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시작이 어렵지 그 뒤를 따르는 건 생각보다 쉬운 법.
한 사람이 시범을 보이자 그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무릎을 꿇었다.
물론 그들 중에서는 갑작스러운 미리내의 등장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의문을 가질 정도로 냉철한 이성과 판단력을 가졌다면.
한순간에 사람들의 다툼을 끝낸 광경을 보고 그 입을 무겁게 다무는 걸 선택할 것이다.
미리내가 빛이 일렁거리는 손가락을 뻗어 황성을 가리켰다.
그 상태로 전체 통신 모드를 켠 미리내가 대화를 시도했다.
[원주민들이여. 당신들에게 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황성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세요.]
김검천이 원주민이라는 단어에 잠시 흠칫했다.
둘의 입장에서는 틀린 단어는 아닌데 이런 상황에서 듣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다행히 원주민이라고 불린 사람들은 신경 안 쓰는 듯했다.
하긴 지금 초월 존재로부터 계시가 떨어졌는데 원주민이라고 불린 게 중요하겠는가.
“다들 들었습니까! 초월 존재께서! 위대하신 존재가 우리에게 복된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전 예전부터 황성에 가고 싶었습니다!”
“우와와! 모두 빨리 황성으로!”
“초월 존재께서 날 보셨어!”
“아냐! 날 보신 거야!”
“황성, 황성!”
방금 전만 해도 죽어라 살아라 하는 걸로 다투던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 황성으로 향했다.
저렇게 안간힘을 다해 움직이면 황성까지는 몰라도 3단계 범위 내로는 곧 진입할 것이다.
이들은 실제로 초월 존재가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늘에서 장엄한 음악과 함께 산처럼 큰 인간을 초월한 미모를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 직접 말을 걸었다.
자신의 말에 따르면 살 수 있다는 듯이.
그랬으니 원주민이든 사람이든 미리내의 입에서 나온 단어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안 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희망이 생긴 게 중요한 것이다.
하늘에서 운석이 그들 머리 위로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10배에 가까운 유성우를 막아내야 했다.
[마지막 유성우. 방어 라인에 접근 중. 천뢰 발동.]
- 쾅쾅쾅!
하늘에서 다시 폭음과 함께 천뢰가 기동했다.
얼핏 보면 천뢰의 위력에 메테오 스웜이라는 고대의 대마법이 통하지 않는 상태.
하지만 천뢰는 실탄 무기.
보유하고 있는 무기 잔량을 모두 쓰면 그저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김검천 또한 준비 중이었지 않았는가.
[천뢰. 잔량 경고. 앞으로 30, 29, 28….]
“파워드슈츠는?”
[에너지 풀차지에 의한 파워드슈츠 각 파츠 임계점 돌입. 각 기능 전력 전개 가능.]
김검천이 가슴을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라면 작고 아름답게 빛나 홀린 듯이 바라보았던 별들의 무리.
지금은 전신에 화염을 두른 채 지상을 향해 점점 덩치를 불려 나가고 있었다.
김검천이 서서히 하늘을 상승하며 입을 열었다.
“기동 개시.”
[에너지 풀차지 완료. 다음 단계 이행.]
- 기이잉. 철컹, 철컹.
파워드슈츠의 장갑이 동물의 가시처럼 일어났다 다시 가라앉았다.
그 위를 은색 광채가 새어 나와 틈 하나 없이 메꾸었다.
파워드슈츠는 그렇게 전체적인 장갑의 모습이 미끈한 비늘처럼 변해갔다.
“미리내. 내가 막아야 하는 범위에 떨어지는 모든 운석 예상 경로를.”
[경로 도출.]
김검천이 중얼거렸다.
“다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 그러니 부서진 운석 파편까지는 놔둬.”
[생명에 지장 없는 수준의 크기까지입니까.]
“맞아서 상처가 나는 것으로 끝날 정도로 작아진 운석은 힘이 남으면 처리할 거야.”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홀로그램을 중단해 에너지 소모를 최대한 막겠습니다.]
“아니, 그냥 놔둬.”
[하지만 에너지 소모가….]
“지금 네 모습이 사라지면 황성으로 오고 있는 사람들이 다시 혼란을 일으킬지 몰라.”
이제는 김검천이 사람들에게 따로 개입할 시간이 없었다.
범위를 줄였다고 해도 수십만 명이 사는 수도의 크기였다.
그 일부를 김검천 혼자서 맡아 방어해야 했으니 다른데 신경 안 쓰는 게 도와주는 것이다.
[시간을 에너지를 소모함으로써 대신 사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시간은 금이라잖아. 소모될 에너지로 시간을 살 수 있으면 남는 거야. 특히 이럴 때면.”
[…지속적인 에너지 소모를 최대한 줄여보도록 하겠습니다.]
“해상도를 낮추는 정도로 참아 볼래?”
[제 미모는 그런 정도로 막을 수 없습니다.]
김검천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순간에 말을 받아친 미리내가 왠지 인간처럼 느껴진 것이다.
천뢰가 운석을 요격하는 소리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 콰…쾅.
[천뢰 곧 기동을 중지합니다.]
그건 이제 실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에 맞춰 김검천의 얼굴을 중심으로 전면에 실드가 하나씩 생겨났다.
김검천의 파워드슈츠가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김검천이 손에는 큐브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곧 운석과 마주치기 일보 직전.
마침내 가슴의 에너지 반응로가 빛을 발했다.
“초음속 가속.”
[초음속 가속.]
- 펑. 쾅!
약식 에너지 큐브를 운석을 향해 날린 후 김검천이 움직인다 싶었다.
근처에 있던 운석 하나가 터져나간 뒤에야 폭발음이 들려왔다.
소닉붐.
소리의 벽을 통과하는 순간 충격파가 충돌하면 생기는 폭발음.
그걸 시속 1,225킬로미터, 음속을 넘어선 김검천이 만들어 낸 것이다.
약식 반입자 큐브에 맞아 박살 난 운석은 충격파에 휩쓸려 완전히 기세가 죽었다.
음속을 돌파하며 생긴 충격파를 일종의 무기처럼 사용한 것이다.
김검천은 반중력장치를 이용해 굉음과 저항을 줄일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도 에너지가 소모되었으니까.
김검천도 그만큼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마저 이용할 정도로 상황은 급했다.
그만큼 수도로 떨어지는 운석은 많은 것이다.
김검천이 양손으로 계속 약식 반입자 큐브를 생성하며 날려 보내도 손이 모자랄 정도로.
주변의 운석 파편을 충격파로 마저 밀어내던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미리내. 경로.”
[초음속 기동에 의한 경로 재계산. 더 가속합니까?]
김검천은 몸에 걸리는 중력의 압박을 느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음속을 넘어선 속도에서도 미리내와 대화가 가능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가끔은 이렇게 몸을 써줘야 뼈가 튼튼해지거든.”
[그렇다면 차라리 우유를 추천드립니다.]
“귀환하면 생각해보도록 하지. 더욱, 보다 빠르게! 부스터!”
[부스터 온.]
- 쿠아아앙--!
파워드슈츠로부터 불꽃이 점화되었다.
이미 소리보다 더 빠르게 날고 있던 김검천은 거기서 더욱 속도를 늘렸다.
실드 입자포부터 약식 반입자 큐브까지 정신없이 무기를 난사하던 김검천이었다.
이번에는 눈앞에 떨어지는 운석을 향해 팔을 뻗었다.
- 푸식….
[무기 과다 사용으로 재사용 대기시간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3….]
3초면 짧은 시간이었다.
눈앞의 운석 하나만 놓치면 될 정도의 시간.
사람보다 약간 큰 운석 하나 정도는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김검천은 유혹에 넘어가는 대신 다른 걸 선택했다.
“무기가 없다면 내 자신이 무기가 되겠다! 초음속 윙실드!”
[실드 중첩. 가속합니다.]
여러 겹의 실드를 전면에 두른 채 김검천은 운석의 옆구리에 그대로 부딪혔다.
- 쿠와왕!
운석이 조각난 몸을 허공에 뿌렸다.
김검천은 멈추지 않고 다음 목표를 향해 날아들다가 입안을 핥았다.
혀에서부터 비릿하며 어딘가 금속의 맛이 느껴졌다.
김검천은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맛보는 피 맛이군.”
[맛을 보실 정도로 맛있습니까?]
“아니, 절대로 추천 못 해주겠는데. 그래서 이제 남은 운석은?”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미리내.”
[김검천 함장님이 맡으신 범위 내에 떨어진 운석은 모두 막아내셨다 이 말입니다.]
“내가 다 막았다고? 다 막았다니!”
[생체 신호 이상. 안정을 요함. 2차 인증 모드 강제 종료.]
파워드슈츠의 외부 장갑을 덮고 있던 액체 금속이 내부 장갑 속으로 스며 들어갔다.
- 푸싱. 치익. 철컹.
이어 관절 부위가 열어 뜨거운 하얀 증기를 계속 뿜어냈다.
김검천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그대로 증발할 정도의 열기와 함께.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김검천에게 닿기도 전에 증발해 한 가닥의 수증기로 화했다.
어느 정도 열기가 가시자 외부 장갑이 다시 결합해 은색의 액체 금속이 틈새를 메웠다.
“겨울이 오려면 아직 먼 모양인데 이런 시기에 무슨 눈이지?”
[에너지 잔량 5% 이하. 그런 건 먼저 안전한 장소로 이동 후 생각하시기를.]
“하하, 이거 잘못했으면 운석에 맞아 죽는 게 아니라 공중에서 추락해서 죽을 뻔했겠어.”
황성으로 돌아온 김검천을 향해 일행들이 달려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쿠퍼가 가장 처음 달려와 입을 열었다.
“김검천님. 말씀하신 대로 다들 무사하게 지켰습니다.”
세이야가 뒤를 이었다.
“역시 김검천님이세요. 믿고 있었다고요.”
루시엘이 차분하게 말했다.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서 다행입니다.”
샤칸이 크게 웃었다.
“으하하! 황제의 목을 직접 못 따서 아쉽지만 최고의 밤이었다!”
황태자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로 다 끝이 난 건가. 고맙다. 김검천.”
리에가 마지막이었다.
“리에, 졸려요. 이제 집에 가요!”
김검천이 일행들을 둘러 보며 대답했다.
“나도 동의해. 힘든 밤이었으니 모두 돌아가서 일단 쉬자고.”
“여기서 쉬는 건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황성보다야 익숙한 황태자의 저택에서 쉬는 게 마음이 편하겠지.”
“하긴 몸은 좀 피곤할 테지만 마음 편하게 쉬는 게 더 중요하지요.”
이 난리 속에서 황태자의 저택이 멀쩡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운석을 막았으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동하는 길에 김검천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뭔가 잊어버린 거 같지 않나?”
황태자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모두 이 자리에 있는데 잊어버릴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막 황성을 벗어나려고 출구를 나서는데 어딘가 눈에 익숙한 마차 하나가 보였다.
그 곁에서 집사가 홀로 마차를 지키고 있었다.
어딘가 외로운 표정으로.
모두가 나타나자 집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맞이했다.
“황태자 전하, 돌아오셨군요. 지금까지 저를 잊어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황태자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 하. 설마 집사를 잊어버렸겠는가?”
황태자는 어색하게 대답했지만 집사는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넘어갔다.
샤칸이 눈치 없이 말했다.
“아, 저 친구는 언제 왔었나? 일 다 끝났는데.”
루시엘이 그런 샤칸의 옆구리를 찔렀다.
샤칸이 투덜거렸다.
“왜 그래?”
“눈치라는 게 없습니까? 당신은.”
“흥, 그런 게 이 샤칸님에게 있을 거 같으냐!”
“그런 걸로 자랑스러워하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황성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황태자가 나서 피해를 입지 않은 장소로 이동시켰다.
아직 살아남은 제국 기사들과 제국군도 섞여 있었기에 그리 큰 소란은 없었다.
황태자의 말이 잘 통한 것에는 미리내가 나타난 여파도 있었다.
이런 난리 속에서도 자신들이 무사한 건 그녀의 가호가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황태자는 그녀의 가호를 받은 새로운 제국의 지배자였고.
당장 해야할 일에 대해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린 황태자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제야 다들 황성을 벗어나 황태자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참이었다.
마차에 올라탄 황태자가 점차 멀어지는 황성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긋지긋한 곳이야. 가능하면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
- 쾅쾅!
황성의 중심부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황성은 그대로 폭삭 주저앉았다.
황제가 죽은 후 걸려 있던 폭발 마법이 뒤늦게 작동한 것이다.
김검천이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너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아무리 그래도 성 자체를 날리다니.”
“우연이라고!”
“정말?”
“….우연이겠지?”
김검천을 비롯해 사람들이 황성이었던 잔해를 바라보았다.
황태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드디어 다 끝난 건가.”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서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죽어서 가장 큰 무덤에 묻히게 되었군.”
그렇게 김검천이 해야 할 일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어떤 마법사들이 전언을 전하러 제국 수도로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