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녹색 마법사가 혀를 날름거렸다.
유난히 녹색으로 빛나는 혀가 눈을 어지럽혔다.
저게 과연 사람의 가진 혀의 색깔이란 말인가.
- 할짝.
“과연 그럴까? 마도 왕국에 왔으면 즐길 만한 건 다 겪어야지. 너도 제법 맛이 느껴지겠는데. 김검천.”
김검천을 다 잡아 놓은 먹잇감처럼 보는 모양.
김검천이 묘한 눈으로 녹색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나를 아는군. 이곳에 있는 너희들까지 연락이 간 건가.”
녹색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제 마을에 이 몸이 왜 없었는지 아나?”
“우리 때문이겠지.”
“그렇다. 곧 올 건 알았지만 이 근처에 있다고 해서 급한 마음에 찾으러 나갔었지.”
“추운 밤 중에 고생이 많았군.”
“이거 성질이 급해서 탈이라니까. 그냥 마을에 머물렀으면 될 것을. 하지만 이제라도 너희들을 발견했으니 된 거야.”
그때 중년 남자가 다급히 말했다.
“녹색 마법사님! 슬슬 시간입니다!”
중년 남자에게는 중요한 건지 몰라도 녹색 마법사에게는 사소하기 그지 없는 일.
녹색 마법사가 짜증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그게 중요하더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 말고도 모두의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부디 자비를!”
중년 남자가 팔을 들어 올렸다.
소매를 걷어 올리니 아예 나무껍질 같은 피부가 드러났다.
어제 중년 남자를 보았을 때보다도 더 심각해진 피부였다.
이것 때문에 중년 남자와 마을 사람들이 마법사의 말을 따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중년 남자의 애절한 간청에 녹색 마법사가 표정을 풀었다.
“자비라. 뭐, 나쁠 건 없겠지. 이들에게 본보기도 보일 겸 말이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들이 귀찮아 졌다 이거야. 멍청아.”
- 딱.
녹색 마법사는 말 대신 중년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중년 남자의 피부가 갈라지더니 몸에서 갈색 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중년 남자가 예상하지 않은 사태에 당황했다.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마법사님! 자비를!”
“어허,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거야말로 실로 자비로운 행동 아니겠나?”
“으아아! 너 이 개새…”
중년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나무가 말을 할 수 없는 건 이곳에서도 상식이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돼버린 중년 남자를 놔둔 채 녹색 마법사가 김검천을 향해 웃었다.
안 그래도 이런 곳에 놔둔 마탑의 머저리들이 원망스러운 참이었다.
그런데 그런 불만을 단번에 풀 수 있는 기회가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녹색 마법사가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나무를 향해 말했다.
“너무 슬퍼 하지 말라고. 다들 네 뒤를 따라갈 테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마을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중년 남자가 겪은 비극이 그들에게도 닥친 것이다.
“으악!”
“이게 뭐야?”
- 와장창!
김검천이 묵고 있던 숙소 창문이 깨지며 나무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아직 사람의 형상이 남아 있는 나무였다.
김검천 일행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건 곧 지면에 뿌리를 박은 완벽한 나무가 되었다.
김검천과 일행들은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을에 왜 나무가 많은지 깨달았다.
마을 곳곳에 있는 나무는 바로 마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한 나무였었고.
녹색 마법사가 히죽거렸다.
“자, 이제는 너희 차례군. 이 마을에서는 할 게 없어 그동안 너무 심심했다고!”
김검천이 팔을 높이 올리자 손 부근에서 금속음이 들려왔다.
“지건 발동.”
- 타타타타탁--!
파워드슈츠에서 발사된 수많은 총탄이 하늘에 떠 있는 녹색 마법사를 꿰뚫었다.
너무 빠른 공격에 어떤 대처도 할 수 없던 녹색 마법사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샤칸이 잘 되었다는 소리쳤다.
“죽었구나!”
김검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엘프의 숲에서도 겪었지만 마도 왕국의 마법사는 이런 정도로 죽을 것 같지 않았다.
마스터 매지션이라면 특히.
그런 의미에서의 추가 공격이 발동했다.
어깨 위로 파워드슈츠의 장갑이 뭉쳐 작은 포탑으로 변형되었다.
포탑은 김검천의 시선을 따라 녹색 마법사를 향해 포신을 향했다.
“숄더 캐논 발사!”
- 쾅! 쾅!
샤칸마저 이미 죽은 자를 향해 너무 심하지 않냐는 듯한 눈빛을 보낼 정도의 공격.
그때 죽은 듯이 보이던 녹색 마법사가 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러자 지면에서 나무줄기가 무수히 튀어 나왔다.
- 펑!
폭발과 동시에 포탄은 튀어나온 나무줄기의 벽을 부수는 데에는 성공했다.
다만 녹색 마법사에게 유효한 타격을 주는 것에는 실패했다.
나무 벽 구멍 너머로 녹색 마법사가 두 발로 멀쩡히 서 있는 모습이 보인 것이다.
김검천이 다른 공격을 위해 숄더 캐논을 해제하면서 말했다.
“역시 살아 있었군. 여기 마법사들은 몸에 장난을 치는 게 기본인 건가.”
워스덤이 옆에서 조언했다.
“조심하시길. 상대는 나무 속성 마법을 위주로 하는 마스터 매지션인 듯합니다. 제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게 마나를 다루는 자이기도 하고요.”
워스덤의 말대로 녹색 마법사의 마법은 공격보다는 보조 역할에 특화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게 적은 마나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다 필요할 때 발동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나무 속성 마법의 진가였다.
그렇기에 워스덤도 제대로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고.
이곳이 마법사를 위한 마을이라는 말이 지금에서야 가슴에 다가왔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녹색 마법사에 의해 인체 개조가 끝난 상태.
물론 인체 개조라고 해도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받은 것이 아니었다.
지배자 역할인 마법사와는 다른 처지였으니까.
제국 밖에서 김검천 일행들이 본 뮤턴트들처럼 다시는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던 상태.
그것도 시간 제한이 가까워지자 이렇게 최악의 형태로 죽어갔다.
녹색 마법사가 도움을 주었다면 조금이나마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뚫린 나무줄기의 벽 구멍을 통과하며 녹색 마법사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피부는 마치 나무껍질같이 울퉁불퉁하고 갈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괴물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모습.
녹색 마법사의 얼굴로 보아 외모는 아무래도 좋은 듯했지만.
김검천이 녹색 마법사에게 말했다.
“마을 곳곳에서 들렸던 비명 소리와 방금 일을 보니 다른 마을 사람들은 다 죽었겠지?”
“당연한 것 아닌가? 쓸모가 다한 물건을 놔두는 마법사가 어디 있겠나.”
발끈한 워스덤이 뭐라 하려는데 김검천이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워스덤이 저런 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감정만 소모시키는 일이었다.
녹색 마법사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희들, 이몸의 마법 신호에 멀쩡하다니. 줬던 음식과 음료를 안 먹었군.”
“역시 거기에 뭔가 섞여 있었군.”
“마을 사람들처럼 만들어주는 것들이 들어 있었을 뿐이었지.”
“너희들은 이 마을뿐만 아니라 마도 왕국 전역을 이런 식으로 다루고 있는 건가?”
“물론! 마법사도 아닌 자들에게 자유가 있을리가. 이 몸보다 더 심한 자들도 많다고?”
마도 왕국에서는 마법사는 오롯히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하급 마법사는 상급 마법사의 뜻에, 상급 마법사는 마스터 매지션의 의지에 따른다.
이것이 마도 왕국의 사회 체계.
마법사가, 보다 강한 마법사가 곧 진리이자 법인 세상인 것이다.
마을 광장에 세워진 거대한 금속 동상도 이런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듯했다.
김검천이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좋군. 아주 좋아.”
녹색 마법사가 딱딱하게 변한 피부를 들어 웃는 표정을 만들었다.
갈색 피부로부터 나무 먼지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호오, 지금 같은 상황이 마음에 든다는 건가? 아깝군.”
“뭐가 말이지?”
“너같은 자는 본인 취향이거든. 고르바 탑주의 지시만 아니었다면 살려주었을 텐데.”
김검천이 고개를 흔들었다.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지만 저런 마법사의 제안 자체가 멀쩡할 리 없었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상태로? 이쪽에서 거절하지.”
“크크크, 눈치가 빠르기까지 하다니 더더욱 마음에 드는데? 결정했다.”
- 투두둑.
나무껍질이 뜯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녹색 마법사가 손으로 몸을 털었다.
- 후두둑.
몸에 박혀 있던 총탄이 납작해진 형태로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몸 정돈을 간단히 끝낸 녹색 마법사가 김검천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손가락에서 새싹이 자라더니 줄기가 되고 거기로부터 가지가 뻗어 나왔다.
“네 팔과 다리를 모두 쳐내고 몸통만 남김 채 분재로 삼아주지. 마음에 들거야.”
“악취미로군. 너보다는 본인 마음에 들어야지.”
“크하하! 네 의견 따위는 듣지 않는다! 본인 생각이 중요하지.”
“네 의견 따위는 처음부터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이제는 신경 쓰이도록 만들어주마!”
- 딱!
김검천이 손가락을 튕겼다.
자신이 손가락을 튕겼을 때 마을 사람들을 나무로 만들어 버린 걸 떠올린 것일까.
잠시 흠칫한 녹색 마법사가 자신의 몸을 빠르게 살폈다.
당연하겠지만 그의 몸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당황하는 녹색 마법사의 모습에 김검천이 피식 웃었다.
“뭐하나? 겁먹었나?”
“이놈이? 사람을 놀리다니!”
“난 사람을 놀린 적 없다. 괴물을 조롱했을 뿐이지.”
“네 놈! 장난은 끝이다!”
“내가 네 따위와 장난 칠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나? 미리내.”
- 콰직!
녹색 마법사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의 입에서 하얀 액채가 흘러내리다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인간을 벗어난 내구력을 가진 녹색 마법사였지만 어디까지나 생물.
갑자기 날아든 배틀 머신의 손에 잡혔으니 그 육체가 멀쩡할 리 없었다.
녹색 마법사가 가슴 밑으로 자신을 붙잡은 배틀 머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나마 멀쩡한 건 자신의 한 팔과 가슴 위뿐.
나머지 신체 부위는 배틀 머신의 손에 잡혀 꼼짝도 못 하게 된 상태였다.
특정 행동만으로도 김검천은 배틀 머신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미리내의 도움이 있다면 말이다.
“이…이건 뭐냐? 방금 손가락을 튕긴 건 이걸 부른 거였던가?”
“그런 셈이지. 널 처리하는 데 손가락 정도는 충분했거든.”
몸에서 붉은 액체를 흘리며 녹색 마법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무슨 수단을 쓴 건지 여전히 이해가 잘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을 튕긴 것만으로도 자신을 포박한 건 현실.
녹색 마법사가 소리를 질렀다.
“도와줘!”
금속망치를 들고 대기 중이던 샤칸이 그런 녹색 마법사를 비웃었다.
“바보 아니야? 김검천님이 왜 너를 도와줘야 해?”
그 순간 김검천은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녹색 마법사의 시선 때문이었다.
녹색 마법사는 김검천 자신을 상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샤칸도 녹색마법사가 김검천에게 애원하는 줄 알았고.
그런데 그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가 보니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등 뒤를 향하고 있었다.
김검천은 자신의 등 뒤에 무엇이 있는지 떠올렸다.
처음 마을에 방문했을 때 저 동상에 대해서 뭐라고 들었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같이.
[경고. 거대 물체 습격.]
“자리에서 피해! 최대한 빨리!”
미리내의 경고와 동시에 김검천이 소리치며 일단 옆으로 피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도 김검천의 말에 따라 일단 움직이고 보았다.
허둥거리던 워스덤은 루시엘이 상체를, 샤칸이 하체를 잡고 같이 뛰었다.
곧이어 그림자가 지더니 크고 무거운 물체가 빠르게 움직이는 파공성이 들렸다.
- 부오오. 쾅!
대지가 흔들리며 지면이 갈라졌다.
쩍 갈라져 입을 내민 바닥이 보기 흉했다.
주변에 잔뜩 있던 나무들도 단번에 으깨져 바닥을 뒹굴었고.
김검천과 녹색 마법사 사이를 가로지른 번질거리는 금속 기둥 같은 게 해낸 일이었다.
샤칸이 돌아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저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