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그때였다.
이 상황에서 대장로의 말에 참견할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나타난 건.
“잠깐. 이 몸도 대장로의 말에 이의 있다.”
“왕왕!”
시선을 돌리니 마을 밖에서 본 엘프 아이와 댕댕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댕댕이는 엘프 아이 주변을 꼬리를 흔들며 열심히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샤칸이 기가 막힌 듯 중얼거렸다.
“댕댕이 녀석, 어디 갔다 싶었는데 이제껏 저 아이랑 놀고 있었나? 속도 편하네.”
루시엘이 대답했다.
“그래도 우리 편이 둘이나 더 늘어났으니 마음 든든해지지 않습니까?”
“하나가 아니라?”
“엘프 아이와 댕댕이면 둘이지요.”
“헹, 저런 연약한 엘프 아이가 무슨 힘이 된다고.”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이제 보니 저 아이는 보통 신분이 아닌듯합니다.”
루시엘의 말대로 주변의 엘프들은 엘프 아이를 향해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겉모습과는 반대로 다른 이유가 있는 듯한 상황.
심지어 엘프 아이가 걸어 나오자 앉아 있던 엘프 장로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장로 역시 공손한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이제야 오셨군요. 하이엘프시여.”
“이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이 몸 없이 결정할 작정이었나?”
대장로가 미소를 지었다.
속마음이 어떻든 간에 하이엘프야 말로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
적어도 존경하는 태도를 겉으로 보여줄 필요는 있었다.
“그럴 리가요.”
“그러면 이 몸도 회의에 참여해도 된다는 말이지?”
“물론입니다. 참석하시는 건 하이엘프의 자유 아니겠습니까.”
하이엘프.
엘프 중에서도 순수한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엘프를 말했다.
수명 또한 일반 엘프가 500년 정도라면 하이엘프는 1000년 이상을 산다고 한다.
보통 금발을 하고 있는 평범한 엘프와는 달리 은색인 머리색부터 달랐다.
방금 전까지 태연한 기색이던 루시엘이 깜짝 놀란 모습을 보였다.
저 엘프 아이가 엘프 사회 어디를 가도 존중받는 하이엘프라니.
하이엘프라면 그 특징때문에 자신이 못 알아볼 일이 없었다.
“말도 안 돼. 하이엘프는 분명 머리가 은색일 텐데 당신은 백금색이지 않습니까?”
“아, 이것 말인가?”
하이엘프가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머리가 백금색에서 반짝이는 은색으로 점점 물들어갔다.
하이엘프가 루시엘을 보며 웃어 보였다.
“마법도구로 변장한 거야. 가끔은 평범한 엘프 아이처럼 돌아다니고 싶을 때가 있거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이엘프가 어찌 마음대로 움직이겠는가.
특이한 머리색이니 머리색을 바뀌는 것만으로 멀리서는 하이엘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을 엘프들도 가까이에서 확인해야 하이엘프인지 알아 보는 것이다.
하이엘프가 대장로를 포함한 엘프 장로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이 같은 철없는 행동에 대장로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하이엘프시여. 체통을 지키시지요.”
“이 몸의 체면 같은 것보다는 지금 상황이 더 문제가 아닌가. 대장로.”
“연세가 500살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아이같이 구시는 행위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들과의 이야기나 제대로 진행해보는 게 어떤가?”
하이엘프가 비어있던 작은 좌석에 가서 앉았다.
하이엘프가 앉으니 딱 맞은 걸 보니 원래 그를 위해 준비된 의자였던 것이다.
하이엘프는 대장로와 엘프 장로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간단히 알려 준 후 물었다.
“이들은 강한 힘을 가졌는데도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 몸은 벌써 죽었을 테지.”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다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하이엘프가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의자가 앞뒤로 흔들렸다.
복잡한 하이엘프의 마음을 보여주듯이.
“규칙이라. 대장로의 말대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규칙을 지키는 게 필수지.”
“하이엘프께서도 규칙의 중요성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치만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대장로가 말을 듣지 않는걸. 어떤 규칙이라도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지. 지금 세계수에 문제가 생긴 건 알잖아.”
하이엘프가 한 곳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이제 곳곳에 검은 반점이 생겼거나 아예 검게 죽은 나뭇잎이 쌓여 있었다.
치워도 치워도 계속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뭇잎들은 멈추지 않았다.
대장로는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곧 세계수 묘목은 회복될 겁니다.”
“그렇지 않아.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가 천천히 말라 죽어갈 거라고. 그게 묘목이든 엘프든.”
“최근 나타난 벌레들에 의해 묘목이 심한 피해를 입어 그러십니까? 문제 없을 겁니다.”
“허어, 이거 본인의 말조차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다니. 어째서 변하려 들지 않나?”
“그건 대장로로서 마을 엘프들의 안전을 위해 규칙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이엘프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하이고, 이거 답답해서. 그러니 리피엘마저도 너에게 반항한 거겠지.”
“제가 하는 행동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으니까요.”
하이엘프가 작은 입을 딱 벌렸다.
하이엘프라고 해도 인간들의 왕처럼 절대적인 명령권을 가진 건 아니었다.
태고적부터 내려온 혈통에 대한 존중과 경외의 대상으로 엘프들의 협조를 받아낼 뿐.
그렇다 해도 하이엘프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대놓고 거절하다니.
하이엘프가 대장로에게 보다 강하게 지시했다.
“대장로, 하이엘프의 이름을 걸고 말하는 거네. 이들을 풀어주게나.”
“멍멍!”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댕댕이도 하이엘프의 말에 동조했다.
잠시 망설이며 고민하는 듯하던 대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하이엘프시여.”
대장로의 고집은 세상의 어떤 요새보다도 튼튼하다는 걸 하이엘프도 드디어 깨달았다.
그 고집을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지켜보던 엘프들도 모두 두 눈을 부릅떴다.
실권을 쥔 대장로라고 해도 하이엘프의 말은 존중해야 했다.
그게 엘프 사회의 암묵적인 규칙 아니었는가.
대장로는 지금 정면에서 하이엘프의 지시를 거부한 것이다.
항상 규칙을 말하던 그가 하이엘프를 존중한다는 엘프들의 암묵적인 규칙은 지키지 않다니.
엘프들의 마음속에서 하이엘프와 대립하는 대장로에 대한 반발심이 솟아났다.
하이엘프가 자리에서 일어서 앙증맞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장로, 본인의 말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거부라니요.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조언은 하실 수 있지만 실권은 없다고요.”
“대장로!”
“하이엘프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많이 피곤하신 모양이다. 모시고 가도록.”
“싫다! 누구 마음대로!”
대립되는 두 엘프의 말에 엘프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졌다.
하이엘프는 모든 엘프들이 존중해야 하는 대상.
대장로는 마을의 실권자로서 엘프들은 수백 년 이상 그의 명령에 따라왔다.
머리로는 하이엘프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몸은 대장로의 명령에 익숙해졌다.
적어도 당장은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혼란에 빠진 엘프들을 보던 대장로가 장로들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 이런 일에는 아직까지 우리들이 나서야 하는 모양이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게 다 마을을 위해서 아닙니까?”
“하이엘프께서도 좀 휴식이 필요하시긴 하지요. 그 나이에 아직 철이 덜 드셨으니.”
장로들이 하이엘프에게 다가섰다.
대장로와 장로들은 규칙에 잡혀 스스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엘프들을 위해 규칙을 만들었으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엘프들을 희생시키는 상황처럼.
샤칸이 루시엘에게 물었다.
“엥? 우리 편이 줄게 생겼는데? 엘프는 상위종인 하이엘프를 저렇게 다루는 게 규칙인가?”
샤칸의 말에도 할 말이 없는 루시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대장로가 마을의 안위를 위해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엘프지만 엘프들이 말이 안 통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하이엘프까지 이렇게 대우하는 건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닫힌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상식마저도 어긋나게 만드는 힘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외눈박이만 있는 마을에서 두 눈을 가진 자는 그 마을의 규칙에 어긋난 존재인 것이다.
“대장로! 지금 하이엘프께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겁니까?”
대장로가 루시엘의 시선을 마주했다.
대장로가 지닌 칙칙하고 혼탁한 눈빛에 루시엘이 흠칫했다.
이미 살아갈 의지를 잃은 자의 모습 아닌가.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답변이 돌아왔기에 겨우 정신을 차린 루시엘이었다.
“지금 당신이 벌이고 있는 짓인데 말입니까?”
“너희들이 이곳으로 찾아오지 않았다면 하이엘프께 무례를 범할 일도 없었을 테지.”
“그게 순리에 따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순리는 규칙이다. 그동안 무수한 희생을 치르며 지켜왔는데 여기서 멈출 수 없지.”
고장 난 인형같이 되풀이되는 대장로의 언동.
아들마저 이해 못한 규칙으로 마을의 엘프를 압박한 끝에 결국 하이엘프까지 거부하다니.
루시엘은 저절로 몸이 떨려왔다.
미친 자는 자신이 미쳤다고는 하지 않는다.
대장로는 규칙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거기에서 헤어나오려면 보다 강한 충격 요법이 필요했고.
김검천이 루시엘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가소로운 모습에 대장로가 피식 웃었다.
“이제 와 어쩌려는 건가? 너희들이 살아날 길 따위는 없는데.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여라.”
“걱정해 줘서 고맙군. 하지만 우리보다 너희 먼저 신경 쓰라고.”
“응? 무슨 뜻이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꼈는지 엘프들의 관심이 김검천에게 집중되었다.
갑자기 검사 엘프 한 명이 뒷덜미를 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악!”
느닷없는 비명에 짜증이 난 대장로가 질책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분위기를 깨느냐?”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벌레 같은 게 저를 물어서 그만…”
“한심하기는. 고작해야 벌레가 물었는데 그렇게 큰 비명을 지르다니?”
“하지만 벌레에 물린 것 치고는 고통이 너무 심했습니다… 어? 끄으윽.”
벌레에 물렸다는 검사 엘프의 목덜미부터 부어오르더니 금세 목 전부가 부풀었다.
얼마나 부풀어 올랐는지 검사 엘프는 말을 하기는커녕 숨마저 헐떡이고 있었다.
부어오른 목이 기도를 막아 호흡하는 것마저 힘들게 만든 것이다.
샤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기 벌레는 괴물이냐? 젠장, 벌레 따위는 딱 질색이라고.”
수갑을 풀 방법을 거의 찾아가던 워스덤은 그 광경에 안색이 변해 경고했다.
주위에 날고 있는 벌레를 보자 어떤 종류인지 알아챈 것이다.
“저건 괴물 맞소! 높은 수준의 마법에 의해 인공적으로 변이된 벌레니까!”
엘프들의 시선이 워스덤에게 쏠렸다.
혹시 저 마충을 워스덤이 조종이라도 하고 있냐는 듯한 뜻이 담긴 눈빛.
아직 상황을 판단하지 못한 엘프들을 향해 워스덤이 답답한 듯 외쳤다.
“본인이 했으면 이러고 있겠소? 다른 마법사가 이곳을 공격 중이라는 거요!”
대장로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에는 너밖에 마법사가 없지 않나? 어디에 마법사가 있다는 건가?”
“답답하기는. 눈에만 보이는 게 전부요? 결계가 열릴 때 벌레만 들여 보내고 조종하는 것이오!”
워스덤의 말대로 그러면 마법사가 결계 내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멀리서 벌레만 조종하면 되니 안전하기까지 했고.
허공에서 벌레 소리와 함께 찢어발기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부우애앵.
- 제법 실력 있는 마법사인듯하구나. 그걸 눈치채다니. 그래 보았자 죽을 일만 남았지만.
아마 이 벌레를 조종하는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워스덤의 말을 믿지 않은 엘프 장로 한 명이 검사 엘프들에게 명령했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수색해라! 마법사가 투명화 마법으로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예! 어억?”
힘차게 대답하며 움직이려던 검사 엘프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들의 주위로 벌레가 달려들어서였다.
벌레들이 날고 있는 방향으로부터 기괴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수색하긴 뭘 해? 이 몸이 자랑하는 마법 벌레, 마충과 같이 잘 놀아보도록 해라.
아까 마충에게 한 번 물린 동료가 어떻게 되었는지 본 검사 엘프였다.
벌레의 모습을 한 마충이라고 해도 방심하지 않고 바로 마나 소드를 만들어 내었다.
- 부우애앵.
“받아라!”
검사 엘프가 마나 소드로 마충을 베었다.
하급 기사 수준이지만 칼 놀림만큼은 제법 능숙했다.
- 깡.
마충을 마나 소드로 베었는데 금속음이 들려왔다.
그래도 충격이 없는 건 아니었는지 벌레가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충은 역삼각형의 머리에 여러 개의 눈이, 턱에는 집게와 날카로운 대롱이 달려 있었다.
검사 엘프가 부들거리는 손을 놔두고 마나로 신체를 강화해 마충을 힘껏 밟았다.
마충은 바닥이 파일 위력의 발로 깔리고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딱딱한 껍질과 많은 다리와 눈이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느낌을 전해왔다.
“비켜봐!”
중급 기사 수준의 동료 엘프가 마나 소드를 만들어 내 바닥에 꽂았다.
- 콰직.
마충은 그제야 죽은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동료 엘프가 만족한 듯 고개를 들었다.
“봤어? 좀 단단하긴 해도 벌레는 벌레지.”
검사 엘프가 떨리는 손으로 동료 엘프를 가리켰다.
동료 엘프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기껏 도와줬는데. 그런 행동은 좀 아니지 않냐?”
“그게 아니야! 뒤, 뒤를 보라고!”
검사 엘프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얼룩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