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주변을 관찰하던 김검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계수 본체는 아니라서 그렇게 말한 걸 거야. 관련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경호대장 엘프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세계수와 연관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네가 샤칸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세계수는 아니지만 세계수와 관련 있다면 묘목인가?”
김검천은 이세계 사람이 아니었기에 보다 객관적으로 사실에 다가갈 수 있었다.
또한 종류는 다르다지만 이 나무보다 큰 함선을 움직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무의 높이에 위압당하지 않고 차분히 살펴 볼 수 있던 것이다.
“놀라운 견식이로군. 그 말대로 저 어린 나무는 세계수가 세상에 남긴 흔적 중 하나지.”
경호대장 엘프의 말에 따르면 세계수 본체가 어디 있는지 아는 엘프는 없다고 했다.
세상 어딘가에 모습을 숨긴 세계수를 찾는 건 포기하고 찾아낸 묘목을 관리할 뿐.
그렇다고 해도 이곳 엘프들에게 있어서는 이 묘목이야말로 세계수 못지않은 존재였다.
저 나무가 있었기에 이런 척박한 곳에서도 마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니까.
김검천이 말했다.
“그렇다면 나 말고 샤칸의 말도 맞는 셈이겠군. 어찌 되었든 세계수는 세계수니까.”
“으음, 드워프의 머리도 장식이 아니라는 건가.”
“경호대장님!”
샤칸이 뭐라고 하려는데 멀리서 한 검사 엘프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오랜만의 개인적인 대화를 방해받은 경호대장 엘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지?”
“엘프 장로님들께서 엘프의 숲에 침입한 자들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벌써?”
경호대장 엘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수명이 긴 종족들은 보통 그렇듯이 엘프도 느긋한 편이었다.
뭔가를 만드는 드워프가 예외에 속하는 쪽이었고.
엘프 중에서도 엘프 장로들의 일 처리는 더 느렸다.
그런데 보고를 받자마자 바로 김검천 일행을 데려오라고 하다니.
짐작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경호대장 엘프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풀렸다.
“일단 그쪽으로 이동하도록 하지.”
“그리고 보고 드릴 게 한 가지 더. 숲을 순찰하던 엘프들 중 1명이 죽고 1명이 다쳤습니다.”
“그 벌레 때문인가? 이번에는 죽은 자까지 나오다니. 날이 갈수록 피해가 심해지고 있어.”
“요즘 들어 불길한 일들이 계속 발생합니다. 이들 같은 외부인들 때문일까요?”
검사 엘프가 김검천 일행을 적의를 가지고 노려보았다.
경호대장 엘프가 그를 꾸짖었다.
“멍청한 생각. 넌 몇 명을 더 데리고 지원을. 보고는 본인이 대장로께 가는 김에 하지. “
“알겠습니다!”
- 부우에엥.
그렇게 대화 중 열린 결계 틈으로 날아다니던 벌레 몇 마리가 마을로 넘어가는 게 보였다.
김검천 일행 말고 엘프들은 거기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는지 결계는 그대로 닫혔다.
김검천 일행은 결계를 통과한 입구부터는 무인차량에서 내려 움직였다.
걸어서 엘프 마을을 둘러보는 쪽이 주위를 관찰하기 더 좋아서였다.
그렇게 엘프 마을을 가로지르는데 주변 엘프들의 시선이 김검천 일행에 쏠렸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손님도 아닌 자들이 엘프 숲도 아니고 마을까지 온 건 처음이었다.
비록 반항하지 못하도록 특제 수갑을 차고 있는 대상이긴 했지만.
엘프들이 수군거렸다.
“저기 봐, 이종족이야.”
“읔, 이게 인간과 드워프? 귀가 짧다니 이상해.”
“엄마, 저게 뭐야?”
“얘야, 보지 마렴. 그런 것 보는 게 아니란다.”
“가까이 가지마. 위험한 종족들이야. 물릴 수도 있어.”
“수갑으로 묶여 있는데 해봤자지.”
대화만 들어보자면 이 엘프들은 도대체 인간과 드워프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의문이었다.
두 눈을 가진 자는 외눈박이만 모여있는 마을에 가면 정상이 아니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처럼 정보가 제한당한 닫힌 사회라서 왜곡된 지식도 진실로 받아들이는 모양.
엘프는 다들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의심없이 그런 것도 받아들이는 듯 했다.
물론 그런 사회나 종족이라도 특이한 개체는 어디든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많은 엘프 몇 명이 일행 중 가장 모습이 이질적인 드워프, 샤칸에게 다가섰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손까지 대려는 듯한 행동.
생전 처음 보는 엘프라도 샤칸이 귀찮게 구는 녀석들을 그냥 참고 넘길 리 없었다.
“캬악!”
- 따딱!
샤칸이 크게 입을 벌려 엘프들을 물어뜯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다리가 짧아 발차기는 힘들고 손은 수갑에 묶여 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거리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엘프들은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헉! 진짜 물잖아?”
“드워프는 가까이 가면 문다. 글로 적어둘까?”
“그런 가치없는 것도 남길거냐. 저런 야만스러운 종족을 왜 우리 마을에 들여보낸 거야?”
다른 일행들이 모두 샤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첫 대면에서 야만스럽다고 평가를 받다니 과연 평소의 샤칸다웠다.
엘프들의 평가따위에 슬쩍 멀어지는 행동을 보이는 동료들이라니.
오늘따라 서러운 기분이 든 샤칸이었다.
샤칸이 투덜거렸다.
“뭐, 왜, 뭐? 이래서 귀쟁이들이란.”
경호대장 엘프가 손을 내저으며 다가오는 엘프들을 쫓아냈다.
김검천 일행은 엘프들의 장난감 취급을 당하기 위해 데려온 게 아니었다.
“일반 엘프는 저리 가라. 지금 이들은 장로님들께 데려가는 중이다.”
샤칸에게 정신이 팔린 호기심 많던 엘프들이 그제야 경호대장을 본 모양이었다.
“직접 이들을 데리고 가시는 중인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모여든 엘프들이 빠른 걸음으로 이 자리를 벗어났다.
몇 마디 만으로 엘프들을 물린 경호대장 엘프에게 김검천이 물었다.
“넌 의외로 이 마을에서 높은 지위에 있나 본데?”
“발언권이 있는 편이긴 하지. 장로님 바로 밑이니. 정말 높으신 분들은 장로님들이지만.”
“기대해도 되겠나?”
“무슨 기대인지 모르지만 하지마. 너희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건 본인이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다들 긴장같은 건 안 하는가?”
워스덤을 보니 이미 다른 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걸어서 이동하던 워스덤이 흙바닥을 슬쩍 발로 문질렀다.
흙을 치우니 지면 아래에 갈색의 울퉁불퉁한 게 드러났다.
워스덤이 뒤에 있던 검사 엘프에게 물었다.
“이 나무 뿌리같이 생긴 건 뭡니까?”
검사 엘프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뿌리 같이 보이는 건 나무뿌리라서 그런 겁니다.”
“이게 그냥 나무뿌리라니! 입구부터 마을 한복판까지 이런 게 연결되어 있는데 정말이오?”
“좀 길고 넓게 펼쳐져 있긴 하지만 저 크기와 높이를 보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요.”
워스덤이 고개를 높이 들어보았다.
아직 어린나무라지만 끝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은 높이.
하긴 가지가 마을을 형성되도록 뻗어 있으니 뿌리도 그 정도는 될 것 같았다.
흥미로워하는 건 워스덤 만이 아니었다.
루시엘은 그렇다치고 이런 쪽에 둔감한 드워프인 샤칸마저 어딘가 들뜬 표정.
확실히 크고 웅장한 것들은 지성체의 가슴을 울리는 존재였다.
태연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건 김검천뿐.
경호대장 엘프가 김검천에게 물었다.
“의외인데. 저 세계수를 보고도 담담한 사람이 있다니.”
김검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놀랍기는 해. 그저 진짜 세계수가 보다는 생각을 하니 괜히 침착해 지더군.”
세계수라면 정말로 세계를 덮을 듯한 위용을 갖추고 있을 것이었다.
마을 하나를 덮을 정도로는 김검천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했다.
“그렇다 해도 보통은 놀라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사는 집보다는 작아서 감동을 덜 받게 된 건지도 모르지.”
그 말대로 함선 미르는 이 세계수 묘목보다 더 컸다.
함선은 마을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작은 도시 정도는 되는 크기였으니까.
10만 명 이상이 살아도 반영구적으로 동작 가능하게 설계된 곳이기도 했고.
경호대장 엘프가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상대가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 판별하는 데 엘프만 한 종족이 또 어디 있겠는가.
김검천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곳이 있다면 언젠가 한 번쯤은 꼭 보고 싶군.”
“놀러 올 수 있다면야 초대해주지. 마물의 숲에 있어서 오는 길이 험하긴 하지만.”
경호대장 엘프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초대 받는 입장이니 집주인에게 이름은 밝혀야겠지. 리피엘이라고 한다.”
“난 김검천이라고 하지. 이미 들었겠지만 이름을 밝혔으니 다시 말해주는 거야.”
“이런, 알고 보니 예의 바른 인간이었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상황과 상대에 따라서 내 태도도 달라지거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이동하던 그들은 세계수 묘목의 밑동에 도달했다.
나무 밑에는 하나하나가 작은 방 하나 크기인 잎사귀들이 떨어져 있었다.
김검천은 지나가기 위해 푸른 잎사귀를 밟았다.
- 뽀용.
세계수 묘목의 나뭇잎이라지만 잎에 불과할 텐데 탄력 있는 방석을 밟은 것 같았다.
샤칸이 열심히 나뭇잎을 밟으며 재밌어했다.
“이거 무인차량에 실어가면 안 될까? 그러면 멀미도 덜할 거 같은데.”
루시엘이 대꾸했다.
“나뭇잎은 당신에게 유용하게 쓰일 바에 땅에서 곱게 썩어가기를 바랄 겁니다.”
“적어도 나뭇잎보다는 낫다고 해줘!”
“알겠습니다. 나뭇잎보다 더한 샤칸.”
“뭔가 욕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이겠지?”
그 옆에서 워스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호오, 세계수 묘목의 나뭇잎은 이렇군요. 확실히 수갑과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리피엘이 아는 척 나섰다.
“수갑에만 쓰이는 게 아니다. 그 외에도 일상생활부터 마법까지 다양하게 사용된다.”
“그렇다면 잎 말고도 줄기, 껍질, 뿌리 등도 쓰이는 겁니까?”
“세계수의 묘목에서 나온 건 하나도 버릴 게 없다. 덕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거다.”
그렇게 걷다 보니 한쪽 부위가 낙엽을 밟기라도 하듯이 으스러지는 나뭇잎이 있었다.
그 나뭇잎은 푸른색이 아니라 노랗고 검게 죽어 있었다.
마치 세계수 묘목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아까 말한 말이 생각나 김검천이 리피엘에게 물어보았다.
“그런 것 치고는 여기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보면 대우가 별로 좋은 건 아닌듯한데.”
세상 모든 것에 장점만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 시점의 엘프 마을에 있어서는.
리피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잘 파악했군. 그것들은 병든 나뭇잎들이라서 그런 거다. 정상적인 잎들과는 다르지.”
“쓸 곳이 없다는 건가?”
“그러기만 하면 다행이다. 이대로 방치해두면 독소가 발생해 엘프들을 병들게 만들지.”
리피엘의 말에 김검천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묘목이라고 하지만 세계수의 자손인 만큼 엘프 마을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컸다.
그만큼 크고 많은 나뭇잎이 마을 곳곳에 떨어져 있었고.
마을에 들어서자 바쁘게 움직이던 엘프들이 보인 이유가 있어 보였다.
이미 썩은 나뭇잎 때문에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었다.
“묘목 어딘가에 문제가 생긴 건가?”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지 묘목이 병이 든 줄 알았지. 알고보니 근래 새로 나타난 벌레 때문이더군.”
지구에서도 병충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보통 식물이 망가지는 건 병균에 의한 병해, 그리고 해충에 의한 충해가 원인인 것이다.
크기만 보면 정말 나무인가 의심스러운 구석도 있지만 이런 걸 보면 나무이긴 한 모양.
리피엘이 몸을 돌려 세계수 묘목의 줄기와 뿌리의 접합 부근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원형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었는데 그 주위에 엘프들이 앉아 있었다.
누군가 아직 도착 안 했는지 중간부근에 비어있는 작은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고.
기분 탓인지 몰라도 리피엘은 방금 전까지 다르게 사무적인 태도를 취했다.
보통 이런 자세는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대할 때 나타났다.
“장로님들이 여기까지 나오시다니. 오늘따라 희한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군요.”
루시엘에게 듣기로 대부분의 엘프 장로는 보통 엘프의 수명 한계에 가까운 자가 뽑혔다.
오래 사는 만큼 엘프 자체가 살아있는 기록물.
책으로 기록을 남기기보다 입으로 구전하는 걸 선호하는 게 엘프들이었다.
500세에 가까운 수명을 지닌 만큼 지나친 세월만큼 지식이 쌓이는 것이다.
물론 지식과 지혜는 별개의 일.
엘프 장로들은 나이가 많이 들어서인지 여태까지 본 엘프들보다 활기가 없어 보였다.
머리숱도 다른 성인 엘프보다 적어 보였고.
그렇다 해도 확실히 인간보다는 육체의 노화 속도가 느려 보였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는데도 장로들은 중년에 가까운 외모를 하고 있었으니까.
머리가 약간 하얗게 셌거나 약간 주름이 보일 듯 말듯한 정도가 끝이었다.
인간이라면 제대로 걷기도 힘들 텐데 발걸음에 힘이 실린 것도 그렇고.
금빛 목걸이를 한 엘프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로들 중에서도 특히 어두운 기색이 얼굴에 서려 있는 엘프였다.
“어차피 회의 중이었다네. 이 자리에서 침입자들에 대한 처분도 내릴 작정이고.”
“알겠습니다. 대장로님. 그런데 이들은 단순한 침입자가 아닙니다.”
“알고 있다네. 녀석에 대한 소식을 가져왔다고 하더군.”
장로 중에서 대표를 맡고 있어서 대장로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대장로를 향해 리피엘이 품속에서 화살을 꺼내 들었다.
“소식 말고도 그의 유품도 가져왔습니다.”
리피엘이 건네는 화살을 대장로가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한눈에 화살의 누구 것인지 알아본 것이다.
“멍청한 놈이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구나…”
대장로가 화살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누가 이 일행 중에 대표인가?”
김검천이 앞으로 나섰다.
대장로가 고개를 숙였다.
“대장로님?”
“엘프, 그것도 장로의 몸으로 어찌 인간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거요?”
다른 장로 엘프들이 대장로에게 항의했다.
대장로가 손을 저었다.
장로 엘프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같은 장로라지만 대장로야 말로 이 마을을 수백 년간 실제로 이끌어 온 엘프였으니까.
대장로가 고개를 들고 김검천에게 말했다.
“먼저 고맙다는 말부터 하지. 너희들이 가져온 건 본인이 아끼던 아이의 유품이다.”
대장로의 태도는 정중하고 부드러웠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거 같았다.
대부분의 일행이 그렇게 생각했다.
대장로가 다음 말을 내뱉기 전까지는.
“하지만 침입자는 침입자. 원칙에 따르자면 너희들은 죽거나 마을에서 추방이다.”
추방이라는 말도 곁들이기는 했지만 죽을 게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
그건 긴장이 풀려가던 모두가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