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이야기를 들은 뭔가 결단을 내렸는지 암흑 마탑주가 말문을 열었다.
“자, 다들 알겠지만 이제 우리 측 피해가 2명, 고르바 탑주 측 피해가 2명이요.”
청색 마법사는 암흑 마탑주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청색 마법사 또한 세력의 균형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암흑 마탑주의 말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암흑 마탑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이제 고르바 탑주가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마스터 매지션은 없다고 봐야지요.”
암흑 마탑주에게 부정적인 의견을 내기에는 무서웠다.
그렇기에 다른 마스터 매지션은 청색 마법사에게 물었다.
“아직 그쪽에 마스터 매지션이 몇 명 더 남아있다고 알고 있소만?”
“남아있기는 합니다. 아직 누구의 편에 들지도 않은 마스터 매지션도 있고요.”
“그러니까 계산이 틀린 게 아닌가 하는 거요.”
“하지만 그들은 결계 유지와 보수에 매달려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잠시만 이야기를 더 들어보시지요.”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결계는 만들 때 많은 마나가 필요했지만 유지와 보수는 생각보다 적은 마나가 들어간다.
마스터 매지션 2명이면 어떻게든 마도 왕국 전역의 결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불어 넣어둔 마나량이 많다면 잠시 손을 떼도 결계가 해제되지도 않고.
그 역할을 맡은 건 고르바 탑주 파벌의 마스터 매지션이었다.
즉, 고르바 탑주는 지금 혼자 남아 있는 것이다.
다른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마스터 매지션들을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암흑 마탑주님이 고르바 탑주와 협의해 마력 공급을 위해 최상급 마석에 배치해둔 상태 아닙니까?”
고대의 대마법이 발동하려면 막대한 마나가 필요했다.
메테오 스웜을 시전했을 때 마도 왕국의 모든 마스터 매지션이 한자리에 모여야 했다.
메테오 스웜이 발동한 이후에도 마법에 들어갈 마나는 동일.
누군가는 최상급 마석에 계속 마나를 제공해야 메테오 스웜이 발동할 것 아닌가.
그런 무식하게 힘든 일을 하는 건 마도 왕국의 모든 마스터 매지션들이 원하지 않았다.
자고 밥을 먹는 시간 외에는 계속 최상급 마석에 달라붙어 있어야 했으니까.
마스터 매지션 같은 대단한 존재가 단순히 마나를 불어넣은 도구의 위치로 전락하는 셈.
그 결과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마스터 매지션들이 뽑혔다.
물론 그들도 자원한 건 아니라 암흑 마탑주와 고르바 탑주의 협의에 의해서였다.
그래야 자신뿐만이 아니라 같은 파벌 마스터 매지션들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테니까.
두 파벌의 마스터 매지션들이 아닌 자들이 힘겨루기에 져 결국 마석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매일같이 마나를 빨려 나간 그들은 지금 와서는 반쯤 망가진 상태.
이제와서 고르바 탑주가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해도 당장 쓸 수는 없었다.
망가진 몸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에 비해 암흑 마탑주의 세력은 탑주를 제외하고도 마스터 매지션이 4명이나 되었다.
몸을 탁자 앞으로 숙인 암흑 마탑주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렇다면 지금 고르바 탑주는 혼자나 다름없다는 말이라는 걸세.”
청색 마법사가 암흑 마탑주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암흑 마탑주님이 마도 왕국의 절대자가 될 절호의 기회가 알아서 우리를 찾아왔다는 겁니다. “
“하지만 고르바 탑주가…”
“뭐가 문제일까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고르바 탑주가 죽으면 다 끝나는 일 아닙니까?”
이 안건에 대해서 청색 마법사만이 암흑 마탑주와는 미리 이야기가 된 상태.
혹시라도 배신자가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지금까지 속마음을 감춰온 상태.
크게 유리해진 지금에서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꺼내든 것이다.
당연히 마스터 매지션들은 고르바 탑주를 죽이자는 말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권력 다툼을 해온 건 사실.
그 와중에 상대방 파벌의 마스터 매지션이 죽거나 다치면 오히려 좋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마도 왕국의 수장, 고르바 탑주를 처리하자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그야말로 반란을 일으키자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기에 한순간 입을 다물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머뭇거리는 마스터 매지션들을 두고 암흑 마탑주와 청색 마법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런 말까지 꺼낸 이상 어찌 되었든간에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야기가 고르바 탑주의 귀에 들어간다면 오히려 반격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
청색 마법사가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금 고르바 탑주는 혼자요.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보았자 우리와 같은 마스터 매지션! 거기에 비해 우리 파벌 마스터 매지션은 모두 5명 아닙니까?”
너무나 확고한 발언에 나머지 3명의 마스터 매지션이 흔들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르바 탑주를 처리하는 일은 실패할 확률이 적지만 분명 있었다.
암흑 마탑주 측 마스터 매지션은 총 5명.
고르바 마탑주 측 마스터 매지션은 총 3명으로 약 2배 차이.
지금은 5명 대 1명이 되었으니 5배나 차이가 났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무조건 성공하는 일이었다.
100% 성공하는 일에 안 끼어들면 마법사답지 않게 바보 같은 짓이다.
지금이야말로 승부를 걸 때였다.
마음이 흔들리는 마스터 매지션들을 향해 암흑 마탑주가 달콤한 미끼를 던졌다.
“성공한다면 마도왕국을 5개로 나눠 한곳씩 나눠주기로 하지. 거기서 왕처럼 살게나.”
마스터 매지션들의 눈에 탐욕스러운 빛이 번뜩였다.
지금도 불편 없이 살고 있었지만 아예 구역을 할당받아 제멋대로 사는 건 다른 이야기.
할당받은 구역 안이라면 자신이 암흑 마탑주나 고르바 탑주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암흑 마탑주가 말을 이었다.
“그뿐인가? 메테오 스웜 마법 주문도 다 입수한 상태네. 이제 남은 건 고르바 탑주뿐.”
청색 마법사가 슬쩍 한마디 덧붙였다.
“그자만 없어지면 우리는 세상을 얻게 되는 겁니다.”
“거기다 마도 왕국말고도 세상을 5개 구역으로 나눠 가지는 것 어떻겠나? 고르바 탑주를 잡으면 또다른 새로운 고대 대마법 주문을 얻을지도 모르지. 그것도 같이 공유하도록 하지.”
- 탁.
탁자를 내려친 마스터 매지션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말뿐인 약속이라지만 암흑 마탑주도 고생을 같이한 동료들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다 성공한 후의 이야기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패한다는 게 더 이상한 상황.
“이렇게 된 이상 망설일 필요가 뭐 있겠소? 갑시다!”
그는 곧 얻게 될 보상에 눈이 먼 듯해 보였다.
마법의 벽에 부딪혀 평생 그 이상의 한계를 넘어가지 못하자 탐욕만 늘어난 것이다.
인내심 같은 건 더이상 찾아볼 수 없는 모습.
그것은 이곳에 있는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
어차피 마도 왕국 마법사들은 의리나 선의 때문에 모인 자들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갑시다! 당장이라도!”
“눈치채기 전에 지금이라도 움직이도록 하지요!”
고르바 탑주가 보물덩이인 황금 고블린이라도 되는 듯 아우성치는 마법사들이었다.
암흑 마탑주가 서두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마스터 매지션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암흑 마탑주는 그대로 집무실 문을 열며 아무 말 없이 나섰다.
움직이는 방향은 고르바 탑주가 있는 집무실 쪽.
청색 마법사가 바로 암흑 마탑주를 따라갔다.
나머지 3명의 마스터 매지션들도 뒤처질세라 그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
그들은 서로 고르바 탑주를 처리하는데 자신이 먼저 나서서 공격하겠다고 생각했다.
공을 세운 만큼 많은 걸 요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마음이었으니 늦게 나선 3명이 오히려 먼저 문을 나선 암흑 마탑주와 청색 마법사를 추월했다.
암흑 마탑주와 청색 마법사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욕심이 눈에 멀어서 그런지 알아서 행동하는 모습이 기특하기까지 했다.
암흑 마탑주와 청색 마법사도 고르바 탑주와 싸워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애초에 그를 처리하러 움직이지도 않았을 터.
하지만 그 와중에 누가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만약 죽는 사람이 나온다면 이 자리에서 가장 앞장선 자가 먼저 죽지 않겠는가.
***
고르바 탑주의 집무실.
먼저 도착한 마스터 매지션들이 저 뒤에서 뒤따라오는 암흑 마탑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명이 속삭였다.
“이보게나. 우리 먼저 들어가자고.”
“응?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암흑 마탑주님을 기다려야지.”
“어허, 마스터 매지션이 3명일세. 그런데도 뭐가 무섭다는 건가?”
“무섭다는 게 아니라 일을 확실히 하자는 거지.”
“쯧쯧, 암흑 마탑주님이 저기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그렇게 겁나나?”
도발당한 마스터 매지션이 발끈했다.
고르바 탑주와 일대일로 붙는다 할지라도 이기지는 못해도 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런 만큼 참지 못하고 도발에 넘어갔다.
“허참, 과연 그런지 잘 보고나 있게나!”
앞장선 마스터 매지션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자신에게 방어 마법을 걸고 움직였다.
다른 마스터 매지션들은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주위에 침묵과 통행 금지 마법을 걸었고.
마스터 매지션이 아니라면 이 자리에 누구도 오지 못할 것이다.
마스터 매지션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마치 누가 방문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들어선 마스터 매지션이 집무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고르바 탑주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 아무도 없는 듯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마스터 매지션이 고개를 돌렸다.
“이봐,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동료 마스터 매지션이 피식 웃었다.
“집무실 안에 들어가서 살펴야지. 그렇게 고개만 들이밀고 살피면 되겠나?”
“거참, 아무도 없다니까.”
“응?”
동료 마스터 매지션의 얼굴빛이 변했다.
집무실 안에 막 들어서서 살피던 마스터 매지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나?”
“뒤를 봐!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다고!”
동료 마스터 매지션이 소리를 지르자 마스터 매지션이 고개를 돌렸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챈 암흑 마탑주와 청색 마법사도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암흑 마탑주와 청색 마법사가 고르바 탑주 집무실 앞에 도착할 무렵.
마스터 매지션들은 그 집무실 안에 세 사람이 있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고르바 탑주는 그렇다 치고 치료사와 펠우테, 두 사람은 왜 이 자리에?”
결정하자마자 움직인 이 짧은 시간에 정보가 새었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이 자리는 함정이었던가.
그때 펠우테가 가장 앞에 있는 마스터 매지션에게 달려들었다.
마스터 매지션 주위로 붉은빛이 번뜩이더니 펠우테가 공중 제비를 넘으며 착지했다.
마스터 매지션이 걸어둔 방어 마법이 발동해 부딪힌 펠우테가 튕겨 나간 것이다.
완전히 튕겨나기 전에 펠우테는 양팔에서 튀어나온 칼을 빠르게 휘둘렀다.
순간 놀랐지만 자신의 방어 마법을 믿은 마스터 매지션이 펠우테를 보며 비웃었다.
“흥, 마법사도 아닌 주제에 어딜 마스터 매지션에게 덤비느냐!”
펠우테가 그런 마스터 매지션을 보며 나직히 울부짖었다.
마치 비웃는 듯한 음성이었다.
“크르르...”
그 말을 내뱉은 마스터 매지션의 얼굴로부터 붉은 실선이 그어지고 있었으니까.
그 붉은 실선은 점점 그 길이를 늘려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이어졌다.
마스터 매지션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뭐…뭐지? 이거 기분이 이상해.”
그게 그 마스터 매지션의 마지막 말이었다.
몸이 반으로 갈라져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이다.
그걸 본 치료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펠우테. 함부로 나서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들은 다 쓸모가 있는 자들입니다.”
“크릉크릉.”
그제야 도착한 암흑 마탑주와 청색 마법사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
그 둘도 준비해두었던 방어 마법을 급히 발동하며 전투태세에 들어섰다.
고르바 탑주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기다리다 지쳤다네. 이제야 올 사람은 다 온 모양이군. 그러면 시작해 보도록 하지.”
고르바 탑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집무실 앞 지면의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