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김검천은 나가기 전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지막으로 챙겼다.
대회장에서의 겪은 걸 대비하기 위해 귀에 노이즈 캔슬링 액체를 바른 것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를 세이야에게 말한 후 저택을 나섰다.
기다리고 있던 친위 기사들이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목례를 한 친위기사들 중 지휘 역할을 맡은 선임 기사가 나서면서 공손히 말을 걸었다.
“김검천님 맞으십니까?”
“그렇소.”
“저희들은 김검천님을 황성으로 모시고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혹시 나만 초대받은 거요?”
“황제 폐하께서 언급하신 분은 김검천님 뿐이십니다. 왜 그러시는지요?”
김검천이 대답대신 슬쩍 뒤에 눈길을 주었다.
선임 기사가 돌아보니 쿠퍼와 샤칸, 루시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선임 기사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쿠퍼는 그렇다 치고 샤칸과 루시엘같은 이종족이 눈에 거슬린 것이다.
“혹시?”
“일행과 같이 가고 싶어서 물어본 거요.”
선임 기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김검천님만 원하셨지 다른 자… 아니, 분들은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입장이 곤란하다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만약 내가 저 마차를 타지 않는다면 그쪽은 더 곤경에 처하겠지요.”
김검천의 말에 선임 기사가 깜짝 놀라며 다급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하시겠다는 겁니까?”
“날 데리러 온 친위 기사들이 싫다는 데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김검천님은 되지만 다른 분들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거야 그쪽 사정이지 내가 알 바는 아니지요. 일행들이 같이 못 간다면 나도 안 갈거요.”
김검천도 황제를 만나러 가야할 이유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걸 친위 기사들이 알리가 없었다.
황제의 명령을 받았으니 김검천만큼은 꼭 데려가야 하는 상황.
발등에 불이 떨어질 정도로 마음이 급한 쪽은 친위 기사들인 것이다.
친위 기사들로서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김검천을 끌고 가고 싶었다.
생각은 그랬다.
데리려 온 만큼 그들은 김검천은 이번 무술 대회의 우승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제국 사천왕보다도 강할지 모르는 힘의 소유자인 것이다.
여기 모인 친위 기사들로는 그런 꿈같은 일이 가능할리가 없었다.
선임 기사와 다른 친위 기사들이 서로 눈길을 주고 받았다.
그러더니 선임 기사가 한숨을 쉬며 김검천에게 말했다.
결국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 선임 기사인 것이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선임 기사는 같이 온 친위 기사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돌아왔다.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선임 기사가 입을 열었다.
“의논해 봤는데 같이 마차를 타고 동승해도 좋습니다.”
“함께 가는 건 그렇다 치고 황성에 입장한 이후는 어떻게 되는 거요?”
“그건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
김검천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신을 데리고 가면 그 뒤로는 여기 친위 기사들 책임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니 황성까지는 데리고 간 후 황제를 만나는 건 다시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알았으니 일단 가기나 합시다. 의논한다고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으니.”
김검천이 이의를 제기하기는 했지만 그걸로 시간을 잡아먹은 쪽은 친위 기사들이었다.
선임 기사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미 달이 하늘 한쪽으로 기울어진 게 보였다.
황성에 도착할 즈음에는 친위 기사들이 김검천을 데려오라는 시간이 지날지도 몰랐다.
마음이 급해진 선임 기사가 직접 마차 문을 열며 고개를 숙였다.
“동행해도 좋으니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빨리 움직여야 하니까요.”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구는 선임 기사를 향해 김검천이 상냥히 대답해주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부탁까지 받았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이 가야겠군. 다들 가자고.”
“감사드립니다!”
친위 기사의 감사 인사까지 받으며 김검천과 쿠퍼, 샤칸, 루시엘 모두 마차에 탔다.
그래도 무기를 가지고 타게 못 하게 했으니 다들 맨몸이었다.
모두 탑승하자 마차 문을 닫은 친위 기사들도 타고 온 말에 올라탔다.
그제야 마차는 친위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황성으로 이동했다.
명령을 받은 일부 친위 기사들이 마차의 앞으로 나가 먼저 길을 정리하려 들었다.
마차가 빠르게 이동하기 쉽게 주변의 사람들을 물리려는 작정인 모양이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친위 기사들은 강제로라도 사람들을 밀고 지나갈 기세였다.
지금 주변으로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 실제로 저지르지는 못한 게 다행일 정도로.
샤칸이 마차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김검천에게 말했다.
“우리를 둘러싼 저 인간 기사 녀석들, 이상할 정도로 열심히 경계 중인데?”
“황제가 나를 데리고 오라고 했으니 도망가지 않도록 감시하는 게 아닐까.”
“아니야. 경계하는 건 마차 쪽이 아니라 바깥쪽이라고.”
김검천이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다.
제멋대로기는 해도 샤칸은 가끔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기도 했다.
“다른 방면으로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하지. 저들의 대화를 한번 들어보도록 할까. 미리내.”
달리는 마차 안에서 말을 탄 사람의 대화를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차가 굴러가면서, 그리고 말이 달리면서 생기는 소음이 방해했으니까.
하지만 김검천은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들을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디멘션 노이즈 캔슬링 개시. 주변 잡음을 차단 후 음성만을 증폭시킵니다.]
김검천이 샤칸에게 살짝 기댄 채 창문 너머로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였다.
어떤 친위 기사가 동료 기사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김검천이 듣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속에 있는 걸 털어놓고 있었다.
“어이, 들었어?”
“뭘?”
“황성을 나가기 전 수도 치안을 맡은 제국군에서 전령을 보낸 거 말이야.”
“그거? 수도에 또 폭동이라도 발생했나 보네. 그건 항상 하는 정기 보고 같은 거잖아.”
“이번에는 좀 달라. 여기로 출동하기 전 대기하면서 슬쩍 이야기를 들어보았거든.”
말을 꺼낸 친위 기사가 조금 목소리를 낮추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려주기 싫은 듯이.
“폭동이 일어났다고 해도 수십 명 정도가 날뛰거나 많아도 백여 명 정도였잖아?”
“어, 수도 치안 병력이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숫자지.”
“그런데 이번에는 수천 명은 되어 보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급히 보고하러 온 거고.”
“수천 명이라고? 오늘이 대회 마지막이라서 그런가. 수도 치안군이 고생 좀 하겠네.”
“운이 나쁘면 우리들도 차출되어서 지원 나갈지도 몰라.”
“우리는 황제 폐하와 황성을 지켜야 하는 몸이지 수도 치안을 담당하는 건 아니잖아.”
“보고를 자세히 들은 높으신 분들은 생각이 좀 다른 거 같더라고.”
“뭐, 수도의 치안이 나빠지면 황성에도 영향이 없는 건 아니긴 한데.”
친위 기사가 앞에 있는 선임 기사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오늘따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기라도 하듯이 예민하게 굴고 있지 않은가.
동료 기사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거기에 대해 언급했다.
“혹시 사람을 앞으로 보낸 것도 그 이유인가? 황성 가는 길에 폭동이라도 있을까 봐.”
“그러지 않을까? 아니면 다른 때 안 하던 짓을 할 리가 없지.”
“정말 그러면 앞에 있는 동료들이 고생 좀 하겠군.”
“그러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저들 먼저 습격받을 테니까.”
“무슨 말이 그러냐. 저기 황성이 보이니까 금방 도착하긴 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둘의 대화는 중지되었다.
더이상 할 말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 앞에서 친위 기사들의 고함소리에 이어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아니? 이놈들이! 저리 꺼지지 못해!”
“이것들이 미쳤나? 아니, 왜 이렇게 힘이 강해?”
“미치면 힘이 강해진다고 하잖아!”
“아, 그렇구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으악!”
친위 기사가 동료 기사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말한대로 공격하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너, 오늘 이후로 옆에 서지 말아 줄래? 가능하면 괜찮다는 말도 하지 말고.”
그 바람에 전방의 어딘가에 불이라도 붙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대낮만큼은 아니지만 앞에 있던 친위 기사들이 당하는 모습을 볼 정도는 되었다.
거의 백여 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친위 기사들을 잡고 늘어지고 있던 것이다.
불꽃에 비친 그들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친위 기사들은 이미 죽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선임 기사가 욕을 뱉었다.
“빌어먹을, 꼭 나쁜 것만 맞아떨어진다니까. 수도 안에서 이게 무슨 꼴이람.”
“선임 기사님. 어떻게 합니까?”
“어쩌기는? 우리의 임무는 저들과의 전투가 아니야. 황제 폐하의 명령을 따를 뿐.”
- 스릉.
선임 기사가 검을 빼 들었다.
“친위 기사들의 반은 전면에 돌격 진형! 나머지는 방어 진형으로!”
명령에 따라 절반의 친위 기사들이 선임 기사에게 다가와 말 머리를 나란히 했다.
나머지 친위 기사들은 마차 주위로 흩어져 어디서 달려들지 모르는 공격에 대비했고.
싸우고 싶지 않아도 저들과 격돌하는 순간 전투가 시작될 것이었다.
“황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대로 돌파한다! 뒤떨어지지 마라! 돌격!”
친위 기사들이 탄 말들이 거침없이 달려갔다.
겁이 많은 보통 말과는 달리 기사들이 탄 말들은 전쟁을 위해 훈련된 전마.
앞에 사람이 다가오고 있더라도 타고 있는 기사들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 돌진한 것이다.
- 우드득.
첫 돌격은 성공적이었다.
전마의 발굽이 앞을 가로막은 붉은 눈의 사람들을 깔아뭉개며 달려나갔으니까.
뚫린 길로 마차가 지나가며 그 뒤를 다시 친위 기사들이 따라 가려고 했다.
그러다 뒤에 처진 친위 기사 몇 명이 다시 몰려든 붉은 눈의 사람들에게 잡혔다.
붉은 눈의 사람은 단순히 육체의 힘만으로도 마나를 다루는 하급 기사 정도의 힘은 냈다.
전마는 그 이상의 힘은 내지 못했고.
전마는 붉은 눈의 사람들 손에 잡혀 바닥에 쓰러지게 되었다.
타고 있던 친위 기사도 별수 없이 나뒹굴게 되었다.
“억? 이거 놓지 못해?”
“살려줘!”
“도와줘! 이 새끼들아! 놔두고 가지 말라고!”
포위망을 빠져나온 친위 기사들 중 한 명이 선임 기사에게 소리쳤다.
“돌아가서 구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선임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바로 코앞에 황성이 보였다.
“놔둬! 일단 황제 폐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지만….”
“마차부터 황성까지 데려놓은 다음에야 돌아가든가 말든가 하자고!”
“아, 알겠습니다!”
겨우 황성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하늘에 걸린 3개의 달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제부터 일어날 김검천과 황제의 만남에 관심이라도 있다는 듯이.
굳게 닫혀 있던 황성의 성문이 선임 기사의 신호를 받고 열렸다.
김검천이 탄 마차가 황성 안으로 들어서자 다시 성문은 닫혔다.
황성은 변경의 성 못지않은 방어력을 자랑했다.
마스터 나이트의 오러, 마스터 매지션의 마법이 아니고서는 부서질 리가 없었다.
또한 제국 수도에 나타날 리는 없다지만 강철 골렘 같은 공성 병기라든지 말이다.
마차에서 내리자 김검천에 대한 임무를 넘겨받게 된 친위 기사가 다가왔다.
이 기사는 김검천외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온 이유를 선임 기사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친위 기사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검천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황제가 허락하지 않은 한 접견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이동해야 할 때였다.
황제를 기다리게 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더 컸으니까.
“일단은 모두 따라 오시지요.”
도착한 곳은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연회장이었다.
친위 기사가 한 곳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황제 폐하께서 오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