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마법사가 김검천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이 몸에게 맡겨놓기라도 했나? 알려주는 게 당연하다는 표정이로군.”
“말하고 싶어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거 들켰군. 그래.”
“그래서?”
다시 얼굴을 굳힌 마법사가 대답했다.
“죽지는 말라고 알려주는 거다. 적어도 항복을 외칠 시간은 있어야 하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만 성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나?”
“가능하면 지면에 발이 닿지 않도록 해. 아니면 그런 마법 도구라도 가지고 출전하든가.”
“비행이 가능한 마법 도구라도 쓰라는 건가.”
“그런 셈이지. 결국은 아무 소용없겠지만.”
“그런지 아닌지는 그때 가면 알테지. 아무튼 이야기는 고맙다.”
- 이어 A블록 마지막 시합이 시작됩니다. 기대하시던 사천왕…
자리를 뜨는 김검천의 등 뒤로 사천왕이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게는 시합보다 수도 주변을 둘러보고 온 일행들을 만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쿠퍼와 샤칸, 루시엘 세 명이 힘을 합치면 마스터 나이트급도 상대할 수 있을 무력이었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었다.
황태자의 저택에 돌아오니 다행히 사람들은 모두 모여 있었다.
나갔다 온 쿠퍼와 샤칸, 그리고 루시엘은 겉보기에 멀쩡하니 큰일은 없던 것 같았다.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는 리에 곁에는 세이야가 붙어있었고.
리에와 세이야는 외출하지 않고 저택에 머물러 있던 것이다.
다만 루시엘의 얼굴 표정이 굳어 있는 게 아예 문제가 없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김검천이 루시엘에게 물었다.
“오늘 탐색하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게…”
“이 몸이 대신 말해줄까?”
루시엘이 쉽게 입을 떼지 못하자 샤칸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항상 제멋대로 살던 샤칸이 루시엘을 배려해주다니.
무슨 일을 겪은 걸까.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하지요. 다만 제대로 파악도 못 했는데 이야기 드리는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루시엘이라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봐.”
김검천이 말을 건넨 덕분에 루시엘은 표정을 풀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와 함께 수도 전역을 돌아보라고 하신 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면 수도 밖에서 문제가 생긴 건가?”
“말씀하신 대로 샤칸이 황태자가 같이 있으니 수도 밖도 살피는 게 어떠냐고 해서요.”
김검천이 샤칸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칭찬이라고 알아들은 샤칸이 양손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잘한 행동이야. 미리내가 있다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
미리내가 실시간으로 주변을 파악한다 해도 거리가 한정되어 있었다.
탐지해야 할 종류가 늘어날수록 사용되는 에너지도 많아진다.
그러니 미리 지형이라도 탐색하도록 사람들을 보낸 것이다.
거기다 마물의 숲에서나 드워프 마을로 갈 때도 미리내와 한 이야기가 있었다.
함선 혹은 미리내와 연락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리내는 실체가 없는 만큼 장소와 상관없이 김검천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건 미리내와 소통이 안 되면 작게는 파워드슈츠, 크게는 함선과 연락이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김검천은 방도가 없는 것이다.
준비가 가능할 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김검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손에 쥘 수 있는 정보는 많을수록 좋지. 문제를 공략하기에도, 만약을 대처하기에 좋거든.”
“동의합니다. 그러면 보고를 계속하겠습니다.”
루시엘의 설명에 따르면 수도로부터 대략 10킬로 정도 떨어진 곳 같았다.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잘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고.
수도로 이어지는 길로부터도 벗어난 장소였다.
김검천은 문득 의문이 생겼다.
“마차를 타고 먼 건 아닌 것 같지만 길도 아닌 곳을 찾아가게 된 이유가 있겠지?”
직선 방향으로 가다가 찾았다면 또 모를까 10킬로 범위 안에서 찾았다니.
거기다 길에서도 벗어난 위치라고 했었다.
뭔가 계기가 없다면 오늘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발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김검천의 말대로 인지 루시엘이 거기에 대해 보충 설명을 했다.
“수도 밖에서 둘러보는 데 우연히 제국인 몇 명이 비틀거리며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걸 보았습니다. 일단 주변을 파악하는 게 급하니 우리는 하던 거나 계속하려 했습니다.”
우리라는 단어에 황태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황태자도 좀 달라진 것 같지만 루시엘이나 샤칸도 약간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국 수도는 들어올 때는 자유가 아니었지만 나갈 때는 자유였다.
특별한 사건이나 명령이 없다면 그냥 맨몸으로 나가는 건 검문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행동이 좀 이상하다고 해도 그들을 검문소에서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검문하는 입장에서는 수도 밖에서는 그들이 뭘 하든지 관여한다면 귀찮기만 했고.
“황태자가 그들을 따라 가보자고 한 건가?”
“원래는 황태자도 몇 마디 묻고 지나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황태자를 무시한 채 그냥 가던 길을 가더군요. 심지어 황태자라는 걸 밝혔는데도요.”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제국에서 누가 제국의 황태자의 말을 무시한다는 말인가.
황태자와 힘겨루기를 하는 대귀족도 그건 못할 것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황제의 후계자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테니까.
루시엘이 말을 이었다.
“그들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진 황태자는 혼자서라도 그들을 쫓아가려 했지요.”
황태자를 무시하는 자들이 무엇을 할 건지는 김검천도 궁금했다.
“너희들은 황태자가 없으면 주변 탐색하는 데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같이 따라간 건가.”
“어차피 둘러봐야 하니 그쪽 방향을 먼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일행들은 흐느적거리면서도 쉬지 않고 이동하는 사람들을 따라가야 했다.
황태자의 말만 못 듣는 게 아니라 힘으로 강제로 멈춰 세워도 다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보게 된 것은 산으로 둘러싸인 중앙에 있는 거대한 탑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제국인들은 엎어지고 자빠지면서도 그 탑 속으로 사라졌다.
김검천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혹시 그들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지 않던가?”
루시엘이 말하는 동안 입이 근질거리던 샤칸이 냉큼 입을 열었다.
“엄청나게 빨갛더군! 쟈칸의 불꽃 정령처럼. 정령과는 다르게 보고 있자니 기분 나빴지만.”
“그 대답을 들으니 어쩐지 그 마법의 하얀 가루라는 것에 중독된 자처럼 들리는걸.”
최면이 잘 걸리거나 강압적인 명령에 더 잘 따르게 만든다는 마법의 하얀 가루.
한 마법사의 인체 실험에 의해 뮤턴트가 돼버린 자들을 기억나게 만들었다.
뭔가 생각하던 루시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군요. 그 탑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김검천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마저.
샤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직접 보았을 때는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모두 잊어버리다니. 루시엘 말처럼 이상한 곳이야.”
쿠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 인지 저해 마법일지도 모릅니다.”
김검천이 질문을 던졌다.
“함선 미르의 스텔스 모드와 비슷한 것인가? 은신으로 안 보이게 만드는 기법같이.”
쿠퍼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과 비교할 만한 게 아닙니다. 단순히 숨기는 게 아니라 광범위로 피해를 입히니까요.”
이 중에서는 가장 마법에 익숙한 루시엘이 말을 받았다.
“인지 저해 마법이라면 저주에 가까운 마법. 나쁜 주술처럼 사람에게 해를 끼칩니다.”
사물을 봐도 인지하기 힘들게 만들 뿐만 아니라 약한 자는 죽게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으슥한 곳이라지만 이런 건축물이 좋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마법의 하얀 가루에 중독된 사람이 거기로 향한 것도 이상했고.
누가 김검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김검천은 리에에게 물었다.
“응? 리에야, 왜 그러니.”
김검천이 돌아왔는데도 뭔가 열심히 그리는 중이던 리에였다.
그림을 다 그렸는지 손에는 그림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리에가 들고 있던 그림을 김검천에게 내밀며 손바닥으로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 나쁜 거 이렇게 생겼어! 때치야!”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몰라도 이 그림은 리에가 열심히 그린 작업의 성과다.
일단 그림을 받아든 김검천은 리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구나. 리에야.”
“에헤헤.”
리에의 미소를 보고 흐뭇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보았던 탑을 떠올리기 위해서 기억을 뒤지던 루시엘이 목소리를 높였다.
리에의 그림을 보고 놀란 것이다.
“맞습니다. 이렇게 생긴 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탑을 그린 것입니까?”
황태자도 리에가 그린 탑을 보자 크게 소리쳤다.
리에 앞에서 목소리를 낮춘다는 것도 깜빡 잊을 정도로 놀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건 블러드 타워? 황제의 입에서 들은 이걸 리에가 어떻게 알고?”
리에는 루시엘과 황태자의 목소리에 놀란 모양이었다.
리에가 대답은 하지 않고 쪼르르 달려가 세이야의 뒤에 고개만 내밀고 숨었다.
김검천도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에가 마석을 충전하는 힘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보통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지금 보니 그 이상의 능력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리에에게 강요해서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거기다 지금은 제국에 관련된 일이 먼저였으니까.
김검천도 이 탑에 대해서 생각나는 바가 있었기도 했고.
왕국에서도 이런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었지 않은가.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여기에 대해 아는 게 있는 사람? 이것과 비슷한 걸 왕국 수도에서 본 적 있다.”
루시엘이 흠칫했다.
엘프라서 마나에 민감한 편이었기에 이 탑에 대해 남들보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세상에 존재하는 게 나은 건 아니라는 걸.
“이런 저주받은 탑이 제국 말고 왕국 수도에도 있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루시엘의 말을 듣자니 블러드 타워라는 게 대놓고 알려질 만한 종류는 아닌 것 같았다.
누가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세이야가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왕세자가 된 세이야는 접하게 된 정보가 몇 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방금 말한 탑에 대해서였다.
루시엘이 보고 온 탑과 같은 것인지는 확신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연관점은 있어 보였기에 세이야는 루시엘에게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테우펠 공작 녀석이 만들도록 시킨 그 탑은 미완성이었요. 지금은 해체 예정이고요.”
“아, 왕국 수도에서는 아예 탑이 사용될 일이 없었던 모양이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끔찍한 탑을 어디다 쓰려고 만드는 걸까요?”
샤칸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법 분야에는 약했기에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을 꺼낸 표정을 지으면서.
“이런 탑이 인간 왕국의 수도에 있는 게 뭐가 문제인데?”
루시엘이 샤칸을 내려다보았다.
샤칸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수한 표정으로 루시엘을 바라보았고.
루시엘은 저절로 올라가는 손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아까 말했듯이 이 탑을 보는 것만 해도 문제가 생기니까요.”
“그래서?”
“후우, 샤칸은 이 탑을 보고 어땠습니까?”
“괴로웠지.”
“역시 당신도…”
“그러게 말이야. 누가 세웠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건축물이라고 만들었냐 싶더라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뭐, 왜, 뭐. 그 탑은 예술미라고는 하나도 없었다고!”
루시엘은 김검천이 넘겨준 마법사의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면 이 예술미 하나 없는 지팡이는 이제부터 제겁니다.”
“지팡이가 예술미를 만든다는 말도 못 들어 보았어? 김검천님이 준 거면 더욱 그렇다고!”
김검천은 그 둘의 투닥거림을 보며 수도에서 한가지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시간이 난다면 자신이 직접 그 블러드 타워를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리에가 말해줘서 그런지 그만큼 중요한 기분이 들었다.
***
그날 늦은 밤.
황제는 보고를 위해 찾아온 친위 기사단장에게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황태자가 수도의 금지 구역을 둘러 보고 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출입을 막으신 지역이라 이렇게 보고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하명 주시옵소서.”
보고를 하던 친위 기사단장은 속으로 부하들을 향해 이를 갈고 있었다.
황태자가 상대인 만큼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을 윗선에 보고를 해오다니.
황제도 접할 수 있는 공식적인 경로로 올라왔기에 친위 기사 단장도 숨길 수 없었다.
덕분에 황제를 직접 만난 자리에서 이 소식을 알리게 되었다.
근래 들어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 이 알현의 방에서.
친위 기사단장은 황제에게 보고를 올리다 죽는 일 만큼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