만.
- 휘이익.
전사가 지면에 충돌하려는 순간 김검천이 슬쩍 한 발을 내딛으며 좀 더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러자 손 위에 퍼트린 실드 위로 전사가 정확히 떨어져 내렸다.
김검천이 아니었다면 전사는 지면으로 떨어져 뼈와 살이 분리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