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워스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김검천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잠깐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김검천의 말은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까.
엘프의 숲에서 싸웠던 암흑 마탑주 파벌의 마법사들이라면 워스덤도 이해가 갔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도 자신의 편이 아니라면 적보다 더 미울 때가 있었다.
그 결과 심지어 나라가 멸망한다 해도 그런 내부 권력 투쟁은 멈추기는 쉽지 않았다.
그건 역사로 증명된 사실인 것이다.
암흑 마탑주만 해도 김검천 일행보다 고르바 탑주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중이었고.
권력 다툼이라는 건 나라 밖의 적보다 나라 안 동료가 더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도 자신을 따르고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을 죽이려 들다니.
그것도 평범한 마법사가 아닌 마스터 매지션이라는 귀중한 전력을.
워스덤이 결국 김검천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고르바 탑주가 미친 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김검천은 그렇게 묻는 워스덤이 이해가 갔다.
군대 내에서 갖은 파벌들의 암투를 겪은 김검천도 아직 확신한 건 아니었으니까.
상식적으로 자기편을 함정에 밀어 넣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다만 상황으로 봐서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마스터 매지션을 처리함으로써 고르바 탑주가 그 이상으로 이익을 본다면 말이다.
“지금까지 일을 살펴보면 지금 마도 왕국은 고르바 탑주와 암흑 마탑주가 파벌을 만들어 싸우는 중인 것 같더군.”
“암흑 마탑주라면 그럴 만한 자격의 마법사지요. 고르바 탑주 못지않은 자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2개의 파벌로 나뉘어 나머지 마법사들이 권력 쟁취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 같고.”
“거기까지는 저도 알겠습니다만 고르바 탑주가 자기편도 죽이려는 부분은...”
김검천이 보기에 고르바 탑주의 목적은 마스터 매지션들을 반드시 죽이려는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장거리 마법이 부여된 마법 도구를 넘겨줬을 리 없었다.
정말 죽일 거면 그 마법 도구에 자폭용 마법이라도 발동하도록 했을 테니까.
“고르바 탑주에게 중요한 게 권력이 아니라면 이야기의 퍼즐 조각이 맞춰지지 않겠나?”
“마스터 매지션들이 그 마법 도구를 사용토록 하는 게 그의 의도였다는 겁니까? 도대체 무슨 의도로 말입니까?”
“모든 걸 뒤로 하고 마법사가 추구하고 싶은 게 무엇일까. 그 정답은 그쪽이 더 잘 알겠지.”
김검천의 추측에 워스덤이 흠칫했다.
생각해보면 마법사에게 있어 권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가 있겠는가.
마법, 거기에 더해 더 나아진 마법뿐이었다.
마법을 익혀 마법사라고 할 정도가 되면 마법이라는 굴레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마법사는 이세계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몸.
필요하다면 자신이 가진 무엇이든 버려가면서.
김검천이 마도 왕국의 마법사를 접하며 본 잔인한 광경들도 그것의 일부였다.
인체 개조든 실험이든 마법사가 자신 능력 한계를 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마스터 매지션 저 너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마법사들에게 있어 권력 같은 건 겉치레를 꾸며줄 장식에 불과한 것이다.
워스덤이 입을 열었다.
“역시 마법이겠지요. 마스터 매지션들을 버려서라도 얻을 수 있는 마법의 힘이라면? 솔직히 마스터 매지션을 능가하는 마법사가 될 수 있다면 저라도 흔들릴지도…”
워스덤이 말끝을 흐렸다.
여태까지 마도 왕국의 마법사들이 한 비인간적인 행동에 분노하던 워스덤이었다.
그런 그도 마스터 매지션 너머에 존재하는 마법에 대한 지식 욕구에 마음이 흔들릴 정도.
하물며 진작에 인성 같은 건 예전에 가져다 버린 마도 왕국의 마법사들은 어떻겠는가.
김검천이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생각은 할 수 있어. 실제로 하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야.”
“김검천님…”
“뭐, 그건 그렇고 내 생각이 맞다면 마탑까지는 앞으로 별일 없겠군.”
김검천은 구름을 꿰뚫고 높이 솟아오른 마탑을 바라보았다.
암흑 마탑주 파벌 마법사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곧 이상하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고르바 탑주가 정보를 통제한다 해도 분명 한계가 있을 테고.
고르바 탑주가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다면 애초에 다른 파벌 같은 게 생겼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과의 문제 때문이라도 고르바 탑주는 김검천 일행에 신경 쓸 틈이 없을 것이다.
마탑과의 거리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차라리 마탑에서 김검천 일행이 오기를 기다릴지도.
고르바 탑주는 마탑에서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지도 몰랐으니까.
모든 건 마탑에 도착하면 알게 될 일.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였다.
마을을 떠나기 전 미리내가 김검천에게 보고해 왔다.
[김검천 함장님. 함선 미르가 마침내 마도 왕국 결계 밖에 도착했습니다.]
미리내가 전달한 내용은 김검천도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이로써 마탑에서의 결전 때 비장의 수단이 늘어나게 되었다.
만약을 대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도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거리가 가까워져 원거리 조작이 가능해졌군. 왕국의 결계 안인데 접속이 가능한가?”
[저희가 통과한 결계의 틈을 통해 함선과 연락이 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동은 힘듭니다.]
세계수 묘목의 조각이 결계에 제법 넓은 틈을 만들어냈다.
그렇다고 해도 도시만큼이나 큰 함선 전부가 들어갈 정도의 공간은 무리였으니까.
그래도 그 외의 공격 수단은 사용 가능한 듯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대신 함선의 일부라도 결계 내에 가능한 진입시켜둬. 또한 대함선 무기를 사용할지도 모르니 엔진에서 발생한 잔여 에너지를 가능한 한 모아두도록 하고.”
[예. 다른 지시 사항은 있으신지요.]
“무인장비들을 동원해 격납고에 있는 장비들을 운용할 생각이야. 제대로 전투가 가능한 걸로 지금 당장 밤낮 가리지 않고 마탑으로 보내도록.”
전투 장비들을 운용시 모자라게 되는 에너지는 함선 미르의 원격 기능으로 보충할 것이다.
사출 기능을 통해 이동시킨다면 거리도 빠르게 단축하며 에너지도 많이 들지 않을 테고.
아쉬운 건 그것들이 김검천 일행이 마탑에 도착하고 나서야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알겠습니다. 또 다른 명령이 있으신지요?]
“나머지는 마탑에 간 후에 다시 결정하지. 그쪽도 우리 이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일테니.”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점차 더 굵어졌고 쏟아지는 양은 더 많아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무인차량이라도 가다가 눈 속에 파묻힐 거 같았다.
김검천은 슬슬 무인차량의 다른 기능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비행 기능이라면 눈 속에 파묻힐 염려는 안 해도 될 것이었다.
약간의 에너지 더 소비하는 것이 탑승자의 편안함을 보장하는 것이다.
비행 이동을 위해 김검천이 모두를 무인차량에 태우며 중얼거렸다.
“고르바 탑주와 마법사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마탑에 도착하면 알게 되겠지.”
***
- 쿵!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힘껏 두들겼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죄 없는 문이라도 두들겨서 해소하고 싶다는 듯이.
깊은 사색 속에 잠겨 있던 고르바 탑주가 깨어났다.
다른 곳도 아닌 탑주의 집무실 문을 누가 감히 저렇게 두들긴다는 말인가.
고르바 탑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난리인가. 조만간 다들 버릇을 고쳐줘야겠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고르바 탑주는 방금 전 치료사에게 받은 책을 전부 읽어 새로운 힘을 얻는 데 성공했다.
원래 이건 유체이동 마법으로 치료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봐야 하는 책이었다.
그래도 치료사에게 간절히 부탁한 끝에 겨우 책을 여기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내용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치료사는 단 하루의 기한만 허락해 준 것이었다.
기한을 어기고 책을 본다면 다시는 이 책을 볼 수 없다는 마법의 맹세까지 해야 했다.
고르바 탑주는 아쉬움을 달래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책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어냈기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누가 방해를 하든 간에 계속 책에 집중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르바 탑주는 책을 올려둔 책상과 앉아 있던 의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움직이지 않은 가구는 좋은걸. 살아 움직이는 가구는 끔찍하다고.”
그러자 책에서 두 다리가 튀어나오더니 책상 밑으로 뛰어내렸다.
치료사가 준 기한이 방금 끝난 모양이었다.
떨어지는 중간에 책은 반투명하게 변하더니 그대로 지면 밑으로 통과해버렸다.
보아하니 책 스스로 자신에게 유체이동 마법을 걸어 치료사에게 돌아간 것 같았다.
고르바 탑주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치료사 놈. 책에는 발이 없어 어디 도망가지 않는다더니. 책 혼자 마법까지 사용하는군.”
평소와 다른 고르바 탑주의 모습.
고르바 탑주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자신을 속일 필요가 없다는 듯이.
- 쾅!
큰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겨우 마탑으로 돌아온 녹색 마법사가 문을 박차고 집무실 안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고르바 탑주가 혀를 찼다.
“츳, 이거 녹색 마법사 아닌가. 마스터 매지션이라는 자가 이렇게 예의가 없어서야.”
“예의? 지금 예의를 따질 때냐고!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흠, 목소리를 좀 낮추는 게 어떻겠나? 바깥까지 소리가 다 들리겠네.”
“들리라고 이러는 것이야!”
“그런가? 그러면 이쪽도 마음대로 하도록 하지. 닫혀라. 문.”
- 탁.
고르바 탑주의 짧은 말에 집무실의 문이 닫혔다.
녹색 마법사는 닫히는 문에 밀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고르바 탑주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집무실은 치료사가 있는 장소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마법이 걸려 있었다.
어느 정도는 보안이 유지되는 것이다.
“자, 그러면 대화를 시작하도록 하지.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자신은 그래도 고르바 탑주의 파벌이며 몇 안 되는 마스터 매지션 아닌가.
녹색 마법사는 문이 닫히자 불길한 예감이 들어 움찔했지만 이내 분노가 앞서 입을 열었다.
“그 김검천과 그 일행들 정체는 대체 뭐요! 워스덤이 있다고 하나 이 몸과 금색 마법사가 힘을 합쳤는데도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단 말이요!”
녹색 마법사는 전투 도중 마법 도구의 힘을 빌려 도망쳤기에 싸움의 끝을 보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거기서 벌어질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녹색 마법사 자신을 간단히 처리한 자들을 금색 마법사 혼자 무슨 재주로 이긴단 말인가.
실제로도 마을에서의 일은 그렇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고르바 탑주가 별 거 아니라는 듯 로브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들 말인가. 암흑 마탑주 파벌의 마스터 매지션 2명을 해치운 자들이지.”
녹색 마법사가 입을 벌렸다.
그런 정보가 있다면 우선적으로 자신들에게 제공되어야 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김검천 일행을 해치우라는 지시만 내려왔었다.
이건 분명 따져야 할 일이었다.
“고르바 탑주. 그 정보를 은폐해서 우리들마저도 속인 겁니까?”
“음? 딱히 속이거나 숨길 의도는 없었다네.”
녹색 마법사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러면 어째서 그런 정보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은 겁니까!”
녹색 마법사의 피를 토할 것 같은 외침에도 고르바 탑주는 별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대신 집무실 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제와서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거든. 자, 보게나.”
“말하던 것이나 끝낼 것이지! 아니, 아무것도 없는 저 벽을 보라는 거요?”
“아, 지금 자네는 장거리 마법의 부작용으로 마나를 못 쓰던가? 도와주도록 하지. 투명해진다. 벽.”
고르바 탑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집무실 한쪽 벽이 투명해지며 건너편이 보였다.
그곳에는 황색 마법사가 정신을 잃은 채로 누워있었다.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는 관 속에 있어서 그런지 어딘가 피부색마저 흐릿해진 모습으로.
수상쩍은 광경에 녹색 마법사가 물었다.
“다쳐서 회복 중이라던 황색 마법사가 왜 저런 곳에 들어가 있는 겁니까? 저건 회복 중이 아니라 마치…”
녹색 마법사가 말꼬리를 흐렸다.
막상 입 밖에 내려고 하니 등골이 오싹해진 것이다.
다른 자도 아니고 마스터 매지션이 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고르바 탑주의 눈이 둥글어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허, 말은 끝까지 하게나. 저게 마치 뭐 같아 보인다는 건가?”
녹색 마법사가 고르바 탑주의 눈치를 보았다.
고르바 탑주는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녹색 마법사는 눈을 질끈 감고 생각하던 걸 입 밖으로 내뱉었다.
“우리가 여태까지 연구실에서 인체 실험을 위해 사용하던 실험체처럼 보인다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