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그 시각, 블러드 타워의 숨겨진 입구를 통해 어떤 검은 로브의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걸리적 거리는 무성한 수풀과 나뭇가지를 밀치며 블러드 타워로부터 멀어져갔다.
로브 안쪽으로 보이는 마법사의 얼굴은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블러드 타워에 잠입해 있었던 도플갱어였다.
도플갱어는 블러드 타워에서 어느정도 거리를 벌리자 은밀한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는 수정구 하나를 품 안에서 꺼낸 후 마법을 영창했다.
“통보신안. 공간이여. 연결되어라!”
수정구에서 연기가 걷히며 하얀 머리에 순백의 수염을 기른 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에는 주름이 깊숙이 파였고 한때는 듬직했을 신체 또한 왜소했다.
마법사의 힘으로도 세월은 이기지 못한 것이다.
다만 노인의 눈빛은 심연과 같이 깊었으며 청년 못지않은 활기찬 느낌마저 주었다.
- 오랜만일세. 도플갱어여.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이게 다 마법사를 위한 일 아니겠습니까. 위대한 마법의 탐구자, 탑주님이시여.”
마법사 단체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탑의 탑주가 미소를 지었다.
- 괴물이라도 마법사처럼 말하니 기특하군. 연락한 이유는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인가.
“수도에서의 소동이 점점 커져가며 황제에게 준비한 혈석을 넘긴 걸 확인했습니다.”
- 어찌 인간 된 몸으로 초월 존재의 뜻을 거스르려 하는지. 우리도 그냥 놔둘 수는 없겠군.
“저는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요? 이 얼굴을 유지하는 것도 이제 한계입니다.”
- 돌아오도록 해라. 네가 그동안 블러드 타워에 잠입해 빼 온 정보는 모두 확인했으니.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도플갱어는 수정구를 품 속에 챙긴 후 비행 마법으로 어두운 하늘을 날아 사라졌다.
블러드 타워에서는 그저 검은 로브의 마법사 한 명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
마탑은 보통 마법사들의 정점인 마스터 매지션이 탑주가 되어야 설립 가능한 곳이었다.
그 여러 마탑들 중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심연 마탑의 탑주 고르바.
그가 바로 도플갱어를 블러드 타워에 보낸 장본인이었다.
고르바 탑주는 모여 있는 마법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우리가 어리석은 자들에게 천벌을 내릴 때가 다가왔습니다.
이곳에 있는 십여 명의 마법사들은 마탑 탑주나 혹은 마스터 매지션에 도달한 자.
이들만으로도 왕국 하나 정도는 멸망시킬 수 있는 전력이었다.
대인 마법뿐만 아니라 광범위 마법도 가능한 마스터 매지션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스터 나이트와 비교되긴 하지만 그건 일대일로 정면에서 붙었을 때 이야기였다.
마스터 매지션이 충분한 준비 후 마법 공격을 하면 마스터 나이트도 일격에 죽일 수 있었다.
준비된 마법사가 발휘하는 마법은 그렇게나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오늘 여기서 마스터 매지션들이 그렇게 준비된 마법이 발동될 예정이었다.
힘겨운 표정의 마법사들이었지만 마음속에 쌓아둔 게 많았는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정말 오랜 시간이었습니다.”
“제국과 블러드 타워에서 빼낸 마법 지식, 그리고 최근에 추가된 워스덤의 연구까지.”
“그래서 우리는 혈석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상급 마석도요.”
“그런 것들이 모두 모여 고대로부터 전해져오던 이 대마법을 부활시킬 수 있게 되었지요.”
“우리 마법사들이 꿈꾸는 세상.”
“그것이 이루어질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고르바 탑주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마법사들을 돌아보았다.
이 자리에 있는 마법사들은 견해에 차이가 있기는 하나 한가지 일에는 모두 동의했다.
마법사들을 위해, 마법사들을 위한, 마법사들에 따라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든든하다는 표정으로 고르바 탑주가 한쪽을 가리켰다.
“또한 여기 있는 이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곳에는 치료사가 펠우테와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치료사가 담담히 말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마법사분들이 아니었다면 시작도 못 했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당신 덕분이지만 말이요. 제국이 가진 혈석의 정보를 주다니.”
고르바 탑주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치료사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마법사들이 모일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치료사가 그렇게 한 이유는 간단했다.
황제가 초월 존재께서 원하시는 바를 거부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황제는 죽을 이유가 충분했다.
적어도 치료사에게 있어서는.
“필요한 일인데 뭘 못 드리겠습니까? 덕분에 여기 펠우테도 이 자리에 있게 되었고요.”
“크르르….”
치료사의 말과 펠우테의 짐승 같은 반응에 지쳐있던 마법사들이 웃어 보였다.
칭찬은 오우거도 춤추게 만든다.
마법사들이 순수한 아이같이 활짝 웃는 모습은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순수하다는 게 꼭 선하다고는 볼 수 없는 게 문제였지만.
지금 이들은 대량 살상을 위한 대마법을 준비 중이었다.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마법사들의 무엇을 하든지 간에 치료사에게는 한 점 망설임도 없었다.
그가 하는 행동은 모두 그분이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치료사는 마법사들은 신경쓰지 않고 중얼거렸다.
“초월 존재시여. 저는 당신의 종이자 도구입니다. 모든 건 원하시는 대로 행하소서.”
마법사들은 치료사가 하는 말을 듣긴 했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치료사가 저러는 게 한 두번도 아니었으니까.
고르바 탑주가 창문 너머로 밤하늘을 힐끗 보았다.
하늘 너머로 유성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와 함께.
고르바 탑주는 마법사들을 재촉했다.
“더 늦어지면 때를 놓칠지도 모르오. 그 전에 고대의 대마법을 완성해 소환합시다.”
마법사들이 주문을 영창하자 뿜어진 마나가 중앙에 있는 마석에 흡수되는 게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마법들 중 하나를 발동하기 위해서.
그건 이 대륙에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최상급 마석의 기능을 수행 중이었다.
최상급 마석이 없으면 대신할 것을 만들면 되는 법.
상급 마석 수십 개를 모아 마법사들이 최상급 마석처럼 만들어 낸 것이다.
주문을 영창하는 십여 명의 마스터 매지션이 합친 마나의 힘을 감당하기 위해 특별하게.
여기에 쓰인 대부분의 상급 마석을 치료사가 모아왔다.
지금껏 황제에게 상급 마석을 받아왔던 게 여기에 쓰인 것이다.
그게 치료사가 마법사들에게 환대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고르바 탑주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 다른 마법사들도 자신과 같이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게 될 것이었다.
세상이 바뀌는 순간을.
“우리 마법사들은 세상을 구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오! 마법사들의 꿈을 위해서!”
이제 곧 과거 속으로 사라졌었던 고대 마법이 구현될 것이었다.
제국을 향해서.
***
그리고 제국 황성 연회장에서 김검천은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 꼬르륵.
그건 열심히 음식을 나르던 어떤 시종에게서 난 소리였다.
예상 못한 소리가 들으면 사람은 호기심으로 무엇인지 살펴보기도 했다.
지금 김검천이 그랬다.
그리고 김검천은 다른 시종을 향해서도 눈길을 주게 되었다.
- 꼬르륵, 코르륵, 꾸르륵.
거의 같은 시간에 시종들의 배에서 비슷한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김검천이 옆에서 대기 중이던 엘프 시종에게 물었다.
“다들 배가 고픈 모양이군요.”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이상한 소리를 듣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엘프 시종이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김검천은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보다 긴 귀의 끝부분이 붉게 물든 걸 주시했다.
루시엘을 상대하며 엘프의 습성을 약간이나마 알게 된 김검천이 다시 물었다.
“괜찮다는 건 결국 참고 있다는 거지요. 그게 아니라 배고픈지를 물은 겁니다.”
엘프 시종이 머뭇거리다 솔직히 말했다.
“사실 저희들은 아침 한 끼만 식사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배가 고팠던 거군요.”
“죄송합니다.”
그나마 주어지는 아침이라고는 말라 비틀어진 딱딱한 검은 빵 한쪽만 나올 뿐이었다.
김검천 일행들이 저녁부터 못 먹었다면 시종들은 오늘 점심부터 굶은 것이다.
말을 해서 그런지 에너지가 소모된 엘프 시종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 꼬르륵.
김검천이 웃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여기 있는 음식을 같이 먹도록 하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황제 폐하의 손님들을 위해 마련된 음식을 저 같은 시종이….”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누가 뭐라고 하면 내가 강제로 먹였다고 하면 되지요.”
그래도 머뭇거리는 엘프 시종이었다.
김검천은 괜찮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혼날지 몰랐으니까.
기세좋게 먹던 샤칸이 끼어들었다.
“이 몸도 책임질 테니 먹으라고. 이렇게 음식이 많은데 남기면 아깝잖아.”
쿠퍼가 음식을 여러 개의 접시에 담아 한쪽 테이블에 쌓아두었다.
“김검천님의 말씀대로 당신들도 좀 먹는 게 좋을거요. 먹는 게 남는 거니까.”
루시엘도 한마디 했다.
“당신들이 안 먹는다면 그거야 말로 김검천님의 말을 우습게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눈치를 보던 시종들 중 아직 어린 나이로 보이는 한 명이 음식 접시에 손을 가져갔다.
오늘만 굶은 게 아니라 황성에 온 후로 한번도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혼이 나더라도 지금은 먹고 싶었다.
“시키신 대로 먹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곧이어 입 안에 음식을 가뜩 담은 채로 시종은 웅얼거렸다.
“마…마시쪙!”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에 저항감이 사라진 시종들이 하나씩 쿠퍼가 놓아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절하던 엘프 시종도 슬쩍 끼어들었다.
누구라도 배가 고플 때 밥을 먹으면 즐거워진다.
그렇게 다들 사이좋게 먹고 있는 와중에 샤칸이 가슴을 탁탁 치며 큰 소리 쳤다.
“조금만 참으라고! 저기 김검천님과 함께 이 샤칸님이 너희들을 구해줄테니까!”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려 루시엘을 보면서도 귀찮은 듯 말했다.
“저기 루시엘이라는 귀쟁이와 쿠퍼라는 인간도 도와줄거야!”
열심히 음식을 먹던 시종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이렇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다.
다들 배 불리 먹고 정리를 하려는데 갑자기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즐기는 시간은 끝난 것 같군. 다들 준비해야겠어.”
쿠퍼가 물었다.
“뭔가 감지하셨습니까?”
“조금 있으면 주인이 도착할 모양이거든. 많은 숫자가 감지되었다.”
김검천이 파워드 슈츠의 수납 공간에서 쿠퍼와 샤칸, 루시엘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시종들은 눈이 커진 채로 김검천이 하는 행동을 바라 보았다.
황성에 초대받은 손님이 저런 흉악한 무기들을 가지고 들어왔다니.
또한 저 갑옷 어디에 저만한 무기를 담을 수납 공간이 있다는 말인가.
김검천이 놀란 눈으로 지켜보는 시종들을 향해 윙크를 했다.
“이걸 보았으니 대충 눈치 챘겠네. 우리가 높으신 분에게 나쁜 짓을 할 거라는 걸. 아,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리는 건 너희 자유야.”
김검천이 굳이 시종들에게 이런 말을 한 이유를 알아챈 쿠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시종들을 위해 배려를 하신 겁니까. 과연 김검천님이십니다.”
루시엘이 시종들에게 말했다.
“혹시 몰라 말하는데 알린다 해도 저희들은 당신들을 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샤칸이 먹던 음식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럼. 우리의 무기는 너희를 괴롭히던 자들을 향해 휘둘러지기에도 바쁠거라고?”
시종들은 대답 없이 서로 얼굴만 마주 볼 뿐이었다.
쿠퍼와 샤칸, 루시엘이 무기를 안 보이도록 자신의 등 뒤쪽에 숨겼다.
시종들이 말하면 쓸모없겠지만 그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충분히 기습 공격이 가능했다.
얼마 안 있어 연회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앞서 들어온 친위 기사가 외쳤다.
“황제 폐하의 행차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 폐하를 맞이 해 주십시오!”
그러더니 다른 사람들이 모두 서 있는 걸 보고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곧이어 붉은 갑옷의 호위 기사와 검은 갑옷의 호위 기사를 거느린 황제가 나타났다.
상급 마석 하나를 손에 쥔 채로.
황제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리던 쿠퍼가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종들은 황제를 비롯해 다른 자들이 나타났음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자신들의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황제는 연회장에 마련되어 있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앉기 전 김검천에게 말을 걸었다.
“어떤가? 짐이 준비해 둔 최후의 만찬은 잘 즐겼는지 모르겠구나. 김검천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