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방적으로 불합리한 조건만 아니라면. 설마 팔다리 하나쯤 떼 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오히려 경호대장 엘프가 기겁했다.
“아니, 어떻게 그런 끔찍한 소리를?”
“그러면?”
“이 수갑만 차면 된다. 그렇다고 우습게 생각하지 마. 일단 차면 마스터 나이트도 물론 오우거 같은 괴물이라도 어찌할 수 없는 물건이니까.”
경호대장 엘프가 허리춤에서 금색과 갈색이 섞여 있는 수갑 하나를 내밀었다.
금속은 아닌 것 같은데 기묘한 광택이 어린 게 보기 드문 재질로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김검천이 망설이지 않고 양팔을 내밀었다.
경호대장 엘프가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나? 마을에서 손님으로 받아주지 않으면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는데.”
“내가 선택했으니까. 대신 다른 사람은 따로 물어봐야 해.”
“당연히 그래야겠지. 적을 잡아가는 게 아니니까.”
경호대장 엘프가 조심스럽게 김검천의 두 팔에 수갑을 채웠다.
광택이 나서 금속 재질인가 싶었는데 감촉이 좋은 걸 보니 그것도 아닌 듯했다.
김검천이 슬쩍 팔을 양쪽으로 당겨보았다.
수갑은 고무처럼 약간 늘어날 뿐이었다.
김검천이 수갑을 이리저리 다뤄보면서 물었다.
“이건 뭘로 만든 거지?”
“세계수의 일부와 우리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것이지. 그것 자체가 귀중한 소재인 거지.”
그저 단단하기만 하면 그 이상의 힘을 받거나 특정 각도에서 잘 박살 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금속 무기도 충격과 변형에 잘 견딜 수 있게 따로 열처리를 하는 것이었고.
워스덤이 앞으로 나서며 경호대장 엘프에게 질문을 던졌다.
“방금 세계수라 하셨소? 세계만큼 크다는 엘프의 나무가 맞는 거요?”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온 게 아닌가?”
“그건 처음 들었소. 우리는 하이엘프가 결계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찾아온 것 뿐인오. 아, 본인도 수갑으로 묶어 주시구려. 빨리 해주시면 고맙겠소.”
기묘한 표정을 지은 경호대장 엘프가 턱짓을 하자 검사 엘프가 다가가 수갑을 채웠다.
워스덤이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수갑을 얼굴에 비볐다.
“이것이 세계수로 만들었다는 수갑. 과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촉이 끝내주는구려.”
검사 엘프가 급히 워스덤에게 떨어졌다.
전투를 벌일 때보다도 더 두렵다는 시선을 워스덤에게 보내면서.
“뭐야, 인간, 무서워…”
샤칸이 뒷걸음치는 검사 엘프에게 다가섰다.
검사 엘프가 떠듬거리며 말했다.
“뭐… 뭐냐?”
샤칸이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도 워스덤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게 어떤지 체험해 봐야 하니까 이 몸도 빨리 묶어줘! 저 인간에게 질 수는 없지!”
샤칸이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워스덤을 노려보았다.
드워프가 되어서 인간 마법사에게 뒤질 수는 없었다.
변태적으로 보이는 광경에 루시엘이 머리를 짚었다.
“제발 이런 걸로는 경쟁하지 말아 주었으면 합니다만…”
그런 드워프와 인간 마법사로부터 빨리 떨어지고 싶다는 건 다른 엘프들도 비슷한 모양.
손이 비어있는 검사 엘프가 루시엘에게 급히 다가섰다.
“그쪽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들 하신다는 데 일행인 저만 빠질 수는 없겠지요.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팔을 이쪽으로 해주시기를.”
인간인 김검천부터 드워프인 샤칸까지.
모두 사이좋게 수갑을 찬 모습은 괴기하기까지 했다.
모두가 순순히 수갑에 묶이는 모습에 경호대장 엘프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잡아가는 본인이 묻기에 좀 그렇지만 정말 궁금하군. 다들 뭘 믿고 수갑을 찬 거요? 운이 나쁘면 그 수갑을 찬 채로 죽을 수도 있는데.”
이미 경고를 했는데도 한 사람도 망설이지 않고 제안에 응하다니.
망설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하는 자들도 있었고.
일행들의 시선을 느낀 김검천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들은 나를 믿으니까. 나는 저들을 믿고. 그러니 저들은 의심없이 나를 따르는 거지.”
경호대장 엘프는 처음 인간을 보는 듯이 김검천을 쳐다보았다.
이런 곳에서 사는 만큼 인간을 그렇게 자주 보는 건 아니다.
그렇다 해도 이런 종류의 사람은 처음 만난 것이다.
“자신감인가? 자만감인가?”
“편한 대로 생각하라고.”
경호대장 엘프가 김검천 옆에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다른 검사 엘프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정말 최악의 경우라면 가능한 수갑만큼은 풀 수 있도록 협조해 보지.”
“마을에서 손님으로 받아주지 않는데도 말인가? 그러면 네가 위험할 텐데.”
“너희 처우는 마을 장로회에서 결정할 일. 거기에 반발하는 건 내 마음이야.”
경호대장 엘프가 중얼거렸다.
넘겨받은 화살을 소중하게 만지작거리면서.
“그거 아나? 이 친구는 정말 멋진 엘프였어. 마을을 이끄는 다음 대장로가 될 거라도 다들 믿었지.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자들도 넘쳐났고.”
“능력도, 성격도 훌륭한 엘프였군. 그런 엘프가 왜 마을을 나간 거지?”
“그러게 말이야. 그런 친구의 마지막 소식을 전해온 자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지.”
“마음만이라도 고맙군.”
“경호대장님!”
경호대장 엘프는 자신을 부른 검사 엘프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샤칸의 금속해머를 두 손으로 질질 끌고 움직이던 검사 엘프가 물었다.
“이들의 무기는 어떻게 처리합니까?”
“규정에 따라 마을에 들고 가야지.”
“하지만 너무 무겁습니다. 이것만 해도 양손으로도 들기 힘듭니다.”
경호대장 엘프가 검사 엘프를 꾸중했다.
“드워프는 한 손으로 다루던 무기도 못 들고 가겠다는 건가?”
검사 엘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무기만 가져간다면 어떻게든 못 하겠습니까. 다만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합니까?”
경호대장 엘프가 흠칫했다.
김검천 일행들이 가져온 친구의 유품에 너무 집중한 모양이었다.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하다니.
검사 엘프의 말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를 놔두고 가기에는 그랬다.
야생 동물뿐만 아니라 김검천 일행처럼 느닷없이 침입할 자가 있을지도 몰랐고.
그럴 확률은 낮았지만 남의 목숨을 걸고 행동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것이다.
경호대장 엘프가 검사 엘프에게 명령했다.
“별수 없군. 마을까지는 본인과 다른 한 명이면 될 테니 네가 여기서 지키고 있도록.”
경호대장 엘프는 마을에 도착한 후 다른 엘프들과 함께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현재로서는 이게 그나마 최선책으로 보였다.
고민하는 모습에 김검천이 나섰다.
“괜찮다면 우리가 도와주도록 할까?”
의외의 행동에 경호대장 엘프가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
“이들을 업고 가주겠다는 건가?”
수갑을 찼다고 해도 발까지 묶인 건 아니었다.
다친 엘프는 모두 5명이니 등에 짊어지고 가면 운반은 가능할 거 같았다.
적어도 이런 곳에 내버려 두고 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움직이는 데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응? 그게 뭔가?”
“우리가 뭘 타고 왔는지 보여주지. 다목적 무인차량, KK210Mk1 기동. 사이드 윙 개방.”
- 키이잉.
무인차량 양쪽 옆에서 날개 같은 세모 판이 밀려 나왔다.
엘프들은 저절로 움직이는 무인차량에 저도 모르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김검천이 느긋하게 말했다.
“너무 겁먹지 말라고. 다친 엘프들을 운송하기 편하게 모습을 약간 변형시킨 거니까.”
엘프들이 신기한 듯 무인차량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결계 안에서만 살다 보니 이런 물건은 처음 본 것이다.
경호대장 엘프가 그러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이게 마차라는 건가? 누가 운전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인다는. 이런 기능까지 있다니.”
“마차가 아니라 무인차량이야. 아무튼 그들을 날개 위에 올려 두면 될 거다.”
다친 엘프들을 무인차량 위에 올려 두자 김검천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리도 같이 무인차량에 타고 이동하자고.”
“예, 김검천님!”
그 말에 당연한 것처럼 김검천뿐만 아니라 일행들도 무인차량에 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갑까지 차 놓고 너무 태연한 모습 아닌가.
지켜보던 경호대장 엘프가 기가 막힌 듯 입을 열었다.
“아니, 너희들까지 그 마차…”
“무인차량.”
“그래, 그 무인차량에 타고 이동하겠다니. 너희 상황이 어떤지 알고 그러는 건가?”
김검천이 수갑에 묶인 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
“착각하지마. 우리가 수갑을 찬 건 너희 마을로 가기 위해 협력하는 것뿐이야. 안 그래?”
“윽,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아까 네 입으로 우리는 손님인지 침입자인지 판명이 안 났다고 하지 않았나?”
손님 대접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침입자로 잡혀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어떻게 이동하든지 참견받을 일은 아니었다.
대꾸할 말이 없었던 경호대장이 입을 몇 번 우물거리다 닫았다.
너무 당당한 행동에 놀라서 참견한 것이지 그도 억지 부릴 생각은 없었다.
“마음대로 해라.”
“혹시 너희들도 타고 싶으면 태워줄 테니 올라오라고. 생각보다 재밌는데.”
검사 엘프들이 경호대장 엘프의 눈치를 보았다.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저런 모습이라니.
경호대장 엘프가 눈을 부라리며 뒤쪽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이 몸도 걸을 테니 네 놈들도 걷는다! 너희는 행렬 맨 뒤쪽을 경계하고. 알겠나?”
“알겠습니다!”
검사 엘프 2명이 아쉬운 표정으로 행렬의 맨 뒤에 섰다.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기왕이면 편하게 갈 것이지. KK210Mk1. 안전 이동 개시.”
[이동 개시.]
- 부르릉.
음성 명령을 인식한 무인차량이 천천히 바퀴를 굴렸다.
댕댕이가 운전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조작뿐만 아니라 원격기능도 탑재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엘프들이 신기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김검천이 굴러가는 무인차량을 멍하니 보고 있는 엘프들을 향해 말했다.
“뭐하나? 너희는 안 움직일 건가?”
그제야 검사 엘프들이 바쁘게 다리를 움직였다.
수갑을 찬 김검천이 오히려 엘프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모양이었다.
워스덤이 고개를 돌리며 김검천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댕댕이는 어디 간 겁니까? 아까 전부터 조용하던데요.”
“왕왕!”
거기에 답이라도 하듯이 댕댕이가 짖는 소리가 무인차량 옆에서 들려왔다.
김검천이 돌아보니 댕댕이가 엘프 아이에게 찰싹 붙어 있었다.
저렇게 친근한 모습을 보이는 건 함선 사람 말고는 처음이었다.
자연과 함께 사는 엘프인 데다가 아이라서 좀 더 동물과 친화적인 모양이었다.
“댕댕이 녀석. 오랜만에 놀아줄 상대를 찾아서 신이 난 모양이야.”
***
“이제 곧 도착한다. 주변에 다른 자들은 없나?”
“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좋아. 결계를 풀고 들어설 때까지 주위를 잘 살피도록.”
- 부우웅.
샤칸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자신의 손가락만 한 벌레 한 마리가 주변을 날고 있었다.
“숲이라서 그런가? 무슨 벌레가 숲 입구서부터 여기까지 계속 보이는 거야.”
“하압!”
경호대장 엘프가 갑자기 칼을 빼 들고 샤칸을 향해 날아들었다.
푸르게 빛나는 칼이 느닷없이 샤칸의 주변을 베고 지나갔다.
샤칸이 화를 냈다.
“갑자기 무슨 짓이냐! 이 귀쟁이 놈아! 한번 해보자는 거냐?”
칼로 바닥을 찍은 경호대장 엘프가 무기를 높이 들어 올렸다.
칼에는 반 토막 난 큼직한 벌레 한 마리가 꽂혀 있었다.
경호대장 엘프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칼을 휘둘러 벌레를 떨구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그쪽에 별일 없어서 다행이야.”
“다행은 무슨! 벌레 잡는 데 누가 마령검까지 사용한다냐?”
“뭘 모르는군. 지금 우리들은 현재 벌레와 전쟁 중이야. 생각보다 위험한 놈들이거든.”
샤칸이 콧방귀를 꼈다.
벌레가 위험하면 얼마나 위험하다는 건지.
샤칸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었다.
경호대장 엘프가 그런 샤칸은 신경 쓰지 않고 등을 돌렸다.
샤칸이 투덜거렸다.
“지금 무시하는 거냐?”
“아니, 결계를 열어야 하니까 그런 거다. 할 말 있으면 나중에 하라고.”
경호대장 엘프가 두 눈을 감고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 치칙치칙.
뻗어낸 두 손으로부터 푸른 불꽃이 튀었다.
그 불꽃이 다시 금색으로 변하는 순간.
숲에 막 진입했을 때처럼 사람들의 눈앞 광경이 완전히 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나무와 수풀만이 우거져 있던 숲속이었다.
지금은 구름을 찌를 듯이 보이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출현한 것이다.
그 나무는 높고 또 높아서 지상에서는 그 끝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김검천이 보기에 건물로 따지면 100층도 넘을 듯한 높이로 보였다.
이 거대한 나무는 엘프들이 친 결계 속에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던 것이다.
그 거대한 나무의 가지를 따라 엘프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마을 곳곳에 수많은 엘프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고.
나무 같은 자연환경은 부수거나 유용하게 쓰는 걸 선호하는 샤칸마저 감탄했다.
“이게 세계만큼 크다는 엘프의 세계수인가? 크기는 정말 크군.”
“후, 그렇게 보이나?”
검사 엘프 한 명을 엘프 장로들에게 먼저 보낸 경호대장 엘프가 웃었다.
샤칸이 의아해했다.
“방금 전 이야기에 뭔가 웃긴 내용이라도 있었나?”
“아니, 이걸 세계수라고 여기다니 의외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거대한 나무가 세계수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