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김검천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냉혹한 발언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전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귀를 의심할 정도로.
쿠퍼가 늘어나지 않았다면 김검천이 가짜가 아닐까라고 고민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김검천에게 쏠렸다.
그나마 충격에서 빨리 회복된 세이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검천님.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 겁니까? 저희가 모르는 다른 의미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 그 말대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런...”
“어차피 결정하는 건 저 둘이지. 세이야는 내가 없던 동안의 상황을 말해 주었으면 해.”
쿠퍼들은 여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망설이는 중이었다.
갑자기 죽어달라는 말에 따라야 하는 판국이니 이상한 반응도 아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김검천은 옆에 놓은 거대한 식탁 옆으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는 식사에 사용하는 나이프나 포크 같은 여러 가지 식기들이 놓여 있었다.
김검천은 나이프 2개를 집어 쿠퍼 일과 쿠퍼 이에게 각각 던졌다.
- 쨍그랑.
나이프는 각각의 쿠퍼들 앞 발밑에 떨어졌다.
쿠퍼 일이 김검천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저에게 죽으라는 게 진심으로 한 말씀이셨군요.”
쿠퍼 이가 김검천에게 항의했다.
“누가 도플갱어인지 모르니 그냥 죽으라고 하신 겁니까?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쿠퍼 일과 쿠퍼 이의 주위를 향해 기묘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던 김검천이 말했다.
“극단적이긴 해. 하지만 그만큼 확실한 방법이지. 둘 중 하나는 분명 도플갱어니까.”
그 말에 따르면 하나가 도플갱어라면 나머지 한 명은 당연히 쿠퍼였다.
김검천이 왜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한 샤칸이 소리쳤다.
“아니, 김검천님! 이건 말도 안 돼! 도플갱어 하나를 잡겠다고 쿠퍼를 죽일 작정이야?”
김검천이 샤칸에게 도로 물어보았다.
“샤칸, 둘 중 누가 쿠퍼인지 알아냈나? 아니면 내가 말한 것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나?”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샤칸이 그답지 않게 대답을 우물거렸다.
샤칸이라고 해서 딱히 좋은 생각이 있어 나선 건 아니었다.
쿠퍼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던 것뿐.
김검천이 딱 잘라 말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서로 간에 불신만 깊어질 거다. 지금은 쿠퍼로 변했지. 이 자리를 벗어나게 되면 내일은 또 누구로 변신할까?”
김검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로 간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만약 도플갱어가 나로 변하면 너희들 중 망설임 없이 칼을 들 수 있겠나? 리에가 너희들을 죽이려고 들면 거리낌 없이 살해할 수 있을까?”
쿠퍼 일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라리 제가 죽었으면 죽었지 그런 건 못하겠군요.”
쿠퍼 이가 침중한 어조로 대꾸했다.
“죽이지 못하면 이쪽이 죽어야 하다니.”
앞에서 휘둘러지는 칼보다 등 뒤로부터 내려치는 칼이 더 무서운 법.
권력자들이 암살자를 무서워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보다 더욱 무서운 건 신뢰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습격.
매일 같이 웃고 떠들던 얼굴로 친구나 가족이 자신의 등 뒤에 칼을 박아 넣는 것이다.
그것도 먹고, 씻고, 잘 때 같은 취약한 때를 노려서.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다들 입을 다물고 있는 와중에 김검천이 미리내와 의논한 내용을 밝혔다.
“사실 너희들을 한곳에 모은 건 도플갱어를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성공했지.”
도플갱어도 김검천이 동료를 희생시켜가면서 자신을 죽이려 들지는 몰랐다.
알았다면 이 자리에 나타났을 리 없었으니까.
도플갱어로서는 제 발로 함정에 들어온 셈이었다.
먼저 쿠퍼 일이 납득했는지 허리를 숙여 자신 앞에 떨어진 나이프를 집어 올렸다.
“그러면 분란의 여지는 자신의 손으로 없애야겠군요. 그러기에 나이프는 좋은 도구지요.”
스스로 죽는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의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었다.
쿠퍼 일과 다르게 아직도 망설이는 쿠퍼 이를 향해 김검천이 싸늘하게 물었다.
“쿠퍼 일만 나이프를 들었군. 너와는 다르게. 혹시…?”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보인 말과 행동이 쿠퍼 일에 비해 수상쩍은 건 쿠퍼 이였다.
사람들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쿠퍼 이를 향했다.
쿠퍼 이는 무언의 압박에 밀려 떨리는 손으로 나이프를 집어 올렸다.
“제… 제길…”
김검천은 그 모습을 보며 조언했다.
“아래턱의 좌우에서 조금 내려간 부분의 경동맥을 베는 걸 추천하지. 확실하게.”
그 조언을 들은 쿠퍼 일이 피식 웃었다.
“그러면 고통은 없을 거라는 겁니까?”
“적어도 고통이 길지는 않을 거라는 건 장담하지.”
목동맥 손상 시에 뇌로 가는 혈류가 확 줄어들기에 즉각적인 반응이 온다.
쿠퍼 일이 나이프를 목에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이거 의외군요. 나이프가 닿았는데 생각보다 차가운 느낌은 안 드네요.”
쿠퍼 이가 투덜거렸다.
“지금 그게 중요해? 젠장, 정말 죽어야 합니까?”
내뱉은 말을 철회하는 대신 김검천은 다른 걸 강조했다.
“이것 하나만큼은 보장하지. 도플갱어는 더이상 우리에게 위험이 되지 않을 거다.”
쿠퍼 일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믿습니다. 김검천님은 저희들에게 입에 발린 말은 안 하시거든요.”
웃음을 그친 쿠퍼 일의 손에 힘이 들어가려는데 김검천이 말렸다.
“잠깐.”
“무슨 일이신지요?”
쿠퍼 일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사이에 생각이라도 달라진 것인가.
김검천이 쿠퍼 이를 가리켰다.
쿠퍼 이는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은 듯 떨리는 손으로 나이프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김검천은 도플갱어의 정체를 밝히고 싶어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었다.
단순한 변덕으로 쿠퍼가 죽는 걸 원하는 게 아닌 것이다.
“저쪽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쿠퍼 이, 네가 도플갱어라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
쿠퍼 이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저야말로 쿠퍼입니다!”
“그렇다면 너도 도플갱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라. 셋을 셀 테니 동시에 목을 찌르는 거지.”
“만약 찌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김검천이 딱 잘라 말했다.
“도플갱어가 자기 정체를 밝히는 셈이지. 우리가 아는 쿠퍼가 목숨을 아끼던가?”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쿠퍼는 동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김검천이 또다시 미묘하게 손을 움직이면서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겠지. 이제 너희들이 행동으로 보일 차례야. 자, 움직여라.”
쿠퍼 일과 쿠퍼 이가 목에 나이프를 가져갔다.
아까 전 김검천의 기묘한 손동작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죽음의 공포를 느낀 쿠퍼 일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침을 삼킨 목울대가 움직이자 대고 있던 나이프 끝에 살짝 찔렸다.
그런데도 아까처럼 목에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이상했지만 더이상 생각이 이어지기 전에 김검천이 숫자를 세었다.
“3, 2, 1!”
김검천의 신호가 끝났다.
그리고 쿠퍼 일과 쿠퍼 이는 각각 다른 소리를 만들어냈다.
- 카칵!
“너나 죽어라!”
쿠퍼 일의 나이프는 부드러운 목을 찔렀는데도 불구하고 날 부분이 부러졌다.
나이프를 막아낸 부위로부터는 푸른색의 빛이 은은하게 발산되고 있었다.
어느새 파워드슈츠로부터 시전된 실드가 쿠퍼의 목 부분을 방어하고 있던 것이다.
쿠퍼 이의 나이프는 주인의 목을 찌르는 대신 김검천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나이프를 던진 쿠퍼 이는 뒤도 안 보고 급히 몸을 날렸다.
마침 쿠퍼 이의 등 뒤는 식당의 출입구.
이 자리의 누구라도 도주하는 쿠퍼 이를 막을 수 없어 보였다.
쿠퍼 이가 뭔가에 부딪힌 듯 튕겨 나가기 전까지는.
- 쾅!
“억!”
쿠퍼 이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한 채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마치 단단한 벽에 전속력으로 달려들다 얼굴부터 부딪힌 사람같았다.
“역시 네 놈이 도플갱어였군.”
김검천은 망설이지 않고 받아냈던 나이프를 다시 쿠퍼 이를 향해 힘껏 던졌다.
나이프는 쿠퍼 이의 가슴에 박힌 채 함께 식당 출입구를 향해 날아갔다.
그건 맨몸의 김검천이 했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 콰직.
“아악!”
나이프와 함께 쿠퍼이는 출입구로 보이는 통로쪽 공중에 박혀 버렸다.
허공이 아니라 마치 벽에라도 매달린듯한 모습이었다.
고통 때문인지 쿠퍼 이의 얼굴이 기괴하게 흐물거렸다.
인간의 얼굴 구조는 절대로 액체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김검천이 소리쳤다.
“샤칸!”
“맡겨두라고! 괴물의 머리 부수는 건 이 몸의 장기지!”
이 순간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샤칸이었다.
잠시나마 도플갱어 따위에게 농락당한 분노가 금속 해머에 모여들었다.
샤칸은 그 분노를 모아 쿠퍼 이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려쳤다.
- 빡!
- 쿵.
머리가 반쯤 함몰된 쿠퍼 이가 고개를 박았다.
쿠퍼 이의 머리 부분이 물결처럼 일렁거리며 칙칙한 회색의 달걀처럼 변해갔다.
방금 전까지 팔딱거리던 몸도 축 늘어진 채였다.
김검천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괜찮은가? 쿠퍼.”
쿠퍼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김검천과 부서진 나이프를 번갈아 보았다.
“이거 제 몸이 나이프보다 단단할 줄은 몰랐습니다.”
김검천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쿠퍼의 목 부위로부터 실드가 팔랑거리며 김검천의 손가락 위에 앉았다.
“생각해보니 쿠퍼라면 내 실드 없이도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보이는군.”
“실제로 도전해볼 생각은 전혀 없지만요. 절 살려주신 일에 감사드립니다!”
쿠퍼가 김검천에게 고개를 숙였다.
김검천이 쿠퍼를 일으키며 반대로 사과했다.
“아니야. 오히려 네 목숨으로 도플갱어를 유인한 셈이니 내가 미안하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도플갱어는 사람의 생각을 읽는 마법 도구를 쓰는 것 같았다.
적을 속이려면 먼저 아군을 속여야만 했다.
그래서 무리하게 쿠퍼를 밀어붙이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김검천이 왜 이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덕분에 도플갱어도 제대로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던 것이고.
“미안하실 것 없습니다. 언제든 김검천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요. 또한…”
쿠퍼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전 김검천님이 누구도 내 사람을 해칠 수는 없다고 하신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거든요.”
김검천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이라니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든 것이다.
“테이룬과 겨룰 때 지나치며 한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물론이지요. 그러니 제가 어찌 김검천님을 믿지 못하겠습니까?”
“언젠가 내 능력이 모자를 일이 있을지도 몰라.”
“그게 어디 김검천님의 잘못일까요? 도움이 안 되는 제가 문제겠지요. 리에처럼 보호가 필요한 아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쿠퍼의 두 눈은 맑게 빛났고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지금까지 쿠퍼와 리에를 거두게 된 탓에 갖은 위험을 겪었던 김검천이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쿠퍼의 생명을 바친다고 해도 오히려 부족한 감도 있었다.
쿠퍼는 김검천이 목숨을 내어달라고 해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 된 것이다.
쿠퍼와의 대화가 끝나자 김검천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과의 말을 했다.
“다들, 미리 말을 하지 않아서 미안하다.”
만약을 대비해서지만 김검천은 모두를 속인 셈이었다.
세이야가 다른 사람들을 대표해 대답했다.
“아뇨. 김검천님이 그러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으셨던 거니까요.”
“이해해주니 고맙구나. 다들 할 말은 많겠지만 잠시 후 이야기하지. 먼저 할 게 있다.”
김검천이 축 늘어져 있는 도플갱어 앞으로 다가섰다.
“아직 살아있겠지? 나에게 몇 가지 답을 주었으면 하는데.”
도플갱어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샤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 죽은 것 같은데?”
- 부우웅.
김검천이 광선검을 꺼내 들어 도플갱어의 머리를 겨냥한 채 말했다.
“그러면 정말 죽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 방법을 써보도록 해보지.”
이거야말로 100% 확률로 사망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