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김검천과 루시엘, 샤칸, 워스덤은 이미 엘프들 사이로 녹아들어 있었다.
그들이 함께 하는 걸 엘프들은 전혀 이상한 눈치가 아니었다.
하이엘프가 말을 이었다.
“자네 말에 따르면 저들은 모두 규칙을 어긴 이단자겠지.”
“물론입니다! 저들도 모두 벌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들과 저들의 가족, 동료들도 모두 죽이거나 마을에서 추방이라도 할 건가?”
“필요하다면 할 수 있습니다! 규칙을 위해서!”
목소리가 쉴 정도로 고함을 치는 대장로의 눈에 핏발이 섰다.
뒤에 선 장로 엘프들마저 대장로의 그런 행동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내저을 정도의 모습.
하이엘프가 안타까운 눈으로 대장로를 바라보았다.
“규칙을 지킨다고 자네는 아이를 잃었지. 이제는 규칙을 지키기 위해 뭘 버릴 건가?”
“필요하면 이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규칙을 위해서? 그런다고 다른 엘프들이 알아줄까?”
“비록 엘프들이 몰라준다 해도 이렇게 세계수의 묘목만큼은 지켜왔습니다!”
- 우지직. 쿵.
대장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머리 위에서 묘목의 가지가 부러져 내렸다.
떨어져내린 가지는 작고 말라비틀어진 모습이 제대로 된 나무의 형상이 아니었다.
대장로가 미친 듯이 달려가 가지의 상태를 살폈다.
병충해에 의한 피해는 잎만이 아니라 어느새 가지와 줄기까지 퍼져 있었던 것이다.
대장로는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지만 뿌리까지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다고! 도대체 이 몸은 뭘 위해서 살아온 거냐고!”
하이엘프는 미친 듯이 울부짖는 대장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거두었다.
안 그래도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을 치우는 것에도 손이 모자란 마을의 엘프였다.
어떤 의견도 변화도 받아들이지 않은채 똑같은 나날의 반복뿐.
결국 변화 없는 생활 속 무관심의 끝에 이렇게까지 병이 진행된 묘목이었다.
하이엘프가 직접 나서 이렇게 된 걸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제 묘목뿐만 아니라 마을 엘프들은 가지처럼 죽어갈 나날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대장로는 모든 것을 경계하는 게 아니라 문제점이 무엇인지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했다.
“후우. 대장로…”
대장로의 뒤에 서 있던 장로 엘프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김검천 일행에게 당한 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서 위로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피엘을 비롯해 엘프들에게 외면을 당한 건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거기다 마을의 근본인 세계수의 묘목마저도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을 줄이야.
대장로가 고개를 돌려 장로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조용히 따라와 주었던 장로 엘프들마저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규칙을 준수한다며 엘프들을 몰아붙인 끝에 탄생한 거라고는 서로간의 증오뿐.
하이엘프가 조용히 물었다.
“도대체 이제 자네에게 뭐가 남았나?”
대장로가 하이엘프를 돌아보며 공허한 눈을 했다.
방금 전까지 악에 받쳤던 모습을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한테 뭐가 남은 걸까요.”
가족도, 지인들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세계수의 묘목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대장로는 지금까지 괜찮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이엘프가 손을 내저었다.
“왜 이 몸에게 묻나? 답은 스스로 찾아야지. 굳이 말하자면 짐을 내려놓는 게 어떤가? “
하이엘프는 그 말을 끝으로 원형 탁자의 자기 자리로 갔다.
그리고는 남들 눈에 잘 띄게 의자에 올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자, 이쯤 되면 다들 머리가 식었겠지? 다들 들어라!”
하이엘프가 말하자 모든 엘프들이 행동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했다.
방금 전 대장로가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
“외부에서 온 김검천과 루시엘, 샤칸, 워스덤을 우리 손님으로 모시는 것에 불만 있는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엘프 모두가 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대장로가 뭔가 입을 열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여태껏 엘프들이 저렇게 활기가 넘친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심지어 저렇게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하이엘프님의 말대로 이 몸은 규칙에 잡혀 있었던 거였어. 모두를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도대체 뭐에 홀렸던 것일까…”
대장로는 비척거리며 어딘가로 움직였다.
이제 어떻게 할지는 대장로 스스로 결정할 일.
나머지 장로 엘프들이 고개를 마주하더니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대장로가 지금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건 장로 엘프들이 힘을 실어주어서였다.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해도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기에.
일이 잘못되어 갈수록 장로 엘프들은 대장로를 떠날 수 없었다.
그 결과 세계수의 묘목도 지키지 못한 채 사태만 악화되었다.
장로 엘프들도 대장로 못지않게 다른 엘프들을 볼 낯이 없었다.
대장로와 장로 엘프들이 사라지자 엘프들은 더욱 활기차게 움직였다.
하이엘프가 김검천에게 다가왔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은가요?”
“이쪽 일도 대충 끝났으니 상관없습니다.”
“아하하, 왜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는 거예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이야기하세요.”
김검천이 하이엘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이엘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나요?”
옆에서 일을 돕고 있던 샤칸이 끼어들었다.
“나잇값 좀 하라는 거다. 나이가 몇인데 아이 흉내를 내고 있냐? 노망난 하이엘… 웁웁!”
루시엘이 급히 샤칸의 입을 틀어막았다.
샤칸이 버둥거리는데도 필사적으로 입을 막은 루시엘이 하이엘프에게 사과했다.
“하이엘프이시여. 동료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괜찮다. 우리 엘프들을 구원해 준 자네들 아닌가. 솔직하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지.”
“그렇다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못할 게 뭐가 있겠나? 자, 해보게나.”
“저도 샤칸의 의견에 공감이 간다는 것이지요. 하이엘프이시여. 실례하겠습니다.”
루시엘이 샤칸과 함께 거리를 벌렸다.
그 말을 들은 하이엘프가 고민했다.
저 예의바른 루시엘이 그런 말을 할 정도라니.
하이엘프로서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였다.
물론 생각만 하고 그만두지는 않을 테지만.
하이엘프가 오묘한 표정으로 김검천에게 물었다.
“이 몸의 언동이 그렇게 이상했나?”
“다른 건 몰라도 나이에 안 맞는 행동인 것 확실하지요.”
“섭섭하군. 마을 밖에서 아이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던 사람은 어디 간 건가.”
“아이로 알았으니까요. 하이엘프께서는 엘프로 따져도 할아버지뻘로 알고 있습니다만.”
종족마다 아이로 취급하는 나이의 기준이 다르다.
엘프는 100살은 넘어야 성인으로 취급했다.
엘프 기준으로 생각하면 이곳의 인간은 어른이 되기도 전에 다 죽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를 대할 때는 서로 암묵적으로 각 종족의 기준에 맞추고는 했다.
김검천도 어느 정도 이곳의 상식에 익숙해진 것이다.
하이엘프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 말투는 싫은 것이다! 그러면 말이라도 편하게 해라. 괜히 섭섭하지 않느냐.”
김검천의 몇 배는 살아온 하이엘프가 정말로 아이가 삐진 듯이 굴었다.
김검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 같아진다더니 정말인 것 같았다.
500살 이상 살아본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눈앞의 하이엘프는 그러고 있었다.
“그러지. 네가 원한다면.”
김검천은 이미 상대를 아이처럼 대한 적이 있었다.
거기다 하이엘프 본인이 원하는 데 편하게 말을 못 할 게 뭐가 있겠는가.
하이엘프가 기분 좋게 활짝 웃었다.
“과연 말귀가 잘 통하는데. 그러면 본인을 따라올래? 선물 줄 게 있어!”
“준다는 데 거절한 필요는 없겠지.”
하이엘프는 세계수의 묘목 뿌리와 몸통의 줄기 사이에 난 거대한 구멍 쪽을 가리켰다.
묘목도 고층빌딩만큼이나 크다 보니 자연적으로 난 구멍에도 생활공간이 있는 것이다.
구멍을 통해 내부로 들어서니 100명도 서 있을만한 광장이 나왔다.
김검천이 물었다.
“혹시 이렇게 만든 건 너희 엘프의 힘인가?”
하이엘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보통은 세계수가 원래 이렇게 생겼나 하고 생각할 텐데.”
루시엘에게 듣기로 엘프들은 지역과 생활 방식에 따라 행동 양식이 달라진다고 들었다.
세계수와 함께 사는 엘프들은 그에 맞게 진화해 왔을 거라고 보았는데 맞는 것 같았다.
“너희들이 괜히 세계수와 함께 사는 건 아닐 테니까.”
하이엘프가 감탄했다.
몇 가지 보고 들은 것만으로도 이렇게까지 정보를 조합해내다니.
무력뿐만이 아니라 통찰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 말대로야. 이 마을의 엘프는 이 묘목을 지키고 성장하도록 도와주지. 그 대가로 묘목은 우리 엘프들이 자신을 이용하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고.”
“공생하는 건가. 서로에게 이익을 주는 관계군.”
“그것도 조만간 끝이 날 것 같지만. 다 왔네.”
몸통이라 생각되는 부근을 걷다 보니 들어온 입구보다는 못해도 제법 큰 구멍이 나왔다.
길을 알고 있는 하이엘프가 아니라면 이곳에 구멍이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이엘프가 먼저 들어가 벽 쪽 지면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더니 바닥이라도 팠는지 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하이엘프가 나무 조각을 내밀었다.
그건 어디에나 볼 수 있는 것 나무 조각 같았다.
하이엘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혼자만 따라오라고 한 건 이걸 주려는 데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야.”
“이건?”
“결계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었지? 마을의 은인이라 주는 거야.”
“평범한 나무 조각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보이도록 손을 썼거든. 이건 이 묘목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부분. 네가 원하는 정도는 성취할 수 있을걸.”
한 점 티 없이 웃는 하이엘프를 보고 김검천은 한마디 안 할 수 없었다.
“이런 귀중한 게 왜 바닥에 묻혀 있는 것이지?”
“귀중한 거니까 별 것 아닌 것처럼 숨겨두면 오히려 못 찾는다고.”
“우리는 몰라도 세계수와 익숙한 엘프들은 알아볼 텐데. 혹시 다른 이유라도?”
김검천은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하이엘프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눈치가 빠르니 속이기도 힘들군. 솔직히 말하지. 우리 마을은 이미 끝장난 상태야.”
“대장로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맞아. 아까 보았지? 마을의 근본인 이 세계수가 죽어가고 있거든.”
하이엘프는 조용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세계수는 수백 년에 걸쳐 점차 피해가 커져갔다.
하이엘프가 묘목의 치명적인 상태를 발견한 건 벌써 100여 년은 되었다.
그때도 세계수의 묘목은 이미 잎이나 나뭇가지를 조금 도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뿌리마저 병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건 이곳이 세계수가 자라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닌 탓이 컸다.
엘프들이 인간 왕국과 멀어지기 위해 선택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대장로의 아이가 결계 밖으로도 나간 직후의 발견이었다.
하이엘프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에는 본인도 일이 이렇게까지 될지 몰랐어.”
그때는 처음 겪는 엘프들의 가출에 마을 분위기가 엉망이기도 했다.
충격을 받은 대장로가 예전보다 강압적으로 엘프들을 다루기 시작하기도 했고.
하이엘프는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세계수에 문제가 있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사람이든 엘프든 버틸 수 있는 충격에는 한계가 있었다.
참을 수 있는 불행이라도 회복될 틈도 없이 연속으로 닥쳐오면 견딜 수 없었다.
하이엘프가 그때 이야기를 했다면 예전에 이곳 사회 자체가 붕괴해 버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