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워스덤이 먼저 입을 뗐다.
그도 줄곧 미묘한 느낌이 들었기에 입이 간질거리던 참이었다.
샤칸이 언급한 게 발단이 되어 겨우 참고 있던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기에 발가락을 찍는 그 고통은 사람이 견딜만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루시엘도 동의했다.
“저 샤칸도 못 견디는 고통을 일반인이 참아 넘긴다는건 말이 안 됩니다.”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다들 평소보다 마음을 놓고 있는 것 같았지.”
웃음과 같은 온화한 표정은 마주하는 낯선 타인을 편하게 해주고 경계심을 풀어준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면 그만큼 상대방에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이 덜해지는 것이다.
하물며 이 마을 사람들이 지었던 표정처럼 행복한 얼굴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워스덤은 오히려 그게 꺼림칙하다는 듯 말했다.
“좀 지나친 생각인지 몰라도 이 마을 사람들은 어딘가 정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샤칸이 공감했다.
“그러게. 이 샤칸 님도 못 견디는 걸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겨서 이러는 건 아니라고?”
김검천이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졌다.
차가운 손가락이 매끄러운 턱에 느껴지자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했다.
“확실히 워스덤이 말한 대로 이상하긴 해.”
“역시 김검천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다만 이건 딱히 우리를 노리고 하는 행위로는 안 보여.”
“그 말씀은?”
이상하긴 해도 자신들에게 해가 될만한 행동은 아닌 듯 했다.
워스덤을 마도왕국 마법사로 여기고 있는 것도 그랬고.
오히려 김검천 일행들에게 더 못 해줘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김검천이 자신이 내린 결론을 말했다.
“아무래도 항상 웃는 표정으로 친절한 행동을 하도록 누가 시킨 모양이야.”
“마법사들이 말입니까? 이 마을 사람들만이 이런 걸까요?”
“마도왕국 사람들 모두 이러도록 지시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
“정말 괴상한 짓이군요.”
“아니면 어떤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든지.”
김검천 일행이 마도왕국 사람들을 만난 건 이곳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다른 곳이 어떠한지 알 리 없었다.
다만 마법사는 일반인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
특히나 마도 왕국 마법사는 좋은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로 그랬다.
워스덤도 보통 사람들이 보면 호기심과 의문이 많은 편이었다.
그런 워스덤도 마법사의 관점으로 본다면 일반인에 가까웠다.
이곳은 마법사가 다스리는 왕국.
무슨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루시엘이 김검천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필요한 정보는 다 모았는데 그냥 떠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숙소 안내도 끝난 데다가 늦은 밤이었다.
이대로 몰래 떠나면 아침까지는 들키지 않을 걸로 보였다.
김검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침 일찍 떠나도록 하지.”
“운이 나쁘면 마을을 관리한다는 마법사가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루시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김검천에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마법사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좋아. 어차피 상대해야 하는 녀석이라면 이 자리에서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들어보니 맞는 말이었다.
이미 김검천 일행이 처리해버린 마스터 매지션이 2명.
그렇다고 해도 마탑에는 고르바 탑주를 포함해 마스터 매지션이 최소 5명은 있을 터.
김검천 일행이 마탑으로 가기 전 마스터 매지션의 수는 가능한 줄여두는 게 좋았다.
적은 한번에 처리하는 것보다는 여러 번에 나눠서 상대하는 게 더 쉽지 않겠는가.
거기다 여유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닌만큼 시간제한을 걸어 둔 상태.
어차피 자면서 소모되는 시간을 이곳에서 쓰겠다는 것 뿐이었다.
손해 볼 건 없는 것이다.
“하긴 우리를 막기 위해서 마탑에 마법사 전력들이 모일 걸 감안한다면...”
“또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니 떠나기 전까지만 그 마스터 매지션을 기다리자는 것이고.”
중년 남자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이 마을의 책임자는 마스터 매지션.
마탑을 가기 전 마스터 매지션을 처리할 수 있다면 김검천 일행에게 좋은 일이었다.
만나지 못하고 마을을 떠난다면 오늘 밤 푹 쉬는 기회로 삼으면 되었고.
“그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 마탑까지 마차로 3일 정도면 간다고 했습니다.”
“무인차량으로 빠르게 이동하면 이틀 후라도 도착할 수 있겠군요.”
갑자기 샤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것보다 밥이나 먹자고! 배고프지 않아?”
루시엘이 샤칸을 구박했다.
“샤칸. 늦은 시각에 뭘 먹으면 살이 찝니다. 키는 안 크는데 옆으로 늘어나고 싶습니까?”
“헹, 알게 뭐야? 배가 고프면 먹고 안 고프면 마시는 게 드워프라고!”
샤칸이 성큼 중년 남자가 마련해 둔 먹을 것 앞으로 다가섰다.
음식에서는 아직까지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막 음식에 손을 데려는 샤칸을 김검천이 말렸다.
“아니, 먹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루시엘이 샤칸을 보며 잘되었다는 듯 웃었다.
“보십시오. 김검천님도 샤칸이 살찌는 걸 보기 싫으시다고 하지 않습니까?”
“배고픈데…”
샤칸이 며칠 굶은 강아지같은 얼굴로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김검천이 파워드슈츠 안에 든 전투 식량을 꺼내며 말했다.
“굶으라는 게 아니야. 다만 다들 이곳이 적지라는 걸 잊지 말라는 거지. 물 한 방울, 먹을 것 한 조각도 의심해.”
샤칸과 루시엘, 워스덤이 흠칫했다.
김검천의 말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조심해야 할 상황.
어째서 김검천이 언급할 때까지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마을 사람들의 웃는 얼굴이 경계심을 약하게 만든 것이다.
워스덤이 김검천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법이 직접 사용된 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모를 리 없었겠지요.”
마스터 매지션인 만큼 워스덤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그렇다 해도 세상의 모든 마법을 워스덤이 다 알 수는 없는 일.
메테오 스웜 같은 고대의 대마법의 경우에도 모르고 있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른 마법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생각해 봐야 했다.
“만약 상대에게 효과가 별로인 마법이 사용되었다면 알아볼 수 있겠나?”
워스덤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효과가 제대로 나지 않는 마법이라면 저도 알아보기 힘들 겁니다. 그만큼의 마나가 적게 사용되었다는 거니까요. 그 정도면 무생물도 가지고 있을만한 마나량입니다. 아, 혹시?”
워스덤과 루시엘은 김검천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샤칸은 이해 못해서 그런지 입이 삐죽 나와 있었고.
그래서 김검천은 샤칸을 향해 보충 설명을 했다.
“그런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제공한 음식, 음료 등에 뭐가 들어있을지 모른다는 거지.”
마나가 적게 들어가면 흔적을 찾기 힘들고 효과도 적었다.
그런 경우에 효과가 발생하려면 사람의 몸속에 직접 투여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다.
사람의 몸 안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부위였으니까.
그제야 샤칸이 아쉬운 듯 음식을 내버려둔 채 전투식량을 뜯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깝다. 이 많은 음식과 음료를 먹지도 못하고 버려야 한다니.”
아까운 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지만 제 손으로 독을 먹는 것보다는 나았다.
김검천이 창문 너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먹는 것보다는 낫겠지. 정 먹고 싶다면 먼저 밖을 한번 본 다음 먹던가.”
“엨, 그래도 되나?”
샤칸이 김검천 옆으로 빠르게 다가와 밖을 바라본 순간 흠칫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마을은 눈이 쌓인 광경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 그림에는 마을 사람들도 같이 참여하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고 바람이 부는 데다가 해까지 져서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 속에서.
김검천 일행이 방 안에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들 밖에 나와 있던 모양이었다.
머리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 것 보면 말이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광장의 동상을 둘러싸고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마을에서 그들을 처음 보았을 때와 다름없이.
누가 봐도 저건 절대로 평범한 행동이 아니었다.
샤칸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김검천의 말에 따라 바깥 광경을 본 루시엘과 워스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샤칸은 아무 말 없이 방 안의 음식과 음료들을 자기 손으로 직접 버렸다.
그리고는 김검천이 넘겨준 전투식량을 맛있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김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내일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할 거 같으니 푹 자두라고. 경계는 미리내가 해줄거야.”
***
다음날 아침.
김검천 일행은 상쾌한 얼굴로 숙소 앞에 주차해둔 무인차량으로 향했다.
미리내가 경계를 선 덕분일까.
누구에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어젯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샤칸은 그게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쳇, 결국 그 마을의 책임자라는 녀석은 못 만나고 가네.”
루시엘이 샤칸을 다독였다.
김검천의 말대로 싸우지는 못했어도 푹 쉬면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지 않았는가.
“좋게 생각하십시오. 쓰레기는 한번에 치우는 게 더 성취감이 큰 법입니다.”
“그거 타는 쓰레기일까? 연기는 메케해서 싫은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그때 중년 남자가 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
김검천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아침이라고 하지만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시각.
보통 사람들이라면 여전히 이불속에서 꿈지럭거리고 있어야 했다.
물론 아침 일찍 기상해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는 있었다.
김검천 일행이 떠나려고 하는 순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달려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달려온 중년 남자의 얼굴은 추위로 인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웃는 얼굴로 워스덤에게 물었다.
“벌써 마을을 떠나시려고 하십니까? 날씨도 추운데 해라도 뜬 후에 가시지요.”
“저 무… 마차에 타면 따뜻합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제 오셔서 별로 해드린 것도 없는데 가시면 섭섭합니다.”
중년 남자는 마법사인 워스덤이 이 일행의 책임자라고 생각하는 모양.
워스덤은 김검천을 힐끗 쳐다보았다.
김검천이 눈짓으로 떠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고 싶지 않을 때라도 할 때는 해야 했다.
워스덤은 내키지 않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마음만 받겠소. 우리는 갈 길이 바빠서 말이요.”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더…”
김검천이 집요하게 달라붙는 중년 남자를 향해 말했다.
“지금 시간을 끄는 건가?”
대놓고 말하는 만큼 무례하게 느껴지는 말에도 중년 남자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금껏 이렇게 살아오기도 했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저는 그저 마을에 귀중한 손님이 오셨으니 가시는 게 아쉬워서 그런 것뿐입니다.”
김검천이 턱으로 공중을 가리켰다.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은데.”
김검천의 말대로 녹색의 로브를 두른 사람이 하늘에 떠 있었다.
비행 마법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과시하고 있는 자.
어느새 나타났는지 파악한 건 김검천 뿐이었다.
중년 남자가 반색을 하며 외쳤다.
“녹색 마법사님!”
자신을 부르는 말에는 신경 쓰지 않고 녹색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저 말대로 손님이 왔으면 주인을 보고 가야지. 그냥 가면 되겠나?”
김검천이 말을 되받아쳤다.
“조금 있으면 그냥 모른 척할 것이라고 후회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