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제국 수도에는 일반적인 행정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제국 행정청이 있었다.
평상시 제국이 문제없이 돌아가는 건 제국 관리들이 열심히 일하는 덕분인 것이다.
그곳의 회의실에 황태자를 포함한 요인들의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황태자는 긴 탁자 중앙에, 왼쪽에는 대귀족들이, 오른쪽에는 각 관련자들이 앉아있었다.
다들 오랜 회의 탓인지 저마다 지친 얼굴로.
대귀족들 중 근사한 콧수염을 가진 자가 헛기침을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콧수염 공작이라고도 불리는 대귀족.
공작의 위치를 가져 대귀족들을 대표해 나름대로 목소리를 내는 자였다.
“크흠. 슬슬 결론을 내려야 할 거 같습니다만. 황태자 전하도 피곤하실 테니까요.”
어제 갑작스럽게 일이 늘어나 새벽에 이 방에서 잠시 잔 게 다인 황태자였다.
그의 눈가에 검게 죽은 자국이 사람들의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그렇지만 황태자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늦어도 오늘 안에는 끝날 거요. 한가해서 이 자리에 모두를 모은 게 아니니까.”
“그냥 저희들이 내놓은 제안에 따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골치 아픈 일은 없을 겁니다.”
황태자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지금까지 회의가 안 끝나는 원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귀족들이 한데 뭉쳐 황태자가 내놓은 제안을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는 중인 것이다.
황태자는 딱 잘라 말했다.
“제국의 안위와 무엇보다 제국민들을 위한 일이니 대충 넘어갈 수 없소.”
대귀족들 중 한명이 옆의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다 좋은데 황태자 전하의 말씀 중 제국민들에 이종족들도 들어가는 건 그렇지 않소?”
“그러게 말이요. 당장 오늘까지만 해도 노예처럼 부리는 자들을 해방시키라니.”
“노예라는 건 다 제국민들의 사유 재산 아니요? 아무리 황태자 전하의 말이라도 조금…”
“수도 재건을 위해 노예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정도로 마무리 지었으면 될 텐데.”
“애초에 수도를 재건할 필요가 있을까요? 마도 왕국이 다시 공격할지 모르는 판국에.”
“차라리 이 기회에 수도를 이전하는 게 어떨지요.”
대귀족들이 벌써 회의가 끝나기라도 하듯 제멋대로 떠들었다.
황태자의 앞에서 마음껏 떠드는 대귀족들이었다.
그런만큼 제국 행정을 맡아보는 실무자들 정도가 마음껏 발언 할 수 있을리 없었다.
황태자의 말이 맞다지만 대귀족의 눈치를 안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눈치를 보던 실무자들 중 그나마 용기가 있는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제국 황실과 제국 국고가 모자랍니다. 부디 예산의 충원을!”
제국 재무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당연히 해야 할 말이었다.
대귀족들은 별로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들 중 한 명이 관리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어디 미천한 것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나서는 것이냐?”
다른 대귀족도 관리를 핍박했다.
“너희들은 우리가 필요하면 알아서 찾을 테니 그때 가서나 입을 열어라!”
관리는 더 이상 아무 소리를 하지 못했다.
이런 식이니 제대로 된 회의가 진행될 리가 없었다.
- 탕!
보다 못한 황태자가 책상 위로 손바닥을 내려쳤다.
그제야 대귀족들은 관리에 대한 언급을 멈춘 채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황태자가 자신의 양옆에 비어있는 좌석에 눈길을 주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부른 지원군이 올 때가 되었다.
“슬슬 시간인데.”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 앞을 경비하고 있던 친위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태자 전하. 김검천님이 오셨습니다.”
“오오, 어서 들라 하라!”
황태자가 지옥에서 빛이라도 본 듯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대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김검천? 그게 누군데 황태자 전하가 저렇게 기뻐하는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한데.”
“이 사람들이. 그 뭐더냐, 가끔 열리던 무술 대회의 우승자 아니요.”
“그러고 보니 요즘 수도 내에서 많이 들리는 이름이구려.”
“그런데 왜 이 자리에?”
“황태자 전하와 같이 거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흥, 설마 무력으로 위협하기라도 할 생각인가?”
김검천이 회의실에 들어서자 황태자가 반색을 하며 불렀다.
“왔나? 어서 이쪽에 와서 앉게나.”
황태자가 가리키는 곳은 바로 옆에 비어있던 좌석이었다.
눈치 빠른 자들은 그것만 봐도 황태자가 얼마나 김검천을 신뢰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일반인도 아니고 김검천 정도 실력자를 바로 옆에 두다니.
그야말로 자기 목숨을 맡긴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한편으로 겁이 나기도 했다.
김검천이 정말로 황태자의 칼이라면 그게 향할 방향은 자신들일 테니.
몇몇 사람들은 괜히 목이 타는지 앞에 놓인 음료를 단숨에 들여 마셨다.
김검천이 옆에 앉자 황태자가 짧게나마 지금까지 회의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이래서 회의가 끝이 안 난걸세.”
“제가 보낸 마법사들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간 게 아니었군요.”
공식인 자리인 만큼 황태자에게 높여 주는 김검천이었다.
“그 덕분에 밤샌 건 맞거든?”
“그 부분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대화를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김검천이 황태자와 편하게 말을 나눌 만큼의 친근한 관계라니.
김검천을 조심스럽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물론 이 와중에도 눈치 없는 사람이 있긴 했다.
대귀족 한 명이 김검천이 회의에 참석한 게 불만스러운지 불평을 늘어놓았다.
“황태자 전하. 왜 회의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를 부르신 겁니까?”
황태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격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번 일과 관련된 사람이기도 하거든.”
“제국인도 아닌 그가 말입니까?”
황태자가 나서기 전 김검천이 먼저 말을 꺼냈다.
“황태자 전하, 괜찮으시다면 제가 대신 말해도 되겠습니까?”
황태자가 승낙의 뜻을 표하자 김검천이 대귀족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 자리에 있는 건가?”
평상시라면 이런 말에 발끈하고도 남는 게 대귀족이었다.
이상하게 김검천으로부터 위압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대귀족이 평소와 다르게 공손히 김검천에게 대답했다.
“그거야 대귀족인 우리가 없으면 제국이 제대로 돌아갈 일이 있겠소?”
“그래서 뭘 했지?”
간단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대답할 게 없던 대귀족은 말문이 막혔다.
수도가 공격당한 이후로 몸을 사리다가 황태자의 부름에 이제야 찾아 왔다.
그들이 한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뭔가를 하려 드는 황태자를 걸고넘어지고 있었다.
대귀족은 자신을 응시하는 김검천의 눈에서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지는 한 게 없지요. 하지만 제국 사람도 아닌 당신이 관여할 게 아니잖소?”
김검천이 황태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제국의 황태자를 친구로 두었고.”
김검천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제국의 기사가 내 사람이며.”
김검천이 회의실 안에 모여 있는 자들을 노려보았다.
“제국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가 내 보호 아래에 있다. 그런데 상관할 바가 아닌가?”
대귀족들이 하나같이 김검천의 눈과 마주치지 않게 딴청을 피웠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황태자에게 권력 집중이 되어야 했다.
지금의 황태자라면 제국 누구보다도 자신이 다스리는 자들을 위할 것이다.
콧수염 공작이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 자격은 그렇다 칩시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으니 말이요.”
콧수염 공작이 대귀족들을 둘러 보았다.
그 동작에 대귀족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우리들의 협조가 있어야 해결될 문제 아니오?”
“그렇겠지. 현재 인력을 빼면 모든 게 부족하니까. 돈과 식량, 무엇보다 시간이.”
김검천의 말에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우리들 앞에서 그렇게 뻣뻣하게 굴어도 되는 것이오? 당신이 사과하면 생각해 볼지도 모르는데.”
대귀족들이 여기저기서 키득거렸다.
김검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귀족들이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를 대리한다는 저 오만한 자가 자신들을 향해 사과를 하는 모습을 그리며.
김검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의 기대를 배반했다.
“내 입에서 그렇게 사과가 듣고 싶은가?”
“그걸 말이라고 하오?”
“사과 대신 내가 너희들에게 줄 기회를 잡는 게 더 나을 텐데.”
“하하! 우리들은 기회를 주는 사람이지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요.”
“과연 그럴까?”
김검천이 황태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밖에 누구 없느냐? 김검천과 같이 온 자가 있을 것이다. 그를 들여보내도록 하라!”
낡고 냄새나는 복장의 사람 한 명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평상시의 태도를 보여주듯이 어깨를 움츠리고 허리를 살짝 굽힌 채 두리번거리면서.
수도에서 살긴 하지만 기록상에는 존재하지 않은 빈민가의 사람이었다.
김검천 덕분에 암흑가 사람에게 원수를 갚은 사람이기도 했다.
빈민가의 사람이 지나치자 옆에 있던 대귀족이 급히 코를 막았다.
“윽, 무슨 냄새가? 아니, 왜 저런 것을 왜 이런 자리에 부르셨습니까.”
빈민가의 사람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높으신 분들과는 달리 변두리에 사는 비천한 몸이라서요.”
황태자는 그의 상태가 어떻든 관계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그가 말할 내용이었으니까.
“이야기하라. 네가 겪은 일을 간단히.”
먼저 황태자에게 깊숙이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한 빈민가의 사람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변경의 어느 백작이 우리들을 통해 거리에 거짓 소문을 배포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대귀족들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변경백의 이야기가 나오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빈민가 사람은 모두에게 간결하게 이야기를 전달했다.
변경백의 수하가 자신들에게 어떤 일을 시켰는지.
그리고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자신들을 죽이려고 든 것을.
“이번 일이 없었다면 저희들은 다 죽었을 겁니다. 그들의 일을 하며 알게 된 게 있거든요.”
빈민가 사람이 다시 한번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높으신 귀족 여러분들이 그자와 공모한 일을 말이지요. 그 결과는 모두가 잘 아실 테죠.”
회의실이 적막에 잠겼다.
그 적막을 깬 건 황태자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들은 반역자라는 건가?”
대귀족들도 자신의 영지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힘을 가졌다.
차기 황제인 황태자라도 그들을 강제하기 힘든 것이다.
다만 반역죄가 맞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 자리에서 김검천이 이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명분은 충분했다.
거기다 반역자는 그 장본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문까지 모두 말살하는 법이었다.
- 쾅!
의자가 뒤로 넘어져 뒹굴었다.
공작이 급히 일어서는 바람에 일어난 작은 소동.
하지만 지금 그런 사소한 일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헛소리다! 저런 비천한 자의 말만으로 대귀족인 우리들을 역모죄에 엮을 생각이요?”
김검천이 대꾸했다.
“하지만 너희들이 그 일에 관여된 건 사실이지. 아닌가?”
콧수염 공작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김검천의 말대로 자신들이 연관된 건 사실이었다.
사실 황제가 변경백에게 죽었다는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황태자와 김검천이 황제를 공격한 것도 역모죄였으니까.
다만 그 시기가 다른 게 극과 극의 결과를 불러온다.
황태자와 김검천이 황제를 친 건 그야말로 제국을 위한 구국의 결단.
실제로 그 덕분에 수도의 수십 만 제국민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미쳐 버린 황제의 영생을 위한 한 줌의 돌로 변하기 전에.
황제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는지는 살아남은 친위기사들이 양심적으로 증언했고.
그렇기에 제국민들은 황제를 쓰러트린 황태자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대귀족들이 변경백에 동조한 건 그 일이 벌어지기도 전이었다.
또한 변경백은 처음부터 오직 황제만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기 위해 황제와 황태자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과 뒷공작을 벌였고.
몰랐다고 하나 대귀족들이 그런 변경백과 손을 잡은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콧수염 공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소이다.”
누가 봐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모습이었다.
그때 제국 관리와 실무자들을 모아둔 자리로부터 남작 한 명이 일어섰다.
“…후, 공작 각하, 더이상 추한 꼴을 보이지 맙시다.”
그는 바로 황궁을 제외한 수도 전역의 치안 담당 책임자, 수도 방위 사령관이었다.
대귀족과 달리 그는 가족과 가문을 위해 황태자를 찾아가 먼저 죄를 빌었다.
변경백이 죽은 이상 어딘가에서 파탄이 생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벌레가 득실거리는 썩은 살 부위를 잘라 버릴 차례였다.
자신 외 가까운 사람들의 안위도 보장받아야 했고.
사령관은 허무한 미소를 지은 채 공작을 비롯한 대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사령관? 그게 무슨 말이요?”
공작이 콧수염을 바르르 떨며 물었다.
사령관은 대귀족들이 변경백에 동조할 때 같은 자리에 있었다.
하급 기사부터 시작해 수도 방위 사령관이 된 남작의 말이라면 다들 믿을 것이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모든 걸 다 알고 계시고 있습니다. 공작 각하.”
“사령관!”
“그리고 솔직한 자들에게는 기회를 주신다고 합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수도 방위 사령관의 말에 공작은 눈을 감았다.
어찌 되었든지 지금 황제는 죽었고 황태자는 살아 있다.
황태자는 곧 황제가 될 테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이 변경백이 한 일에 협조한 건 사실.
자신들은 그렇다 치고 가문이 살아남으려면 어떤 방법이 최선일까.
차라리 정말로 이 자리에서 반역을 일으키는 게 어떨까.
대귀족들이 데려온 호위 기사만 해도 마스터 나이트 한 명 정도는 처리할 무력이었다.
“흥.”
비웃는 듯한 코웃음 소리.
공작이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에는 김검천이 있었다.
공작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사천왕을 이긴 상대와 겨뤄 결국 대회에서 우승한 김검천이다.
여기로 끌고 온 병력으로는 저기 있는 김검천 한 명도 당해낼 수 없었다.
어쩌면 황태자는 여기 있는 대귀족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인지도 몰랐다.
김검천을 이용해서.
이것은 지나치게 머리를 굴린 공작의 착각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쉰 공작은 황태자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밝고 즐거운 제국의 미래를 위해 저희들은 힘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황태자 전하.”
공작을 따라 다른 대귀족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황태자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로써 대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예상되었다.
사유 재산이라는 이종족들의 해방 역시도.
황태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공적인 일을 끝낸 김검천이 황태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축하한다.”
“네 덕분이야. 이제야 제국이 제대로 움직이겠군.”
“이제부터는 이들과 협상의 마무리를 짓는다고 바쁘겠군. 오늘도 저택에 못 돌아오겠네?”
김검천의 말에 황태자가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오늘도 밤을 새워야 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