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함선으로 귀환해서 이세계 최강-152화 (152/250)

152화

황태자가 두 눈을 부릅떴다.

손님으로 와 있는 그들에게 이런 사실을 밝히겠다니.

황태자가 지금 상황에 대해 가장 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김검천과 리에였다.

김검천하고는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리에는 자신의 힘으로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은 대상이었고.

그런데 오히려 자신이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니.

당장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체면만큼은 지키고 싶은 게 황태자의 현재 마음이었다.

차라리 황제 손에 죽었다면 낫지 않는가 싶을 정도로.

“그건 안 된다! 본 태자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생각이더냐?”

집사가 다시 부탁했다.

“지금 자존심이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야 뭐든지 할 수 있는 법 아닙니까?”

집사가 보기에 현재 상황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들은 김검천과 그 일행들이었다.

물론 이곳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기사들도 제국을 위해 충성하는 자들이었다.

다른 대귀족이나 권력자가 상대라면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황제가 상대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제국을 위해 황태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황제에게도 충성 못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황제의 명을 거역하면 반역이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야 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까지도.

황태자의 모든 것은 결국 황제로부터 나온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황태자는 더더욱 김검천과 김검천 일행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이다.

“…집사여,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황태자답게, 품위 있게 죽도록 내버려다오.”

“황태자 전하, 품위 있게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정말 중요합니까?”

황태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집사를 바라보았다.

황궁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넘치던 황태자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살 방법이 있으면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테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제국의 힘을.”

그리고 황제는 제국의 힘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였다.

차라리 대들었을 때 그냥 죽었으면 좋았을 터였다.

그러면 고민은 물론이고 집사와 다른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지도 않을 테니까.

목이 멨는지 집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황태자 전하. 정말로 이대로 죽으실 작정이십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찮은 벌레나 괴물마저도 마지막 순간까지 발버둥 치는 법입니다.”

황태자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졌다.

오랫동안 자신을 옆에서 돌봐온 집사였고 항상 힘든 내색 없이 옆에 있어 주었다.

그런 집사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게 만들다니.

황태자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후후, 집사. 미안하게 되었소. 고생만 시키다 이런 꼴을 보게 만들었구려.”

“황태자 전하--!”

“죽고 난 후에 어쩌면 떠나버린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황태자였다.

황태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황제로부터 나왔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황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

“잠깐이라도 기분 전환이 가능할 만한 걸로 챙겨 오도록 하겠습니다.”

황태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끔 기분 전환용으로 챙겨 먹던 달고 따뜻한 음료라도 가져올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뭘 가져온다고 해도 기분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집사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섰다.

***

주방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던 집사의 생각은 황태자와 달랐다.

앉아서 죽기에는 인생이 아까웠다.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워진 자신이 아니라 아직 살날이 더 많이 남은 황태자가.

김검천과 그 일행들이 머무는 방 앞에서 집사는 걸음을 멈추었다.

“살아야 할 사람은 살고 죽어야 할 사람은 죽어야겠지. 황태자 전하께서는 살아야 하고.”

***

- 똑똑.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올 사람은 방금 나간 집사밖에 없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황태자가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대답했다.

“들어오게나. 집사.”

“황태자 전하.”

목소리의 주인은 역시 집사였다.

황태자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평소보다도 더 많이 웃기라도 하면서 지낼 생각이었다.

황태자는 그게 지금의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 같았다.

죽기 전까지 공포에 질려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그런데 고개를 들자 집사의 등 뒤로 김검천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황태자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네가 거기서 왜 나와?”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네가 날 나오게 했으니까. 집사가 날 찾아오게 만들었잖아.”

김검천의 시선이 집사를 향했다.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힘없이 나부끼는 하얀 머리카락이 괜히 황태자의 눈을 서글프게 만들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부디 이야기라도 해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집사.”

“제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황태자가 집사와 김검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이라고 못 들어줄까? 말해서 손해 볼 일은 없으니 일단 말해봐.”

“본인에게는 문제야.”

“괜찮아. 나한테는 문제가 아니니까. 잘하면 내가 해답이 될 수도 있어.”

태평한 대답에 황태자는 마음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모르는 느긋한 얼굴이라니.

기왕 김검천이 알게 되었으니 불타는 속이라도 달래기 위해 시원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알겠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문제 같지만.”

황태자는 자신을 위한 행동이기에 집사를 용서해주었다.

그리고 황태자는 반쯤 포기한 상태로 황제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다시 말하는 것이라서 집사에게 말할 때보다도 더욱 정확하게.

“…그러니 이 몸의 생명은 무술 대회가 끝나는 대로 사라질 예정이라는 거지.”

김검천이 딱 잘라 말했다.

“그거 좋군.”

황태자가 슬픈 듯한 미소를 지었다.

김검천의 냉정한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좋게 위로라도 해주면 안 되겠나? 그래도 곧 죽을 사람인데 자네한테까지 나쁜 이야기를 듣기는 싫거든.”

김검천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황태자가 뭔가 오해하는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잘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음? 얼마 후 반드시 죽을 거라는 내용에서 좋아할 만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건 다시 말하자면 무술 대회가 끝나기 전에는 죽이지 않겠다는 거니까.”

절대라는 건 없지만 대회 중간에 황태자를 죽이지 않겠다고 황제가 선언한 것이다.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거군.”

“컵에 물이 반이 담겨 있는 걸 보는 것도 관점에 따라 달라지니까.”

“물이 절반밖에 없다는 거?”

“물이 절반이나 남아있다고도 할 수 있는 거지.”

황태자가 김검천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검천은 다르게 세상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했다.

황태자 자신도 김검천처럼 세상을 바라보면 인생이 달라질 거 같았다.

물론 황제의 손에서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황태자는 희망이 생긴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시무룩 해졌다.

“하지만 결국 죽는 건 똑같지 않은가.”

“응, 도망가면 그만이야.”

김검천과 일행들이 준비하고 있는 것도 그거였으니까.

황태자가 한숨을 쉬었다.

“휴, 그게 쉬웠으면 죽을 준비나 하고 있겠나? 밤을 틈타 도망갈 계획이나 짜고 있겠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나 보군.”

“이건 대부분 모르는 사실인데 황제 폐하… 아니, 황제 직속으로 움직이는 그림자 부대라는 자들이 있다. 황제가 원하는 정보를 직접 가져다 바치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자신을 죽이려는 황제에 대한 마음을 떨쳐 버린 듯한 호칭이었다.

한결 짐을 던듯한 황태자의 표정을 보며 김검천이 다시 물었다.

“공식적인 정보 집단이 아닌 거 같네.”

“황제의 숨겨진 칼 같은 자들이지. 이제는 이 몸을 향해 그 칼을 휘두를 테고.”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을 처리하는 자들이라는 말이군. 뭐, 제국 황제라면 대놓고 움직여도 이상할 것 없겠지만.”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금 말한 그림자 부대는 자신이 어렸을 때만 해도 없던 조직이었다.

원래 황제는 필요한 일이 있다면 휘하의 마스터 나이트나 제국군을 움직였다.

국가 간의 전쟁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수십 년쯤부터 황제를 호위하던 붉은 갑옷 기사가 그림자 부대를 육성했다고 해.”

“재주도 많은 자인가 보군. 거기다 호위를 선다니 본인도 약하지는 않을 테고.”

“비밀이 많기도 하지. 황제 외에는 그의 정체를 아는 자가 없으니까.”

“그러니 도망을 친다 해도 결국 그들에게 잡힐 거 같다는 건가.”

“그런 거지. 발버둥 쳐도 어차피 죽을 거면 차라리 조용히 살다 가고 싶은 마음이라고.”

김검천은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곁에 있는 집사만 해도 쿠퍼나 샤칸, 루시엘과도 비할 정도의 강자였다.

황제를 이길 수는 없다고 해도 황태자도 아예 힘이 없는 자는 아니었다.

죽는 게 억울해서 발버둥 친다면 가는 길에 같이 동행할 자들은 많이 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

“뭐가 말인가?”

설명을 안 해주었으니 황태자는 이해를 못 할 수밖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김검천은 일단 황태자의 어깨를 짚었다.

“너 내 탈주 동료가 되어라.”

“…하아?”

그렇게 제국 수도를 함께 탈출할 동료가 늘었다.

안 그래도 사람이 부족하던 참이었다.

김검천은 황태자를 열심히 부려주겠다고 다짐했다.

***

다음날.

한 마차가 아침부터 제국 수도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은 곳이든 제국에서 금지한 구역이든 가리지 않고서.

다른 곳은 그렇다 치고 금지된 장소라면 그에 걸맞은 자들이 감시하고 있을 터였다.

실제로 마차가 금지 구역에 침입하자 다가가는 자들이 있었다.

제국의 붉은 꽃문양이 새겨진 마갑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비밀스러운 장소인 경우에는 소수 정예로 운용되는 것이다.

“누구냐? 이곳은 금지된 장소다! 이곳에 오기 전에 분명히 출입금지라는 걸 보았을 텐데.”

“설령 모르고 들어왔다 해도 죄를 지은 것이다. 그 죄는 무겁다.”

마차 안에서 창문을 통해 드워프 한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

샤칸이었다.

“거, 모르고 들어 올 수도 있지!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안 그래?”

옆에 있던 엘프인 루시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법이지요. 물론 당신을 보고 저러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다가오던 기사 2명이 샤칸과 루시엘을 보았다.

마부석에 마부가 없는데 움직이는 걸 보면 마탑에서 생산한 마차.

그리고 노예로 보이는 동행한 이종족인 엘프와 드워프.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콧대가 높은 어느 귀족 정도로 보였다.

그러니 여기가 어디인지 신경 쓰지 않고 금지 구역으로 진입한 것이었다.

하지만 장소를 잘못 골랐다.

이곳은 침입자를 죽여도 살인죄가 안 되는 장소였으니까.

그게 아인이라고 부르는 이종족이면 문제 될 것도 없었고.

-스릉.

한 기사가 검을 뽑아 들며 그 둘을 비웃었다.

“햐, 이 벌레 같은 아인 놈들이 죽고 싶어서 난리를 치는구나. 소원대로 해주마.”

그때 마차 안에서 황태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더냐?”

같이 있던 동료 기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기억 한 구석에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어디서 보았는지 고민 중인 동료 기사를 놔둔 채 다른 기사가 뽑은 검을 향하며 소리쳤다.

“흥, 노예인 이종족을 때리면 주인이 나오는 법이지.”

황태자가 대꾸했다.

“저들의 주인은 아니다만 네 말투가 건방지구나.”

“건방져? 저 둘만으로 끝내려 했는데 죽고 싶은 모양이군. 당장 마차에서 내려… 악! 왜?”

동료 기사가 말을 꺼낸 기사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찬 것이다.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다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