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4화 (4/250)

< 2장 - 교수 안정록 (1) >

「 인간 표현의 근본은 흉내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 보호를 갈구하는 것 외에는 어떤 감정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과 확연히 대비되는 긴 양육기간 동안, 양육자를 통해서 다채로운 표현이 학습된다.

기쁨. 슬픔. 즐거움. 괴로움. 안정. 공포. 해방. 속박. 의기양양. 의기소침. 애정. 혐오. 희열. 분노. 열정. 욕망. 충동. 인내······

모든 감정들은 주위를 관찰함을 통해서 발현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연기의 근본 역시 흉내다.

인간의 모든 표현양식이 타인의 표현을 통해서 학습되므로, 결과적으로 타인의 표현을 세밀히 관찰하고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가장 완벽한 연기를 완성할 수 있다.

그렇기에 생소한 배역을 맡은 배우들은 직접 현장으로 찾아가 그러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관찰한다.

그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지 직접 확인하고, 그것을 체화해 흉내 내기 위해서.

그렇지만 흉내는 연기의 전부가 아니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인간의 표현은 의식 아래의 무의식 단계에서 좌우된다. 미세표현(micro-expression)이 바로 그것이다.

기쁨은 이성을 통해 인지되기에 앞서서 당신의 입꼬리를 끌어올릴 것이다. 분노는 그 메커니즘이 명확해지기 전에 얼굴의 혈관을 팽창시키며, 충동은 온몸을 긴장 상태로 몰아가 내면의 갈등을 목소리의 떨림으로 드러내고 만다.

그야말로 미세한 표현이기 때문에 시각과 청각으로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요소들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중요하다.

관객이 그 감정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비록 입술의 각도와 눈썹의 비틀림과 턱 끝과 손끝과 음성의 떨림이 평상시와 어떻게 다른지 일일이 알아채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 전체적인 느낌을 우리는 알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미세표현을 보여주지 못하는 연기는 어색하다. 대체적으로는 지시대로 표현하고 있기에 뭐라고 콕 집어 충고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크게 어색해 보인다.

그런 부정확한 흉내를 우리는 소위 ‘겉핥기’라고 부른다.

그저 겉만을 따라하는 연기. 그것을 통해서 어떤 공감도 반감도 느낄 수 없는 로봇 같은 연기가 되고 만다.

이러한 저급 연기를 탈피하기 위해서 연기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미세표현은 마치 사방에서 몰려오는 탄환과도 같아서, 연기자의 단련된 눈으로도 하나하나 분간하는 것이 어렵다. 그에 더해 마치 불수의근(不隨意筋)의 성질과도 같이 의식적으로 흉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하려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관찰력에 자신의 신체를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리라.

즉 흉내만으로는 관객이 감정에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관객들과 직접 마주하는 연극이나 카메라의 성능이 발달한 현대의 연기는, 흉내가 아닌 진짜 감정을 요구한다. 배역과 감정을 일치시켜 자연스러운 표현을 선보이기를 배우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배우들은 거짓된 감정을 촉발하는 방법을 익힌다. 관객들을 속여 그들이 극에 녹아들게 만들기 위해서.

출발선은 배역의 분석이다. 배역을 파헤쳐 그가 느낄 감정을 추론하면, 배우가 겪었던 사건의 회상으로 유사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자아 위에 배역의 인격을 덧씌우는 방법도 있다. 그 배역의 처지에 정신적인 자아를 위치시키면, 배역의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해낼 수 있다. 이것을 소위 ‘메소드 연기’라고 부른다. 모두 감정을 체화하여 보여주기 위한 연기의 방법론에 해당한다. 」

거기까지 써내려간 뒤에, 안정록은 펜을 던졌다.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흉내가 아닌 진실한 짜증이었다.

‘제기랄. 이따위 이론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대체 연기를 이론으로 배우는 놈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단 말이야? 극단에 들어가서 직접 부딪쳐봐야 지가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는지 알 수 있는 건데, 시스템형 탤런트니 뭐니 하면서 꼬맹이들에게 책상물림을 시키는 꼴이라니.’

타인의 강요에 의해 쓰는 글이라는 것은 늘 버겁다. 그건 손꼽히는 영화배우이자 국립한국예술대학 연극원 교수인 안정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강요의 목적이 비전 없는 헛짓거리라고 생각될 때에는 더더욱.

‘말이야 좋지. 배역분석법, 메소드연기법, 모두 그럴싸한 얘기고 활용도 좋은 스킬이 맞아. 하지만 얼굴 번지르르한 모델들한테 그거 가르친다고 연기력이 생기나? 천만에. 부딪쳐야지. 직접 관객들과 소통하면서 극 속에 몸을 담가야지. 그러지도 않고서 미니시리즈니 뭐니 하는 사랑놀음에 나가서 얼굴이나 팔고 나면, 그 뒤엔 연기보다도 CF나 찍으면서 나르시시즘에 빠지고 말 것을. 이군영 이 자식은 소신도 없는 게 야망만 커가지고서는, 애들 다 망칠 짓을 하고 있어.’

사실 나라엔터테인먼트의 이군영이 멍청한 인물은 아니다. 그건 안정록 역시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미 이소연, 차영기, 진유성, 감수재 등의 모델이 탤런트로 전향해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는 외모가 그들을 스타로 만들어줬다. 연기 역시 최근엔 제법 물이 올랐지만, 그건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고.

그렇듯 예쁘고 멋진 외모의 모델들이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점령하게 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렇지만, 이군영이 거기 올라타면 안 되지. 정통파 연극인으로서 최소한의 자긍심은 지켜야지······.’

마음속으로만 외치는 한탄이다.

극단 동기였다곤 해도 이제 이군영은 나라엔터테인먼트의 대주주이자 CEO. 일개 교수인 안정록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위치였다.

거기에 극단 후배들의 미래까지 이군영에게 달려 있는 상태. 인맥 넓은 그가 영화에 꽂아준 후배들이 꾸준히 후원을 해왔기에, 불경기에도 극단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안정록은 기획사 모델들의 연기지도를 맡아달라는 이군영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누구는 미래의 스타들을 키워내는 영광스런 자리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일이야. 내 제자들한테 극단에서 기초를 닦아야 한다는 말을 앞으로 어떻게 한담. 얼굴 하나만 믿고 주연 따낼 미꾸라지들을 가르치고 있는 주제에······.’

그러나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 기한 내에 교재를 완성하지 않으면 이군영은 다른 강사를 모색할 것이다. 안정록은 상념을 접어두고 다시 펜을 들려 했다.

그 타이밍에 교수실의 전화기가 울렸다.

“흠, 큼.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극단의 유호진입니다.]

“어, 호진아. 잘 지내고 있지? 새 극은 잘 올렸냐?”

[예, 선배님. 계속 후원해주신 덕분에 신작 무사히 무대에 올렸습니다. 반응도 되게 좋아요. 잘하면 대극장 공연까지 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흠······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만. 신참들은 어떠냐?”

[영자 역 맡은 희재가 무대체질이더라고요.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잘해줘서 앞으로도 기대가 됩니다. 어······ 그 외에는 좀 애매하긴 하지만요. 다들 기초는 잡혔는데, 도무지 관객들이랑 소통이 안 되네요.]

안정록은 작게 혀를 찼다. 끼 있는 애들은 대체로 모델이니 아이돌이니 하는 쪽으로 몰려가버려서, 극단으로 흘러드는 청년들의 수준이 확연히 낮아진 시대였다.

‘그나마 한 명이라도 건진 게 어디야. 희재라고 하면, 임희재였나? 조만간 한번 보러 가야 되겠군.’

안정록이 그렇게 생각할 무렵, 조심스레 말을 고르던 유호진이 진중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선배님. 선배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아이가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제가 판단하기 좀 애매해서요.]

“네가 판단하기 애매하다고? 그럼 아닌 거지. 호진이 네 눈을 내가 못 믿겠니.”

[앗. 그런 쪽으로 애매한 건 아닙니다, 선배님.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얘를······ 감히 제가 맡아도 될까 하는 겁니다.]

그 얘기에 안정록의 눈이 번쩍 뜨였다.

유호진은, 이미 두 편의 영화에서 주조연으로 활약하며 국민들에게 자기 이름을 각인시키고도, 연극에 대한 열정 하나로 여전히 극단 <별빛>의 실무를 맡고 있는 인물이다.

연기에 있어선 절대로 허언을 하지 않는 그 유호진이 ‘감히 제가 맡아도 될까’라는 겸양을 부리고 있었다.

“무슨 말이야. 제대로 말해봐. 어떤 앤데? 완전히 신인이야?”

[아, 예. 신인이죠. 아예 연극 경력이 없습니다. 그 흔한 학교 동아리도 안 해봤대고, 아예 본 적도 없다네요.]

“아니, 그런 애가 대체 무슨 볼 데가 있다는 거냐?”

[예, 그러니까요. 그래서 머리가 아픕니다. 어떻게 그런 애가 흠 하나 잡기 힘든 인물모사를 해내는 건지······.]

‘흠 하나 잡기 힘들다고? 이 깐깐한 유호진이 정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건가?’

안정록이 당황해서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깊은 한숨을 한 차례 내쉰 유호진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녀석······ 천재 같아요. 그래서 선배님께 연락드렸습니다. 제가 잘못 건드렸다간, 위대한 재능이 일그러져버리는 거 아닐까 싶어서요. 그래서 말 한마디 못해주고 돌려보냈거든요.]

“연락처는?”

[물론 받아놨습니다. 왜 전에 잠깐 들어왔던 영찬이 있잖아요? 걔가 소개해준 애거든요. 친한 형사님 동생이래요.]

“오케이. 내가 지금 가마.”

[엇, 지금 바로요? 평일인데 바쁘지 않으십니까?]

“쓸데없는 글줄 끼적이는 일정밖에 없어.”

그렇게 답하며 책상 위를 힐끗 내려다본 안정록은, 원고지 뭉치를 대충 엎어버리고 일어섰다.

“지금 출발할 거니까 다시 불러놔라. 근데······ 애가 몇 살이나 먹었냐? 대학생? 군대는 갔다 왔어?”

[······선배님. 그 지점이 제일 희한한 부분인데요.]

“왜? 뭐야, 나이가 좀 많아?”

[아뇨. 열두 살이래요. 또래보다 키가 좀 크긴 한데, 얼굴은 그냥 애기예요. 그런 애가 60대 노인을 완벽하게 표현해내는데, 전 진짜 제가 헛것을 보고 있나 싶었습니다.]

‘열두 살의 연기천재라고······?’

안정록의 입꼬리가,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긴 호선을 그렸다. 두말할 나위 없는 기쁨의 미세표현이었다.

*

극단장 유호진은 환하게 웃으면서 두 사람을 반겼다.

과거 극단에 잠깐 머물렀다가 순경이 된 이영찬이 친절하게 맞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인 까닭만은 아니었다. 유호진은 무대 아래에서 연기를 할 수 있는 위인이 못 된다.

다만, 이젠 자신의 손님이 아니라 선배 안정록의 손님이 된 두 사람인 까닭이었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 차 좀 드시죠. 방금 우려내서 맛이 괜찮을 겁니다. 제가 참······ 가시라고 했다가 다시 오시라고 했다가, 너무 제멋대로였죠?”

“뭐 그런 건 괜찮아요. 이쪽도 이쪽 생리가 있을 테니까.”

이영찬과 친하다는 중년 형사는 제법 점잖은 사람이었다. 우호적인 관계를 조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신분을 내세워 으름장을 놓으려고 했다면, 유호진도 가만히 당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일단 제가 선배님 한 분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찬이를 직접 봐주시기로 했어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다시 연락을 드리게 됐습니다.”

“아······ 선배님이요? 그런데 그쪽도 꽤 유명한 배우 아니십니까? 난 영찬이한테 듣고 깜짝 놀랐는데. 영화에서 봤던 배우님이 극단에 있다고 해서.”

“하하. 영화야 부탁받아서 나간 것뿐이고, 제 고향이 여긴걸요. 20대를 통째로 여기 바쳤는데 이제 와서 어딜 가겠습니까. 평생 후배들 양성이나 하려고요.”

대중이 인식하는 극단원과 영화배우의 인식 차이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을 논리였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낭만이 살아있는 시대였기에, 윤대흥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선배님이라고 하면, 어떤 분입니까?”

“안정록 선배님입니다. 혹시, 아시죠?”

“엇? <용의 시대>랑, <소리의 빛> 나온 그? 오, 맙소사. 그 사람도 여기 출신이에요?”

“창립단원이시죠. 지금도 후배들 자주 챙겨주고 계시고요.”

“정말 대단하네. 여기가 아주 대단한 극단이었군요?”

“하하. 그땐 정말 대단했다고 하죠. 지금이야 불경기라 현상유지도 힘든 상황이지만요.”

두 어른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소년 이찬은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임시로 불을 켠 객석과 달리 완전히 조명이 꺼져 있는, 어둡고 조잡해 보이는 배경. 새로 올렸다는 연극이 아마도 뒷골목을 배경으로 하는 모양이었다.

그곳을 바라보며 이찬은 홀로 피식 웃었다.

‘저기서 연기를 한다면 그건 집시랑 꽤 어울리겠는걸. 좀 초라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안정록 정도면 되게 유명한 사람이지. 성격도 답답하진 않을 것 같고.’

이찬은 대하사극 <용의 시대>도 영화 <소리의 빛>도 보지 못했지만, 서울역 대합실의 TV에서 안정록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시절은 참 좋았지. 너무 자주 들락거리다가 역무원한테 눈도장 찍혀서 파출소 잡혀가지만 않았어도, 수원까지 내려와서 TV 밖 사람들 관찰하고 놀 필욘 없었을 텐데.’

그렇지만 바로 그 덕분에 윤대흥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을 아저씨도 삼촌도 아닌 형이라고 부르라 한 윤대흥이 처음 건넸던 약속을 지켜서, 결국 극장에까지 오게 됐고.

‘딱히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이 아저씨는 내가 사람 따라하는 걸 되게 좋아한단 말이지. 나 때문에 칼 맞은 사람한테 그 정도 재미는 줘야지. 그게 공평한 거래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이찬이 또 픽 웃은 순간.

마침내 극장의 문이 열리고, 중년의 배우가 나타났다.

눈부신 햇살을 배경으로, 숨을 헐떡거리면서.

< 2장 - 교수 안정록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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