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기뻐하는 황제와 반대로 쿠퍼의 속은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끝까지 숨겨왔는데 정작 가장 들켜서 안 되는 자에게 발각되다니.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황제는 기뻐했다.
“운수 좋은 날이로다. 짐이 영원히 살게 된 날, 진실 된 후계자가 다시 돌아오다니!”
- 후읍.
황제가 심호흡을 하며 주변의 붉은 연기를 마셨다.
그러자 경련하던 황제의 근육의 떨림이 점차 가라앉았다.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후계자가 있는데 왜 그렇게를 못하니.”
“무엇을 말이더냐?”
“블러드 타워에서 공급받는 붉은 연기도 네 노화와 죽음을 막아주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하하, 그래서 네가 뭘 어쩌겠다는 것이더냐?”
그때였다.
블러드 타워가 있는 방향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러더니 멀리서 분노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 쿠오오오오--!
멀리서 전해져온 뜨거운 열풍이 황제의 머리카락을 나부끼게 만들었다.
그에 따라 황성을 채우고 있던 붉은 연기도 기세를 잃어갔다.
황제가 놀란 눈으로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김검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김검천이 대답해주었다.
“핵폭탄.”
“그게 뭔지는 몰라도 블러드 타워는 여전히 멀쩡한 것 같군! 붉은 연기가 남아 있다!”
“직격이 아니었거든.”
사정거리가 부족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던 일.
직격이 아닌만큼 한 번으로는 안 될 거라는 예상도 했다.
김검천이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렸다.
황제가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그건 또 무슨 의미인 것이냐?”
“아직 한 발 남았다고.”
***
그때 블러드 타워에서는 난리가 난 상태였다.
- 크루루쿠와--!
마법사들을 지휘하는 붉은 선의 마법사가 비틀거리다 옆의 기둥 하나를 부여잡았다.
밀려드는 충격에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없어서였다.
자신이 이 정도 충격을 받았다면 블러드 타워의 마나 보호막은 이미 박살 난 걸로 보였다.
“상황을 보고하라! 마법이든 뭐든 사용해서 빨리!”
옆에 있던 가는 눈의 마법사가 대답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실력 없는 마법사인 저희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저번에 들은 꾸중에 앙심이라도 품은 걸까.
이런 긴급한 상황에 빈정거리는 듯 한 대꾸까지 하다니.
눈이 돌아갈만큼 화가 치민 붉은 선의 마법사가 소리쳤다.
“그러면 닥치고 따라오기나 해!”
확실히 평소보다 마법을 걸기가 힘들어진 상태.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붉은 선의 마법사는 자신만 방어 마법을 걸고 블러드 타워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보았다.
길고 거대한 기둥 같은 것이 블러드 타워를 향해 날아드는 모습을.
그리고 밤하늘이 대낮처럼 밝아졌다고 생각한 순간.
그곳에 있던 마법사들은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방어 마법을 사용한 대가는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더 괴로워 하는 차이밖에 없었다.
- 쿠오오오오…
핵융합 미사일이 폭발하며 발산한 파괴의 빛은 빛의 구슬이 되어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그 여파로 주변에 있는 생명체는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이어 광구는 밑에서 연기와 함께 솟아올라 하늘을 밝히는 붉은 꽃이 되었다.
블러드 타워가 산속 깊은 곳에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폭발이 감소하긴 했다.
하지만 장소의 이점으로도 그 힘을 모두 막기에는 부족했다.
막지 못한 힘은 뜨거운 열 폭풍이 되어 원을 그리며 뻗어나갔다.
- 쿠와왕쿠루루--!
***
황제가 느꼈던 건 블러드 타워 근처에 떨어진 핵융합 미사일의 여파였던 것이다.
수도 방벽을 거쳐 황성까지 도달했을 때는 뜨거운 바람에 불과해질 정도로 약해졌다.
하지만 황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도 않았고.
“블러드 타워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공격의 여파를 느낄 정도라니? 말도 안 된다!”
김검천이 대꾸했다.
“네가 자신하던 블러드 타워를 날려버리려면 이 정도 위력은 있어야 잖아?”
그 말을 하면서 김검천은 자세를 낮추었다.
다음 행동을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황제가 소리쳤다.
“뭘 하는 거냐! 짐이 했던 말이 기억 안 나나? 다가오면 이 아이를 죽이겠다는 걸!”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나도 알아. 너는 그런 녀석이라는 걸. 그래서 네 주의를 끌어본 거지.”
황제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느낌은 현실이 되었고.
황제 옆의 성벽이 무너지며 거대한 금속 주먹 하나가 날아든 것이다.
황태자 일행을 여기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온 배틀머신.
자율 전투 모드로 자동으로 움직이던 배틀머신이 미리내의 신호를 받고 공격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 배틀 머신은 어느새 팔 하나가 사라진 상태였다.
- 투쾅!
“우읍!”
황제는 배틀 머신의 기습 공격에도 쉽게 당하지 않았다.
양손을 이용했다지만 육체 하나만으로 배틀 머신의 주먹을 막아낸 것이다.
황제는 얼굴을 리에를 돌리며 소리쳤다.
“이런 게 있다면 끝까지 비장의 수단으로 숨겼어야지! 이런 애매할 때 사용하다니!”
김검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배틀 머신이 네가 못 볼 만한 덩치는 아니니까.”
황제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도 공격시킨 거였냐? 짐을 꼼짝 못 하게 묶어두긴 했으니 나쁜 시도는 아니야. 다만!”
황제가 리에를 향해 위협적으로 입을 열어 보였다.
언제든 음파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처럼.
“당장 이것을 멈춰라. 더 이상 짐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도 약속해라.”
“설마 리에를 죽일 작정인가? 그러면 네가 오래 살겠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텐데.”
“미래보다는 현재가 짐에게 더 소중하지. 하지만 넌 어떨까?”
김검천이 그 말에 손가락 2개를 들어 올렸다.
김검천의 손가락에 좋은 추억을 가지지 못한 황제였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가? 물러서는 대신 조건을 2개나 걸겠다는 말이냐?”
“일.”
김검천이 손가락을 다시 하나 꺾었다.
그러자 황제의 반대쪽 성벽으로부터 배틀 머신 주먹 하나가 날아와 그를 후려갈겼다.
- 쾅!
“으악!”
배틀 머신의 한쪽 주먹을 막는데도 양팔의 자유를 빼앗긴 황제였다.
반대편으로 날아온 다른 주먹까지 막을 여유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판국이니 리에에게 신경 쓸 수도 없었고.
그 틈을 이용해 김검천이 재빨리 날아가 리에를 안아 물러섰다.
쿠퍼와 황태자가 날아 오듯이 달려와 리에를 넘겨 받았고.
이제 고개마저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황제가 그나마 사용 가능한 건 입 정도였다.
“네 이놈… 김검천! 아직 손가락 하나를 덜 꺾었다!”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그런 걸 신경 쓰다니. 당한 게 억울하긴 한가 보네. “
원래 배틀 머신은 분리, 합체가 가능한 로봇.
지금처럼 팔 부분은 따로 전투 무기로도 사용 가능할 정도의 출력과 파괴력을 자랑했다.
김검천은 아무것도 없는 한 곳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곳에 마치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3개의 달 주위로 떨어져 내리는 유성이 김검천의 눈에 들어왔다.
***
“고르바 탑주님. 하늘의 움직임을 보니 마법을 발동시키기에 최적인 모습입니다.”
- 파지직.
중앙에 놓인 최상급 마석의 주변으로 넘쳐나는 마나가 번개처럼 튀었다.
이제 남은 건 마법을 발동시킬 마법사의 마법 주문 한마디면 충분했다.
고르바 탑주는 만족한 듯 웃었다.
이 정도 마나량이면 고대의 대마법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고르바 탑주가 마석이 잔뜩 박힌 마법 지팡이를 들고 최상급 마석 앞에 섰다.
“드디어 때가 왔구려.”
마나와 정신력의 지속적인 소모에 잠시 숨을 돌리던 한 마법사가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워스덤이 없는 건 좀 아쉽군요.”
“그자는 마법사들의 수치요. 제국 삼현자라는 세속적인 명예에 잡혀 제국에 협력하다니?”
“워워, 진정하시오. 그 워스덤의 연구 결과가 결국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으니.”
“그건 그렇군요. 워스덤이 알면 피를 토하며 후회할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워스덤이 잠시나마 인생을 즐기도록 놔두도록 합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르바 탑주는 워스덤을 그냥 놔둘 생각은 없었다.
워스덤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냥 놔두었다가는 분명 후환이 될 것이었다.
운 좋게 고대의 대마법에서 살아난다고 해도 따로 보낸 자들에 의해 죽을 것이었다.
워스덤에 대한 고르바 탑주의 생각을 방해한 건 어떤 마스터 매지션이었다.
“그런데 이 대마법을 제국 수도에 사용해도 되는 겁니까? 발동하면 수만 명은 가볍게 죽을지도 모르는데요. 어쩌면 수십 만명도.”
“아아, 정말 슬픈 일이겠군요. 다만 그런 희생은 각오해야지요. 마법사답게.”
“물론 제국의 황제를 놔두면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지 모른다고 하지만…”
“마법사답게 마법사를 위한 일입니다. 지금 와서 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위해 지금 사람을 죽인다니.
그것도 죽는 사람이 아니라 죽이는 사람이 각오해야 한다는 건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지만.
곧 죽어갈 사람들로서는 황제든 마법사든 어느 쪽이 더한 악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마법사들이 조용해진 모습에 고르바 탑주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마법사들답게 이해가 빠르군요. 말이 통하지 않은 워스덤과는 다르게 말이지요.”
일반인의 목숨보다는 마법에 관련된 지식에 신경 쓰는 게 마법사다.
그게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제대로 된 마법사의 자세인 것이다.
마법에 깊이 빠져들수록 더욱 그런 면이 부각 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제국 삼현자인 워스덤은 마법사들 중 이단인 셈이었다.
사람들의 희생을 두려워 고대의 대마법 의식에 참여할 기회를 저버렸으니까.
고르바 탑주가 마법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지팡이로부터 태양 광선 같은 푸른 빛이 기둥 형태로 뿜어져 나왔다.
찬란하게 빛나는 마법 지팡이는 최상급 마석으로 향했다.
이어 그 빛은 최상급 마석에서 들끓는 마나를 폭주시켰다.
다른 마법사들이 침을 삼키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고르바 탑주가 이 마나를 제어하는 데 실패하면.
고대의 대마법은 제국이 아니라 이 자리에 떨어질 것이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던 고르바 탑주가 지팡이를 높이 들어 마법을 발동했다.
“하늘에 떠도는 수많은 재앙이여, 지상으로 강림할지어다. 메-테-오-스-웜--!”
최상급 마석으로부터 하늘을 꿰뚫을 것 같은 빛무리가 쏟아 올랐다.
그 빛무리는 3개의 달을 휘감으며 밤하늘 사이로 사라졌다.
지켜보던 마법사들이 웅성거렸다.
“성공인가?”
“아니면 실패인가?”
마나를 쏟아 부은 고르바 탑주가 초췌한 표정이었지만 엄숙하게 말했다.
“고대의 대마법은 발동되었소.”
마법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소리쳤다.
“드디어!”
“으하하! 이 기세로 모든 마법을 부활시켜 어리석은 인간들을 깨닫게 만듭시다!”
“이 고대의 대마법이야 말로 마법사의 시대가 왔다는 걸 알리는 시발점이 될 것이오!”
한쪽 구석에서 일의 진행을 살피던 치료사는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점거했다.
마물의 숲에서 나타나 왕국, 그리고 이번에는 제국의 일마저 망친 그자.
“과연 김검천이라는 자는 이번에도 살아날 수 있을까요?”
별똥별의 폭우가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지상을 향해 날아갔다.
김검천이 있는 제국 수도 쪽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