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황제의 명에 따라 대회장을 나간 수천 명의 사람들은 수도 곳곳으로 각자 흩어져갔다.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해 알아서 이동한 것이다.
그들은 황제가 있는 황성 쪽으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들이 우선해야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자신들 같은 자들을 늘리는 것.
그것을 위해 황제는 하얀 마법 가루를 수도 내에 퍼트려 왔던 것이다.
그들은 무료로 하얀 마법 가루를 먹어 온 만큼 다른 걸 대가로 그것을 토해낼 차례였다.
***
“우악! 떨어져! 뭐야? 이 미친놈은!”
붉은 기가 감도는 눈을 한 채 비틀거리며 걷던 사람이 길거리의 행인을 붙잡고 늘어졌다.
별 생각 없이 지나가다가 갑자기 자신을 껴안는 사고에 놀란 행인이 소리쳤다.
“뭐야? 이 자식은! 놔! 놓으라고! 이놈에게서 묻어나는 하얀 가루는 또 뭐야? 더럽게!”
길거리에서 좌판을 놓고 물건을 팔던 상인이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그 사람 비틀거리는 걸 보니 술이라도 취한 모양이요. 그냥 밀어버리고 갈 길 가면 될 텐데 왜 그러고 있소? 혹시 그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요?”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는데 무슨 말을 그리합니까! ….아직 그녀에게 말은 안 했지만. 그냥 이놈이 힘이 세서 못 벗어나는 거요. “
좌판 상인이 어이가 없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 그러면 결혼한다는 건 형씨의 망상 아니요? 술에 취한 쪽은 그 쪽인거 같은데.”
“뭐야, 이 사람 떼어줘요. 대신 좌판 물건을 하나 사기로 하지요.”
“어허, 두 개로 하지요.”
“누가 장사하는 사람 아니랄까 봐. 기회를 놓치지 않는군. 알겠소!”
상인이 붉은 눈의 사람을 잡고 힘껏 당겼다.
이제 그의 손에도 하얀 가루가 묻어 났다.
그러자 붉은 눈의 사람이 하는 일을 방해받은 것에 자극 받아 상인을 향해 물려고 들었다.
- 딱!
다행히 이빨은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자칫했으면 손가락이 잘려져 나갈뻔한 상인이 허둥지둥 떨어져 나갔다.
그 바람에 눈에 붉은 기가 도는 사람은 행인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고.
“이놈, 술 취한게 아니라 미친 거 아니야? 거기 손님, 무사하오?”
실랑이를 벌이던 붉은 눈의 사람과 행인이 비틀 거리며 일어났다.
행인의 눈은 빛이 사라진 것처럼 멍했다.
상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은 거 맞소? 아무튼 물건은 약속대로 사시죠?”
“크으으….”
행인이 멍한 눈길로 상인을 바라보았다.
아까와 달라진 모습에 상인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등 뒤로 물건 팔던 좌판이 닿아 물러서지도 못하게 되었다.
“물건 살 필요도 없으니까 그냥 가시죠!”
“크아악--!”
그 말에 응답한 행인이 상인을 향해 덮쳐갔다.
붉은 눈의 사람도 함께.
그리고 잠시 후 상인은 붉은 눈의 사람을 따라 행인과 같이 다른 사람을 덮치기 시작했다.
이제 길거리에는 부서진 좌판에서 굴러떨어진 물건만이 홀로 남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
제국 수도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런 곳이니 한정된 인원과 예산으로 치안을 담당하는 건 힘든 일.
오늘도 제국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제국군들은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곳곳에 흩어져 난동을 피우는 걸 아직 모른채로.
거리를 순찰하던 제국 기사가 눈이 빨간 자를 겨우 제압한 다음 자기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손에는 붉은 눈의 사람을 잡을 때 피부에서 묻어난 하얀 가루가 묻어 있었다.
이런 험한 일을 하는 때일수록 하급 기사에서 벗어나서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에도 하급 기사였고 지금도 하급 기사였으니 가능할지는 의문이었지만.
이런 하급 기사라도 병사들에게는 대단한 존재였다.
기사는 병사들을 향해 잘난 척하며 입을 열었다.
“이런 힘만 쎈 놈을 봤나? 거기에 비해 너희 병사들은 왜 이리 약한거야.”
“그거야 기사님은 마나로 육체를 강화할 수 있는 실력자 아닙니까. 비교 대상이 됩니까?”
“힘의 차이가 느껴지냐? 그런데 이건 뭐지. 꽤 찝찝한 느낌이 드는 가루인데.”
그 하얀 가루가 묻은 건 기사뿐만이 아니었다.
지휘관인 기사가 나서기 전에 제국 병사들이 붉은 눈의 사람을 상대하러 나섰다.
그리고 잡기는커녕 도리어 당한 제국 병사들의 손과 몸에도 묻은 것이다.
그 뒤에 기사가 나서서 처리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몸에 이상한 게 잔뜩 묻어버린 병사들도 불평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기사님. 괜찮으면 잠시 집에서 씻고 와도 될까요?”
“이놈이 빠져가지고는. 안 돼.”
“정말 안 될까요?”
10년 넘게 이 짓을 같이 해온 병사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제야 기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대신 오늘은 정시 퇴근을 시켜주마. 넌 신혼이잖아.”
“감사합니다! 기사님!”
또 다른 병사가 실실 웃으며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는요?”
“본인도 없는 여자친구가 있는 녀석의 요청은 거절한다! 죽창으로 안 찌른 걸 다행으로 알라고.”
“권력을 남용하시는 게 아닙니까?”
“정말로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는 게 어떤 건지 쬐금만 맛보여줄까? 앙?”
시무룩한 표정의 병사가 갑자기 손가락을 들어 기사를 가리켰다.
“저…. 저….”
기사가 인상을 썼다.
오랫동안 같이 일해왔기에 가까워진 사이라지만 자신은 윗사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손가락질을 당했는데 그냥 넘어갈 신분과 관계는 아닌 것이다.
기사가 주먹을 흔들었다.
“이 자식이. 미쳤냐? 어디다 대고 손가락질이야?”
“기사님 말고 기사님 뒤요! 뒤를 보세요!”
“뒤가 뭐 어떻다는 말이냐?”
기사가 별 것 아니라면 가만히 안 두겠다는 턱 짓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헉!”
아까 겨우 제압한 자와 같은 붉은 눈을 한 사람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늘어날 것도 아니라 십여 명에 달하는 숫자가.
병사들에게 별거 아닌 듯 말하긴 했지만 기사인 자신도 제압하는 게 힘들었다.
저런 숫자라면 현재 이곳에 있는 병력으로는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기사가 소리쳤다.
“지원! 지원을 요청해!”
“저, 기사님.”
“왜? 지금 바빠!”
“여기 오기 전 다른 곳에 예비 병력까지 출동해서 지원 병력은 없다고 들었잖습니까?”
“젠장, 오늘로 무술 대회가 끝나면 좀 쉴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곧 쉴 수는 있겠네요. 잠깐이 아니라 평생이 될지 모르겠지만요.”
“지금 한가하게 농담할 때야? 너도… 으악!”
기사가 정신이 나가 있는 듯한 아직 신혼인 병사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러면서 기사는 병사의 눈을 보게 되었다.
신혼의 꿈에 젖어있어 반짝이던 병사의 눈은 흐릿하기 짝이 없었다.
기사는 황급히 병사를 힘껏 밀었다.
그 병사는 잠시 비틀거리더니 붉은 눈의 사람이 하던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덮쳐갔다.
기사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젠장! 예비병력이 없어도 어떻게든 지원을 요청하라고…. 어? 너마저?”
여자친구가 있는 병사의 눈빛도 흐릿하게 변했다.
그리고는 기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주변의 사람들과 같이.
전염이라도 된 듯이 다른 사람들도 멍한 눈으로 흐느적거리는 무리에 합류한 것이다.
“멈춰! 멈추라고!”
아무리 말해보았자 기사의 말에 따를 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자기의 말 한마디에 웃고 웃던 병사들마저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기사는 칼자루를 쥐었다 놓으면서 망설이다 결국 검을 뽑아 들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얼마 가지 못하고 잡힐 것 같았으니 반항이라도 해보려는 것이었다.
그 기세로 기사의 손에 묻어 있던 하얀 가루가 말라붙은 채로 떨어져 내렸다.
두려운 눈빛의 기사는 검을 굳게 쥐며 중얼거렸다.
“왜 본인 혼자만 멀쩡한 거지? 차라리 저들처럼 되었다면 이런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텐데.”
그것이 제국 기사가 할 수 있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
수도 전역으로 서서히 문제가 커져 갈 무렵 김검천은 황태자의 저택으로 돌아와 있었다.
황제가 사람을 보내기 전 일행들과 처리 할 일이 있었기에 급히 돌아온 것이다.
이곳은 대회장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아직 도달하지 않아서 별일 없어 보였다.
대회장을 벗어난 사람들은 힘은 세졌어도 이동 속도는 걷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당장 이곳에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붉게 저물어 가는 하늘에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후라면 또 몰라도.
김검천은 집사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사고가 일어났다면 집사가 한가롭게 여기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런데 집사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초조한 표정의 집사는 멀쩡한 모습의 김검천을 보자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회장에 보내두었던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우승 축하드립니다.”
“고맙군. 그보다 저택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한데?”
“모두 떠났습니다. 김검천님이 돌아오시기 전 황제가 보낸 전언이 있었거든요.”
떠난 사람들 중에서도 의리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남겠다는 기사와 사용인도 있었다.
그들은 황태자가 직접 나서 충분한 골드를 준 다음 집으로 돌려보냈다.
혹시 자신이 살아남게 된다면 다시 부르겠다는 말과 함께.
집사가 중얼거렸다.
“휴, 권력이라는 게 참 허무하군요.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요.”
“그나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대비하고 있던 게 다행이지. 내 일행들은?”
“다들 모여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획을 검토하고 마지막 준비하는데 시간이 제법 소모되어 끝났을 때는 밤이 되었다.
황태자는 세이야와 함께 그림 도구를 쥔 리에를 데리고 움직였다.
집사도 그 뒤를 호위하듯이 섰다.
이쪽은 김검천 일행이 타고 온 마차를 이용해 따로 수도를 떠날 사람들이었다.
황태자가 조심스럽게 김검천에게 물었다.
“정말 이대로 도망가도 될까? 감시하는 눈이 붙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생각보다도 더 크게 일이 터질거야.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확실해.”
“우리가 수도를 떠난다 해도 황제측에서 우리를 감시할 여유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적어도 오늘만큼은 감시가 붙지 않을 걸.”
김검천은 황제의 말에 이성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예상이 맞다면 오늘까지 사람을 풀어 소문을 흘리던 변경백도 행동을 시작할 것이다.
그 틈을 타 수도를 떠난다면 적어도 하루 정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무엇보다 김검천이 오늘 황제를 쓰러트린다면 황태자에 대한 처우가 달라질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알린 상황은 아니니 황제가 죽으면 황태자가 황위를 잇게 될지도 몰랐다.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었지만.
김검천은 대회장에서 본 걸 간단히 정리해 일행들에게 알려주었다.
황태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럴만한 거겠지. 수도 밖으로는 언제 떠나는 게 좋을까?”
“그건 상황을 보면 알테니 스스로 결정해. 다만 안전을 위해 미리 마차에 타고 있으라고.”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차 안이 김검천이 자신할 정도로 그렇게나 안전한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쿠퍼와 샤칸, 루시엘은 김검천의 왼쪽 옆으로 이동했다.
김검천이 물었다.
“나와 같이 황궁에 가면 위험할 텐데 정말 같이 가려는 건가?”
쿠퍼가 단호히 말했다.
“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김검천님과 갈 겁니다.”
루시엘이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적어도 김검천님의 짐은 안 될 테니까요.”
샤칸이 대답했다.
“드워프를 잡아오라는 황제라는 인간의 면상을 한번쯤은 직접 보고 싶었거든!”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라면 적어도 자기 한 몸은 보호할 정도는 되었다.
정 위험해 보이면 도망치게 만들면 될 테고.
요즘 들어 더 강해진 셋이 함께라면 마스터 나이트도 이길 수 있을지 몰랐다.
김검천은 저택 밖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상징인 붉은 꽃이 새겨진 마차 한대가 집 앞에 서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수십 명의 제국 친위 기사와 함께.
황제가 있는 황성으로 김검천을 데리고 갈려고 온 것이다.
순순히 따라가지 않으면 무력이라도 행사할 것 같은 모습으로.
김검천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선언했다.
“자, 그러면 계획을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