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절대로 쿠퍼와 루시엘, 샤칸이 이동한 입구가 있는 바깥 방향에서 접근한 게 아니었다.
이 3명은 황성 안쪽에 있는 연회장으로부터 나타났다.
리에는 연회장에서 굴러다니던 상급 마석까지 들고 있었고.
김검천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김검천과는 멀고 황제와는 가까운 장소에 나타나버렸다.
그나마 황제의 뒤에서 나타났기에 아직 그는 눈치를 못 챈 모양이었다.
그래서 김검천은 미리내를 통해 황태자에게 말을 걸었다.
예전 샤칸에게 음성 모드로 말을 전했듯이.
[지금은 아무 말 없이 따르도록 해. 네 앞에 있는 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다들 물러나.]
김검천의 목소리를 들은 황태자는 상황 판단을 못 했는지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아니, 김검천. 네가 왜 여기에? 지금 상황은 도대체 뭐고 저건 또 누구냐?”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황제의 흐릿하던 눈이 번뜩이며 고개가 돌아갔다.
황제가 기다리던 기회가 제 발로 걸어서 찾아온 것이다.
이거야말로 살아있는 기회 아니겠는가.
황제는 스스로 찾아온 기회를 죽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남아 있는 힘을 모두 끌어낸 황제가 황태자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여태까지 버티던 보람이 있었구나!”
아무리 김검천이라고 해도 공간과 거리의 제약을 무시할 능력은 없었다.
황제를 막을만한 위력을 가진 무기를 쓴다면 다른 사람도 휘말릴 수밖에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김검천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세이야!”
입을 여는 동시에 김검천도 몸을 날렸다.
세이야가 잠시나마 황제를 막아주기를 바랬다.
맨몸이라면 못할 일이지만 세이야는 사병용 파워드 슈츠를 장착한 상태였으니까.
“예!”
세이야가 황제를 막아섰다.
황제가 아무리 강해도 엉망이 된 모습을 보니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어 보였다.
실제로 황제는 중상을 입었기에 처음같이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 쩌억.
황제가 크게 입을 벌렸다.
무슨 공격인지 예상한 김검천이 한발 앞서 세이야에게 경고했다.
“음파 공격이다!”
- 끼에에엑!
미리 알렸다지만 전투 경험이 별로 없는 세이야가 바로 대응하는 건 무리였다.
황제의 음파 공격에 당한 세이야는 귀를 중심으로 얼굴을 부여잡은 채 정신없이 물러섰다.
그 틈을 타서 황제는 리에와 황태자를 양손에 낚아챘다.
황제가 급히 소리쳤다.
“멈춰라!”
김검천이 멈추었다.
황제와 1미터도 남지 않은 거리.
살아있는 기회를 붙잡은 황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버티면 기회가 오는 법이군.”
이렇게 인질을 잡으니 저 괴물 같은 김검천도 꼼짝을 못 하지 않은가.
인정 같은 것에 휘말려 황제 자신을 죽일 기회를 놓치다니.
황제와는 달리 참으로 어리석은 자였다.
밖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뭔가에 의해 황성의 벽이 흔들렸다.
- 쿵. 쿵. 쿵.
“막아! 막으라고!”
“저런 걸 어떻게 막으라고? 으악!”
지금 황제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평소라면 모를까 눈앞에 김검천이 있는데 어떻게 다른 곳에 정신을 팔겠는가.
황태자가 황제의 손에 붙들린 채 신음을 흘렸다.
“흐윽, 뭐지? 이 괴물은?”
황태자가 못 알아볼 정도로 엉망이 된 황제였다.
황제가 황태자를 보며 흉측한 미소를 지었다.
“짐에게 대놓고 괴물이라고 하다니. 과연 저 김검천과 친분이 있을 담력은 있구나.
“윽. 이게 황제?”
황태자가 중얼거리는데 같이 붙들린 리에가 상급 마석을 든 두 손을 올렸다.
“이건 나쁜 짓이에요. 리에는 이런 게 싫어요.”
황제가 눈살을 찌푸린 채 리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아이라도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 한가한 소리나 내뱉고 있다니.
리에를 보던 황제의 눈이 튀어 나올듯 커졌다.
리에의 손에서 있는 상급 마석의 푸른 빛이 약간씩이나마 밝아지는 게 보여서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난 수백 년간 직접 마석을 충전해 온 황제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건 마석이 에너지를 회복시킬 때 보이는 모습인데. 이 아이는 대체?”
황태자가 황제의 그 말에 정신이 든 것 같았다.
“당신이 정말 황제라면 죄 없는 아이는 그냥 놔줘! 왜 그런 모습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황제로서의 품위는 지켜라!”
황제가 황태자를 내려다보았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황태자여. 짐의 겉모습보다 아이가 마석을 회복시키는 게 더 신경쓰여야 하지 않겠는가?”
마석 충전은 그만큼 희귀하고 소중한 능력.
특히 마석 수급이 어려운 지금 시대라면 더욱더 그랬다.
황태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 판단을 잘못해 황제 같은 자를 앞에 두고 실수를 계속 저지르다니.
황태자는 그냥 죽고 싶었다.
“큭, 죽여라!”
“흐음, 어떻게 할지 고민이로다. 널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니까.”
리에가 옆에서 또박또박 말했다.
“안 죽일 거예요. 황태자 아저씨가 죽지 않는 건 리에가 보았어요.”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엉망이 된 얼굴이라 오히려 흉악한 표정이 돼버렸지만.
“똑똑한 아이구나. 황태자는 저기 있는 김검천이 가만히 있다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황태자를 여태까지 살려둔 건 고통을 주며 죽이기 위해서다.
이제와서 그를 간단히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김검천을 위협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죽여야겠지만.
“리에야!”
김검천의 등 뒤로부터 쿠퍼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루시엘과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려오는 샤칸도 보였다.
쿠퍼가 김검천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김검천은 왕성에서 경험한 비밀 장소를 떠올렸다.
황태자인 만큼 황성의 비밀 통로 몇 개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아마 황성에 있는 비밀 통로로 여기까지 넘어온 모양이야. 운이 없어 황제에게 잡혔고.”
“저게 황제라고요?”
알고 있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김검천이 거짓말할 리는 없었다.
쿠퍼가 황제에게 소리쳤다.
“만약 리에에게 손끝 하나 건드렸다가는 용서하지 않겠다!”
황제는 쿠퍼를 비웃었다.
“너 따위가 짐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쩔 것이냐?”
황제는 리에의 머리를 두툼한 엄지손가락으로 만졌다.
그러면서 그 모습을 쿠퍼가 잘 보이도록 몸까지 슬쩍 돌려주었다.
“네 이놈!”
“어허, 움직이면 되겠나? 짐이 깜짝 놀라서 손에 힘이라도 들어가면 어쩌려고?”
“크으윽!”
리에가 아닌 황태자가 신음을 흘렸다.
황태자는 황제에게 있어 리에와 달리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상관없는 것이다.
황제가 살짝 힘을 준 것만으로 황태자는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쿠퍼는 당장이라도 황제를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두 사람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위협이 성공하자 황제가 다정한 눈빛으로 리에를 바라보았다.
살아있는 기회가 보물이 되어 황제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아이야, 지금 네 손에 들려 있는 마석의 에너지를 네가 회복시킨 것이더냐?”
“그래요!”
“어디 한번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겠느냐?”
“먼저 우리를 놔주면요.”
황제가 잠시 고민하다가 김검천에게 먼저 말했다.
“이 둘을 잠시 내려놓겠다. 너희들이 이 이상 다가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나와 내 일행은 다가서지 않겠다. 약속하지.”
“짐이 믿을 수 있겠는가?”
“날 믿으라는 게 아니야. 너는 급하면 아이도 죽일 수 있으니 우리가 조심하는 것이지.”
“후후후, 과연 사람 보는 눈은 있군.”
“널 인간으로 봐야 한다는 게 웃기지만. 세이야, 이쪽으로.”
김검천 옆으로 세이야가 이동하자 황제는 그들과 자신의 거리를 재었다.
지금까지 본 바에 의하면 김검천이 자신보다 빠르다고 해도 한계는 분명했다.
이 정도 거리를 두며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설사 손이 닿지 않는다고 해도 황제에게는 음파 공격이 있으니 함부로 못 움직일 것이다.
황제는 그제야 리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이라서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었다.
리에는 자신이 그동안 바라왔던 능력을 가진 보물이었으니까.
귀중한 물건은 소중히 다뤄야 오래 쓰는 법 아니겠는가.
상급 마석을 쥔 리에가 황태자를 가리켰다.
“잘생긴 아저씨도 놔주세요!”
“좋다. 이거 하나 더 놔준다고 달라질 건 없을 테니.”
물건 취급당한 황태자의 얼굴이 육체가 아닌 정신의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황제가 리에를 보며 물었다.
“만약 짐이 황태자를 안 놓아주었다면 어찌할 생각이었느냐?”
“그랬으면 약점을 말했을 거예요.”
“짐에게 약점이 있다고?”
리에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크고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리에는 알아요. 심장에 칼이 찔리면 죽는 거예요.”
황제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실제로 강화된 육체로 왠만한 상처로는 죽지 않은 황제의 약점이기도 했으니까.
“그건 모든 생명체의 약점 아닐까?”
황제의 비밀 아닌 비밀에 옆에 있던 공간이 마치 누군가 있는 것처럼 살짝 흔들렸다.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눈치 못 챈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후후, 오늘은 나쁜 일만 벌어진 것 아니로군. 이 아이가 마석을 충전시키면 당분간 짐이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다. 그사이 수도의 인간들을 하나씩 혈석으로 만들어 주마.”
황제는 김검천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를 제물로 못 바친 건 아깝지만 대신 제국의 모든 이를 죽여서라도 짐은 영원히 젊음을 누리며 살 것이다. 이게 다 인간을 위한 세상을 위해서다.”
누가 들어도 미친 소리 같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황제의 얼굴은 진지했다.
리에의 손에 들려 있던 상급 마석이 점점 푸르게 빛을 밝히는 게 황제의 눈에 들어왔다.
황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훌륭하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제국 황제의 후계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질인 것이지!”
쿠퍼가 발끈했다.
“웃기지 마라. 리에는 네 장난감이 아니야!”
황제가 쿠퍼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뭔가 귀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 어디선가 많이 들었는데. 크크, 너, 그 아이의 호위 기사였던 자로구나.”
“…사람을 잘못 보았다.”
“이제 와서 뭘 숨기려는 것이냐. 머리카락이 없어 못 알아보았구나. 그렇다면? 하하하!”
황태자가 황제에게 다급히 물었다.
“역시 리에는 누님의 아이인 건가?”
“당연한 것을 묻다니. 제국 황실의 핏줄이 아니면 누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겠는가.”
황제의 자신 있는 말에 황태자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말에 따르면 리에는 누나의 딸이 맞는 것이다.
그녀 또한 리에처럼 마석을 충전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제국 역사를 통틀어도 몇 명 없었던 그녀는 황제의 엄중한 보호 아래 사육당하고 있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결혼을 했지만 아이를 출산한 그녀는 그날 바로 사라졌다.
그녀의 호위 기사와 함께.
쿠퍼가 손가락으로 황제를 가리켰다.
“이렇게 된 것 더 이상 숨길 건 없겠지. 황제, 그녀는 너를 피해서 도망간 것이다.”
“화려한 드레스와 안전한 쉴 곳, 풍족한 음식을 제공한 짐에게 문제가?”
“네가 그랬던 건 그저 그녀로부터 마석을 충전 받기 위해서였을 뿐!”
“무슨 문제인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
“그녀는 매일 상급 마석의 에너지를 회복시켜야 했기에 날이 갈수록 허약해져만 갔어!”
황제의 감시 아래 칙칙한 회색의 황성에 갇혀 하루 종일 상급 마석만을 회복시켰다.
그게 마석을 회복시키는 능력을 타고나 황제에게 잡힌 사람의 운명인 것이다.
“그게 그 아이가 도망친 이유인가?”
“아니, 리에 때문에 도망친 거다.”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급 마석의 에너지를 회복시키는 리에를 보니 알만했다.
“자신의 아이도 자신과 같이 마석을 회복시키는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건가.”
“그녀는 자신의 삶에 순응했지만 딸인 리에는 자신과 똑같이 살게 할 수 없었던 거지.”
“그래서 네가 데리고 도망친 거였던 것이냐. 안락한 친위 기사의 자리를 버리고?”
“그녀가 부탁했으니까.”
“그보다 그 아이는 어디 있나?”
“죽었다. 마물의 숲에서. 병으로 말이다.”
“츳, 바보 같은 아이군. 그냥 황성에 머물러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황제가 혀를 차는 모습에 쿠퍼가 버럭 소리쳤다.
“네 탓이다! 마석을 충전하는 일은 생명력을 빼앗기도 해! 그로 인한 불치병이었다고!”
황제가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감이로군. 황태자와 비슷한 나이라면 잘 관리하면 아직도 쓸 수 있는데 그렇게 죽다니.”
- 탁.
벌레가 물기라도 한 듯이 짜증 난 얼굴로 황제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황태자가 주먹으로 황제를 때리고 있었다.
고작해야 중급 기사인 황태자로서는 검도 아닌 주먹으로 황제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주먹에 피가 나도록 후려치던 황태자가 소리쳤다.
“네 놈이… 누님을! 누님의 아이… 리에를 놔줘!”
황태자가 여태까지 가족 간의 정을 느낀 건 황실에서는 오직 누나뿐이었던 것이다.
유일한 안식처였던 사람을 황제 때문에 빼앗겼다니.
황제에게 버림 받았을 때와 다른 충격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황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모았다.
“어리석은 놈. 너 같은 건 더 이상 필요 없다. 이 아이만 있으면 충분해.”
-탁!
튕긴 손가락에 얻어맞은 황태자가 김검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김검천이 조심스럽게 황태자를 받아냈다.
“이봐, 살아있나?”
다행히 황태자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황제가 나중에 가지고 놀려고 그랬는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황태자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울분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에를 구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거다.”
“동감이야. 그래도 그 몸으로는 무리다. 내게 맡기라고.”
리에에 대한 걱정에 쿠퍼가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리에를 구출해 낸다는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