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김검천은 떨어지는 유성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옆에 내려놓은 리에를 향해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괜찮니? 리에야.”
“죄송해요. 리에가 오자고 했어요. 그래야 무사했어요.”
리에가 작은 목소리로 김검천에게 사과했다.
파워드슈츠의 2차 인증 모드를 해제하던 김검천은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리에에게 조용한 말투로 속삭였다.
“그래서 모두가 무사했구나. 다만 다음번에는 뭔가 알면 모두에게 먼저 말해야 한다?”
“알았어요!”
단번에 기운을 차린 리에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쿠퍼의 품 속을 향해 뛰어들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쿠퍼를 먼저 선택한 것이다.
리에는 평상시보다도 더 크게 쿠퍼를 불렀다.
“아빠!”
쿠퍼의 얼굴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형태로 꿈틀거렸다.
리에가 자신을 아빠라고 부른 것에 기분 좋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런 리에의 친아빠가 아닌 것이 슬프기도 했다.
“리에야, 대화를 들어서 알겠지만 사실 난 네 친아빠가 아니었단다. 네 아버지는…”
리에가 힘있게 고개를 저었다.
쿠퍼가 입을 다물고 리에가 뭐라고 할지 집중했다.
“으응. 아빠는 아빠야. 리에도 그건 알아!”
쿠퍼의 두 눈에 슬쩍 눈물이 맺혔다.
실제로 갖은 고생을 다하며 여태까지 길러온 건 쿠퍼였다.
이제껏 자신이 고생한 건 아무래도 좋았다.
리에가 이렇게 자신을 아빠라고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래. 우리 리에는 귀여운 딸이지!”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던 쿠퍼가 리에의 얼굴에 얼굴을 문질렀다.
리에가 쿠퍼의 반들거리는 머리에 두 손을 탁탁 내려쳤다.
“아빠! 수염 따가워! 저리 가!”
“하하, 미안하구나. 수염은 바로 깎으마. 우리 리에가 말했는데 들어야지.”
쿠퍼가 내려놓자 그제야 리에는 세이야 옆에 가서 섰다.
쿠퍼가 세이야를 향해 으스대듯이 턱을 세웠다.
세이야가 그런 쿠퍼를 향해 말했다.
“뭔가 분하네요.”
“후후, 어떠냐. 세이야. 인연의 차이가 느껴지냐?”
“하지만 지금 리에는 제 옆에 있죠?”
둘의 다툼에 황태자도 가세했다.
“크흠, 이 몸도 같이 있어 줘야겠군. 리에의 후견인으로서 말이다.”
쿠퍼와 세이야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생각해보니 리에는 황태자의 조카.
같은 피가 흐르는 황태자로서는 리에의 후견인을 자처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리에는 예전에 황태자가 따르던 누나의 아이이기도 했고.
“저 3사람이면 리에에게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러면 끝을 내볼까.”
김검천은 이것으로 황제의 일을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미리내가 개입했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전체 음성 모드로 전환한 상태로.
[경고. 당장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이지? 미리내.”
[제국 수도를 향한 대규모 범위 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
평상시의 미리내라면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늘어난 탐색 범위에 잡힌 공격.
배틀 머신과 동기화한 미리내였기에 그만큼 탐색 범위가 늘어나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들려오는 미리내의 목소리에 황태자가 놀랐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미리내가 말한 내용이었고.
황태자가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지금 시기에 제국이 침공을 당해? 그런 징후를 보인 곳은 없었다!”
[공격 예정이라고 했지 침공당했다고는 안 했습니다. 원주민 씨.]
김검천이 고개를 들어 달을 올려다보았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별똥별들이 이곳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혹시 하늘에서부터의 공격이라는 건가?”
[최소 숄더 캐논부터 미사일 이상 위력을 가진 운석이 무수히 떨어질 예정입니다.]
“반가운 소식은 아니군. 그런 비를 막을만한 우산은 준비해 오지 않았으니까.”
루시엘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강대한 파괴력의 운석이 수도에 떨어진다는 게 정말입니까?”
[제 탐색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고대의 대마법, 메테오 스웜이 발동한 거군요. 당장 도망가야 합니다!”
상황을 짐작한 김검천이 루시엘을 향해 빠르게 물었다.
“수도라도 벗어나자는 건가?”
“그 마법이 발동한 이상 막을 길이 없습니다. 제국 수도는 이제 가망이 없습니다.”
“미리내. 예상 공격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지?”
[지금입니다. 초탄 명중.]
- 쿠왕!
부서진 성벽 너머로 불타는 운석이 황성 근처 고층 탑 하나를 박살 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직격당한 고층 탑의 꼭대기가 기울어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고층 탑은 그 충격으로 흔들거리다가 건물 자체가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수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황제가 배틀 머신의 양손에 붙들려 있었다.
김검천이 손을 들어 올리며 지시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너희들은 먼저 피하도록.”
김검천이 손 중앙에서 에너지가 압축되며 빛의 구슬이 만들어졌다.
빛의 구슬에서 방전된 빛의 불꽃이 주변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처음보다 약해진 황제에게 이 정도 공격이 직격한다면 모든 게 끝날 것이다.
황제는 죽을힘을 다해 배틀 머신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실드 입자포!”
- 쿠아앙!
그때 하늘에서 떨어지던 운석 하나가 황성을 직격하며 황성이 물결치듯이 흔들렸다.
황제가 디디고 있던 바닥마저도.
황제를 잡고 있던 배틀 머신의 움직임이 어긋나는 순간이었다.
“크아아악!”
황제에게는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황제는 안간힘을 다해 배틀 머신의 팔을 밀어 날아드는 실드 입자포를 피하려 들었다.
- 피잉, 쾅!
실드 입자포는 그대로 황제의 오른팔을 잡아먹으며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날려 버렸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죽었을 상처였지만 강화된 육체의 황제는 아직 움직일 수 있었다.
황제는 연회장 안으로 몸을 날려 설치되어 있던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마나를 불어넣었다.
김검천은 황제를 끝내기 위해 공격을 하려다가 무슨 이유인지 잠시 손을 멈추었다.
의자가 놓여 있던 주변을 포함한 바닥에서부터 마법진이 발동하며 빛이 났다.
죽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지만 그런 것 치고는 힘이 넘치는 황제가 이를 갈았다.
“짐은 반드시 돌아오겠다! 모든 힘을 기울여 너희들을 죽이기 위해!”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발동한 마법에 의해 모습을 감추었다.
김검천이 고개를 흔들었다.
“황태자가 나타날 때도 그렇고 이 성에는 비밀 통로가 많기도 하군.”
그 말에 황태자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몰라서 미안하다.”
“뭐가?”
“방금 그 비밀 통로는 황제만 알고 있던 장소였던 모양이다.”
“아, 그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어찌 신경을 안 쓸 수 있다는 말인가? 황제가 탈출했으니 말한대로 반드시 보복할 텐데.”
황태자의 걱정스러운 말에 쿠퍼가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지막에 공격을 안 하신 걸로 보였습니다만…. 혹시 제가 잘못 보았다면 죄송합니다.”
“과연 쿠퍼군. 네 말대로였다.”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별거 아니야.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거든.”
쿠퍼뿐만 아니라 황태자 또한 입이 벌어질 만한 발언이었다.
“황제에게 기회를요? 아무리 관대하셔도 그렇지 저런 인간 아닌 인간에게 기회라니요.”
“세상에는 용서할 수 있는 자와 용서 못 할 자로 나눠. 황제는 절대로 용서 못 할 부류고.”
김검천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한 사람은 변경백이다. 황제가 아니야.”
황태자와 쿠퍼의 고개가 같이 갸우뚱했다.
둘 다 의문이었지만 쿠퍼가 먼저 질문을 했다.
“변경백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변경백은 자기 영지에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는 계속 여기서 우리와 같이 황제와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습은 안 보였는데 어찌 이 자리에…. 아, 마법 도구로 몸을 숨기고 있었나 보군요.”
김검천도 미리내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변경백을 놓칠 정도로 은밀하게 숨어있었다.
만약 김검천이 지는 상황이라면 변경백 혼자 황제를 암습하기라도 했을지 몰랐다.
김검천은 황제가 사라진 곳을 보며 대답했다.
“황제가 도망치기 위해 마법을 발동했을 때 변경백도 같이 마법에 휘말렸더군.”
“아, 그래서 공격을 멈추셨던 겁니까?”
“그대로 공격했으면 변경백도 죽었을 테니까.”
이런 자리까지 나타난 변경백이 황제를 따라간 이유는 뻔했다.
복수.
변경백이 처음 김검천을 이용하려고 든 건 아들의 원한 때문이었다.
중간에 권력에 대한 탐욕에 잠시 다른 생각이 들었고.
하지만 그는 결국 권력보다는 복수를 택한 모양이었다.
김검천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황제는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게 되었군. 이제껏 자신이 해왔던 일들에 대해서.”
***
“허억, 허억, 허억.”
중상을 입은 황제는 방금이라도 죽을 듯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거야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고 배에 구멍이 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이 상태로 살아있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황제가 능력으로 자신을 강화한 덕분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황제가 불사신은 아니었으니 부작용은 어쩔 수 없었다.
파워드슈츠를 장착한 김검천보다 더 컸던 몸집은 본래의 절반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있지 않아 정말로 죽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황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라고 해도 그는 김검천의 손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후후, 차라리 놈이 따라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 비밀 통로에는 추적자를 떨쳐내기 위한 마법이 함정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황성의 대부분을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
심지어 황제가 죽으면 발동하는 마법 장치이기도 했다.
설사 황제가 누군가에게 죽더라도 혼자 죽을 일은 없었다.
겨우 일어선 황제가 비틀거렸다.
“예비용 혈석이 아직 비밀 장소에 남아 있다. 그걸로 잠시 동안만 버티면 된다.”
황제를 위한 혈석의 연구 결과는 블러드 타워가 아닌 다른 곳에 남아 있었다.
급한 대로 제국 마법사들에게 혈석을 만들라고 시키면 된다.
혈석의 재료 같은 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리 좋은 재료는 아니더라도.
블러드 타워도 다시 만들면 된다.
이미 만든 경험이 있으니 다음번에는 더 빨리, 더 나은 타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후후후, 무엇보다 봉인을 해제한 짐은 이 정도 상처로는 죽지 않지. 그거면 충분해.”
숨을 헐떡이며 걸어가던 황제는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옆에 있는 공간이 물결처럼 흔들리는 모습이.
황제가 중얼거렸다.
“이런 게 비밀 통로에 설치되어 있었던 건가?”
잠시 거기에 정신이 팔렸던 황제는 갑자기 가슴에서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크헉….”
황제의 발밑으로 미끄럽고 진득한 액체가 떨어져 내렸다.
황제는 떨리는 손으로 심장 부위를 쓰다듬었다.
그곳에는 날카로운 마법 단검 하나가 박혀 있었다.
리에가 황제의 약점이라고 하던 곳이었다.
“이…. 이건 도대체?”
“기회를 준 김검천에게 초월 존재의 축복이 깃들기를. 드디어 이때가 왔군요. 황제 폐하.”
투명 마법이 봉인된 반지를 조작해 은신을 푼 변경백이 황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이 어떻게 이 자리에?”
“이거 섭섭합니다. 김검천과 싸우는 현장에 줄곧 같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아, 마법 도구로 몸을 숨기고 있어서 못 보셨나 봅니다.”
방금 전 심장 부위를 찔린 단검도 마법이 걸려 있던 모양이었다.
완전히 전투 능력을 상실한 황제는 필사적으로 변경백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무슨 짓이냐? 짐은 널 살려주었다! 그런데도 이런 무도한 짓을 저지르다니?”
“아아, 그랬지요. 황제 폐하께서는 저를 살려주셨지요. 대신 아들을 죽이셨고요.”
“고작해야 아들 한 명을 죽인 것으로 짐에게 원한을 품은 것이더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들을 잃은 변경백이 반란을 일으키는 걸 기다렸던 황제였다.
지금은 변경백이 자신에 대한 원한을 제발 잊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변경백이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말씀대로 아들이야 또 낳아 키우면 그만이지요. 아들이 죽은 것도 죽을만해서 죽었고요.”
“그러니 모든 걸 떨치고 짐을 도우면 너를 후작, 아니 공작으로 삼고 큰 상을 내리겠노라!”
황제는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자신의 가슴에 단검을 박아 넣은 변경백이 상대라 할지라도.
이 순간만 벗어나면 생각이 바뀔지는 모를 일이지만.
변경백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런데 변경의 어떤 백작과는 달리 한 아들의 아버지는 다른 게 더 욕심나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더냐. 안 된다. 짐이 죽으면 너도 죽는다!”
“심장이 찔리셨으니 이미 늦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겁니까?”
“짐은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을 위해서라도! 네 녀석은 죽는 게 두렵지도 않은가!”
“물론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오붓하게 복수를 할 시간이 생겼지 않습니까?”
변경백은 다른 단검 하나를 또 빼 들었다.
베기 보다는 뭔가를 써는 게 더 나아 보이는 단검을.
그리고는 차갑게 웃었다.
“그러니 죽어서도 곁에서 같이 어울려 드리지요. 영원히.”
죽은 후에도 그 뒤를 같이 할 수 있는 관계가 꼭 아름다운 형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변경백이 단검을 들고 황제를 향해 걸어갔다.
천천히 다가오는 단검의 칼날이 황제의 눈동자에 비쳤다.
“짐은 싫도다!”
“소신은 아주 좋습니다. 황제 폐하.”
곧이어 황제의 비명 소리가 비밀 통로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황제의 죽음을 확신한 김검천 일행은 이제 다른 문제가 더 신경 쓰였다.
- 슈우웅, 쾅!
황성이 다시 흔들렸다.
하늘에서 하나둘 운석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메테오 스웜, 수도에 작렬하고 있는 운석의 비로부터 살아남아야 할 차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