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다음날.
편안해 보이지만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워스덤이 방을 나서 식당으로 향했다.
이동하면서 워스덤은 보송보송하게 마른 자신의 몸과 수염을 쓰다듬었다.
“마법도 아닌데 물도 쓰지 않고 몸을 씻을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로군. 누가 믿을까?”
오랜 여행길에 더러워졌던 몸이었다.
찝찝한 기분에 세이야가 말한 대로 방안 네모난 투명 상자 안에 들어가 버튼을 눌렀다.
따뜻한 느낌이 전신을 어루만진다 싶더니 곧이어 상쾌해졌다.
기분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이렇게나 몸이 깨끗해진 것이다.
그 증거로 더럽혀져 회색으로 물들었던 수염이 하얗게 변하지 않았는가.
“오늘은 또 무슨 신기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기대가 되는군. 이러고 있을 때는 아니지만.”
함선을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루가 지났을 뿐.
그런데도 자신은 바깥에서 1달 동안 겪은 것보다 더 많은 걸 경험했다.
지식을 탐구하는 마법사라면 절대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문제는 한가하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있지 않아 다시 엘프를 찾아 떠나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워스덤의 그런 고민은 어디선가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의해 사라졌다.
- 꼬르륵.
워스덤은 쑥스러운 소리를 내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사람은 먹어야 사는 법이지. 이놈, 어차피 식당으로 가야 하니 조금만 더 참아라.”
워스덤은 기대에 부푼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먹었던 요리를 생각만 해도 저절로 침이 흐를 것 같았다.
- 쾅!
식당으로 가는 길에 뭔가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의 느긋함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로 워스덤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려갔다.
식당을 지나 자동으로 열리는 차단문을 통과하다 보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통로 너머를 고개만 내밀어 훔쳐보면서.
무슨 일인지 파악이 안 된 워스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다들 이러고 있는 거요? 아까 그 소리는 또 뭐요?”
세이야가 바로 대답했다.
“김검천님이 다음 구역의 차단문을 여시는 데 도전하고 계시거든요.”
“그게 무슨 말인지?”
“우리가 함선 내에서 지금까지 본 것보다 더 대단한 걸 보게 되었다는 거지요.”
워스덤이 깜짝 놀랐다.
“아니, 지금까지 본 것들보다 더 대단한 게 남았다니? 본 게 다가 아닌 건 알았지만…”
도대체 이 함선에는 어떤 신비가 잠들어 있다는 것인지.
계속 파도 밑이 보이지 않는 유적이라도 찾은 기분이었다.
쿠퍼가 옆에서 세이야의 말을 거들었다.
“저도 아직 함선에 뭐가 있는지 다 못 보았거든요. 가장 오래 있었던 세이야마저도요.”
“허어, 정말 여기는 마법사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군. 지루할 틈이 없다니.”
“아, 김검천님이 드디어 차단문을 여셨네요.”
차단문을 연 김검천은 구역이 활성화되는 걸 확인하자 몸을 돌려 상황을 알렸다.
“다 끝났으니 이제 나와도 된다.”
다른 사람의 출입을 위해 해당 차단문 권한을 조정한 후 김검천은 먼저 이동했다.
들어선 문 너머의 공간은 넓었다.
곳곳에 뻗어 나온 기둥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있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보였다.
기둥들을 치우면 배틀 머신이 있던 격납고보다도 더 넓은 공간이 나올지도 몰랐다.
샤칸은 드워프답게 먹고 마시는 일 외에도 몸을 쓰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몸이 근질거려 보이던 샤칸이 김검천을 지나 그 안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함선 내에서 본 것 중에서 가장 넓은 곳을 발견했으니 마음껏 뛰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김검천이 지나쳐가던 샤칸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샤칸이 허공에서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물었다.
“왜 잡는 거요? 그저 이 안을 한 줄기 드워프처럼 마음껏 달려보려는 것뿐인데!”
세이야가 천천히 다가와 곳곳에 기둥이 뻗어 나와 있는 문 안을 보면서 말했다.
“달리다가 기둥에 부딪히거나 넘어지기라도 하면 위험할까 봐 그러신 게 아닐까요?”
“이 몸은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가 아니다!”
뒤따라 온 루시엘이 샤칸에게 한마디 했다.
“차라리 함선 밖을 뛰다가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샤칸이 투덜거렸다.
“함선 밖은 마물의 숲이잖아. 이 몸이니 죽지는 않겠지만 죽을 만큼 고생은 하지 않겠냐?”
“바로 그겁니다. 샤칸치고는 꽤 이해력이 높아졌군요.”
“아니, 이 귀쟁이가?”
김검천이 샤칸을 내려다 놓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실제로 위험해서 그런 거다.”
“아니, 아무리 이 몸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곳에서마저 다치거나 미아가 되지 않는다!”
괜히 발끈한 샤칸의 모습을 보니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김검천이 루시엘에게 물었다.
“혹시 샤칸이 함선 내에서 미아가 된 적이 있었나?”
“복잡하지도 않은 구조인데 그러더군요. 함선 내 차단문도 다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물든 샤칸이 대꾸했다.
“아, 드워프가 배틀 머신 격납고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지! 이 몸으로는 안 보인다고!”
드워프의 키라면 배틀 머신의 부품이 쌓여있는 곳에서는 그 너머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샤칸에게 있어서는 미로나 다름없는 것이다.
샤칸의 고충을 이해한 김검천이 미소를 지었다.
“뭐, 여기가 위험하다는 건 그것과 좀 다르지만.”
쿠퍼가 물었다.
“어떻게 위험하다는 겁니까? 겉보기에는 그냥 여기저기 기둥이 솟아난 곳인데요.”
김검천이 벽에 손을 가져대며 말했다.
“말보다는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낫겠지. 에너지 공급. 공정 모드 초기화.”
- 키이잉.
무수하게 나와 있던 여러 가지 형태의 기둥이 벽면으로 스며 들어갔다.
누가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자동으로 이동하는 기둥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다들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기둥이 사라지자 배틀 머신이 모여 있는 격납고보다도 더욱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아까 있었던 기둥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이.
세이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둥이 없어진 게 위험하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되었으니까.
“시야가 확 트인 건 좋네요. 그런데 이곳이 뭐가 위험하다는 건가요?”
김검천이 대답했다.
“원래 여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던 곳이야. 우리가 본 기둥은 그걸 위한 도구야. 방금 전까지는 저 기둥의 제어를 못 하던 상태였고.”
“이곳이 어떠한 곳인데요?”
“여기는 일종의 자동 조립형 공장이라고 할 수 있지.”
“자동 조립형 공장이라면 알아서 물건이 만들어진다는 거네요. 사람이 없이도.”
일정한 지식을 주입받은 세이야는 김검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듯했다.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그러려면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지만. 미리내. 이곳의 에너지 공급 상황은?”
[엔진실로부터 해당 장소로 여유 에너지를 주입 중입니다. 초기화 중.]
“이곳을 운용할 정도는 에너지가 남아 있어 다행이로군.”
[이 장소 전체를 운용하는 건 힘들지만요. 그래도 몇 개 정도 공정은 가능할 겁니다.]
“그거면 충분해. 그건 하나만 만들어도 되니까. 제어는 지금 가능한가?”
[초기화 완료. 지금이라면 김검천 함장님이 제어하실 수 있습니다.]
“공정 모드 기동. 다목적 무인 차량 조립. 다른 사람은 잘 모를테니 직접 보여줘야겠지.”
자동 공정이라고 해도 마법에 관련된 부분은 수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니 사람들이 직접 이곳에서 작업하러 올 수도 있었다.
김검천 자신이 없을 때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이곳이 어떠한 곳인지 시범을 보이려는 것이다.
김검천의 말이 끝나자 벽면으로부터 부품처럼 보이는 게 달린 기둥이 솟아 나왔다.
그 반대편에서도 부품이 달려있는 기둥 하나가 튀어 나왔다.
- 쾅!
기둥 2개가 서로 부딪히며 발생한 큰 소리가 사람들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특히 샤칸은 남들 눈에 안 띄게 찔끔했다.
기둥이 부딪친 중간에 끼어 있는 게 마치 자신인듯한 착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작은데 지금보다 더 납작한 몸이 되는 건 사양이었다.
- 키이잉. 쾅!
좌우에서 뻗어 나온 기둥 사이로 다시 위아래로 기둥이 튀어나와 맞부딪혔다.
이어 앞과 뒤마저도 기둥이 튀어나오며 한 점에 집중되었다.
저 안에 들어 있는 게 무엇이든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6개의 기둥은 잠시 그렇게 머물러 있다가 다시 벽면 속으로 돌아갔다.
기둥들이 마주친 자리에는 사각형 큐브 형태의 금속 덩어리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루시엘이 먼저 김검천에게 물었다.
“저게 무엇입니까?”
“차세대 다목적 무인 차량. 일종의 마차라고 생각해. 사람을 위한 차량이기도 하거든.”
정확히는 일반인이 아닌 파워드 슈츠를 장착한 보병을 위한 군사용 차량이었지만.
강력한 무기는 아니지만 이것은 김검천이 아쉬워 하던 걸 채워줄 만한 물건이었다.
여태까지 사용한 마차보다 공격과 방어, 기동력 모든 면에서 뛰어난 장비.
특히 기동성이라는 부분이 지금의 김검천에게는 가장 절실했다.
루시엘이 이리저리 살피더니 물었다.
“저기에 어떻게 타는 겁니까? 설마 저기에 올라타는 건 아닐 테고요.”
루시엘이 궁금해할 만했다.
김검천이 마차라고 한 네모난 금속 덩어리에 빈틈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저것과 이동한다면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노예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저 금속 덩어리 밑에 통나무라도 놓고 잡아당겨야 겨우 미동이나 할까 싶었으니까.
김검천이 무인 차량을 향해 슬금슬금 걸음을 옮기려던 샤칸을 다시 잡으며 대답했다.
“방금 기둥은 몸체 부품을 압축, 조립하는 역할을 하지. 공정은 이제부터 시작이고.”
- 딱.
김검천이 다른 한 손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 신호에 맞춰 천정에서 기계 팔이 튀어나와 금속 덩어리로 향했다.
기계 팔 끝부분에서는 강렬한 느낌의 빛이 방전하고 있었다.
- 파칙, 파칙.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뒤에서 놀라는 워스덤의 외침이 들려왔다.
“헉! 저건 또 뭡니까? 소형 골렘입니까? 그런 것 치고는 아무런 마나도 안 느껴지는데?”
무인 장비에 놀라는 워스덤에게 세이야가 대답해 주었다.
“이건 무인 장비라는 거예요. 저 배틀 머신도 옮길 수 있는 작지만 강한 녀석들이지요.”
고개를 돌리니 통로를 따라 무인 장비들이 잡다한 부품들을 운반해 오고 있었다.
배틀 머신 격납고로부터 방치된 일부 배틀 머신의 부품을 대용품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무인 장비들은 나란히 선 사람들을 지나쳐 자동 공장이라고 불린 장소로 들어섰다.
기계 팔은 네모난 금속 덩어리에 접근하더니 일부분을 들어 올렸다.
이제야 김검천에게 풀려난 샤칸이 그걸 보면서 감탄사를 발했다.
“대단해! 저건 단순한 금속 덩어리가 아니었어! 그렇게 보이도록 조립시켰을 뿐이군!”
이런 방면에 능통한 샤칸인 만큼 저런 게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눈에 들어왔다.
김검천이 샤칸을 위해 조금 더 보충을 해줬다.
“잘 아는데? 저 기둥들 앞에 붙어 있던 부품 조각을 네모난 큐브 형태로 결합시킨 거야.”
사람이 조립식 장난감을 만드는 것과 비슷했다.
완성품의 크기와 들어가는 재료, 만들어지는 속도는 크게 차이가 났지만.
“그게 가능하다니? 그냥 보기에는 공장에 침입한 자를 요격하려는 함정인 줄 알았는데.”
“아, 그런 기능도 있지. 그래서 널 말렸던 거고.”
샤칸이 다시 한번 루시엘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칫했으면 동족인 드워프도 못 알아볼 몸이 돼버릴 뻔했다.
워스덤이 김검천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마차…아니, 차세대 다목적 무인 차량이라는 건 언제 만들어집니까?”
머리 좋은 마법사답게 단번에 처음 듣는 단어도 바로 외워 쓰는 워스덤이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워스덤의 얼굴에는 약간 초조한 감이 서려 있었다.
김검천은 그가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마도 왕국의 마법사들에 의해 대마법이 발동될 거 같아 그러는 건가?”
“이곳에서의 생활은 꿈에서도 그리던 것이나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게 필요한 거지. 이번 일은 시간을 얼마나 단축시키냐가 관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