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뒤에 뭐가 있길래? 헉!”
동료 엘프가 뒤를 돌아보니 아까 해치운 마충이 또 나타나 있었다.
몇 마리 정도가 더 늘었다면 그도 이렇게까지 놀라지 않을 것이었다.
출현한 마충은 대충 봐도 100마리가 넘었다.
한 마리 해치우는 데도 그 고생을 했는데 이렇게까지 수가 많다니.
동료 엘프도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도대체 언제 저렇게 많은 벌레가 마을 안으로? 어째서 그걸 눈치를 못 챘지?”
“지금 그게 중요해? 이미 들어왔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문제지!”
그 말대로 공중을 나는 마충 백여 마리를 어떻게 처리할지 머리가 아픈 상황.
하지만 엘프들의 그런 고민은 곧 사라졌다.
당장 눈앞에 닥쳐오는 검은 파도 앞에서 생각보다 먼저 손을 움직여야 했으니까.
- 까까깡--!
동료 엘프는 전력을 다해 마나 소드를 만들어 달려드는 마충을 내려치고 찍었다.
정령과 융합시키면 벨 수 있겠지만 아직 그들의 수준으로는 무리인 기술이었다.
할 수 없이 검사 엘프와 다른 엘프들도 마나 소드를 만들어 대항했다.
그렇게 검을 휘둘렀지만 제대로 저항한 건 고작 몇 분에 불과했다.
엘프들은 힘이 모라자 점차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뭉쳐! 뭉쳐서 서로의 뒤를 보호해줘!”
누군가 외치자 엘프들은 서로 등을 맞대며 원형진을 만들었다.
이렇게 서로를 보조하면 자신의 등 방행은 그나마 덜 신경 쓰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집중력이 높아져 아까 전보다는 더 힘입게 무기를 휘두르며 마충에 대항했다.
그렇다고 해도 엘프들의 발밑을 굴러다니는 벌레보다 남아있는 마충들이 더 많았다.
위태해 보이는 몇몇 엘프가 언제 당할지 몰랐다.
그 순간 남은 엘프들도 탐욕스럽게 달려드는 마충들에게 당할 게 뻔했다.
이미 승기를 잡았다고 본능으로 느꼈을까.
아니면 다른 먹잇감을 찾는 걸까.
마충 몇 마리가 따로 떨어져 장로 엘프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달려드는 마충을 본 대장로가 분노했다.
인간 마법사가 조종하는 하찮은 것들이 평온하던 이 마을을 엉망으로 만들다니.
“벌레 따위가 감히! 바람의 상급 정령이여!”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장로의 등 뒤로부터 바람의 상급 정령이 나타났다.
거대한 인간의 모습을 한 상급 정령은 몸집만큼이나 큰 손바닥을 휘둘렀다.
- 퍼퍽.
손바닥에 맞은 마충들이 반쯤 으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중급 기사 수준의 마나 소드는 되어야 잘려나가던 마충이 단번에 박살 난 것이다.
워스덤이 감탄했다.
“과연 상급 정령이로군. 마법보다 빠른 발동에다가 혼자 알아서 움직이기까지 하다니.”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장점만 보면 그렇지요. 정령은 마법과 달리 소환식이라서 꾸준히 마나를 잡아먹거든요.”
“그래서인지 엘프는 타고날 때부터 인간보다 훨씬 마나가 풍부하지 않소?”
“엘프라도 몸에 담을 수 있는 마나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하긴 무한정으로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요.”
워스덤은 슬쩍 하이엘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프 중 엘프라고 불리는 하이엘프라면 어떨까 궁금해서였다.
이런 상황에도 호기심에 정신이 팔린 워스덤과 달리 루시엘은 상급 정령을 바라보았다.
대장로는 만약을 대비해 자신의 상급 정령의 힘을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마나가 무한히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도 대장로는 마충 몇 마리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런 숲 안에서 평생을 지내왔을 테니 전투 경험이 많을리 없어서 벌어지는 일.
설사 지식으로는 알고 있어도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것이다.
“그보다 수갑을 찬 상태로도 마나는 움직이고 있습니까?”
“아까보다는 어느 정도 나아진 것 같소. 그쪽은?”
“저도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수갑을 차고도 마충 정도는 상대할 수 있겠습니다.”
키가 작아 가려져 안 보이는 탓에 열심히 자리에서 뛰어 상황을 보던 샤칸이 소리쳤다.
“젠장! 벌레가 이쪽으로 온다!”
“벌레가 아니라 마충이라고 합니다. 샤칸.”
“그게 그거지! 어느 쪽이라도 다 싫거든!”
바람의 상급 정령이 이리저리 손바닥을 휘두를 때마다 터져나가던 마충이었다.
그 와중에서 용케 직격을 피한 마충이 상급 정령의 바람에 날려 이쪽을 향한 것이다.
재수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자빠진 것처럼 코가 부러지기도 한다.
정작 마충을 날려 보낸 셈인 대장로는 이쪽을 힐끗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마충이 김검천 일행들을 죽인다면 손도 안 쓰고 일이 처리되는 것이다.
샤칸이 수갑에 묶인 양팔을 힘껏 잡아당기자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쳇, 팔만 자유로웠다면…!”
“샤칸! 어디를 보는 겁니까?”
루시엘이 샤칸을 힘껏 밀었다.
샤칸이 비틀거리다 겨우 자세를 잡았다.
“뭐하는 짓이…아.”
루시엘의 뺨에서 뭔가에 베인듯이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옆을 입가를 붉게 물들인 마충이 배회하고 있었다.
루시엘은 샤칸에게 날아드는 마충을 막기 위해 그를 밀친 것이었다.
그래서 루시엘이 대신 다친 것이다.
자신 때문에 다친 루시엘을 향해 샤칸이 버럭 화를 냈다.
“이 귀쟁이가? 뭐 때문에 도와준 거야!”
“제 마음입니다. 별로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요. 샤칸이야말로 왜 화를 내는 겁니까?”
“네가 이 몸을 도와주다가 다쳤잖아!”
“저를 걱정해주는 겁니까?”
“너에게 빚지기 싫어서야!”
“그렇군요. 샤칸은 저에게 빚을 진 겁니다.”
“헹, 안 들린다고!”
이런 상황에서 둘이 편안하게 대화하는 게 마음에 안 든 것일까.
아니면 루시엘이 흘린 피 냄새에 끌려온 것일까.
루시엘을 덮친 마충 말고도 또 다른 마충들이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 부우애앵.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소리였다.
자다가도 들리면 벌떡 일어나야 할 것 같은 소음.
더 끔찍한 건 저 마충들을 피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샤칸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렇게 된바 정면으로 받아버리겠다는 드워프답게 막 나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샤칸이 루시엘이 앞을 막아섰다.
“샤칸! 뭐하는 겁니까?”
“같이 마나를 못 써도 비실거리는 너보다는 이 몸이 나아!”
드워프의 몸은 태생적으로 인간보다 튼튼하게 태어난다.
거기에 더해 광산과 대장간의 고된 일로 단련된 근육질의 육체.
이렇게 몸을 움직이다 보니 덤으로 조금이나마 마나도 사용할 수 있었다.
적어도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 샤칸의 주먹이 힘껏 뻗어 나갔다.
주먹과 마충의 육체적 만남을 방해한 건 워스덤의 마법이었다.
“일어나라. 땅이여! 흙방패!”
금속처럼 단단해진 흙덩이가 지면으로부터 사각 상자 모양으로 치솟아 올랐다.
루시엘과 샤칸, 워스덤을 모두 집어넣은 형태로.
날아들던 마충들이 흙덩이의 벽에 부딪혀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주위가 막히자 마충들은 열려 있는 공중 부분으로 날아왔다.
전후좌우가 모두 막혀 있으니 유일한 통로로 몰려든 것이다.
비행하는 적이 까다로운 건 어느 방향에서 공격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더군다가 크기까지 작았으니.
그런데 이렇게 뭉쳐 한 곳으로 날아오니 어디를 공격할지 뻔했다.
마나가 부족해 겨우 사용가능한 범위가 좁은 중하급 마법으로 공격하기에도 좋았고.
“후려쳐라. 땅이여! 흙주먹!”
- 콰직.
땅으로부터 다시 흙이 손처럼 뭉치더니 날아드는 마충들을 두들겨 팼다.
이중영창을 이용해 2가지 마법을 발동한 워스덤이 마충들을 격퇴한 것이다.
루시엘이 워스덤에게 물었다.
“워스덤. 마나가 벌써 다 회복되신 겁니까?”
워스덤이 고개를 저었다.
마스터 매지션인 자신이었다.
마나를 모두 못 쓴다 해도 이 정도 마법은 어렵지 않았다.
원래 몸 상태였다면 마충들을 물리치는데 그치지 않고 주변을 모두 날려버렸을 것이다.
“시간만 더 있으면 어찌 될 거 같은데 이대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아 유감이구려.”
곧이어 마법 유효시간이 끝난 흙방패가 무너져내렸다.
흙더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엘프들의 우세였다.
대장로와 장로 엘프가 불러낸 상급 정령들이 마충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100여 마리가 넘던 마충들은 이제 10마리도 남지 않아 보였다.
“워스덤의 말대로 일이 끝나면 대장로가 우리들을 다시 죽이려고 들겠군요.”
“본인의 말은 아니라 마충들의 공격이 이걸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거요.”
허공에서 다시 마법사의 음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부우애앵.
- 그렇군. 네가 워스덤이로구나. 과연 마스터 매지션이야. 엘프들은 멍청이들이고.
인간에게 무시당하자 발끈한 장로 엘프가 아직 움직이는 검사 엘프들에게 소리쳤다.
“아직도 저 마법사가 있는 곳을 못 찾았느냐?”
워스덤은 아직도 헤매는 장로 엘프가 답답했다.
아까 자신이 말했던 건 저 길다란 귀로 흘려 보낸 건지.
“저건 마충들이 날갯짓 소리를 변형해 사람 소리를 흉내내는 거요. 패밀리어 마법으로 마충을 조종하는 것이니까!”
마법사의 말이 들릴 때마다 마충의 날갯짓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워스덤은 그걸 파악하고 알려준 것이다.
대장로와 장로 엘프들은 몰라도 다른 엘프들은 워스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패밀리어 마법.
보통 동물을 조종해 시전자와 한 몸이 된 듯이 움직이게 하는 마법이었다.
그런데 마스터 매지션쯤 되면 동물이 아니라 벌레 같은 것마저도 움직일 수 있었다.
마을의 결계가 일부나마 열린 순간 마법사 본인은 힘드니 마충을 대신 들여보낸 것이다.
무슨 수단을 썼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줄어들었던 마충들의 수는 다시 늘어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유리하게 보였던 상급 정령들도 약간 힘에 부치는 모습이었다.
상급 정령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급 정령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마나가 필요한 법.
장로 엘프라고 해도 무한한 마나를 가진 건 아니었으니 마나가 밑바닥을 보이고 있는 것.
엘프 한 명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젠장! 도대체 뭐가 목적이길래 이런 짓을 벌이는 거냐고!”
마충들이 뭉쳐있는 장소로부터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부우애앵.
- 목적? 하이엘프 말고 또 있겠나?
“하이엘프라니! 그 분이 어떤 분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냐?”
- 물론. 하이엘프는 태곳적부터 내려온 초월 존재의 가호가 함께하는 마나 덩어리잖아?
엘프를 엘프로 보지 않는 마법사의 말.
심지어 엘프 중의 엘프라는 하이엘프마저도 단순한 물건처럼 보는 듯 했다.
이성적인 엘프들이라도 분노하기 좋은 말.
하지만 분노하는 것만으로 엘프들이 어떻게 할 상황이 아니었다.
어느새 마충의 한 무리가 하이엘프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다.
장로 엘프들이 노력했지만 모든 마충들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에게 밀려드는 마충을 처리하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었으니까.
하이엘프는 사자만큼이나 커진 댕댕이가 없었다면 이미 당했을 것이다.
댕댕이는 하이엘프 주위에서 날카로운 이와 발톱으로 마충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엘프 외 존재에게 보호를 받게 된 하이엘프가 중얼거렸다.
“이런, 이 몸은 벌레라면 딱 질색이라네. 귀엽지 않잖아.”
- 조금 있으면 네가 제발 귀여워해달라고 애원하게 될 것이다. 기대가 크군.
마법사의 명령에 따라 마충들이 하이엘프를 향해 덮쳐가려고 했다.
마충들이 사람 몸통만 한 날아드는 나무 조각에 막아 짓뭉개지지만 않았다면.
거대한 나무 조각은 절묘하게 엘프들을 피해 사이로 떨어졌다.
“우앗!”
“피해!”
엘프들은 기겁을 하며 피했다 다시 원형진을 만들었다.
싸움이 잠시 멈추고 모두의 관심이 나무 조각이 날아온 방향에 쏠렸다.
그곳에는 파워드슈츠에서 빛을 뿜어내는 김검천이 있었다.
김검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1차 인증 개방.”
김검천의 파워드슈츠의 중앙으로부터 손등까지 빛의 물줄기가 거꾸로 흘렀다.
그 물줄기가 거꾸로 타고 올라 얼굴에 닿았다.
빛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2차 인증 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