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그 말에 펠우테도 나직이 울부짖으며 동의했다.
“크르릉…”
색 구분도 힘든 이런 곳에 처박혀 있다 보니 답답해서 폭발 직전인 듯 했다.
그럴 때는 좀 더 다양한 색을 보는 게 기분 전환이 될 것이다.
기왕이면 붉은색이라든지.
고르바 탑주가 보기에 펠우테라면 마스터 매지션 한둘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터.
저 자가 있는 것만으로도 암흑 마탑주의 세력은 견제 가능했다.
고르바 탑주 자신만 해도 충분히 강한 전력이었으니까.
하지만 고르바 탑주는 손을 내저으며 강하게 거부의 뜻을 밝혔다.
단순히 그들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결판을 보았을 것이다.
암흑 마탑주 파벌을 이렇게 방치해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치료사를 만난 그때부터 세운 계획에 따라서 말이다.
“그러기에는 아깝지요. 조금만 더 시간을 준다면 더 좋은 방향으로 그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저자처럼요.”
검은 구체가 살짝 방향을 틀자 이제는 병상에 누워있는 황색 마법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치료사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 자는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아, 마법사에게는 마법사가 최고겠지요? 이 마스터 매지션을 통해 본인이 가진 최고의 마법과 지식을 실현해 보려고 합니다.”
“과연 마법사다운 말씀입니다. 책으로 쌓은 지식은 실제로 해봐야 아는 것이지요.”
치료사의 호응에 고르바 탑주가 구김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가 봐도 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웃음.
누가 가르치지 않는 어린아이는 선도 악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걸 할 뿐.
그런 고르바 탑주의 모습을 검은 구체가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무엇을 하든 간에 모든 걸 파악하겠다는 듯이.
***
그 시각 김검천 일행은 마도 왕국에 경계에 도착해 결계를 돌파하려는 중이었다.
성질 급한 샤칸이 내리자마자 일단 반투명한 푸른 빛의 금속 해머로 결계를 찍었다.
흉험한 전투 끝에 샤칸도 마침내 마스터 나이트의 등급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 쾅!
오러가 서린 금속 망치가 튕겨 나오자 샤칸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결계를 쳐다보았다.
멀미에 시달리며 여기까지 온 분노까지 담은 일격이었는데도 소용없다니.
“오러도 소용 없는 결계라니? 진짜 단단하기는 하네.”
왜 이 드워프는 쓸데없는 행동을 해서 힘을 빼는 건지.
따라서 내린 루시엘이 샤칸을 타박했다.
“우리가 엘프 마을까지 가서 하이엘프와 만날 이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아이고, 이 귀쟁이가 드워프 잡네. “
“불만 있으십니까? 그러면 종족을 바꾸십시오. 샤칸.”
“…쳇, 귀쟁이가 구박하는 걸 너무 당당하게 여기니 오히려 할 말이 없네.”
“그래서 막 나갈 때는 오히려 뻔뻔해지라고 하더군요.”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거든? 드워프에게 사과해! 어? 저건?”
김검천의 손 위에서 하이엘프로부터 받은 나무 조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곧이어 결계 부위에 붙더니 푸른 스파크와 함께 나무 조각이 터져나갔다.
샤칸이 루시엘에게 소리쳤다.
“헉, 저게 어떻게 구한 건데! 손이 미끄러지지도 않았는데 그냥 사라졌네!”
“그냥 박살 난 게 아닙니다. 나무 조각이 사라진 곳을 잘 보시지요.”
이미 워스덤이 자리를 이동해 나무 조각이 사라진 주위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러더니 결계 한쪽에 손을 밀어 넣었다.
오러에도 꿈쩍하지 않는 결계에 맨손을 집어넣다니.
그런데 워스덤의 손은 물에 넣기라도 하듯이 한구석에 쑥 들어갔다.
오러로 쳐내린 금속 망치도 튕겨낸 결계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워스덤이 남은 다른 팔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성공입니다. 다만 결계 해제 범위가 넓지는 않군요. 마도왕국 전체의 결계가 사라진 건 아니고 이 일대를 중심으로 해제된 상태입니다.”
김검천이 무인차량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차량이 통과할 공간만 있어도 충분했는데 그보다 더 넓은 구역이 해제된 것이다.
이 정도면 함선의 일부도 넣을 수 있을지 몰랐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나무 조각으로 이런 결과를 내었으니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해. 아차, 여기까지 왔으니 이것도 한번 봐주었으면 해.”
김검천은 가지고 있던 그림 몇 장을 워스덤에게 넘겼다.
워스덤이 그림을 받더니 뒤적이면서 놀란 얼굴을 했다.
“아니, 이건? 하이엘프, 그리고 마충에다가 이번 결계의 해제까지 그려진 그림 아닙니까?”
“놀랍지? 리에가 그린 그림이야. 그 아이는 아무래도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더군.”
워스덤이 눈을 크게 떴다.
“마석을 충전하는 제국 황실의 적통에다가 미래시의 능력까지… 황태자 전하 다음으로 차기 여황이 된다고 해도 누가 반대할 사람이 없겠군요. 그런데 저에게 이런 걸 보여주시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 중에서는 이세계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니까.”
김검천이 가지고 있던 남은 그림들을 워스덤에게 넘겼다.
“마법사와 탑,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 둘과 반투명한 검은 구체군요. 그리고 이건…아무것도 없는 하얀 종이군요.”
“몇 가지는 알겠는데 몇 가지는 나도 짐작이 안 가더군.”
워스덤이 고민하다가 몇 가지를 짚었다.
“마법사는 아무래도 고르바 탑주를 말하는 게 아닐까요. 처음 보는 이 둘은…”
“아마 치료사와 펠우테라는 자일 거다.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거든. 검은 구체는 내가 여기까지 오게된 이유와 관련 있는 걸 테고.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건 이 하얀 종이야.”
워스덤이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종이를 바라보았다.
뒤집어 봐도, 마법으로 자세히 살펴도 워스덤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그냥 종이입니다. 그저 새하얗기만 하군요.”
“그렇다면 리에는 왜 이 종이까지 다른 그림과 같이 준 걸까.”
“황녀께 물어보셨습니까?”
“리에도 그저 보이는 걸 표현할 뿐. 자신도 정확한 의미는 모른다고 했다.”
“음. 이건 제 생각에 불과합니다만 아직 어리시니 그냥 주고 싶어서 드린 게 아닐까요?”
“흐음…”
“그 나이 때 아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걸 주고 싶기도 합니다.”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에서인가?”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행동이기도 할 겁니다.”
마음에 드는 이야기였지만 결국 그림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미래를 예견한 그림이라는 걸 알아도 이것만으로는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알 수 없는 일.
그림만으로는 뭔가 사건이 일어난다는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김검천은 그림들을 파워드슈츠 안에 수납했다.
리에에게 받은 선물이니 소중히 다루는 것이다.
“아쉽군. 리에가 같이 있었다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고 보니 황녀께서는 저희와 떨어져 계신데 안전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쿠퍼와 세이야가 같이 있다는 걸 아는데도 시야 안에 없으니 걱정이 되는 모양.
워스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김검천이 대답했다.
“내 옆만큼이나 함선 안도 안전해. 더군다나 함선도 이쪽으로 이동 중이니까 서로 간의 거리도 좁혀지고 있다고.”
함선을 떠나기 전 김검천은 함선 미르에게 이동할 방향을 미리 지정해 준 후 출발했다.
아쉽게도 엔진이 제 성능을 못 내는 만큼 김검천 일행과 접촉할 일은 없어 보였다.
무인차량이 함선보다 더 빠른 것이다.
다만 함선은 바로 마도 왕국 쪽으로 향하게 했고 김검천 일행은 엘프 마을을 들려야 했다.
그만큼 서로의 거리는 줄어들어 며칠 후면 함선도 마도왕국 근처까지 도착할 것이다.
그때는 미리내가 함선을 원격 조정할 수 있는 범위 안까지는 들어올 걸로 보였다.
통신 불량같은 불행한 사건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별 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혹시 그걸 직접 전투에 사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정말 사용할 때가 온다면 써야지. 난 사용 가능한 걸 그냥 놔두는 성격은 아니거든.”
현재 열핵융합 동력로만으로도 에너지형 대함선 무기는 사용 가능한 상황.
엔진들이 모두 고쳐진 게 아니라서 위력은 줄었지만 그것만 해도 충분했다.
지금 상태로도 산 하나쯤은 충분히 날려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위력을 줄이는 만큼 연속 사격이 가능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주엔진에 대한 봉인에 대한 위험 때문만 아니면 함선 무기를 쓰는 것도 생각해 볼 만했다.
함선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알 수 없는 위험보다는 눈앞에 닥친 위험이 더 급하니 사용할지도 몰랐다.
이동하는 에너지도 아껴가며 무기 사용이 가능하도록 함선에 명령을 내려놓았으니.
미리내의 계산에 따르면 한번은 사용 가능할 것 같다고 했으니 필요할 때 쓸 생각이었다.
“그렇게 거대한 함선의 무기라면 정말 무서운 위력이겠군요.”
“가능하면 쓸 일이 없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미래를 알 수 없으니 대비해두는 거야.”
“뭐, 불확실한 미래니까 우리들도 이렇게 노력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미래 정해져 있다고 해도 내 마음에 안 들면 어떻게든 바꾸려고 시도할걸.”
“하하하, 믿음직한 말씀입니다. 그 행복한 미래에 저도 함께 했으면 좋겠군요.”
“무슨 말을. 함선에 왔을 때부터 워스덤도 우리 일행이었는데. 자, 다들 떠나자고.”
다들 무인차량에 다시 탑승하는데 머리 위로 하얀 눈이 내렸다.
루시엘이 손을 내밀어 눈을 받았다.
내려앉은 눈은 체온으로 녹아 손바닥에서 흘러내렸다.
떨어진 물은 바닥을 적시며 스며들었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군요.”
추워서 팔짱을 낀 샤칸이 재채기를 하며 투덜거렸다.
“에취! 이 계절에 벌써 눈이라니? 눈 같은 건 싫어! 춥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벌써 눈이라니 확실히 드문 일이기는 합니다.”
마지막으로 올라탄 워스덤이 걱정스러운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는 길에 재해라도 안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워스덤의 걱정은 무인차량이 마도왕국의 결계를 넘기 전까지만 유지되었다.
자잘한 고민이나 잡념이 바로 사라진 것이다.
결계를 통과하고 나서 보이는 광경에 말이다.
샤칸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나 알아. 이쪽으로 가면 바로 마탑이 나오겠지?”
루시엘이 샤칸이 들어 올린 팔을 내렸다.
“그런 말 안 해도 눈이 달려 있다면 알 겁니다.”
워스덤이 감탄했다.
“마도 왕국이라고 내세울 만한 상징물이 하나쯤은 있었군요.”
김검천도 동의했다.
“마도왕국에 들어선다면 마탑이 어디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더니.”
김검천 일행들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마탑을 바라보았다.
마탑은 높았다.
넓이와 폭은 그렇다 치고 높이만큼은 이곳에서 접한 것들 중 어떤 것보다도 말이다.
심지어 함선 미르도 높이만큼은 저 마탑보다 낮아 보였다.
김검천이 대충 관측한 바로는 500층 높이의 건물과도 맞먹지 않을까 생각이 들 높이.
저 정도면 지구의 한국에 있다는 한라산 높이와 맞먹을 것 같았다.
샤칸이 고개를 흔들었다.
“드워프도 저런 건축물을 만들기는 힘들 거 같은데.”
루시엘이 말을 받았다.
“저런 게 마법적인 힘이 작용하지 않고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뭐! 어때서! 저런 대단한 걸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만들고 싶어 할 수도 있지!”
“으음, 드워프의 낭만이라는 겁니까. 뭐, 나쁘지는 않군요.”
샤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는 겁니까?”
“아니, 너도 그런 걸 동감하는가 싶어서. 귀쟁이 주제에 제법이잖아.”
그때 놀라움에서 벗어난 워스덤이 중얼거렸다.
“대단합니다. 그래서 더욱 이상하군요.”
김검천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느 점을 말하는 거지?”
“마법은 몰라도 인간이 사용하는 마법의 힘에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저런 마탑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그래서 마스터 매지션인 저로서도 믿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