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미리내가 재차 확인했다.
[펠우테라고 탐지되는 생체 반응이 멀어져갑니다.]
“설마 도망친 건가? 이 자리에서?”
김검천도 펠우테가 이렇게 도망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직 전력을 다한 것 같지 않았으니 여력은 충분히 남은 것 같았는데.
그건 무슨 사정이 있어 물러났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이상한 점은 더 남아 있었다.
방금 자신의 이름을 부른 외침에는 어떤 식으로든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늘 서로 얼굴을 직접 본 건 분명 처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펠우테는 김검천의 기억에 없는 것이다.
기억과는 별개로 뭔가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고 어디선가 만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질되는 법.
만약을 위해 미리내에게 확인해 보았다.
“미리내, 내가 저 녀석을 만난 적이 있었나?”
[그건 아닙니다. 제 기록 데이터에 저렇게 생긴 자는 입력 되어 있지 않습니다.]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느낌이 좋지 않은데.”
결승전에서 유일하게 남은 김검천이 자리를 지키는 사이였다.
펠우테의 도주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김검천뿐만 아니라 다른 모두에게도.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어떻게 대회 결승까지 나온 상대가 끝도 안 보고 도망간다는 말이냐!”
“으악! 그놈이 밟은 어깨가 부러졌어! 아프다고!”
“아프면 다냐? 이쪽은 사람이 죽었어!”
“누가 다치고 죽은 게 문제야? 내기는 어떻게 된 거야!”
“저 둘이 서로 짜고 친 거 아니야? 돈 돌려줘!”
“내기는 무효다!”
“출전자가 아니라 우리들이 죽는 걸 보러 온 게 아니야!”
결승전을 보러온 관중들의 기대감이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되어 갔다.
그들은 안전한 관중석에서 폭력과 죽음을 바라며 즐기려고 왔다.
반대로 자신들의 목숨이 출전자에게 위협받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 것이다.
관중들의 항의가 거세지며 곳곳에서 분노한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기사나 마법사들같은 자들만 그나마 이성을 유지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모두 자리에 앉아 진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회 운영진의 방송에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대회 운영진 놈들 다 나와보라고 해!”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일어나 분노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차 늘어났다.
그렇다 해도 이상할 정도로 동조하는 자들이 많았다.
마치 이성이 마비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행위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에 핏줄이라도 터진 듯 붉은 눈을 하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제국군들이 그런 걸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중무장한 제국 기사와 병사들이 대회장 곳곳에서 튀어나오며 관중들에게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이냐?”
“당장 자리에 앉아!”
“이곳은 네 놈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놀이 공간이 아니다!”
펠우테가 저지른 일은 순식간의 일이라서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관중들이 날뛰는 건 뻔히 눈앞에서 보이는 일.
심지어 황제가 직접 지켜보고 있는 앞 아닌가.
제국군 기사와 병사들은 자신들의 목과 몸이 이별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특히 남이 일으킨 문제로는.
그렇기에 관중석 밑으로 정렬한 제국군들은 대놓고 관중들을 압박했다.
분노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장한 상대는 꺼림칙했다.
자신보다도 강해 보이는 데다가 적의까지 내비친다면 더욱 그랬고.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관중들의 기세가 꺾여나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면 작은 소동으로 마무리가 되었을 것이다.
정작 문제가 된 건 제국 기사 몇 명이 무기를 들어 관중들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해서였다.
“감히 황제 폐하의 앞에서 이딴 짓거리를 하다니!”
“어디 하찮은 자들이 함부로 날뛰느냐?”
“주동자 몇 명만 죽이고 나머지는 노역형일 테니 감사하게 여겨라!”
제국 기사들의 위협적인 말과 행동은 꺼져가는 분노라는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특히 앞장서 날뛰던 자들은 평소에 제국군들에게 불만을 가진 자들이었다.
무엇보다 세상은 넓고 그런 만큼 미친놈도 많았다.
눈이 돌아가면 무기를 든 기사든지 고귀한 황제든지 보이는 게 있을 리 없었다.
한 사람이 관중석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다 발목이라도 삐었는지 절뚝거리면서도 무기를 든 제국 기사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해봐!”
“뭐?”
“해보라고! 이 잡것들아! 안 그래도 열 받아 죽겠는데 너희 따위가! 으아아!”
- 부우욱.
말하다가 분노 조절이 불가능해진 그가 한 손으로 자기 상의를 찢어발겼다.
못 먹어서 키도 작았는데 몸마저 말라비틀어져 뼈가 드러나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그대로 너덜거리는 옷을 휘날리며 무기를 든 제국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이 미쳤나?”
“이 새끼가?”
기사 옆에 있던 병사 2명이 달려드는 키 작은 사람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 둘은 달려드는 기세를 못 이겨 같이 끌려갔다.
“어어?”
“야, 누가 도와줘!”
무기를 안 쥔 다른 제국 기사가 한심한 표정으로 키 작은 사람을 양손으로 잡았다.
“한심한 놈들! 제국 병사라는 자가 이런 체격의 사람도 못 이겨서…크흑!”
제국 기사는 야단치다 말고 입을 다물고 양팔에 힘을 주었다.
키 작은 사람을 제압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 기사는 그의 발목을 걷어차 바닥을 구르게 한 후 겨우 제압하며 중얼거렸다.
“젠장, 마나로 육체를 강화한 기사의 힘에 저항하다니. 이놈 생각보다 힘이 쎈데?”
동료 기사 한 명이 피식 웃었다.
“원래 미친놈이 힘이 세다고 하잖아.”
“그런가? 어쩐지 미친놈 같더라. 헉!”
“왜 그래?”
“저길 봐. 미친놈들이 더 늘어났어!”
키 작은 사람을 제압하는 사이 관중석에서 뛰어내린 자들이 늘어나 있었다.
당장이라도 피를 보고 싶은 욕구를 제국군을 향해 풀고 싶다는 듯이.
무기를 든 제국군을 향해 맨손으로 달려드는 관중들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가는 중이었고.
언젠가 김검천이 대회장을 콜로세움이라 부른 건 모습 말고도 규모도 그만큼 커서였다.
이곳에 구경을 위해 수용 가능한 인원은 수만 명에 달했다.
지금 난동을 부리는 자들이 관중들 모두는 아니더라도 천 명은 가볍게 넘어 보였다.
그만한 인원들이면 걸어다니는 것만 해도 지반을 다질 수 있을 정도였다.
인간같이 연약한 육체는 저들에게 밟히는 것만으로도 죽어나갈 것이고.
제멋대로 날뛰는 사람들의 모습에 제국군의 지휘자가 다급히 외쳤다.
“제국군에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범죄자다! 죽여도 좋으니 무기를 들어라!”
- 채앵.
제국군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지만 무기와 방어구 모두 갖춘 상태였다.
사람은 도구를 다루는 것으로 전력이 몇 배나 증가하는 법이었고.
그렇다고 제압이 쉬운 건 아닌 게 분명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서로 간에 피를 볼 것이었다.
2개의 무리가 서로 다른 뜻을 가진 채 격돌하려는 순간.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선 황제가 소리를 높여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직 연회가 시작되기 전이니 모두 조용히 하라.”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마디였다.
상식적으로 모두가 미쳐 날뛰는 와중에 누가 그런 말을 따르겠는가.
무엇보다 크게 소리쳤다지만 이런 난리 속에서 사람들의 귀에 들릴리가 없었고.
하지만 실제 상황은 달랐다.
대부분의 관중들이 황제의 말에 따라 얌전하게 변한 것이다.
그런 행동을 보인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는 제정신이 아닌 듯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서는 하얀 마법 가루가 피부로부터 묻어나오고 있었다.
심지어는 제국군 병사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
날뛰는 사람을 제압하는데 접촉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병사 한 명이 아까 전에 묻은 손에 묻은 하얀 마법 가루를 옷에 닦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옆의 동료 병사도 바닥에 손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야, 너두?”
“야, 나도. 이놈들 잡는데 피부에서 뭔가 묻었어.”
“뭔가 기분 나쁜데.”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황제 폐하의 목소리가 들려.”
“녀석. 방금 전 황제 폐하의 목소리를 들은 게 그렇게 좋아?”
“그게 아니라 여전히 황제 폐하의 말이 머릿속을 감도는 거 같다고.”
“네 말을 들으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머리가 멍해지는데.”
“으어어….”
그 둘만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
폭도들을 막아낸 제국군 병사들 다수가 하얀 마법 가루가 묻은 상태였다.
그렇게 된 병사들은 지휘자인 제국 기사들의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김검천이 황제를 올려다 보았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는 자신도 미리내를 통해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그나마 황제가 무슨 짓을 할지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고.
그런데 황제의 말이 사람들에게 닿은 것이다.
말이 아니라 그의 뜻이 전해진 것처럼.
“흥미롭군, 황제의 말 한마디로 이런 난리 속에서도 군중들을 제어할 수 있다니.”
상황을 지켜 보던 관중석의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이상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특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던 마법사들이 더욱 그랬다.
공격과 방어 마법을 열심히 영창 중이던 마법사들 중 한 명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역시 마법 주문을 외던 다른 마법사가 말을 받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 폐하가 뭐라고 한 것 같긴 했는데.”
“허, 웃기는 소리. 말 좀 했다고 성난 군중들이 순한 양처럼 변했다고?”
“그걸 이 몸이 어찌 아나? 무슨 말을 한지도 모르고 그냥 그랬다는 건데.”
“모르면서 왜 아는 척하는 건가?”
“아니, 모르는 걸 알려준 것도 잘못인가?”
흥분한 마법사가 영창하던 주문마저 그만두고 동료 마법사의 멱살을 잡았다.
황제도 못한 일을 동료 마법사가 해낸 것이다.
동료 마법사도 지지 않고 상대의 목을 졸랐다.
“안 그래도 아는 척하던 네 놈이 평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켁켁, 너 이 뇌가 쬐그만 놈이!”
“너보다는 머리 크다고!”
마법사들의 작은 소동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김검천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아까보다 더욱 피곤해 보였다.
고작해야 말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저렇게 되다니.
단순히 말을 입 밖에 꺼낸 게 아니라 말을 매개체로 다른 짓을 한 게 아닐까.
사람들을 저렇게 만들어버린 건 황제의 능력과 관계있을지도 몰랐다.
이세계는 생각하지도 못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그 마법 가루의 효능이 작용한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이 상황은 그 둘 모두와 연관이 있는 건지도 몰랐다.
김검천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어떤 식으로든 말이야.”
주변이 조용해지자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여흥은 끝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황제를 향했다.
오늘로 모든 것이 끝이 나고 내일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황제는 뭔가를 기대하는 듯이 살짝 들뜬 표정을 지었다.
“모두 돌아가 내일이 올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라. 곧 있을 축제를 위해서.”
침묵을 지키던 사람들이 황제의 말에 따라 줄을 맞춰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몸 주위로 하얀빛으로 반짝이는 마법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행렬에는 그들을 저지하던 제국 병사들마저 끼어 있었다.
눈을 붉게 물들인 채.
제국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병사들을 가로막았다.
관중들을 겨우 제압한 다음에는 병사들마저 이렇게 혼이 나간 모습을 보이다니.
“저들은 황제 폐하의 명을 따른다고 쳐도 너희들마저 왜 그러는 것이냐?”
“거기 멈춰라, 상관의 명에 따르지 않는 자는 군법에 의해 처벌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무력이라도 사용할 것이다!”
상황은 제국 기사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갈 거 같지 않았다.
병사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불행 중 다행히도 그들 간의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황제가 제국 기사들에게 그들도 그냥 보내라고 한 것이었다.
황제의 의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명령은 명령.
제국 기사들은 지휘가 가능한 병력만을 데리고 철수했다.
곧이어 제국의 상징인 붉은 꽃 한 송이가 마갑에 새겨진 친위기사가 김검천에게 달려왔다.
“김검천님.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