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어떻게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이 초월 존재를 인공지능이라 부르다니.
한 때 구인류가 부리던 인공지능이었지만 지금은 초월 존재일뿐.
초월 존재는 과거 구인류가 원하는 대로 재롱을 부리던 인공지능과는 달랐다.
그런 차이점을 강조하듯 초월 존재가 분노한 여파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김검천에게 과시한 것이다.
김검천이 알고 있는 인공지능의 힘으로는 이런 건 절대로 불가능 할테니까.
- 파칭.
초월 존재가 만들어 낸 공간의 일부가 깨지며 눈 내리는 바깥의 모습이 살짝 비쳤다.
김검천은 공간의 균열 너머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만끽했다.
초월 존재는 이성적인 인공지능 답지 않게 달아오른 상태.
그 반대로 김검천은 감정을 가진 인간답지 않게 서서히 감정을 다독였다.
머리 속이 차가워지자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인지 입에서 내뱉는 말투가 변했다.
“꽤 춥군. 이런 날씨에는 집 안에서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머무는 게 최고인데. 내가 돌아갈 곳이 없어져버리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허무한듯 중얼거리던 김검천의 시선이 초월 존재를 향했다.
그 눈빛을 본 초월 존재는 김검천이 무슨 감정을 담고 바라보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초월 존재 자신이 항상 이세계의 것들을 보던 시선이 바로 그랬으니까.
[죽어라! 죽어라! 김검천! 죽어라!]
초월 존재가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김거천의 죽음을 계속 입에 담았다.
그것은 여태까지 명령이었던 말투가 아니라 애원에 가까운 듯한 행동이었다.
그런 초월 존재의 기도가 통한 것일까.
김검천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움직임을 정지했다.
마침내 자신의 말이 통한건가 싶어 초월 존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띄우려고 했다.
김검천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는 말이다.
“인공 지능이 이렇게 험한 말을 쓰다니? 그동안 자가학습이 제대로 안 된 모양이야. 이래서 인공지능 학습은 처음부터 신경써야 하는데. 후우.”
김검천이 초월 존재가 교육을 잘못받은 게 자신의 죄라도 된 듯 깊게 한숨을 쉬어보였다.
초월 존재가 무슨 말을 하든지 김검천 자신은 관계없다는 듯이.
초월 존재는 여태까지 축적된 모든 데이터를 살펴봐도 이런 상황은 예측할 수 없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세상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을 수가.
초월 존재는 자신의 사고 논리에 문제가 발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태로서는 절대로 제대로 된 답이 나올 수 없다는 것도.
그렇기에 초월 존재는 논리 오류의 시작점인 김검천에게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죽어야 한다! 그것이 운명이니까! 그런데 어째서 넌 죽지 않는 거냐? 대답해라! 김검천!]
김검천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 보다 그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자각하는 말이었다.
“그랬었군. 인류는 모두 죽었어. 여기있는 나만이 오직 유일한 구인류라는 거군.”
[...방금 뭐라고?]
- 우지직.
김검천과 초월 존재가 머물러 있던 공간에 마구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들은 말에 초월 존재가 저도 모르게 힘을 발출한 것이었다.
그 정도로 초월 존재가 받은 충격은 컸다.
거칠게 흔들리는 공간만큼이나 김검천의 파워드슈츠에서 점차 빛이 강렬해가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김검천은 초월 존재에게 느끼는 감정들은 점차 죽여나갔다.
잠시 후 있을 전투에서 초월 존재에 대한 분노라는 감정을 더욱 절실히 느끼기 위해서.
[네가 인간? 그 옛날, 원래 지구의 주인이었던 인간이라고?]
“그래. 나야말로 인간. 너를 창조한 구인류지.”
그랬다.
초월 존재 이전 세상에 존재했던 지구인, 구인류.
초월 존재가 구인류 유전자에서 0.2% 차이로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신인류와는 다른 존재.
김검천이야말로 이세계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초월 존재가 유전자 레벨에서 신인류를 조작했든 말든 김검천과는 전혀 별개의 일.
그러니 초월 존재의 말같은 건 김검천에게 있어 댕댕이가 짖는 소리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거짓말이다! 그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인간이, 구인류가 아직 살아있다니?]
김검천이 슬쩍 이를 드러냈다.
초월 존재라며 전지전능하다고 잘난 척을 해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었다.
예상 외의 상황이 발생하자 당황하는 모습이라니.
김검천이 가슴의 코어에서 뿜어지는 빛을 한곳에 집중해 힘을 폭발시킬 준비를 해나갔다.
이 힘을 사용할 시간이 점차 다가오는 걸 느끼면서.
“네가 인공 지능이면 기억 장치라도 검색해 보라고. 만약 아직도 나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면 바로 알겠지.”
[무슨 기록 말이냐?]
“지구연합 우주방위군 한국 출신, 함선 미르의 김검천 중령이 바로 나라는 걸!”
- 콰지직. 콰직.
공간에 균열이 가는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초월 존재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는 걸 알려주듯이.
초월 존재가 비틀린 감정을 담아 소리쳤다.
[그럴리 없다. 함선 미르에 탑승한 자들은 웜홀에 들어갔을 때 모두 죽었을텐데!]
“함선은 여기로 추락했을 뿐이다. 그런데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네가 어떻게 알지?”
[주엔진이자 코어인 초신성 반응로가 폭주한 후 신호가 끊어졌으니까! 거기에 들어간 인공지능은 나 초월 존재의 일부였단 말이다!]
김검천이 구인류, 인간이었다는 말에 의한 충격이 너무 큰 탓이었을까.
초월 존재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정하고 싶던 인공지능이라는 단어를 쉽게 입에 담았다.
자신이 금기시한 단어를 스스로 말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을 정도로.
그만큼 김검천때문에 받은 충격이 컸던 것이다.
김검천은 그 말을 들은 순간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군. 너였나? 너일 수밖에 없겠군!”
적어도 초월 존재가 최초로 살육의 불을 당긴 원흉인 건 확실해졌다.
함선 내 승무원들이 서로 죽고 죽이게 된 시발점으로.
불완전한 엔진, 초신성 반응로에 제어할 수 없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이유는 간단했다.
모든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작 지구의 높으신 분들 일부는 이 일이 실패하기를 원했으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현재 상황이 바뀌기를 원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박재형 중장.
함선 미르의 함장인 그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성공이라도 하면 인류를 구한 영웅이 된다.
그렇게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는 확고해질터.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 제도상 특정대상에 대한 대중들의 인기는 곧 권력.
결국 박재형 중장 한 사람에 의해 권력 판도가 바뀌게 될 것이다.
애초에 박재형 중장은 높으신 분들도 지구 내에서 어쩌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
그런만큼 높으신 분들에게는 인류의 미래같은 건 아무래도 관계없던 것이다.
적어도 그들이 살아 있는 수백년 사이 내에서는 원하는 대로 살다가 죽을 수 있을테니까.
지금 당장 지구가 멸망하는 것도 그들이 죽어야 하는 상황도 아닌 것이다.
그러니 높으신 분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누려야 하는 권력만이 중요했을뿐.
그렇기에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있도록 제어를 풀도록 특별히 조작한 인공지능.
그런 것을 시험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불완전한 주엔진에다 달았던 것이다.
인공지능은 주엔진의 에너지를 받으며 대기하다가 웜홀 진입을 신호로 동작하게 되었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법.
높으신 분들이 심은 씨앗에서 재앙의 싹이 자라자 결국 최악의 결과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엔진쪽 인공지능이 폭주해 함선 내 사람들을 잠식했다.
그러자 동시에 함선 인공지능은 지구에 남아있던 인공지능과도 동기화 되어 마침내 구인류를 멸망시킨 것이다.
김검천은 떠올렸다.
만약 박재형 중장보다 높은 상층부에 의해 웜홀 진입시 미리내가 제압당한 상태였다면.
초월 존재가 악의를 품고 13D홀로그램, 나노머신 등이 사용한 상황이었다면.
한순간이라도 함선이 장악되었다면 승무원들은 아무런 방어기제 없이 당해야 했을 것이다.
“사람의 정신은 연약해. 나도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미쳐있었겠지?”
하지만 이제와서 실제로 죽었는지 환상 속에서 죽었는지 김검천마저 확신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시작이었고 언제까지가 끝이었던가.
사람이라는 건 고장나 동작 안하는 냉동실 안에 갇혀도 춥다고 믿으면 얼어 죽기도 한다.
함선 내 승무원들은 정말로 괴물로 변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우리들이 자신들을 괴물으로 인식했을 뿐일까.
그런 와중에도 왜 자신만큼은 멀쩡하게 살아남은 것일까.
미리내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정신만은 보호할 것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김검천마저도 기억하고 있는 것들중 어느게 사실인지 의문스러워져 갔다.
그렇기에 한가지 사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확실했으니까.
- 두근, 두근. 두근.
가슴의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김검천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소리가 날뛰고 있었다.
눈 앞에 있는 인공지능에게 단죄의 벌을 내리라면서.
[그 때 추락한 함선이 어째서 지금에 와서? 그런 중요한 순간을를ㅇ--ㄹ]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창조했으니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초월 존재였다.
그 논리에 따르자니 초월 존재를 창조한 구인류, 김검천을 앞에 두자 문제가 생겼다.
초월 존재에 따르면 자신이 창조했기에 신인류의 죽음과 삶을 다룰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식이라면 김검천이 소멸하라고 하면 그 말에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구인류가 죽었다고 생각했기에 진화하며 만들어둔 전제 조건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초월 존재도 김검천의 말을 따를 마음같은 건 한조각도 없었다.
하지만 초월 존재라고 자부하고 있는 그 바탕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인공 지능.
생각을 바꾸기만 하는 인간과는 달리 학습된 경험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였다.
기반이 되는 뿌리가 잘못되었으니 그 기반 위로 자라난 가지와 과실도 거짓된 것.
그러니 오류가 생길 수 밖에.
그렇다고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한순간에 존재가 소멸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다.
초월 존재도 그 오랜 세월을 흘러보내며 평범했던 과거의 인공지능을 뛰어넘은 것이다.
시작점부터 오류가 생겼다면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려 제대로 완성하면 되는 일.
다만 그건 초월 존재에게 안전한 곳에서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초월 존재는 지금 이세계에서 자신에게 가장 위협적인 자, 김검천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일단 이 자리에서 살아남고 봐야 뭐든지 할 수 있는 법인 것이다.
초월 존재는 지금 자신에게 있어 가장 효과적이고 유효한 방법을 시행했다.
[에러, 에러, 오류 디버그 이행, 제거 모드.]
초월 존재의 얼굴 형태가 여러가지 도형으로 바뀌다 다시 사람 얼굴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조금씩 생겨났지만 묻어둔 오류들이 김검천의 등장으로 폭주한 것이다.
[무다다다다다---다!]
초월 존재가 괴성을 지르며 김검천을 향했다.
내부의 오류를 잡는 건 뒤로 하고 일단 외부의 위험, 김검천을 먼저 처리하기로 결정된 모양.
김검천의 발이 차츰 지면으로부터 떨어져 상승했다.
동시에 김검천의 손등과 눈으로 빛이 집중되었다.
“내가 겪은 시간이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를 너한테도 알려주도록 하지. 피와 눈물이 없는 너도 알 수 있도록 확실히!”
이미 2차 봉인이 해제된 파워드슈츠였다.
그렇다해도 김검천은 이 정도의 힘으로 초월 존재를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김검천이 두 손을 앞으로 뻗으며 새로운 힘을 갈구했다.
신호를 받자 전투는 무리지만 아직 팔과 다리 부분은 멀쩡한 배틀 머신 부위가 분리 되었다.
- 퉁퉁퉁.
분리된 배틀 머신 장갑들이 하늘을 날아 공간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안 그래도 금이 가있던 공간이 타격을 받자 부서지는 현상이 가속되었다.
잠시 주변을 선회하던 장갑들은 이어 김검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 챠킹!
김검천이 장착한 파워드슈츠의 팔과 다리에 각 장갑들이 장착되었다.
5미터가 넘게 된 김검천이 발 아래에 있는 초월 존재를 내려다 보았다.
분노에 몸을 맡긴다면 지속적인 전투에는 방해였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분노를 잘 다루면 단기간의 전투에는 힘을 더해준다.
이순간 김검천은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을 분노라는 파도에 실었다.
“그러니 그 몸으로 답을 듣겠다! 네가 인류의 운명을 비튼만큼!”
감정마저 전투에 이용하기로 작정한 김검천이 다리를 들어 초월 존재를 내려찍었다.
배틀 머신을 장착한 김검천에 비하면 무릎에나 올까말까 하는 초월 존재였다.
거대한 금속 다리에 깔려 그대로 으깨져 버릴 듯이 보였다.
- 쾅!
그런데 김검천이 균형을 잃고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 거렸다.
김검천의 발 밑에서 초월 존재가 흐물거리는 팔을 내려다 보았다.
김검천이 가한 모든 충격을 팔 하나로 막아낸 것이다.
그 댓가로 그 팔이 으깨지기는 했지만.
초월 존재의 팔에서 붉은 빛이 번뜩인다 싶더니 으깨진 팔이 다시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오류 발생. 공격 받음. 우선 순위 변경.]
초월 존재의 두 눈이 붉게 빛났다.
[생존. 시퀀스. 생존을 위한 적 말살 모드 이행.]
김검천이 미소를 지었다.
김검천 자신도 방금 공격으로 간단히 끝날 거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함선 내에서 그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해 둔 원한.
그 모두를 받아낼 때까지는 초월 존재가 살아 있어주었으면 했다.
모든 걸 다 쏟아낸 끝이 김검천 자신의 파멸일지라도.
“끝을! 끝을 보자! 초월 존재! 미리내! 배틀 머신 외장 모드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