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김검천의 8강전 상대인 검은대지 주술사.
그의 전신에는 알 수 없는 문신 같은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
단순히 네모나고 둥근 그림이나 글자 같아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문신 주제에 살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 꿈틀거리고 있어서였다.
신기한 듯 바라보는 김검천의 표정을 보며 검은대지 주술사가 음산하게 웃었다.
“크흐흐, 벌써부터 겁에 질린듯한 얼굴이구나. 참으로 보기 좋은 표정이야.”
김검천의 입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저번에도 김검천을 향해 도발을 하던 녀석이었다.
이제보니 자기 혼자서도 잘 노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는 넌 높으신 분들이 좋아할 거 같은데?”
검은대지 주술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뭔가 아부같이 들린 모양이었다.
“호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거지? 말만 잘하면 죽이지는 않으마.”
“문신이 꿈틀거리는데 신기하잖아. 가만히 있기만 해도 재밌어 보이는데 싫어할 리가.”
“누구를 광대 취급하는 것이냐?”
“난 말한 적 없는걸. 그렇게 말한 건 너야.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기라도 한 건가?”
검은대지 주술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놈이? 목숨만은 살려주려고 했더니 알아서 죽을 길을 찾아가는구나.”
“살려주려고 생각하기나 했고?”
아니, 어떻게 알았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검은대지 주술사가 묘한 눈길로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김검천이 딱 잘라 말했다.
“네 상대 중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뻔한 일이야.”
“들켰군. 그래서? 다들 죽거나 죽일 각오로 시합을 나온 것 아닌가?”
“하지만 죽이지 않아도 되는데 시합에서 일부러 죽이려 드는 녀석은 드물지.”
이 둘의 짧은 대치를 끝낸 건 대회 운영진이었다.
시합 시작을 알린 것이다.
- 그러면 B블록 8강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관중들의 기대에 찬 환호와 탐욕이 담긴 야유가 섞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관중들 사이로 그들을 부추기는 도박표가 날아다녔다.
“말이 길다!”
“빨리 시작이나 해!”
“이기는 쪽 우리 편!”
“그러게. 이기면 닥치고 내 돈이나 가져가!”
“이번에도 꼭 이기라고!”
“다시 그 빛의 총알을 보여주게나!”
그들 중에는 눈에 불을 키고 지켜보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2차전에서 암건을 사용한 모습에 영혼이라도 빼앗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원하는 방면에서 원하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였으니까.
물론 비무대 위의 둘은 관중이 뭐라고 하든지 흥미 없었다.
신경 쓰이는 건 눈앞의 상대였으니까.
검은대지 주술사의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너처럼 눈치 빠른 어린애는 정말 싫어. 괴롭혀 주는 보람이 있겠는걸.”
“진짜 어린애는 아니지만 말이야. 거기다 너 같은 녀석의 호감 따위 원하지도 않아.”
검은대지 주술사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호감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죽음을 주도록 하지.”
“과연 될까?”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검은대지 주술사가 이를 드러냈다.
“네가 그럴수록 잡아 죽일 재미가 있겠구나. 왜 이 몸이 검은대지 주술사인지 아느냐?”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크크, 싫어도 곧 알게 되겠지. 이 몸은 마법사도 주술사도 아니다. 하지만 둘과 비슷하기도 하지. 바로 이렇게!”
- 짝.
- 쾅!
검은대지 주술사가 박수를 치는 것과 동시에 김검천 발밑의 지면이 폭발했다.
김검천이 내려다보니 사람 발이 들어갈 정도의 넓이에 불과했지만 제법 깊어 보였다.
“박수 한 번에 구멍 한 개인가? 아까 한 말을 정정해야겠군.”
“이제야 상황이 파악된 모양이로군.”
“주술사는 공사 현장에 나가면 사랑받겠는데. 힘들일 필요도 없이 구덩이를 파잖아?”
“이놈! 본인은 보통 주술사와는 다르다. 주술사와는!”
검은대지 주술사는 화를 내면서도 여전히 박수 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김검천은 방금 공격에 저번에 싸웠던 마법사의 말이 이해가 갔다.
“가능하면 지면에 발이 닿지 말고 비행 가능한 마법 도구라도 챙기라는 게 이 말이었군.”
“알면 뭐가 달라질까?”
“내가 듣기로는 주술사는 보통 저주나 정신적으로 공격을 한다는데 다르긴 다르군.”
“괜히 검은대지 주술사라고 불리는 줄 아느냐? 대지의 정령마저 저주로 부리기 때문이지.”
그 말을 하는 검은대지 주술사의 등 뒤로부터 흐릿한 모습의 인간 형태가 나타났다.
주술사에게 새겨진 문신이 사라짐과 동시에.
주술사의 문신은 뭔가를 봉인한 것의 모습인 것이다.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네 등 뒤에 있는 게 대지의 정령이라는 건가?”
검은대지 주술사가 흠칫했다.
그리고 김검천의 말에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너, 이게 보이는 거냐?”
“대충은. 맑고 깨끗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럴 리가? 이건 평범한 정령도 아니고 정신 계열의 저주받은 정령이다.”
“정령은 정령이겠지.”
“무슨! 그건 이 몸이 평범한 주술사와 다른 것처럼 이 정령도 보통 정령과는 다르다!”
자신의 정령은 안 보이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소리치는 검은대지 주술사였다.
실제로 같은 주술사나 특별한 능력이 없는 이상은 정신 계열 정령을 볼 수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평범한 사람들은 주술사의 저주에 별다른 대항도 못 하고 당하는 것이다.
뭔가 억울해 보이는 검은대지 주술사를 향해 김검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보이는 걸 안 보인다고 할 수는 없잖아?”
“크, 제법 재주도 많은 녀석이구나. 하지만 보인다고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 짝!
검은대지 주술사가 손뼉을 치는 순간 김검천은 누가 잡아끄는 듯이 급히 몸을 이동했다.
그런데도 폭발은 아까와 같이 김검천의 바로 옆에서 일어났다.
김검천이 발밑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진동을 느끼며 말했다.
“빗나간 게 우연은 아닌 것 같군.”
검은대지 주술사는 전혀 동요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일부로 폭발을 빗나가도록 했다는 말이었다.
아마 죽이기 전까지 김검천을 괴롭히려고 드는 것 같았다.
“그렇다. 정령이 너를 따라다니다가 신호를 받고 폭발하는 것이니까.”
그 말이 끝나자 지면 위로 반투명한 정령이 고개를 내밀었다.
검은대지 주술사에 의해 저주받은 대지의 정령이었다.
그렇기에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대지의 정령은 정령계나 자연 사물에 깃들어 있어야 정상이다.
저주에 의해 강제로 사로잡혀 있는 셈이니 대지의 정령이 멀쩡한 상태일 리 없었다.
정령의 억눌린 분노는 언제라도 어디에서라도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방금 전과 같이 물리적으로도 말이다.
“우리집 댕댕이처럼 귀여워 보이는 녀석은 아니군. 첫인상은 별로야.”
“크하하하! 저주받은 대지 정령을 보고 인상이 어떻냐느니 평가하는 녀석은 처음이군!”
검은대지 주술사로서는 어이가 없어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고통스러워하는 정령의 파장에 걸려든다면 일반인은 그대로 미쳐버린다.
하급 기사 정도면 마나를 사용한다고 해도 저주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힘들 정도였고.
시간이 걸리는 정도가 다를 뿐이지 죽음으로 한발씩 다가서는 것이다.
그런데 김검천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정령을 측정해냈다.
그가 마법사였다면 검은대지 주술사는 진작에 시합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검천을 잠시나마 살펴본 바에 따르면 마갑을 걸친 기사 타입인 게 확실했다.
“평가할 수도 있지, 검은대지 주술사야.”
“하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 짜짝.
안 보이는 존재에게 공격당해 어쩌지 못하는 모습은 최고였다.
보이지 않은 존재에게 공격당하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다.
보이면 보이는 대로 색다른 맛이 있었지만.
보이는 존재에게 공격당하는 건 두려운 일인 것이다.
어찌 되었든지 상대에게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다면 충분했다.
검은대지 주술사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대지의 정령이 몸을 비틀면서 김검천에게 다가갔다.
김검천이 거리를 벌리자 그만큼 간격을 좁혔고.
속도가 빠르든 느리든 일정 범위를 유지하면서.
김검천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검은대지 주술사가 어느 순간 다시 박수를 쳤다.
- 짝.
- 쾅!
김검천이 밟고 있던 지면 바로 옆이 폭발하며 돌 먼지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김검천의 시선이 번갈아 지면과 하늘을 향했다.
검은대지 주술사는 자신을 바로 공격하지 않고 압박하는 중이었다.
김검천을 편안하게 죽이지 않겠다는 말을 실천 중인 것이다.
어찌 보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행동처럼 보이기도 했다.
“확실히 지면에 발을 대고 있는 존재라면 너를 이기기 힘들겠군.”
하늘을 날아 공격하면 또 모를까.
확실히 땅을 밟아야 하는 근접 타입은 지면을 과녁으로 삼는 저자의 상대가 안 될 만했다.
뛰어서 공격한다고 해도 새가 아닌 이상 땅으로 내려와야 할 것 아닌가.
“힘들다고? 불가능한 일이지. 그래서 이제는 비행 마법 도구라도 사용할 건가?”
김검천이 자세를 취하자 검은대지 주술사가 의외로 침착하게 물었다.
자신에게는 뭔가 다른 방도가 있다는 듯이.
그래서 김검천도 바로 하늘을 날기보다는 또 다른 방법을 꺼내 들었다.
기왕이면 에너지도 아낄 생각이기도 했다.
“적의 기대는 배신해야 제맛이지. 미리내. 실탄형 지건으로.”
[안전장치 해제. 지건 실탄형으로 변환.]
- 위이잉.
김검천의 다섯 손가락 부분이 열리며 실탄의 머리 부분이 살짝 드러났다.
김검천이 양팔을 들어 올렸다.
“지건 발동.”
- 드르륵--!
무수한 총탄이 검은대지 주술사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향해 날아갔다.
같은 마나를 쓴다고 하나 주술사는 마나 보호막을 사용하지 못했다.
사용하려면 마법 도구를 이용해 마나를 제공하여 만들어내는 정도였다.
그 정도로는 지건에서 발사된 수많은 총알을 막을 수 없었다.
검은대지 주술사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포기한 듯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반투명한 검은 정령이 검은대지 주술사의 몸을 덮었다.
정령처럼 신체가 반투명한 형체를 띈다고 생각되는 순간 탄환은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마치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김검천은 지건을 거두었다.
이대로는 쏘아보았자 총알만 낭비할 것 같았다.
뭔가 대비책이 있는가 싶었더니 방어에 정령을 이용한 것이다.
“다루는 정령이 둘이군. 아니, 두 종류라고 해야 하겠지.”
“잘도 알아보는구나. 정령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종류까지 구분하다니?”
“내 얼굴에 달린 건 장식품이 아니라 눈이거든.”
검은대지 주술사가 새삼스럽게 김검천을 살펴보았다.
저런 어려 보이는 나이로 정령을 볼 수 있는 재능과 대회 본선까지 진출할 정도의 실력.
분명 어딘가의 높으신 분의 자제가 하늘도 질시할 재능을 가지고 한시도 쉬지 않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김검천은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죽는 것이다.
평상시라면 쳐다보지도 못하는 고귀한 상대의 죽음을 자기 손으로 내릴 수 있다니.
검은대지 주술사는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크하하, 말은 잘하는구나. 이 몸을 우습게 본 죄는 무거우니 곱게 죽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