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받아낸 낙하 충격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김검천의 몸이 그만큼 지면에 가까워졌다.
전사의 운동 에너지를 반중력 장치로 크게 낮췄는데도 그 정도였다.
그럼에도 크게 다쳤는지 전사는 줄어든 충격만으로도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쿨럭, 쿨럭!”
파워드슈츠를 입은 김검천 혼자라면 낙하 충격력을 몸으로 받아낼 수도 있긴 했다.
그랬다면 전사는 고스란히 충격을 받아 지금같이 피를 토하는 게 아니라 즉사했을 것이다.
김검천이 괜히 반중력 장치로 충격을 완화한 게 아니었다.
“저런 높이에서 사람이 떨어지는데 무사히 받았다고?”
“대단한데. 좋아보이는 마갑을 착용한 걸 보니 실력있는 기사같이 보이는걸.”
“얼굴과 거동에 기품이 있는 걸 보니 어디 귀족가문의 자제분인지도 몰라.”
추락한 전사가 무사히 살아남은 모습을 보자 사람들이 놀란 어조로 수근거렸다.
김검천은 전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피를 토할만한 충격이라 내장이 상했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전사는 결국 다시 주저 앉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입을 여는 게 근성이 대단하긴 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신경쓰지 말라고. 머리 위에서 누가 떨어지면 받는 게 당연하거든.”
“후후, 당연한 일을 하는 사람이 드문 게 지금 세상입니다만. 거기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피하지 않고 받아 줄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더 희귀하고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전사에게 있어서 김검천은 생명의 은인이었다.
전사가 곧 기절하지 않았다면 계속 감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후 대회 운영을 위해 파견된 병사들이 전사와 전사의 무기를 들 것에 싣고 나갔다.
- 이번 B블록 2차전 진출자가 결정되었습니다! 늪 부족에서 온 검은대지 주술사의 승!
이어 대회를 진행하는 운영진으로부터 마법으로 음성을 증폭시킨 소리가 울려퍼졌다.
승리한 대지 주술사가 손을 흔들어 보이다가 시합장에서 내려갔다.
시합의 승패를 지켜보던 사람들로부터 환성이 터져나왔다.
“끼야호! 최고다! 대박이야!”
“젠장! 이쪽은 망했어! 설마 전쟁터에서 수도 없이 굴렀다는 전사가 당할 줄이야!”
들고 있는 종이 조가리를 던지는 걸 보니 시합의 승패라도 걸고 도박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돈과 폭력 앞에서는 흥분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었으니까.
이긴 사람이 히죽 웃었다.
“방금 보고도 그런 이야기야? 그게 주술이라더라고.”
“마법 말고 저런식으로도 주술을 쓸 수 있는거였군.”
“이번 대회는 확실히 예전보다 수준이 높아.”
“맞아. 방금 저 전사도 상급 기사 수준이었는데 제대로 실력 발휘도 못하고 당했잖아.”
“모르는 일이야. 저 주술사를 상대로 전사는 상성이 나쁜 건지도 모르고.”
“그러게. 다음 저 주술사의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지금 나오는 마법사라면 어떨까?”
“마탑의 마법사 말이지? 역시 제국 무술 대회는 최고야. 피를 보기에 딱 좋다니까.”
“흐흐흐, 맞아. 요즘 피를 보면 화가 확 풀리는 느낌이 최고더라고.”
이야기만 들으면 피에 굶주린 살인마끼리 하는 대화 같았다.
눈이 약간 붉게 충혈된 것을 빼고는 어디에나 있을만한 평범한 사람들인데 말이다.
방금 전 전사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사건 같은 건 다들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뭔가에 빠져든 중독자처럼 보였다.
눈이 좋은 루시엘이 김검천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이들을 보니 수도 밖에서 그 마을 사람들 생각이 납니다.”
“나도 그래. 하지만 지금 당장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확실한 것도 아니니 일단은 넘어가자고.”
시합이 예기치 못한 사고로 잠시 중지되었다.
그러자 뭔가에 굶주리기라도 한 듯 관중들이 여기저기서 소리쳤다.
“빨리 다음 출전자 나오라고!”
“맞아! 다음에는 누가 죽을지… 아니, 이기나 마지막 시합을 개시하라고!”
그 소란 속에서 루시엘이 다시 말을 걸었다.
“우리가 늦긴 늦은 모양입니다. 마지막 시합이라고 하는 걸 보면요.”
“그래도 봐야 할 시합은 남아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김검천은 어제 받았던 본선 대진표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시드 배정을 받은 김검천은 B블록 마지막 시합의 승리자와 2차전에서 붙게 되었다.
그것이 이 시합인 것이다.
관객들의 야유와 환호 속을 비집고 대회 운영진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러면 마지막 시합을 시작합니다. B블록 출전자들은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시합장 한쪽에서 보통 체격에 머리까지 덮는 로브를 입은 사람이 지팡이를 든 채 나섰다.
아까 사람들이 이야기한 마법사라는 게 저 사람인 것 같았다.
마법사가 나온 반대편에서는 몸집이 작고 말라 보이는 사람이 시합장 위로 올라섰다.
전신 가죽 갑옷에다가 장검과 여러 개의 단검이 허리춤 가죽 벨트에 나란히 꽂혀 있었다.
최대한 속도를 중시하기 위해 가죽 갑옷을 입고 나선 것 같았다.
루시엘이 조용해지자 이번에는 쿠퍼가 김검천에게 입을 열었다.
“장비를 보니 마치 도적 같아 보이네요. 저자는 제법 마법사를 상대할 줄 아는 듯한 모습입니다. 하긴 본선에 올라왔으니 그 정도 수준은 충분히 되겠네요.”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건가?”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마을에서 본 자 빼고는 처음 접하시는 군요.”
“더군다나 내가 바로 제압했기에 마법사와 전투 경험을 쌓을 시간도 제대로 없었지.”
쿠퍼는 김검천을 위해서 간단히라도 마법사 대응책을 알려주고 싶었다.
누가 2차전에 진출할지 몰라도 이런 지식을 알아서 손해 볼 건 없었으니까.
“기본적으로 마법사는 주문을 외어 자연계의 마나를 이용해 적을 공격합니다. 불꽃이나 얼음, 바람이나 대지같은 힘으로 나타나는 거지요.”
“지수화풍 4대 원소인가. 나도 한번쯤은 들어본 것 같군. 그런데 주문을 꼭 외워야 하나?”
“역시 김검천님이십니다. 그 부분을 바로 지적하시다니. 주문을 외우지 않으면 마법이 완성되지 않거든요.”
“마법사가 마법을 못 쓰도록 상대가 방해한다는 건가?”
“마법이 발동한 마법사와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니까요.”
“그러면 거리가 관건이겠군. 마법이라면 원거리 공격도 가능할 테니.”
“바로 그겁니다! 그 2개가 가장 중요한 것이니 필수적인 공략법은 익히신 겁니다.”
상세하게 들어간다면 끝이 없기에 일단 이정도면 될 것 같았다.
쿠퍼는 흐뭇한 표정으로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초월 존재 같은 함선 미르와 미리내를 거느린 김검천이라도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필요한 정보를 알려준다면 중요한 부분이 뭔지 즉시 파악해냈다.
모르는 것이라도 귀찮아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힘으로 삼으려고 들었다.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가 현재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성장하려는 모습.
누구라도 믿고 따를만 하지 않는가.
쿠퍼는 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느새 자신도 세이야처럼 존경을 넘어 숭배에 가까운 감정을 지니게 된 모양이었다.
- 그러면 2차전 진출을 건 마지막 시합. 시작합니다!
“빨리 싸우기나 해!”
“이기는 놈이 우리 편이야!”
“우와와!”
시합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동시에 관중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마법사 대응책 이야기는 끝났으니 김검천과 쿠퍼도 다른 사람들처럼 시합에 눈을 돌렸다.
도적 차림새의 출전자는 시합 시작을 알리자마자 마법사와의 거리를 급격히 좁히고 있었다.
마법사는 오히려 거리를 늘리려고 뒤로 물러서는 중이었다.
가까울 때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자와 멀 때 가장 강해지는 자간의 거리 싸움이었다.
온몸이 근육질인 도적과 연약하게 보이는 마법사의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지켜보던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도적 쪽은 마나로 신체를 강화했을 텐데도 아직 거리가 유지되다니. 마법사가 뭔가 수를 썼나보군.”
이 자리에서는 가장 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루시엘이 대답했다.
“그럴겁니다. 상대는 상급 기사 수준으로 보이지만 마법사도 그 정도는 되어 보이니까요.”
“마법사도 강함을 구별할 수 있게 단계가 나눠져 있는 건가.”
“그들도 하급, 중급, 상급 마법사로 나뉘어 집니다. 그 위로는 마스터 메이지가 있고요.”
“지금 시합을 하고 있는 마법사 수준은?”
“바로 비행 마법을 쓰지 않고 지상에서 견제를 하는 걸 보니 상급 마법사는 되어 보입니다.”
“상대방에게 유리한 지상에서 싸우는 셈이니 그만큼 자신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군.”
“하급이나 중급 마법사의 경우에는 예선 자체를 통과하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기도 하고요. 아, 슬슬 상대도 본격적으로 손을 쓰려는 모양입니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도적 차림의 출전자가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달려서 거리가 줄지 않으면 다른 식으로 마법사를 처리하면 되었으니까.
폼으로 이런 차림에 투척용 무기를 달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마법사를 향해 마나가 듬뿍 담긴 푸른 빛의 단검이 날아갔다.
-찌직.
마나에 의해 파괴력이 증가된 단검이 마법사의 로브를 찢고 지나쳤다.
머리를 스쳤기에 머리의 로브가 흘러내린 마법사의 당황한 표정이 눈에 띄였다.
그래서일까.
마법사의 속도가 줄어들자 그 틈을 이용한 도적이 급격히 거리를 줄였다.
전사형 타입인 샤칸은 마법사가 당한 게 신이 났는지 크게 소리쳤다.
“마법사가 방심한건가? 당연한 결과인지도. 역시 전사가 최고라고!”
김검천이 샤칸의 말을 부정했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당한 척했다면?”
“그럴리가! 마법사가 자신의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는데!”
김검천이 샤칸에게 웃어 보였다.
“어쩌면 그게 이곳의 고정관념인건가.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샤칸이 뭐라고 반박하려는 순간이었다.
- 쿠왕!
시합장으로부터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돌과 흙이 섞인 먼지가 피어올랐다.
폭발한 곳 근처에 있던 관객들 중에는 먼지를 들여마시고 기침을 하기도 했다.
관객들이 여기 저기서 입을 열었다.
“쿨럭, 쿨럭, 무슨 일이지?”
“마법사가 뭔가 마법을 쓴 것 같아.”
“일부러 상대를 끌어들인 후 이 순간을 노려 범위 마법을 펼친 건가?”
흙먼지 사이로 도적 차림의 출전자가 가죽 갑옷이 찢어진 채 낭패한 모습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급히 시합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공격을 겨우 막아내기는 했지만 순간적으로 마법사가 어디있는지 놓친 것이다.
양손에 쥐어진 단검은 한층 더 강렬히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법사의 행적을 발견하기만 하면 바로 표적을 향해 날아갈 준비를 하면서.
그때 하얗게 빛나는 화살 하나가 도적 차림의 출전자에게 날아왔다.
예상이 틀려 입을 다물고 있는 샤칸 대신 루시엘이 중얼거렸다.
“마법 화살? 위력이 약하지만 대신 빠르게 발동 가능한 마법이지요. 하지만 성급하군요.”
김검천이 물었다.
“성급하다는 이유가 있겠지?”
“예. 이런 대회에 나오는 상대에게 마법 화살 같은 하위 마법이 통할 리 없으니까요.”
“저게 미끼라면? 아까도 그랬지만 마법사가 뭔가 다른 방도를 준비해둔 게 아닐까 싶은데.”
김검천의 말에 루시엘도 조용히 시합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적 차림의 출전자는 마법 화살을 튕겨낸 후 쏘아진 방향으로 달려들고 있는 중이었다.
종류가 다양한 마법 화살 중에서도 하얀 빛의 마법 화살은 오직 직선으로만 움직였다.
그러니 마법 화살이 쏘아진 방향만 알면 마법사의 위치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흙먼지를 뚫고 튀어나간 장소에는 마법사가 서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부분은 마법사의 주변에 수십 개의 마법 화살이 떠 있는 것이었다.
마법사는 낚인 게 아니라 상대를 낚은 것이었다.
마법 화살은 당황한 도적 차림의 출전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마법 화살 자체는 별것 아니었기에 도적 차림의 출전자는 정신을 차리고 쳐내었다.
하지만 쏘아져 오는 마법 화살이 10개, 20개가 되자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마법사가 지팡이를 뻗으며 발휘한 마법이었다.
붉은 빛이 번뜩인다 싶더니 지팡이 위로 사람 머리통만한 불의 공이 3개가 뭉치더니 발사된 것이다.
마법 화살에 손발이 묶인 도적 차림의 출전자가 이를 악물고 장검을 뽑아 휘둘렀다.
- 퍼퍼펑!
시합장 위로 폭음과 함께 불똥이 튀고 매케한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왔다.
잠시 후 시합장에는 한 구의 검게 타버린 출전자와 마법사만이 남았다.
- 마지막 시합은 마탑 출신의 마법사의 승리입니다!
대회 운영진의 선언과 함께 오늘 본선 대회는 끝났다.
마법사가 퇴장한 뒤로 다들 퇴장하는 데 그 와중에도 열심히 토론하는 이가 있었다.
시합을 보던 관객들 중에는 마법사들도 있던 것이었다.
“자네, 방금 보았나? 마법 화살의 갯수 말이야.”
“마법사가 한번에 마법 주문을 2개나 외울 수 있는 이중 영창의 실력자인 것도 대단했지만 마법 화살을 그렇게나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다니 놀랐다네.”
“대단하고 말고! 저 정도면 우승도 노릴 수 있지 않을까?”
지나치다 마법사들의 대화를 들은 쿠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김검천이 이기는 건 쿠퍼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런 실력을 지닌 마법사라면 김검천이라도 상처를 입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만큼 대회에서 우승하는 일이 힘들어질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에는 우승을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을 수도 있는 문제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