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달려오던 마법사가 김검천 앞에서 멈췄다.
그러더니 김검천의 얼굴을 살펴보면서 입을 열었다.
“지나가다 아까 대화하는 걸 들었는데 당신이 그 김검천이요? 무술 대회 우승자라는?”
그게 어떤 흥미라도 유발했는지 다른 마법사들도 김검천을 향해 다가왔다.
심지어 배틀 머신을 구경하던 사람들 중 일부도 김검천에게 관심을 가졌다.
김검천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준비태세를 갖췄다.
생각해보니 시합 때 미리내가 개입해 얼굴을 잘 안 보이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단순히 본인인지 궁금해서 묻는 것이기를 바랬다.
다른 걸로 자신의 이름을 물을 이유가 또 있겠는가.
김검천은 상대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천천히 움직였다.
언제든 손을 쓸 수 있도록 마법사들과의 거리를 조정한 것이다.
일행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공격이 집중되는 게 훨씬 편했으니까.
김검천이 대답했다.
“내가 맞는데 무슨 용무라도?”
김검천이라는 걸 확인한 마법사의 얼굴이 점차 달아올랐다.
흥분한 모습의 그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채 김검천을 항해 달려들었다.
김검천은 마법사를 향해 한 손을 뻗어 지건을 발사하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마법사가 어떤 마법 주문도 시전하지 않고 그냥 맨몸으로 달려드는 게 수상했다.
최악의 경우 공격을 받은 마법사가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들 정도로.
바로 앞까지 도달한 마법사의 허리가 굽혀지며 김검천의 손을 향했다.
김검천이 슬쩍 한 발짝 물러서자 마법사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무슨 짓을 하는 거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마법사가 뒤로 물러섰다.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얼굴이 상기된 상태로.
“아, 이거 죄송합니다! 장착하신 마갑이 너무 완벽한 균형미를 보여주고 있어서 그만…”
“그게 날 찾은 이유요? 그런 거면 이름을 물어볼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건 다른 볼 일이 있어서입니다. 현재 당신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니까요.”
그사이 어느새 다른 사람들도 몰려와 주변을 둘러싸며 한마디씩 했다.
“저 봐, 저 사람, 아니, 저분이 김검천님이래.”
“듣자 하니 우리를 제물로 바치려던 나쁜 황제를 처치하는 데 도와주셨다던데.”
“무술 대회 우승자지? 마스터 나이트보다 강하다고 들었어.”
“그 정도는 돼야 황성에 있던 나쁜 놈들을 해치울 수 있었겠지.”
“옆집 동료 친구의 팔촌이 친위기사인데 김검천님이 운석을 막으셨다는 이야기 들었데!”
“…그건 완전 남이잖아. 그러고보니 수도에 나타난 초월 존재와 관계있다는 소문도 있던데.”
“혹시 초월 존재의 아바타 아닐까? 초월 존재를 대신해 그 화신이 지상에 오신 거야.”
옆에서 듣던 마법사 한 명이 코웃음을 치며 동료에게 말했다.
“흥, 실체도 알 수 없는 초월 존재의 아바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가 마법에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와전된 거겠지.”
“그러게. 초월 존재의 아바타가 저런 거대한 강철 골렘의 주인일 리가 있겠어?”
그 의견에는 모여 있던 마법사들 대부분이 동의하는 바였다.
동의하지 않는 마법사들도 김검천을 찾고 있던 이유였고.
이미 서로 간에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마법사 한 명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마법으로 조사하니 이 강철 골렘은 마석도 사용하지 않았더군요. 어떻게 만든 겁니까?”
주인이 누구인지도 아는데 허락도 받지 않고 벌써 마음대로 조사하다니.
김검천은 마법사들이 왜 자신을 찾았는지 알 거 같았다.
마법사는 지식의 탐구자.
그게 마법과 관련된 분야의 지식이라면 목숨을 걸기도 하는 자들이었다.
골렘이라면 마법사들도 관심을 가진 마법 생물.
상급 마석은 사용해야 겨우 만들어지는 거대 골렘이 마석 없이도 만들어졌다.
그러니 마법사들이 김검천에게 관심을 가지고도 남을 만 했다.
상황을 알게 된 김검천은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렇다고 그들과 오래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짧게 답변하고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었다.
“저건 마법이 아니라 과학을 이용해 만들어진 배틀 머신이라는 겁니다.”
한 마법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과학이라고요? 근래 어디선가 많이 들은 단어인데. 마물 숲 근처의 왕국쪽에서 들었나?”
말이 길어지는 건 싫었기에 김검천이 딱 잘라 말했다.
“한마디로 저건 마법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니 당신들이 원하는 지식이 아니라는 거지요.”
김검천은 이 정도면 마법사들이 떨어져 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말 한마디로 퇴치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마법사들이 웅성거렸다.
“들었어? 저 골렘은 과학을 이용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어쩐지 마석이 없더라.”
“어허, 이 사람이. 골렘이 아니라 배틀 머신이라고 하지 않던가. 무식하기는.”
“누구보고 무식하다는 거냐? 배틀 머신도 골렘처럼 움직이면 골렘인 거지.”
“과학으로 만들어졌다니 골렘이 아니라 배틀 머신이라는 범주로 따로 분류해야지!”
“하악, 아무튼 새로운 지식은 환영이야.”
마법사들은 김검천으로부터 전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샤칸이 김검천을 향해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라는 자들도 보는 눈은 제법인데? 배틀 머신이 얼마나 멋진 기체인지 알다니.”
그걸 들은 김검천은 드워프 마을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드워프들이 배틀 머신에 저지른 행동을.
마법사들이 드워프 같다는 생각을.
루시엘도 김검천과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 머리 쓰는 마법사나 몸 쓰는 드워프나 이런 점은 비슷하군요.”
김검천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법사에게 물었다.
“혹시 다들 눈치 없다고 이야기 듣지 않습니까?”
“눈치 있는 마법사를 어디에 씁니까? 그런 거 키울 바에 마법 주문 하나라도 더 외우겠소.”
다른 마법사들이 그 말에 동의하듯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 사람들이.
김검천이 어이없는 듯 눈앞의 마법사에게 말했다.
“나한테 이런다고 당신들에게 배틀 머신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줄 것도 아닐 텐데요.”
“이렇게 쫓아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질려서라도 알려주겠지요.”
이 마법사들, 다른 의미로 생각보다 강적이었다.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뭐, 과학 지식이라면 못 알려줄 것도 없지만요.”
김검천의 말에 마법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자신들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알려줄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먹고 떨어지라고 던져주는 단편적인 단서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말투를 들으니 뭔가 제대로 알려줄 것 같지 않은가.
“그게 정말입니까?”
마법사들이 고기가 붙은 뼈를 본 강아지처럼 눈을 빛냈다.
유감스럽게도 강아지는 귀엽기라도 했지만 마법사들은 귀엽지 않았다.
김검천 옆으로 루시엘이 다가와 속삭였다.
“마법사들 세계에서는 비전의 지식은 살인을 저지르고서도 얻고자 하는 겁니다.”
“어차피 배틀 머신을 만들 정도의 지식은 못 알려줘. 내가 직접 나서도 못하는 거니까.”
만드는 건 함선 내 장비로나 가능한 거지 김검천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 마법사들에게 알려준다고 해도 늙어 죽을 때까지 학습해도 될지 의문이었고.
그 말에 흥미를 잃은 일부 마법사들이 실망한 표정으로 김검천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역시 안 알려주려는 거였어.”
“하긴 누가 그런 비전 지식을 그냥 알려주나?”
“쳇, 이게 희망 고문이라는 건가? 그냥 안 가르쳐 준다고 할 것이지.”
뭔가 오해하는 것 같았지만 결론은 비슷했으니 김검천은 정정할 필요를 못 느꼈다.
하지만 간절하게 원하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다.
남아 있는 자들은 더 절실한 얼굴로 김검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운 지식을 얻으면 지금 상급 마법사 단계에서 정체되어 있는 걸 넘어설 수 있어.”
“상급이면 다행이지. 마스터 매지션 급에서 머물러 있는 이쪽이 더 급해.”
“어떤 대가를 치뤄도 좋으니 부디 그 지식이라도 알려주시지요!”
마법사들이 모여 난리를 피우는 게 문제라도 된 모양이었다.
치안 유지를 위해 기존 제국군 외에도 순찰을 위해 투입된 친위 기사 몇 명이 달려왔다.
그들 중 선임 친위기사가 나섰다.
“무슨 일이길래 한 곳에 모여서 난리냐! 이런 곳에 모여 있으면 통행에 방해니 해산하라!”
자신이 원인이었으니 김검천이 앞에 나섰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군. 나 때문에 벌어진 일 같거든.”
선임 친위기사는 예전 김검천과 접촉이 있던 친위 기사들 중 한 명.
김검천이 대회 우승을 할 정도로 강하며 황태자와 평대를 하는 사이라는 것도 알았다.
임무 수행중이던 선임 친위기사가 가슴에 손을 대고 급히 군례를 취했다.
“아, 김검천님 아니십니까? 김검천님이라면 다 이유가 있어서 하신 일이시겠지요.”
김검천이 미안해질 정도로 믿어 주는 선임 친위기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을 살려준 사람이 김검천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수도를 파멸시킬 뻔한 고대의 대마법으로부터.
이건 수도의 모든 사람들이 직접 겪은 사건이었다.
어찌 김검천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기 황제인 황태자가 김검천을 믿고 있다는 것도 이렇게 나서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고.
덩치 큰 흉악한 인상의 기사가 동경하는 눈으로 보는 건 김검천으로서도 부담스러웠다.
김검천이 슬쩍 눈을 돌릴 정도로.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김검천이 마법사들에게 말을 건네었다.
“정말 나로부터 과학에 대한, 그러니까 배틀 머신에 관련된 지식을 전수받고 싶습니까?”
김검천이 제공할 지식에 눈이 먼 마법사들이 피에 굶주린 광전사처럼 소리쳤다.
“새로운 지식은 언제나 환영이요!”
“좋은 자세군요. 그러기에 앞서 대가로 여러분들에게 몇가지 도움을 받을까 합니다.”
“뭐든지 말씀만 하시지요!”
하는 걸 봐서 그만큼 알려주겠다고 약속한 김검천이 선임 친위기사를 불렀다.
“들었지? 이들을 황태자 전하에게 데려가게. 내가 보냈다고 하면서.”
“아하, 수도 내 마법사 인력이 부족한 판국이니 황태자 전하께서 좋아하시겠군요.”
“좋아 죽을걸? 더군다나 이 마법사들은 무료로 일해주지.”
물론 자원봉사는 아니라 김검천에게 지식을 전수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마법사들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었다.
마법사들은 혼자 살면 일상생활이나 가능한지도 의문인 자들.
그와 별개로 머리만큼은 보장된 집단인 건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규칙이 정해져 있는 시스템 내에서는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기존 제국 마법사들이 하던 업무라면 같은 마법사가 하는 게 적합할 터.
이로써 현재 황태자가 떠맡고 있는 부담은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이었다.
선임 친위기사가 김검천에게 다시 군례를 한 후 마법사들을 데려갔다.
마치 앞으로 쉬지도 못하고 부려 먹힐 노예를 대하는 것처럼.
갑자기 황태자의 부담을 떠맡게 된 마법사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김검천이 쳐다보았다.
누군가 자신을 보던 시선을 느낀 것이다.
“이상하군. 분명히 누가 나를 보는 것 같았는데.”
미리내가 응답했다.
[그럴 겁니다. 제 탐색 범위에만 해도 3890명의 시선이 잡혔으니까요.]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날 보고 있었군.”
[수도의 인기인이 되신 기분이 어떠신가요.]
“뭔가 감정이라도 잔뜩 실린 듯한 말투인데?”
김검천의 시선이 향한 방향을 착각한 마법사들은 김검천을 향해 열렬히 환호했다.
“김검천님이 날 보셨어!”
“아니야, 날 보신 거야!”
“이 상급 마법사 주제에?”
“마스터 매지션급이면 다냐? 다냐고!”
이 와중에 김검천이 느꼈던 시선은 어느새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김검천은 내일이라도 빨리 함선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고민에 빠졌다.
마법사들이 무서웠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리고 황태자는 김검천 덕분에 그날 안으로 집에 돌아올 수 없었다.
새로 온 마법사들에게 걸맞은 업무를 할당해야 해서였다.
오늘 처리할 업무 부담이 늘어난 것이다.
내일 해야 할 업무 부담은 줄어들었는지 몰라도.
졸린 황태자는 저절로 감겨 오는 눈을 비비며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으아아! 김검천!”
김검천은 그날 밤 귀가 많이 간지러웠다.
다음날 황태자가 사람을 보내 김검천을 부르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