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김검천이 그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단번에 죽는 거랑 죽기 전에 시간을 끄는 건 차원이 다르더군.”
“흐흐흐, 그게 무슨 헛소리냐?”
“죽어본 자의 헛소리야.”
“죽음은 마법사나 주술사들도 전설 속에나 접할 수 있는 영역이다. 기사로 보이는 네가 그걸 함부로 입에 담다니?”
“의외로 별거 없더군.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다시 돌아와서 그랬을까.”
검은대지 주술사가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놀림당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서였다.
사정을 모르면 그렇게 들리리라.
“오냐. 그러면 정말로 죽여주마! 다시는 못 살아나도록!”
- 짝!
피할 수 없다면 막으면 되는 법.
김검천이 분석하기에 피하기는 까다롭지만 폭발 위력은 오러보다 강하지 않았다.
그러면 강화된 파워드슈츠의 장갑과 실드라면 방어하는데 충분할 터.
“실드.”
- 쾅!
김검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발밑이 폭발했다.
저주를 받은 대지의 정령의 폭발로 인해 김검천은 거의 백여 미터나 떠올랐다.
일반인이라면 이것만으로도 즉사할 만한 위력이었다.
검은대지 주술사의 공격은 여기서부터였다.
물론 폭발에서 살아남는 자들이 있긴 했다.
마나로 신체를 강화해 방어력을 높이거나 마나 보호막으로 폭발을 막는 것이다.
겨우 살아남는다면 이제는 하늘에서 추락할 차례였지만.
방법은 간단하지만 여러 가지로 막기 힘든 공격이었다.
거기다 그만한 폭발에 휘말려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면 몸 상태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몸의 균형을 잃은 채로.
이래서는 비행마법 도구가 있다고 해도 제대로 사용하기 힘들었다.
마법사가 김검천에게 시합을 포기하라고 권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김검천은 그에 대해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20여 층이 넘는 고층 빌딩 높이에서 떨어지는 중인데도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생체 신호 확인. 나노 머신 활성화. 몸 상태 정상화.]
미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검천의 몸은 정상 상태를 회복했다.
폭발로 인해 머리 부위가 아래로 향한 채로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머리에 피가 오래 쏠리는 것만으로도 사망할 수 있었다.
머리는 심장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 머리 쪽 혈관이 압력에 약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추락해서 죽는 게 더 빠를 테지만.
그렇지만 김검천은 곧 거꾸로 떨어지려는 와중에도 태연하게 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충분히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이제보니 나는 생각보다 멀미에 약한 모양이었군.”
[지금은 멀미 걱정보다는 충돌 걱정부터 하셔야지요. 그리고 방어 준비도요.]
미리내가 경고하는 방향을 보니 희미한 뭔가가 김검천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지면에서 김검천을 기다리고 있는 대지의 정령이 아닌 아까 본 다른 종류의 정령.
이 정령은 하늘을 나는 상대도 공격 가능한 모양이었다.
김검천의 생각대로 하늘을 나는 정령은 검은대지 주술사가 원래 부리던 저주의 정령이었다.
이 저주의 정령을 이용해 대지의 정령을 조종한 것이다.
검은대지 주술사가 소리쳤다.
“용케도 그 폭발에 죽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러면 이제 추락하는 걸 도와주도록 하지!”
그 말에 김검천이 지면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기대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는데? 미리내, 반중력 장치.”
[반중력 장치 기동.]
- 우우웅.
김검천은 하늘에서 몸을 뒤집어 똑바로 섰다.
비행 마법 도구 같은 게 없어도 파워드슈츠만 있어도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검은대지 주술사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확인한 미리내가 물었다.
[저 얼굴을 보니 괜히 불쾌한데 숄더 캐논이나 미사일을 먹여주는 게 어떨까요?]
“지건이 통하지 않은 걸 보니 아마 물리적인 공격은 안 통할 거야. 무기만 소모할걸.”
김검천의 말대로 원거리 공격은 검은대지 주술사에게는 안 통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마법사의 중급이상의 마법이나 마스터 나이트급 마나 공격이 아니면 통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는 저자를 아무리 공격해도 소용없다는 말씀입니까?]
“생각해 둔 방도가 있지. 일단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끝내고 시도하자고.”
[알겠습니다.]
아까 일로 폭발을 막을 수 있다는 걸 확인했기에 김검천은 실드를 펼쳤다.
저주받은 정령이 실드에 막 부딪히려는 참에 김검천은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폭발 공격에 멀쩡한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데도 다시 똑같은 공격을 시도한다라.
연이은 공격으로 타격을 줄 생각인가.
그것도 아니면 폭발 공격으로 보이지만 다른 형태의 공격이 될 것인가.
“실드! 중첩!”
파워드슈츠만 해도 투입되는 에너지양에 따라 실드는 사람 전신을 보호할 수도 있었다.
김검천의 경우 능숙한 조작으로 실드를 비스듬히 조정할 수도 있었고.
그리고 지금같이 특정 부위에 실드를 하나 이상 겹칠 수도 있었다.
- 탁, 탁.
전면에 생성된 실드 외에 상체 부위에 다시 2개의 실드가 더 생겨났다.
모두 3개의 실드가 저주받은 정령 앞을 막아선 것이다.
정령이 첫번째 실드에 부딪혔다.
- 휘이익.
바람 부는 소리와 함께 정령이 실드를 뚫고 들어섰다.
실드를 통과할 때 아예 영향을 받지 않는 건 아닌지 느려지기는 했다.
지상이라면 피할 수 있는 속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공중에 떠 있는 것이다.
정령은 실드를 투과해 그대로 김검천의 팔에 달라붙으려고 했다.
파워드슈츠의 장갑마저 소용없는 방어력 무시 공격.
김검천은 순수한 물리적 방어로는 막기 힘들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다른 방법을 쓰려는데 홀로그램으로 모습을 나타낸 미리내가 먼저 나섰다.
[어디다 더러운 손을 대는 거야!]
그러더니 미리내는 정령을 집어 들더니 정말로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듯 집어던졌다.
- 철푸덕.
푸른 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저주받은 정령은 검은대지 주술사 근처로 떨어졌다.
실체도 없는 주제에 땅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으며 지면 아래로 사라졌다.
검은대지 주술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김검천과 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미리내?”
김검천의 말에 미리내가 흠칫했다.
[죄송합니다. 저런 기분 나쁜 게 김검천 함장님의 육체를 만지는 바람에 허락도 없이…]
“그보다 네가 정령 같은 걸 만질 수 있었나? 혹시?”
미리내가 김검천이 할 말을 알아챘다.
[예. 과거 함선의 엔진실에서 유사한 경험이 있었기에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김검천의 정신에 침입하려는 걸 미리내가 쫓은 일이 있었다.
저주받은 정령도 실체가 없고 유사한 패턴을 보여 나선 모양이었다.
“홀로그램에 에너지를 주입해 구현화 한 게 통하다니.”
[저도 100% 확신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보고 있던 관객들이 미리내의 모습이 보이는지 웅성거렸다.
특히 마법사들 간에 미리내가 나타난 모습에 대해 이야기가 급히 오갔다.
“뭐지? 저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은?”
“환상 마법인가?”
“아니, 마나의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지? 여기 모인 마법사들 모두 부정할 정도라면 마법은 아닌 모양인데. “
“저런 아름다운 모습은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안 들어.”
“마법 지식의 탐구마저 버려도 될 것 같은 초월적인 아름다움이야.”
“혹시 정령이나… 초월 존재가 내린 사도가 아닐까?”
일반인도 아니고 마법사들마저 그렇게 오해할 만도 했다.
단순한 시각 효과에 불과한 홀로그램에 에너지를 주입하는 일이다.
그러면 일시적으로 홀로그램도 실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미리내 같은 인공지능은 실제 육체가 없어 홀로그램으로 모습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런데 그 홀로그램에 에너지를 주입해 실제로 질량을 지니게 만든다면 어떨까.
이것은 미리내가 좀 더 인간과 같아지기를 원하던 과학자들의 만들어낸 성과 중 하나였다.
영관급 파워드슈츠에도 그런 유사한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다.
엔진실에서 미리내가 원격으로 에너지를 부여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질량을 가진 홀로그램 육체라도 영관급 파워드슈츠의 에너지로도 한계가 있었다.
종이 한 장이나 들까 말까 하는 물리력 정도밖에 낼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는 미리내가 파워드슈츠에서 에너지를 받아 쓴 것이었다.
김검천의 허락도 없이.
그냥 두었다면 긴급한 사태가 벌어졌을지 몰랐으니 김검천에게는 고마운 일이었지만.
더구나 이제 저 방어를 무시하고 공격하는 정령에 대한 대비책이 더 생긴 셈이었다.
“미리내. 그러면 정령에 대한 방어와 보조는 너에게 맡기도록 하지.”
[김검천 함장님의 기대를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김검천은 계단을 걷는 것처럼 공중에서 한 걸음씩 내려서며 십여미터 지점까지 내려갔다.
관중석의 마법사들은 그걸 보고 다시 한번 난리가 났다.
비행 마법은 물체를 띄운 걸 미는 것처럼 움직이는 형태였다.
저렇게 지면을 밟는 것처럼 움직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모습인 것이다.
검은대지 주술사는 여전히 지면과 김검천을 계속 번갈아 보는 중이었다.
여태까지 무적이었던 정령 공격이 깨진 게 충격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공격도 안 한 상태로 멍하니 있는 것 같았다.
김검천이 그나마 가까이 내려오자 검은대지 주술사가 신음하듯이 물었다.
“넌 대체 뭐냐? 방금 그 정령은 뭐고?”
“내가 김검천이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아, 그리고 미리내는 정령이 아니야.”
검은대지 주술사가 신경질적으로 발로 딱딱한 돌로 된 지면을 걷어찼다.
자신의 공격이 김검천에게 별다른 타격을 못 준 것 같아 충격을 받은 것이다.
여태까지 누구라도 자신의 정령 공격을 견디지 못했다.
아플 텐데도 육체적 고통보다는 김검천이 말한 내용이 더 신경 쓰이는지 그가 소리쳤다.
“거짓말! 정령은 이 세계를 이루는 근본에서 태어난 존재! 같은 정령이 아닌 이상 만질 수 있을 리 없다!”
그 말에 김검천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미리내가 괜히 칭찬을 받은 느낌이었으니까.
“하긴 우리 미리내가 함선이라는 내 세상의 근본이긴 하지. 정령은 아니지만.”
“이놈이 끝까지 거짓말을! 헉?”
발악하는 듯한 검은대지 주술사의 머리 위로 주먹만 한 그림자가 졌다.
김검천의 숄더 캐논이 대화 도중 발사되어 그에게 날아든 것이다.
그리고 포탄은 그대로 검은대지 주술사를 통과해 바닥에 내려꽂혔다.
- 콰앙!
미리내가 참다못해 발사한 것이다.
결과를 지켜본 김검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역시 이렇게는 못 해치우네.”
[이럴 때는 해치웠나라고 하시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너도 어차피 통하지 않을 건 알고 있었잖아.”
과연 검은대지 주술사는 멀쩡한 모습으로 흙과 돌먼지 속을 빠져나왔다.
“그랬군. 네 녀석의 공격도 이 몸에게는 안 통하는 건가? 이쪽과 마찬가지로.”
멀쩡한 상대의 모습에도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뭔가에 대한 믿음이 클수록 깨지면 받는 충격은 큰 법인데. 원래 세상일은 뿌린 대로 돌아오는 법이라고. 뭔가 잊은 게 있지 않나?”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너라면 더이상 박수는 치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적어도 폭발하게 만드는 박수는.”
검은대지 주술사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게 더이상 김검천을 공격하지 말아 달라는 약한 소리처럼 들렸으니까.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어쩌면 저 김검천이라는 자는 이제 한계인지도 몰랐다.
이번이 저 김검천이라는 자를 해치울 마지막 기회라면?
어차피 다음 4강, 준결승전으로 올라갈 사람은 오직 한 명뿐.
모험을 해볼 가치는 있었다.
검은대지 주술사로부터 저주의 정령이 십여 마리 튀어나오더니 지면으로 스며 들어갔다.
그리고 저주받은 대지의 정령이 된 채 다시 튀어나오더니 김검천의 주변을 포위했다.
방어를 위한 정령의 힘마저 끌어다 쓴 최후의 일격.
검은대지 주술사가 피곤한 기색을 지었다.
하지만 김검천을 죽일 수만 있다면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어떠냐! 한 둘이면 모를까. 이 정도의 숫자라면 너라해도 별수 없을 터!”
저주받은 대지 정령들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움직여보았자 대지 정령들이 다시 따라올 테고.
파워드슈츠의 실드나 장갑도 소용없게 만드는 정령의 공격이었다.
아까 정령 1개만 해도 위험할 뻔했다.
김검천이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확실히 위급한 상황이긴 하군.”
“거기다 이 녀석들은 접촉하는 순간 이 몸의 박수 없이도 터진다. 피하려고 해도 이제 늦었다!”
“네 의지와는 관계없이 터지기도 한다고?”
“그렇다. 그러니…”
그러니 저주받은 대지 정령은 하나만 터져도 모두 차례로 터져 나갈 것이다.
검은대지 주술사가 크게 박수 쳤다.
“이대로 얌전히 죽어라!”
- 짝--!
- 쾅!
“으악!”
그런데 폭발음과 동시에 당한 건 검은대지 주술사였다.
아까 미리내가 지면으로 정령을 집어 던졌지 않은가.
그 정령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실드로도 정령의 공격은 제대로 막을 수 없었다.
다만 지금과 같이 주술사와 교감이 제대로 안 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발밑에 정령이 있다는 걸 모르고 주술사 스스로 자폭하게 만들었으니까.
검은대지 주술사는 하늘로 튀어 오르더니 자신이 설치해둔 저주받은 대지 정령과 부딪혔다.
그러자 부딪힌 저주받은 정령들은 하나씩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 펑! 펑! 펑!
주술사가 목표로 한 건 김검천이었지만 정작 터져나간 건 자신인 것이다.
주술사는 시커멓게 탄 채로 대회장 밖 너머로 추락하고 말았다.
폭발도 폭발이지만 이 높이에서 떨어지고는 살아남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김검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박수를 치지 말라고 했는데.”
서둘러 대회장 밖을 확인한 대회 운영진이 바로 승부 결과를 선언했다.
- 김검천의 승리!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김검천은 준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
그날 밤.
밤이 깊어져 그림자가 사라지는 시간이 다가왔다.
음모는 어두울 때 이루어지는 법.
- 끼익.
불이 꺼져 있는 한 방으로 로브로 머리를 덮어 얼굴이 안 보이는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주변의 램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때 방 안의 불이 켜졌다.
방 안에는 이미 로브로 머리를 가린 여러 사람이 원형 탁자 주변에 모여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이제 다 모인 모양입니다.”
방안에서 누군가 쓰고 있던 로브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김검천과 헤어져 변경백이었다.
황제를 노리기 위해 김검천과 따로 행동하려 들던 자.
그가 오늘 수도의 대귀족들과 몰래 만나고 있던 것이다.
황제의 최후에 대한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