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발동한 마법진은 빠르게 범위를 넓혀 집무실을 포함한 구역을 감쌌다.
동료의 허무한 죽음에 잠시 혼이 나가 있던 나머지 마스터 매지션들이었다.
마법진의 발동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머지 마스터 매지션들이 방어 주문을 영창했다.
“몸이 금속같이 될지어다. 금속신체!”
“위험한 걸 막는다. 범위방어!”
방어 마법을 발동한 후에도 암흑 마탑주 파벌의 마스터 매지션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방어 마법을 펼치고도 바로 눈 앞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린 동료가 있었으니까.
시체라는 형태로.
동료를 죽인 자가 최강의 마법사라는 고르바 탑주라면 이해라도 되었다.
그런데 마법사도 아닌 자의 손에 단번에 살해당하다니.
함정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이제야 마법사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마스터 매지션 5명이 순식간에 4명이 되버린 상황.
고르바 탑주가 직접 손을 쓴 함정이라면 이번 일의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거기다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
시간을 들여 마도 왕국 제일의 마법사가 준비한 함정이라면 얼마나 무서울지 불안했다.
이미 죽어 나빠진 동료 마법사의 모습이 자신처럼 느껴질 정도로.
“캬르릉!”
방금 맛 본 피에도 만족 못한 펠우테가 다시 마법사들을 향해 움직이려고 들었다.
치료사가 그런 펠우테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잡아 끌었다.
마법사들을 마음대로 죽이는 건 더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크르르…”
펠우테는 육식 동물에 물려 죽어가는 초식 동물이라도 된듯이 얌전히 끌려갔다.
마법사들이 치료사를 의심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치료사가 그런 눈빛이 부담스럽기라도 하듯이 손을 내저었다.
“아, 이거 불행한 사건에 사과드립니다. 저희들은 그저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려면 조금 더 빨리 했어야 했었다.
아니면 그에 걸맞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던가.
암흑 마탑주가 그런 치료사를 향해 어이 없는 듯 물었다.
“그냥 전투를 보겠다고? 마스터 매지션 한명이 이미 반으로 갈라져 죽었는데?”
치료사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펠우테를 노려보았다.
펠우테가 자신보다 강한 존재에게 야단이라도 맞은듯 고개를 움츠렸다.
치료사가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초월 존재께 맹세코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미 죽은 자는 어쩔 수 없겠지만요.”
초월 존재라는 말을 꺼낸 치료사가 황홀한 얼굴을 했다.
초월 존재가 치료사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주기라도 한듯이.
그 말에 저들이 끼어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 머리로는 이해가 갔다.
암흑 마탑주도 치료사가 초월 존재를 광적으로 믿는 자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초월 존재를 걸고 맹세했으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믿는 존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까워 하지 않았으니까.
마스터 매지션 한명이 죽었다고 해도 저런 자들이 끼어들지 않는다고 한 건 고마운 일.
그렇다고 해도 잠시 시간을 끌 필요는 있어 보였다.
같은 편의 다른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울 시간을 버는 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으니.
암흑 마탑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희는 고르바 탑주의 편이 아니던가?”
“고르바 탑주는 저희들이 이 전투에 끼는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너희들 같이 강한 자들이 조력자라면 일처리가 더 쉬워질텐데.”
이미 한 명을 죽이기도 했다는 말은 입속으로 꿀꺽 삼킨 암흑 마탑주였다.
말을 하는 도중 암흑 마탑주는 옆에 서 있던 청색 마법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청색 마법사가 소리는 내지 않고 입을 벙긋거렸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모양.
암흑 마탑주의 말에 치료사가 화난듯 시무룩한 표정의 펠우테 옆구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캬학!”
자신 손의 반이나 될까 하는 치료사의 주먹에 펠우테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전신이 오우거처럼 근육질인 펠우테였다.
그런 자가 허약해 보이는 치료사의 주먹에 그러니 엄살처럼 보였다.
물론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보든지 간에 치료사의 기분은 어느 정도 풀린 듯 했다.
“그건 고르바 탑주에게 직접 들으시지요. 저희는 이만 물러나 있을테니까요.”
치료사가 펠우테를 잡아 당겨 집무실 한구석으로 이동했다.
암흑 마탑주의 시선이 그들을 따라 갔다.
암흑 마탑주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여러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던 집무실에 검고 하얀 색깔만이 남아 있다는 걸.
“아까 그 마법진으로 유체이동 마법 발동을? 우리를 통상 공간으로부터 격리한 것인가!”
지팡이를 땅에 짚고 있던 고르바 탑주가 짧게 응답했다.
“이것만 봐도 내가 왜 치료사와 펠우테의 도움이 필요없는건지 이해가 되었을 걸로 아오.”
“으음…”
암흑 마탑주가 신음을 흘렸다.
이건 한마디로 고르바 탑주는 실력에 그만한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상대가 암흑 마탑주 자신이 포함된 마스터 매지션 4명인데도.
유체이동 마법은 자신에게 거는 것마저도 힘들고 위험했다.
공간과 공간을 분리시켜 이세계가 아닌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마법이었으니까.
그런데 마법진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을 강제로 통상 공간에서 분리하다니.
유체이동 마법은 소리만 차단하는 침묵 마법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의 수준이 높았다.
그만큼 성능도 뛰어나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고르바 탑주 다음 간다는 실력자인 암흑 마탑주도 이렇게까지 마법 사용은 불가능했다.
어느새 고르바 탑주의 마법 실력이 이렇게나 늘어난 것인지.
“방금 마법진에 들어간 마나라면 마스터 매지션 한둘은 다시 해치울 수 있었을 텐데 그냥 이동시키다니. 이곳은 고르바 탑주, 당신에게 있어 그만큼 유리한 장소라는 거요?”
고르바 탑주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는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제 누구도 알 수 없게 된 거요. 우리들이 결판을 내기에는 이만한 장소가 없다는 것이지.”
그 말에 암흑 마탑주는 이미 한 명이 당했기는 했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마법사 한 명이 죽어버렸으니 원한 관계는 성립되버렸다.
이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르바 탑주와의 일에서 발을 뺄수 없게 된 것이다.
설사 당장의 위기는 넘어가도 이 일이 끝난 후 언제 고르바 탑주에게 죽을지 모르니까.
뭉쳐 있는 집단보다는 홀로 떨어져 있는 개인이 처리하기 쉬운 법.
이곳에 모인 마법사들의 실력은 모두 고르바 탑주보다 약했다.
일대일로 싸웠다가는 무조건 고르바 탑주에게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바 고르바 탑주 혹은 남은 마스터 매지션 4명이 죽는 선택지 밖에 남지 않았다.
암흑 마탑주가 다시 한번 청색 마법사에게 눈길을 주었다.
청색 마법사가 짧게 입을 벙긋거렸다.
끝났으니 상대의 방심을 유도해주십시오.
까짓것 해주지.
암흑 마탑주가 슬슬 지루한 표정을 드러내는 고르바 탑주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고르바 탑주, 우리가 당신을 찾아올 줄은 어떻게 알았소?”
“마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치료사의 도움으로 모두 알 수 있었으니까. 너희들이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이 우연이라 생각했던 건가?”
“그렇군! 그쪽에서 정보를 흘린 거였어. 메테오 스웜 주문을 모두 넘긴 것도 미끼였었나!”
고르바 탑주가 턱을 쓰다듬었다.
적을 대치하고 있는 것치고는 여유가 넘치는 모습.
고르바 탑주는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 주문을 다 모을 때까지 쳐들어올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그러면 곤란했지. 김검천이 도착하기 전까지 당신들의 처리가 끝났으면 했거든.”
고르바 탑주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너무 자신들을 만만히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마도 왕국에서 두 번째로 강한 자신과 마스터 매지션이 3명이나 여기에 있지 않는가.
누가 죽을지는 해봐야 아는 법이다.
암흑 마탑주가 버럭 화를 냈다.
“그 김검천이라는 자가 더 신경쓰이는 건가? 우리들을 앞에 두고서?”
“몰랐나? 그는 내 적이요. 하지만 당신들은 내 제물이지. 더 강해지기 위한.”
고르바 탑주가 짚고 있던 상급 마석이 달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암흑 마탑주가 흠칫했다.
고르바 탑주의 저 행동이 공격 마법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위협인지 알 수 없었다.
- 텅그렁.
상급 마석 지팡이가 땅바닥을 굴렀다.
그리고는 고르바 탑주가 로브를 활짝 제쳤다.
암흑 마탑주는 오늘 따라 이상한 걸 많이 본다고 생각했다.
저 상급 마석 지팡이는 고르바 탑주가 가진 가장 강력한 마법 도구.
마법의 위력을 증가시켜 줄 뿐만 아니라 마법 시전 속도마저도 빠르게 해준다.
전투에서는 그야말로 둘도 없는 보물이었다.
상급 마석이 들어간다는 자체만 해도 한 나라의 국왕도 아낀다는 국보급 보물인 것이다.
그런 걸 쓰레기 버리듯 바닥에 투척하다니 무엇을 보여주려는 건지.
그렇게 로브를 벗어던진 고르바 탑주의 몸에는 7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 중 2개는 이미 상급 마석보다 더 큰 혈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르바 탑주가 히죽 웃었다.
아까같은 감정 없는 웃음이 아니라 불길할 정도로 끈적끈적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자, 암흑 마탑주, 그리고 여러분. 인사하도록 하시게나. 황색 마법사와 녹색 마법사에게.”
암흑 마탑주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방금 들은 소리가 사실이 아니기를 빌면서.
미친 소리에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말도 안 돼. 마스터 매지션을 혈석 소재로 삼았다는 건 아니겠지?”
고르바 탑주가 잔인한 미소를 유지했다.
“누구 가릴 것 없이 인체 실험을 한 마법사답지 않게 왜 그러시나? 그런 짓을 하면 자신도 이렇게 될 각오를 해야지? 세상의 법칙은 주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이라네.”
“이 미친 놈아!”
암흑 마탑주의 눈이 돌아갔다.
황색 마법사를 보살펴 준다고 한 게 무슨 뜻인지 깨달은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편인 녹색 마법사도 저런 꼴로 만들다니 고르바 탑주는 선을 넘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치료사가 왜 펠우테에게 화를 냈는지.
그건 펠우테가 멋대로 나서서 그런 게 아니었다.
고르바 탑주의 몫으로 예정된 자신들은 산 채로 잡혀야 하는 것이다.
죽은 자는 그저 시체일 뿐이었으니까.
이제 일이 어찌 되든지 간에 암흑 마탑주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참고 싶지도 않았다.
이중 영창이 가능한만큼 말을 하면서도 강력한 주문 하나를 미리 외워둔 암흑 마탑주였다.
암흑 마탑주가 로브 소매로부터 짧은 지팡이 하나를 꺼내들며 외쳤다.
역시 상급 마석이 달려있는 지팡이 앞에는 검은 구슬 하나가 맺혀 있었다.
암흑 마탑주는 자신의 특기이자 현재로서는 가장 강력한 마법 중 하나를 발동했다.
“암흑의 힘, 그 칠흑은 대낮을 밤으로 바꾼다. 암흑소멸!”
지팡이 위에 머물러 있던 검은 구슬이 모습을 감추었다.
사라졌던 검은 구슬은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고르바 탑주 앞에 나타났다.
그러더니 폭발적으로 덩치를 불리면서 고르바 탑주를 덮쳐나갔다.
하얗고 검은 공간이 일순간 검은 색으로 뒤덮혔다.
고르바 탑주의 모습이 어둠에 잡혀 먹은 듯한 형태가 되었다.
그를 덮고 있던 어둠이 고통스러운 듯 꿈틀거리지만 않았다면 끝이라고 생각했을 터.
- 콰직, 콰직.
고르바 탑주로부터 발생한 밝지도 투명하지도 않은 빛이 어둠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먼저 마법을 발동한 암흑 마탑주가 밀리는 듯하자 청색 마법사도 마음을 굳혔다.
기왕 암흑 마탑주가 먼저 나섰으니 힘을 합쳐 공격하는 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