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김검천은 다른 사람에 앞서 리에를 바라보았다.
리에는 울거나 두려운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다만 저절로 몸을 떠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무사할 거라고 아는 것과 다르게 지금 상황이 무서운 것이다.
아직 어린아이였으니 이렇게 참고 있는 것만 해도 훌륭했다.
김검천은 리에를 살짝 끌어안아 주었다.
“리에는 대단한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기에 다들 모이게 했구나.”
“그럼여!”
“잘했구나. 우리가 떨어져 있었다면 분명 위험했겠는데.”
“엣헴, 리에는 알고 있었어요. 착한 아이니까요.”
칭찬을 받아서 그런지 리에가 잠시 두려움을 잊은 듯이 보였다.
김검천에게 칭찬받는 리에를 보며 쿠퍼가 코밑을 쓱 훑었다.
“역시 우리 리에야. 아빠로서 보람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하네.”
황태자가 슬쩍 끼어들었다.
“리에의 외삼촌으로서도 기쁘기 짝이 없는 일이군.”
쿠퍼는 나직이 코웃음을 쳤다.
상대가 황태자라고 해도 세상에는 양보할 수 없는 게 존재하는 법이었다.
“아빠와 외삼촌의 차이는 따라올 수 없는 간격이 있답니다. 황. 태. 자. 전. 하.”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는가. 본인은 리에와는 같은 피를 나눈 몸인 것이야.”
황태자는 잠시 고민했다.
호칭은 외삼촌이 맞지만 어감은 작은 아빠가 더 나았으니까.
황태자의 작은 고민을 무시하며 세이야가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거 잘 아시지요?”
쿠퍼와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글쎄 말이다. 먼저 시작한 건 저분이라고?”
“쿠퍼, 본인을 남처럼 말하면 곤란하지 않나. 리에가 듣고 오해라도 하면 곤란하다.”
세이야가 딱 잘라 말했다.
“두 분, 이런 난리 속에서도 서로 사이좋은 건 보기 좋지만 그만 하세요.”
리에도 세이야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리에를 본 쿠퍼와 황태자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나중에 두고 볼까요? 황태자 전하.”
“그때는 리에의 의견도 꼭 듣고 싶군.”
- 슈우웅, 쾅!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옆에서 부서진 운석 하나가 다시 떨어져 폭발했다.
운이 좋은 게 아니었다.
황성에 직격하지 않은 이유는 자율 전투 모드 중인 배틀 머신이 방어를 하고 있어서였다.
물론 배틀 머신 하나로는 모두 막아낼 수 없었기에 가끔 놓치는 것도 있었지만.
부서진 건물이 붕괴하며 붉게 타오르는 와중인데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여기서 약세를 보이면 리에에 대한 우선순위가 낮아지기라도 하듯이.
그들의 대치 상황은 김검천이 나선 후에야 겨우 풀렸다.
“그건 두 사람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 나중에 리에에게 물어보도록. 일단 대기하고.”
쿠퍼가 물었다.
“대피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상황을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공격 범위가 더 넓고 파괴력이 강해. 그리고….”
김검천이 리에를 바라보았다.
리에는 세이야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중이었다.
“리에가 모두를 여기에 모은 이유도 있고. 여기 있으면 아무도 죽지 않는다고 했지.”
“김검천님의 생각도 그러십니까?”
“리에의 말뿐만 아니라 내가 보기에도 너희들이 여기에 있는 것이 나아.”
“그 말씀은? 황성이 수도 건물 중 가장 튼튼하다고 해서 저걸 막을 정도는 아닙니다.”
김검천이 무너진 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수도로 떨어지고 있는 별똥별의 소나기, 유성우는 전혀 멈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점점 위력과 운석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멸망이라도 맞이하는 기분일 것이다.
“내가 저 파멸의 비로부터 모두를 보호하기에는 수도에서는 이만한 곳이 없다는 거야.”
“그건 그만큼 김검천님이 위험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나름대로 여러 가지 힘든 상황을 겪어온 쿠퍼도 지금 같은 일은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별을 상대로는 사람의 저항 같은 건 아무 의미 없어 보였다.
김검천이 쿠퍼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보다 내가 없는 사이 네가 다른 사람들을 책임져 주었으면 하는군. 쿠퍼.”
- 쾅쾅!
배틀 머신이 황성으로 날아오는 운석을 몸으로 막는 게 쿠퍼의 눈에 들어왔다.
배틀 머신의 무기 시스템으로는 이 근처를 방어하는 것도 거의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 끼이이익…. 쿵.
배틀 머신이 무릎을 꿇었다.
전투 기능이 대부분 상실된 듯한 모습.
쿠퍼는 더이상 자신이 시간을 끌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 김검천이 아니라면 누구를 믿는다는 말인가.
“알겠습니다. 이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뒷 일을 부탁한다.”
쿠퍼는 부서진 성벽을 통해 허공으로 떠오르는 김검천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김검천님을 믿고 돌아오시기 전까지 무사히 버틸 일만 남았군. 다들 이쪽으로!”
***
김검천은 반중력 장치를 이용해 공중에 떠 황성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수도의 하늘로부터는 운석만 떨어지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높이 떠오를수록 수도가 박살 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위력이 놀랍긴 하군. 메테오 스웜은.”
[아직도 마법이 시전 중일 걸 보면 거의 핵융합 미사일에 가까운 위력으로 보입니다.]
“고대의 대마법이라고 해도 이런 피해를 입히다니. 마법이라는 이렇게 위험한 거였나?”
[루시엘의 반응으로 보아 일반적인 마법은 아니겠지만요.]
“그건 이런 일을 벌일 능력을 가진 자가 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말도 되겠군.”
[얻은 정보에 따르면 마법사들 중에서도 마스터 매지션 이상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동의해. 이 사태의 장본인은 나중에 찾아가 따지도록 할까? 할 일이 끝난 후에.”
지금 수도에 떨어지는 운석의 비는 잠시 멈춘 상태였다.
마치 폭풍의 눈 속에 들어서기라도 한 듯한 적막함이었다.
이 틈을 이용해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하는 게 현명해 보였다.
“미리내. 주변에서 생체 신호가 느껴지는 장소를 확대해줘.”
[배틀 머신 시스템 연계. 신호 강화. 13D 홀로그램 투영.]
배틀 머신의 탐색 장치는 다행히 멀쩡했다.
전투 기능은 거의 망가졌지만.
미리내는 배틀 머신의 기능을 끌어와 김검천의 요구를 따랐다.
어차피 부서진 상태니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든지 말든지 최대한 가동한 채로.
김검천의 눈 앞으로 수십, 수백을 넘어가는 작은 사람들 모양이 떠올랐다.
주변 장소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김검천이 있는 장소에서 눈으로 사람들을 보면 거의 점으로 보일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이렇게 본다면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들의 표정마저도 확인할 수 있었다.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말소리였다.
이해 할 수 없는 소리는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김검천이 다시 말했다.
“미리내, 근처에 있는 사람을 선택, 필요한 대화 부분만 들려줘.”
[선택적 음 소거. 음성 재생.]
그제야 김검천의 귀에도 소음이 아니라 의미 있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선별해도 들려오는 소리는 많았다.
김검천은 그것들 중에서도 다시 필요한 것만 듣기로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얼굴과 몸에 피가 잔뜩 튀었어!”
“친구야, 너 붉은 눈이었는데 원래대로 돌아왔어!”
“도시가 왜 이렇게 된 거야?”
“제국이 공격이라도 당한 건가!”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가 싸워서 이렇게 된 걸 거야.”
“재해가 일어난다고 했는데 이런 식의 재난이 벌어지다니!”
“물건 팔고 있었는데 왜 여기에 있는지 기억이? 아, 손님, 어딜 가요. 물건 사셔야죠!”
“도대체 우리는 뭘 해야 하는 거야?”
“기사님! 여기 부디 명령을!”
“누구든 좋으니 우리에게 지금 상황에서 할 일을 알려 주거나 명령해 주었으면….”
보아하니 사람들은 현재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가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황제의 능력에 당해 도시를 배회하고 있었으니 더욱 그럴 것이고.
김검천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들 정신이 든 걸 보니 확실히 황제가 죽은 모양이군. 죽기 일보 직전이거나.”
변경백이 마침내 자기 손으로 꿈을 이룬 것이다.
그 꿈을 이루어 준 누군가에게는 악몽이었겠지만.
김검천은 적당한 위치까지 떠오르자 미리내를 불렀다.
“미리내. 에너지 잔량은?”
[75%가량 남았습니다.]
“역시 에너지를 절약하는 건 좋은 습관이네.”
[황제가 생각보다 약한 상대였던 게 다행이기도 하고요.]
“이 정도면 다시 한번 문장을 개방해도 문제없겠지. 미리내. 지금부터 운석을 요격한다.”
[알겠습니다. 김검천 함장님. 황성 부근 운석 낙하지점 모든 경로 확인.]
“아니, 수도 전역을 대상으로 해봐. 황성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미리내는 잠시 대답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황성을 중심으로 요격 범위를 설정.]
미리내는 황성을 중심으로 수도를 10단계 범위로 나눠진 원을 만들어 공중에 띄웠다.
김검천이 살펴보다가 수도의 성벽 부근부터 황성까지 손가락을 그었다.
“무리라는 건 나도 알아. 수도 전부를 방어하는 건 힘들어. 그래서 대답을 안 한 거지?”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함선 미르라면 모를까 이 파워드 슈츠 화력으로는 무리입니다.]
김검천이 떠오른 황성 주위로 선을 그었다.
“그래도 무리하면 이 정도까지는 가능하겠지.”
[3단계 범위까지입니까. 그렇다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다만 추천 드리지는 않습니다.]
“너는 2단계 범위까지 무리 없다고 보는 거겠지?”
[심지어 황성에 있는 일행만 보호한다면 1단계 범위만 방어하면 되니까요.]
“쉬운 길로만 가면 시시하잖아. 내가 이 정도도 못할 사람 같아?”
[저에게는 솔직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이시는 거겠지요.]
김검천이 지상을 내려다보며 슬쩍 웃었다.
“굳이 날 희생할 생각은 없지만 힘이 닿는다면 못 할 것도 없다는 거지.”
[저도 김검천 함장님에게 문제만 없다면 무엇을 하시든지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이제는 지구연합우주방위군 규범이나 행성법 이야기도 안 하는 거야?”
[적어도 지금은요.]
“그러면 미리내, 날 도와줘.”
[명령만 내리십시오.]
“수도 전역에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크게.”
[음성 증폭. 언제든지 말하시면 됩니다.]
김검천이 숨을 고르며 깊게 호흡을 하더니 있는 힘껏 고함쳤다.
“현재 수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내 목소리를 들어!”
김검천의 외침은 한순간이라지만 수도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를 눌러버렸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볼 정도로.
김검천은 짧게 말했다.
“난 이번 무술대회의 우승자, 김검천이라고 한다. 모두 살고 싶다면 황성으로 와라!”
평상시라면 무슨 알 수도 없는 말이라고 무시할 만한 소리.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사람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움직일 만한 이유를 가진 자들도 있었고.
김검천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김검천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몸이야.”
그렇게 움직이는 무리 중에서는 수도의 외곽, 빈민촌에 살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숫자는 적은 편이 아니었다.
“저 사람 덕에 우리가 원수를 갚을 수 있었지. 가자!”
방어 마법으로 겨우 살아남은 마법사들도 이동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황성은 수도에서 가장 방어력이 높은 건물, 살 가능성이 높지.”
강화된 육체로 죽지 않은 기사들도 다른 사람들을 부축해가며 이동했다.
“우승자라고? 사천왕도 이긴 자를 제치고 이긴 강자의 말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괜히 마음이 동했다.
“일단 우리도 따라갈까?”
“남들이 가니까 우리도 가보자.”
“남들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 같으니 문제없겠지.”
사람들, 특히 일반인들이 이렇게 움직이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비상 상황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황제가 죽어 이성을 되찾았다고 하나 누군가에게 조종당한 여파가 남아 있는 것이다.
[김검천 함장님,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미리내의 보고에 김검천이 잠시 콜록거렸다.
“너무 소리쳤나? 소리를 지르고 싶지 않았는데. 목소리도 좀 달라진 것 같고.”
[아닙니다. 김검천 함장님의 목소리는 지금도 듣기 좋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마운데? 미리내, 1차 인증 개방!”
[에너지 과부하. 1차 인증 계수 한계 도달.]
김검천이 빛나기 시작하는 손을 들어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2차 인증 모드 개방. 에너지 풀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