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하이엘프는 자신을 향한 엘프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엘프들은 자신들의 뜻을 내세우기보다 아직도 윗선의 지시에 익숙해져 있는 듯했다.
갑자기 변하기는 힘든 법.
그런만큼 이런 움직임도 하이엘프의 예상 안에 들어 있기는 했다.
그렇기에 하이엘프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다들 내가 하는 말을 듣겠다는 건가?”
“장로 엘프들이 전부 마을 일에서 손을 뗀 이상 하이엘프께서 앞길을 알려주십시오!”
말을 꺼낸 엘프 말고도 다른 엘프들 모두 그 의견에 동의했다.
“하이엘프께서 마을과 세계수의 묘목을 얼마나 아끼는지 여기 있는 엘프 전원이 압니다.”
“하이엘프가 내세우는 의견인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을 믿습니다!”
“하이엘프시여! 믿습니다!”
하이엘프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김검천은 하이엘프의 눈빛이 부담감으로 인해 흔들리는 걸 눈치챘다.
수많은 엘프들의 미래를 자신의 뜻만으로 결정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엘프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그들로부터 더 좋은 의견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하이엘프는 마음을 굳혔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우리는 묘목과 같이 말라죽든 이곳을 떠나든 2가지 선택밖에 없거든.”
이야기를 들은 엘프들은 입을 다문 채 저마다 고민에 빠졌다.
선택지는 간단했다.
선택은 어려웠지만.
하이엘프가 엘프들을 둘러보았다.
“당장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건 안다. 오늘만큼은 푹 쉬며 내일까지 생각해두도록.”
엘프들 중 한 명이 물었다.
“중대한 선택입니다. 결단을 내리려면 내일 가지고는 시간이 모자라지 않을까요?”
“빠르면 내일이라도 결계가 해제될 거야. 결정하기 힘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해 두던가.”
오늘 이후로는 마을의 결계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니.
용건이 끝나자 엘프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개인적으로 결단을 내려야 해서 그런지 많은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개중에는 울먹이는 엘프도 있었다.
서로 대화를 나누고 어찌할지 고민하는 자들도 있었고.
그렇다 해도 엘프들은 의외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당장 결계가 해제된 게 아니라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 상황이 피부로 와닿지 않은 건지.
어찌 되었든지 간에 내일쯤에는 결론이 나와야 했다.
대충 일이 마무리 된 것 같자 김검천과 리피엘이 하이엘프에게 다가섰다.
하이엘프가 리피엘을 향해 먼저 팔을 내밀었다.
“좀 내려다 주겠나? 신장이 작으니 내려가는 것도 일이거든.”
리피엘이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올라가시지 않았으면 될 일 아닙니까. 높은 곳이라면 다른 장소도 있는데요.”
“요놈 봐라. 그래서 너에게 부탁 안 한 거다. 하이엘프를 공경할 줄 알아야지.”
“그러면 먼저 하이엘프답게 구셔야지요.”
“젊은 놈이 벌써부터 대장로 같이 굴기는.”
“아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씀을?”
하이엘프는 자기 말을 안 듣자 리피엘을 무시한 채 김검천에게 팔을 뻗었다.
“내려줘.”
김검천이 투정부리는 하이엘프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바닥에 내려주었다.
하이엘프가 김검천에게 미안한 듯 웃어 보였다.
“하이엘프가 이래서 미안하군. 인간들의 예상과는 크게 다르지? 해결방법도 다르고.”
규칙을 내세우던 대장로와는 달리 하이엘프가 엘프들을 다룬 방법은 강압적이지 않았다.
그저 무엇을 선택해서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만 알려 주었을 뿐.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거기서 더 당긴다면 버티지 못하고 끊어진다.
세상 모든 것은 한계라는 게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줄을 당기고 싶다면 그것을 먼저 밀어 느슨하게 만들 줄도 알아야 했다.
일단 잠이라도 자고 일어나면 내일은 오늘보다 불안감과 긴장감이 줄어들 것이다.
사정을 대충 파악한 김검천이 하이엘프의 머리를 다독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니까요.”
리피엘이 깜짝 놀라 뭐라고 하려는데 하이엘프가 손을 내저었다.
하이엘프가 괜찮다는데 리피엘도 뭐라고 하기 그래서 뒤로 물러섰다.
김검천의 손을 잡고 내려놓은 하이엘프가 피식 웃었다.
“후후, 이 나이를 먹고 위로를 받다니. 아직 이 외모가 쓸만하긴 한가 보구나.”
“외모로 따지면 우리 리에만큼이나 어려 보입니다만.”
“오호, 본인을 닮았다니 참으로 귀여운 아이겠구나.”
김검천은 함선에 남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안 그래도 함선이 마도 왕국 쪽으로 이동 중이었으니 얼마 안 있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이엘프의 말이 황당했는지 리피엘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보다 더 나이 많으신 분이 인간 아이와 닮았다고 자랑하다니. 이거야말로 엘프 망신이 아닐까요?”
“옆에서 종알종알 시끄럽구나. 입을 놀리는 걸 보니 힘이 넘치는 것 같은데 잘 되었군.”
하이엘프가 리피엘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안 그래도 시킬 일이 있었는데 마침 힘이 넘치는 이 녀석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몸은 솔직하게 반응한 리피엘이 하이엘프에게 다가섰다.
“하이엘프께서는 저에게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계신지요?”
“손님들을 모셨는데 가시기 전까지 대접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아, 오늘 저에게 한 말 중에서 유일하게 옳으신 말씀이네요. 그쪽은 시간이 있나?”
리피엘이 김검천에게 물었다.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할 말이 남았는데 좀 더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겠군.”
샤칸이 투덜거렸다.
“대화 따위는 지루해! 그 시간에 잠이나 자야지!”
리피엘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드워프를 위해서 따로 보관해둔 엘프주를 내올까 했는데. 어떤가?”
샤칸이 입을 크게 벌렸다.
“엘프주? 엘프만이 만들 수 있다는 그 술 말인가?”
“손님들을 모시는 건 100년도 넘었으니 제대로 숙성도 되었고. 다른 분들은…”
워스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 몸은 떠나기 전 묘목을 좀 더 둘러보고 싶소만.”
“밖에서 보는 것보다 묘목 안으로 들어가 서로 대화하면서 관찰하는 건 어떠합니까?”
“부탁하오!”
워스덤도 단숨에 함락되자 루시엘은 리피엘이 말을 걸어 오기 전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어차피 일행들과 함께 할 생각이었습니다.”
“잘 되었군요. 그 쪽도 몇 가지 드릴 게 있었는데. 그러면 다들 절 따라오시지요.”
떠나기 전 김검천이 리피엘에게 물었다.
“혹시 이곳 결계는 나갈 때는 자유인가? 들어올 때는 아니지만.”
“나갈 때는 결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나갈 수 있네. 들어오는 것만 막는데 그건 왜 묻지?”
“그렇다면야 그쪽의 도움은 필요 없겠군. 잠시만 기다려 주겠나?”
“물론이지.”
김검천이 무인차량에 가더니 몇 가지 조작을 했다.
그러자 무인차량으로부터 중계형 드론과 수리용 구슬, 무인장비가 쏟아져 나왔다.
리피엘이 흠칫하는 사이 그것들은 마을 밖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저게 도대체 뭐지? 저걸로 뭘할 작정이고?”
김검천이 별다른 말 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습격한 자들이 다시 올 때를 대비해 약간의 준비를 해두었다.
준비해둔 게 사용할 일이 없다면 그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혹시 몰라 준비한 거니 신경쓸 필요 없어. 그것보다 빨리 가서 쉬자고.”
***
다음날.
유익한 대화를 나눈 끝에 푹 쉰 김검천 일행이 무기까지 돌려받고 난 후 묘목을 벗어났다.
샤칸이 팔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무인차량에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역시 지면을 밟아야 살 것 같네.”
워스덤이 묘목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며칠 더 머물고 떠났으면 좋을 텐데.”
루시엘이 리피엘에게 물었다.
“정말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겁니까?”
루시엘의 화살통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화살 몇 발이 더 늘어 있었다.
리피엘이 아련한 눈빛으로 그 화살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이 가지고 온 화살이면 그를 기억하는 데 충분합니다. 그 보상이라 생각하시지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싸울 때 유용하게 쓸 수 있겠군요.”
샤칸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어라? 어제에 비해 엘프들이 안 보이는데?”
샤칸의 말대로 마을에 엘프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친 엘프들도 얼굴에 고민이 가득해 보였다.
워스덤이 말을 받았다.
“어제 하이엘프께서 말씀했던 선택지를 아직 못 고른 모양입니다. 골랐어도 고민일테고요.”
샤칸이 세계수의 묘목을 올려다보았다.
가지의 나뭇잎들이 하나같이 생기를 잃고 바스러져 가고 있었다.
어제도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단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죽어가는 모습을 보일 줄이야.
엘프들의 얼굴도 세계수의 묘목과 별다르지 않았다.
샤칸이 한탄하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하긴 고향을 떠난다는 결정이 쉬운 건 아니지.”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샤칸을 쳐다보았다.
특히 루시엘은 얼마나 놀랐는지 대뜸 샤칸을 의심부터 했다.
“당신 정말 샤칸이 맞습니까? 웬일로 엘프들을 다 걱정해주는 겁니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누가 들으면 피도 눈물도 없는 드워프인 줄 알겠네!”
투닥거리면서 무인차량으로 이동하는데 머리 위로부터 처음 듣는 소리가 들렸다.
- 투웅웅.
“뭐지?”
하이엘프가 슬픈듯한 얼굴을 했다.
말라비틀어져 텅빈 나무 속을 두들기는 듯한 음향.
이건 세계수의 묘목이 마지막 인사를 고하는 소리였다.
“작별인사입니다. 곧 결계가 해제된다는 걸 알리기도 하고요.”
묘목이 마지막을 고하는 걸 들은 엘프들이 경악했다.
어떤 엘프는 얼굴색이 눈에 보일 정도로 달라졌다.
심지어 한 엘프는 온몸으로 경련을 일으키며 비명을 질렀다.
가득 머리가 복잡한 상태에서 이런 상황까지 직면하다니.
모든 게 절망스러웠다.
“결계가 사라진다!”
“아아아!”
“안 돼!”
그나마 마을을 돌아다니던 얼마 안 되던 엘프들마저 하나같이 집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위험에서 도주한 동물이 구멍 속에 머리만 넣고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
리피엘이 고개를 저었다.
한심한 광경이었지만 같은 엘프로서 그들의 행동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수백년을 넘게 함께 해왔던 결계가 걷혔다.
어떤 엘프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함께 했으니 몸의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신체의 일부분이 사라졌는데 가볍게 웃어넘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성적인 엘프라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그 선을 넘으면 인간보다도 더 연약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오늘 저녁까지는 버틸 줄 알았는데 벌써부터 결계가 걷히다니.”
하이엘프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보다도 훨씬 더 빨리 사태가 악화된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미 엘프들에게 알렸던 문제가 터진 것뿐.
이제 해야 할 건 여기에 안주하지 말고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이엘프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너희들은 이제 먼 길을 가야 하니 이 몸이 친히 배웅해주겠도다!”
리피엘이 그런 하이엘프를 보며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부터 고생길이 시작된 만큼 배웅 정도는 그의 마음대로 하게 놔두고 싶었다.
리피엘은 하이엘프 대신 김검천에게 말을 걸었다.
“하긴 이제 너희들이 떠나면 다시 볼 일이 있을까? 기왕이면 모두 같이 가도록 하지.”
“그래 주면 고맙지. 그러면 이번 기회에 저걸 한번 타볼 텐가? 내가 준비한 선물로 있고.”
귀가 솔깃해진 리피엘에 앞서 하이엘프가 무인차량에 먼저 올라타려고 했다.
그 키로는 힘들어서 김검천이 들어서 올려주었다.
리피엘도 모른 척 같이 무인차량에 올라탔다.
사실은 그도 한번쯤 이 움직이는 금속 덩어리에 올라타고 싶었다.
“크흠, 하이엘프께서도 탔기에 이 몸도 올라탄 거야.”
“물론이지. 이해해.”
무인차량은 빠른 속도로 숲 밖으로 이동했다.
무인차량이 밀고 지나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경로를 보며 리피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지만 파괴된 주변 환경이 스쳐 지나가니 가슴이 아파왔다.
꼭 엘프들의 미래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기분 탓인지 어제보다 지나치는 길에 놓인 식물들이 성장한 것처럼 보였다.
리피엘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어제보다 나무와 수풀들이 자란듯이 보이는데 착각인가?”
이곳 식물이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다른 곳보다 빨리 자라긴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김검천이 답을 알려주었다.
“아, 그건 내가 식물성장제를 뿌려두어서 그런 거야. 며칠 지나지 않아 어제처럼 될 걸?”
결계에 들어오면서 숲을 망가뜨리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복원도 시도 한 것이었다.
“무슨 마법이길래 며칠 만에 저렇게 잘려나간 것들이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는 건가?”
“마법은 아니고 과학의 산물이지. 원한다면 선물로 주고 갈 수도 있고.”
“부탁하지.”
“대신 나도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물건을 좀 맡아 주었으면 해. 서로 좋은 일일 거야.”
리피엘이 무인차량에 연결된 짐들을 쳐다보았다.
크고 긴 것이 제법 무게가 나가 보이긴 했다.
“저것들 말인가? “
“아니, 저 짐 말고 다른 것. 이 근처로 배송시킨 게 좀 있다고.”
리피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짐이길래 그러는 것인지.
나쁠 건 없기에 리피엘은 승낙했다.
김검천의 묘한 미소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뚫린 길을 통해 마침내 무인차량이 엘프 숲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 앞을 기다리고 있던 황색과 갈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막고 있었다.
암흑 마탑주가 보낸 2명의 마스터 매지션들이었다.
“크하하하하!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흐흐흐, 어떤가? 이 몸의 말이 맞지 않나? 우리들로 말할 것 같으면 하이엘프를 데리…”
“지건.”
- 타타타타타타타탕.
김검천의 손가락으로부터 무수한 탄환이 쏟아져 나갔다.
탄환은 갈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의 몸에 무수한 구멍을 내며 지나쳤다.
- 풀썩.
갈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땅바닥을 굴렀다.
어이없는 표정의 황색 로브 마법사를 향해 김검천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 이쪽부터 소개하도록 하지. 난 김검천이다. 방금 인사는 마음에 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