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황제가 엘프 시종의 목에서 입을 떼는 모습이었다.
엘프 시종은 목에서 피를 뿜은 채 알현의 방바닥에 쓰러졌다.
입가를 붉은 색으로 물들인 황제는 옥좌로 돌아가 보석 상자에 놓인 혈석을 먹어 치웠다.
바닥에 쓰러져 죽은 엘프 시종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블러드 타워에서 만들어진 이 혈석은 예전 것보다 효율이 증가했다.
마나가 풍부한 대회 참가자들을 제물로 바쳐 생성된 것이었으니까.
거기다 이종족의 피와 함께 복용하면 더욱 효과가 높아지는 효능이 있었다.
그제야 황제는 자신의 얼굴과 손을 매만지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는 몰랐지만 늙어가던 황제의 몸이 다시 젊어진 것이다.
워스덤의 연구 성과는 이종족 말고도 이런 식으로 결과를 내고 있었다.
황태자가 얼굴을 피로 물들인 황제와 죽어있는 엘프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 폐하? 이건 도대체…”
“보았느냐?”
황제가 황태자의 말을 가로채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황태자는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
황제의 행동만 보면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오히려 잘못 같지 않은가.
“보았구나.”
같은 피를 이어받은 혈족이자 자신의 후계자를 대하는 모습은 절대로 아니었다.
자기 일을 방해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짜증을 넘어 불쾌감을 느끼는 황제의 눈.
그런 시선이 자신을 향했으니 황태자가 가슴 속 깊이 절망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사실 이상한 건 없었다.
황제는 언제나와 똑같이 황태자를 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황제에게 타인 취급 받은 충격이 왜 이렇게 절실히 느껴지는 것일까.
황제는 변하지 않았지만 황태자 자신은 김검천 일행과 지내며 달라졌던 모양이었다.
황제에게 대들 정도로.
황제는 검은 갑옷 기사가 내민 비단 손수건으로 붉게 물든 손과 입을 닦았다.
사용이 끝나자 버려진 손수건은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엘프 시종의 얼굴을 덮었다.
황제가 그걸 보고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쓰레기를 함께 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치울 노력이 줄어들겠군."
더 참을 수 없게된 황태자는 평소와는 다르게 추궁하듯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대로 보았습니다만.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이거 놀랍군. 짐이 이런 것까지 너에게 해명해야 하는 것이냐?”
황제는 제국의 정점이자 절대 권력자.
제국에서 엘프 같은 이종족 같은 건 유용한 도구에 불과했다.
황제가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다가 버린다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방금 버려진 손수건처럼.
그동안의 황태자를 생각하면 그 한마디로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황태자가 김검천 일행과 함께 지내는 동안 일어날 사고관의 변화가 없었다면 말이다.
황태자는 평소와 달리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황태자입니다! 충분히 알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짐은 황제지. 그게 네가 황태자가 된 이유이고.”
“황제 폐하!”
“네 발로 가겠느냐? 아니면 강제로 끌려 나가겠느냐. 그것도 아니면… 짐의 손에 죽겠느냐.”
황태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태도로 자신에 대한 황제의 마음은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위해 여태까지 노력해 온 것인가.
황제에게 억눌린 채로 살다가 그냥 죽기 위해서일까.
황태자의 마음속에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바닥에 쓰러져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갔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황태자의 눈앞에 김검천이 짓고 있는 자신이 넘치는 얼굴이 떠올랐다.
평상시에는 짜증을 유발하긴 했지만 지금은 더 없이 힘이 되는 모습.
만약 김검천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물론 자신은 김검천이 아니었으니 그와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적어도 하고 싶은 말 정도는 제대로 해야지 않겠는가.
여태까지는 황제로부터 관심을 갈망하던 황태자였다.
황실의 삭막한 인간관계 중 유일한 안식처이던 그녀가 사라진 뒤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황제에 대해 애정을 갈구하던 자신이 한심해졌다.
마음을 굳힌 황태자는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한 자 한 자 힘을 실어 말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황제 폐하의 뜻대로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황태자뿐만 아니라 황제에게도 뜻밖의 날이었다.
황태자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반항하는 걸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생각하지 못한 일에 대한 놀라움이 사라진 뒤에 남은 건 분노라는 감정이었다.
믿었던 개에게 물린 느낌이랄까.
황제 자신과 같은 피가 조금은 섞여 있어 다른 자들보다 관대하게 봐주었더니 반항이라.
필요 없는 건 바로 치우는 게 보기에도 좋을 것이다.
“그나마 쓸모가 있을지 몰라 황태자라고 귀엽게 봐주었더니 선을 넘는구나. 오냐, 죽어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황태자는 자신의 숨이 막혀 오는 걸 느꼈다.
누가 황태자의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니었다.
알수 없는 힘에 의해 황태자의 육체가 스스로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었다.
황제의 말이 세상의 법칙이라도 된 듯이.
“끄으윽--!”
황태자가 움직임은 자유로운 자신의 두 손을 목에 가져다 대었다.
어떻게든 호흡을 해보려는 애처로운 발버둥이었다.
결국 쓸모없는 행동이었지만.
황태자의 눈이 돌아가며 입에서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할 때였다.
갑자기 황태자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죽은 게 아니었다.
황제를 지키는 2명의 호위 기사 중 붉은 갑옷의 기사가 손을 쓴 것이었다.
황태자의 혈도를 짚어 일시적으로 기절시킨 것이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는 황제의 시선이 붉은 갑옷 기사에게 향했다.
“무슨 의도인고? 설마하니 이제와서 짐에게 대항하려 드는 것인가?”
붉은 갑옷 기사가 쓰러진 황태자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린 채로 대답했다.
“그 반대입니다. 황제 폐하를 위해 황태자를 살려두려는 것이지요.”
“짐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이 짐을 위한 것이라고?”
황제의 의문에 검은 갑옷 기사가 붉은 갑옷 기사를 향해 움직이려 들다가 멈추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황제의 의지에 따르는 듯한 행동이었다.
붉은 갑옷 기사가 알현의 방 입구와 검은 갑옷 기사를 힐끗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일을 처리하는 데 너무 소란스러웠습니다. 충분히 거리를 두어 떨어진 곳에서 경계하라고 했지만 곧 친위 기사들이 달려와 황제 폐하께서 하신 일을 목격할 겁니다.”
약간 진정된 모양이지만 황제는 여전히 분노에 잠긴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황태자가 짐에게 죽는 걸 친위 기사들이 목격하게 된다는 건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그들도 죽이면 그만인 것을.”
공식적인 후계자인 황태자도 죽이는데 친위 기사 몇 명 더 죽이는 게 무슨 문제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그게 황태자든 충성을 맹세하고 비밀 서약을 한 친위 기사이든 간에.
평상시라면 그래도 되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붉은 갑옷 기사는 그 점을 지적하기로 했다.
“그들은 그렇다 치고 황태자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세워둔 자라고 해도 명색이 황제 폐하의 후계자 아닙니까?”
“후계자라고 해서 짐의 뒤를 이을만한 선택받은 자는 아니다.”
황제가 그런 이야기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황태자가 마석을 충전하지 못해서였다.
마석을 충전하는 건 제국 황실에서나, 그것도 어쩌다 나타나는 특성인 것이다.
제국 황실에서 그런 재능을 타고 난 자가 있다면 그자가 보통 황제가 되는 것이다.
상급 마석을 자기 뜻대로 다루는 재능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특히 요즘처럼 마석이 말라붙기 시작한 시대라면 더욱더.
“황제 폐하와는 달리 무지한 대중들은 후계자로 알고 있으니까요. 기념할만한 탄신 기념일을 맞아 황태자를 죽이다니.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지요.”
“짐이 그런 것들마저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냐?”
“시기가 시기니까요. 무술 대회마저 그 계획의 일부 아닙니까? 황제 폐하를 향한 대중들의 환호와 칭송은 계획을 좀 더 쉽게 완성하게 만듭니다.”
“흐음, 그건 그렇도다. 그걸 위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있으니.”
황제가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내보였다.
당장 황태자를 쳐 죽이려고 든 처음과 비교하자면 확연히 달라진 모습.
“더군다나 이런 일에 일일히 힘을 쓰시는 건 황제 폐하의 신체에도 영향이 갑니다.”
“확실히 능력을 쓸 때마다 젊음이 사라지는 게 느껴진다. 빨리 늙어가는 게 보일 정도고.”
황제가 그 말에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얼굴에 대었다.
그의 이마로부터 굵게 파인 주름살이 다시 느껴졌다.
육체가 혈석의 힘으로 젊음을 회복했었는데 잠깐동안에 다시 나이를 먹은 것이다.
붉은 갑옷 기사의 말대로 힘을 사용한 탓도 있을 테고.
아직 모든 것이 불안정한 것이다.
흔들리는 듯한 황제에게 붉은 갑옷 기사가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마귀가 속삭이는 것 같았을 것이다.
사정을 알아도 비슷한 반응이겠지만.
“무엇보다도 황태자를 죽이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차라리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절망과 공포를 맛보게 해주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황제가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절망과 공포라. 하긴 그냥 죽이는 것만으로는 짐의 화가 풀리지 않겠지.”
“적어도 무술 대회가 끝난 다음에 손을 쓰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군. 대회 우승자가 결정되어 그들이 짐을 위해 사용되고 나서도 늦지는 않을 테지. 그때쯤이면 블러드 타워의 일도 마무리되어 훌륭한 혈석이 만들어질 테고.”
황제가 그 말을 끝으로 옥좌로 돌아가 앉아 입을 다물었다.
말을 줄여 육체에서 소모되는 에너지를 조금이나마 아끼고 싶어서였다.
붉은 갑옷 기사가 자신이 안고 있는 황태자를 내려다보았다.
눈꺼풀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걸 보니 중간에 깨어난 모양이었다.
원래는 좀 더 혼절시킬 작정이었는데 오랜만에 손을 쓰다 보니 실수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황태자는 황제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게 되다니.
그때 가장 가까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친위 기사들이 뛰쳐 들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방금 전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아 함부로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붉은 갑옷 기사가 입을 다물고 있는 황제를 대신해 말했다.
“마침 잘 왔다. 여기 죽어있는 엘프가 황태자를 공격하는 바람에 그 소란이 벌어진 거다.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길래 이제야 온 거냐?”
“죄송합니다! 그런데 엘프가 황태자를 말입니까?”
친위 기사들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멀리 떨어져 경계를 서라고 명령한 건 붉은 갑옷 기사 아닌가.
거기다 엘프가 황태자를 습격하다니.
엘프 개개인이 하급 기사 이상의 능력자이긴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노예의 인장을 부여한 이상 일반인 이상의 힘은 없었다.
그런 엘프가 황제의 호위 기사가 있는 이곳에서 황태자를 암습하다니.
최소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납득을 할 것 아닌가.
적어도 표정이라도 그럴듯하게 지을 수 있도록.
그런 반응을 보면서도 붉은 갑옷 기사는 뻔뻔하게 되물었다.
“설마 본인의 말이 이해가 안 간다는 건 아니겠지? 어디 반론하고 싶다면 해보거라.”
친위 기사들은 짧게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 표정을 고쳤다.
싫어도 이해가 가야 할듯한 말투였다.
알아도 모른 척해야 할 때가 있는 게 황궁 내의 생활.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었다.
많이 알아보았자 시간만 단축시킬 수도 있었으니까.
목이 몸과 작별인사를 나눠야 하는 시기를.
“세상에 이런 흉악한 엘프가 다 있다니!”
“초월 존재께서 보우하셔서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이쪽도 다들 눈치가 빨라 다행이야.”
붉은 갑옷 기사는 운이 좋은 친위 기사들에게 황태자를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는 알현의 방을 나서는 황태자를 쳐다보다가 황제의 옆으로 돌아갔다.
개똥밭을 굴러도 살아남는 게 과연 좋은지 아닐지 판단하는 건 황태자의 몫.
예전 황태자가 소년이었을 무렵 자신이 받은 은혜는 이걸로 갚은 셈이었다.
붉은 갑옷 기사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은혜는 물론 원한도 반드시 갚는 게 무인으로서의 자세인 것이다.
***
황태자를 마차에 싣고 저택으로 출발시킨 친위 기사가 동료 기사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가 싸우는…”
“쉿, 여기서 그 이상 말을 꺼내지 말라고. 헥! 뭐하는 거야?”
“그러게 누가 입에 손가락을 대래?”
손가락이 핥아져 버린 동료 기사가 손을 바지에 닦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자리에는 그 둘밖에 없었고 가능한 한 조용히 말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황궁에서 입 밖에서 꺼낸 말은 어떻게서든 듣는 귀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자신들의 가문, 그리고 연관된 대귀족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를.
황제 다음 서열인 황태자를 밀어낼 기회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자들이 있는 것이다.
요즘 그들에게 접근해 돈과 직위를 보장하겠다던 변경백이라는 자도 그랬고.
권력이라는 마물은 피를 먹고 자라나는 것이다.
누구의 피인지는 상관하지 않고서.
***
저택으로 돌아온 황태자는 자신을 탓했다.
“황태자라는 화려하지만 실속없는 자리에 눈이 멀어 있었군. 사실은 새장 속의 새보다도 못한 처지였는데.”
지금 황태자에게 있어 가장 믿을 수 있고 의논의 대상이 될 사람은 집사였다.
저택에 돌아온 황태자는 고민 끝에 집사를 불러 급한 대로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
“…이렇게 된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한참 고민하던 집사는 하나의 계책을 내놓았다.
“일단 김검천님에게 부탁드려야겠습니다. 김검천님의 일행들에게도 사정을 알리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