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마법사들이 제국을 방문해 수도로 향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난리 속에 죽은 사람은 거의 없다지만 모두가 무사한 건 아니었다.
높은 곳에 있는 자일수록 그에 따른 권한과 책임은 무거웠다.
황제가 죽은 지금 황태자는 제1 황위 계승자.
제국의 그 누구보다 고귀한 몸답게 짊어져야 할 의무도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황태자는 정신없이 바빴다.
몸이 9개라도 모자를 정도로.
저택에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그날 오전 다시 현장으로 복귀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황태자 전하! 지시를!”
“황태자 전하! 이건 어떻게 할까요?”
“황태자 전하! 물자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듯한 모습들.
이러다가는 밥도 떠먹여 줘야 삼킬 모양새였다.
처음에는 냉정하게 대응하던 황태자가 마침내 폭발했다.
“에잇! 그런 것까지 하나씩 다 명령해줘야 한다는 말이더냐! 다른 관리들은 뭐하는 게냐?”
사람들은 황태자의 외침에 움찔했다.
이미 황태자의 지시를 받기 위해 모여 있던 사람만.
다른 사람들이 다시 달려오더니 황태자에게 요청했다.
“황태자 전하! 수도의 황성이나 다른 건물 잔해를 처리하고 복구할 인력이 부족합니다!”
“황태자 전하! 이번에 나타난 초월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황태자 전하! 다친 사람들에 대한 의료 지원을!”
아기 새들에게 쉴 새 없이 먹이를 주는 부모 새들이라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황태자가 머리를 짚었다.
할 건 많았고 가진 시간은 적었다.
황태자도 이런 상황을 아예 예상 못한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인 만큼 실무를 담당하는 제국의 하급 관리들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문제는 윗선의 허락이 있어야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물품을 처리한다면 어떤 의미로 했든지 간에 그건 횡령 아닌가.
죽은 사람들 중에서는 하급 관리들을 담당하는 중, 상급 관리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
그들이 사라진 만큼 결재를 해줄 누군가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게 바로 황태자였고.
이건 최종 승인권자가 황태자였기에 일어나는 문제일 뿐.
옆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동행했던 김검천이 황태자의 어깨를 짚었다.
황태자가 위로해 주는 줄 알고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김검천…”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김검천! 너마저!”
“아, 지켜보니 내가 없어도 네가 여기서 위험할 일은 없겠던걸. 난 다른 곳으로 가보지.”
“아아아, 안 돼--!”
“돼!”
김검천은 황태자를 떠나 근처 현장을 도와주러 나섰다.
황태자 옆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훨씬 생산적인 일이다.
일의 끝이 안 보이는 황태자는 서류를 친구 삼아 고독함을 달래야만 했다.
***
그날 밤, 고독했던 황태자는 밤하늘에 떠오른 별을 보면서 겨우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택에서 느긋하게 집사의 시중을 받고 있던 김검천이 상냥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왔어? 난 일이 빨리 끝나 일찍 돌아왔는데. 넌 당장이라도 쓰러질 거 같은 표정이네.”
“오늘 진짜 힘들었거든?”
황태자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깊숙이 뉘며 다시 한마디 했다.
“이제 별 보는 건 지긋지긋하다고.”
“난 널 위해 별도 직접 따다 주었는데?”
“…그러게. 떨어지던 별을 몸으로 쳐내던 사람은 네가 인류 최초일 거다. 아, 고맙군.”
황태자는 집사가 가져온 뜨겁고 달콤한 음료를 들이마셨다.
지친 몸에 활기가 돌아왔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 황태자가 몸을 눞혔다.
“크흐, 이 맛에 사는 거지.”
“아저씨 같잖아.”
“이 나이면 아저씨야.”
“그냥 아저씨가 아니라 잘생긴 아저씨지.”
“크흠, 리에 따라 하지 말라고. 그래서 우리 귀여운 리에는?”
“늦었잖아. 벌써 자고 있지.”
“좀 더 빨리 올 걸 그랬군.”
“이 제국에 널 말릴 자가 누가 있다고 그런 소리를. 넌 역시 황제와는 다르군.”
예전 황제 같으면 이런 일들은 아래 것들에게 맡기며 자기 일이나 했을 것이다.
황제에게 있어 제국인들은 신경 쓸만한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황태자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이제껏 해온 일을 보고 겪어왔다. 그러니 그와 똑같이 굴 수는 없는 일이지.”
김검천이 황태자를 보며 슬쩍 웃었다.
“과연 이번 차기 황제 폐하께서는 다르시군. 이로써 제국은 100년은 더 가겠는데.”
“너무 짧아! 그보다 이렇게 수도 재건에 신경을 쓰고 있어도 되나 모르겠군. 불안해.”
황태자는 어딘가에 쫓기는 듯이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김검천은 그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의자에서 몸을 세우며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수도를 공격한 고대의 대마법, 메테오 스웜 때문에 그러는 건가.”
“맞아. 이번에는 운이 좋았어. 그 때 네가 수도에 있어 막을 수 있었으니.”
“거기다 난 곧 떠날 몸이기도 하고.”
“제국 사람도 아닌 네가 평생 여기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그러니 고민이지.”
황태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김검천이 없었으면 수도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수도 사람들이 대부분 살아남은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을 겪었다고 해도 제국은 제국.
제국의 전력을 집중시키면 메테오 스웜이라도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수도 한곳에서만큼은.
반대로 말하면 제국의 힘을 다 모아도 수도 외에는 막을 방도가 딱히 없다는 것이었다.
제국 수도의 사람들이 수십만 명이라면 제국 전역에 사는 사람들은 수백만 명은 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매일 같이 불안해하며 살아야 할 테고 치안은 엉망이 될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 생활이 가능할리 없었다.
김검천이 그런 황태자를 위로했다.
“그래도 당장은 떨어지지 않을테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고.”
“그걸 자네가 어찌 아나?”
김검천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리 말하지만 섭섭하게 들릴거야. 내 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거든.”
황태자가 손을 내저었다.
“솔직한 의견은 오히려 고맙지. 네가 수도를 구원한 것만 해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고.”
“그렇게 말해주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데.”
“진심이야. 지금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건 자네나 집사 정도밖에 없어.”
아직 대관식만 하지 않을 뿐.
실제로는 황제나 다름없는 몸이었다.
그러니 제국 사람들 모두가 황태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전 황제가 해왔던 일들이 박혀 있는 것이다.
며칠 전만 해도 황제의 심기를 거슬리면 머리가 몸과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으니 말이다.
황태자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당분간 대마법에 공격받지 않는다는 이유가 있겠지? 자신 있게 말할 정도니까.”
김검천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맨입으로?”
황태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김검천이 만족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인가.
지켜보던 집사가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음료 한잔을 내밀었다.
“너무 황태자 전하를 괴롭히지 말아 주시지요.”
마침 목이 말랐던 김검천이 음료를 들이켰다.
확실히 집사가 황태자보다 눈치가 빠르긴 했다.
“제법 달콤한 대가인데. 이걸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해.”
황태자가 급히 물었다.
“고작 그걸로?”
“어차피 말해줄 것도 내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니까.”
“그거라도 좋네.”
“그렇다면야. 내가 루시엘에게 들어보니 이건 쉽게 사용할만한 마법이 아니더군.”
메테오 스웜.
과거에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는 고대의 대마법 중 하나.
그런 마법이 쉽게 사용할 수 있다면 진작에 대륙이 날아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건 그렇지. 적어도 100년 내로는 그런 대마법이 발동되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으니.”
“어째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그거야 쉬운 일이 아니니까 준비에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아!”
황태자가 알았다는 듯 탄성을 발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여러 정보를 아는 본인 정도면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왜 미처 생각을 못 했을까…”
김검천이 음료를 마저 들이켜며 대꾸했다.
“그건 네가 좋은 군주라는 뜻이야.”
“이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자기 일이면 냉정하게 생각하기 힘들잖아?”
황태자가 그만큼 제국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황태자가 붉어져 오는 얼굴에 손을 부쳤다.
“당장 자기 일도 제대로 못 처리하는 사람을 보고 좋은 군주라니. 이거 부끄럽군.”
“넌 이미 좋은 군주야. 여하튼 당분간은 안심할 수 있다는 거지.”
일단 루시엘과 대화한 바에 의하면 적어도 준비에 1달 이상은 걸린다는 대마법이었다.
더 정확한 시기는 마스터 매지션 정도 마법사와 이야기하면 나올 것 같았고.
잠시 기억을 되짚던 황태자가 동의했다.
“하긴 고대의 대마법 정도면 마스터 매지션 이상의 실력자가 필요할 정도니까.”
“얼마나?”
“많이. 아마 이대륙에 존재하는 마스터 매지션의 절반가량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는?”
“최상급 마석의 용량이 꽉 찰 정도의 마나. 언젠가 본 서적에 적힌 거니 확실하지는 않아.”
“그래도 참고는 되니까. 그렇다면 마법 도구로는 불가능하겠지?”
“맞아. 고대의 대마법을 그런 걸로 사용할 수 있다면 이미 대륙은 통일되고도 남았겠지.”
“그러면 수도에 메테오 스웜을 퍼부은 범인의 정체는 대충이나마 드러난 셈이군.”
황태자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에는 마탑의 탑주같은 실력자가 대거 참여한 것 같던가?”
“난 너보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몰라. 아마 그렇겠지만. 아, 하나 더 말해줄까나.”
“뭘?”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라면 어떻게 움직일지 알 것 같거든.”
“대마법의 발동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접촉 해올 거라는 거지. 마법사라는 부류는 듣는 것보다는 남들에게 말하는 걸 좋아하는 자들이니까.”
그때 집사가 황태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황태자 전하. 죄송하지만 급한 알현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황태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밤중에 누가 찾아왔다는 말인가?”
“당장 들려드려야 할 정보가 있다고 합니다. 두 분과도 안면이 있는 분이기도 하고요.”
김검천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황태자라면 몰라도 개인적으로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제국에서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 생각과 가설을 증명해 줄 마법사 한 명이 찾아온 것 같군.”
***
수도 내 복구 작업이 진행된 지 벌써 며칠이 지나갔다.
이제 황태자의 저택은 단순하게 쉬는 곳만이 아니었다.
일시적으로 황성의 역할을 대신하는 장소들 중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외부 인사를 만난다든지 혹은 명령을 내리는 곳으로서.
이미 있는 건물을 쓰는 게 황태자에게 좋기도 했지만 호위하는 쪽도 편했으니까.
원래 황태자를 경호하던 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좀 더 기사의 수가 늘어나고 경계가 엄중해지기는 했지만.
더구나 저택에 머무는 동안에는 김검천이 있었다.
김검천이 황태자 자신 옆에 붙어있는 동안에는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황태자의 옆에 김검천이 있는 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 난리 속에 무사했던 옥좌에 앉게된 황태자는 저택의 집무실을 좀 바꾸게 되었다.
임시지만 황성같이 알현의 방을 구현하기 위해 벽을 밀어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친위 기사들이 방 한쪽에 줄을 서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황제를 만날 수 있는 알현의 방으로도 쓰일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
그런 황태자의 집무실로 찾아온 친위 기사가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황태자 전하. 마도왕국이라는 곳에서 찾아온 마법사를 데려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 갑작스럽게 수도를 방문한 마법사들에 의한 알현 요청이 있었다.
이번 수도에 떨어진 고대의 대마법과 관련 있다는 자들이.
바쁜 일정이었지만 황태자는 만나 보기로 했다.
그들의 머리를 몸과 떨어트리는 명령을 내리는 대신에 말이다.
그들로부터 얻어낼 게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여보내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마법사들의 몸수색이 끝났으면 들여보내도록.”
허락을 받은 친위 기사가 신호를 보냈다.
그곳으로 마법사 3명이 턱을 높게 치킨 채 팔자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어들어왔다.
자신들에게 누가 감히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냐는 듯 거만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