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 교수 안정록 (2) >
안정록. 57년생으로, 새 천년을 맞아 우리 나이 마흔넷이 된 배우 겸 감독이다.
20대에는 동년배 배우 이군영과 함께 극단 <별빛>에서 활약했고, 서른을 넘긴 뒤에야 공채 탤런트로서 대중에게 자신을 알리게 됐다.
이후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해왔는데, 누구나 인정하는 대표작은 93년도 개봉 영화 <소리의 빛>과 96년도 대하사극 <용의 시대>.
그중 <소리의 빛>에서는 스스로 각본과 연출을 맡아 연출자로서의 실력 역시 뽐낸 바 있었다.
그런 경력을 인정받아 한국예술대학의 연극원 교수로 발탁된 지금은, 작품 출연보다는 각본 집필과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렇게 인지도도 사회적 명망도 드높은 안정록이, 숨을 고르기 힘들 정도로 뛰어서 극장에 들어온 순간.
윤대흥은 가슴 벅찬 심정으로 웃었다.
‘유호진 극단장이 정말 극찬을 해준 모양이군. 그러니까 저렇게 황급히 달려왔겠지. 잘된 일이야. 혹시라도 내 눈이 잘못된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이 유명한 탤런트들에게도 우리 찬이의 재능이 빛나 보이는 모양이지!’
그런 기쁨은 10분쯤이 지난 뒤에 세 배 이상으로 커졌다.
숨을 고른 안정록의 요구에 따라 이찬이 보여준 자유연기가, 또다시 유호진을 깜짝 놀라게 했기 때문에.
“······방금, 선배님 따라한 거지?”
“그냥 뭐, 성공한 배우가 인터뷰 하는 장면이죠.”
“완전히 똑같았는데. 내가 그 인터뷰를 몇 번 돌려봤거든? 그랬는데 정말 토씨 하나까지 똑같았어. 말 마치고 나서 불량스럽게 히죽 웃는 것까지······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됐다. 나도 아는 버릇이니까.”
안정록은 그렇게 답한 뒤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가 아는 모든 문화권에서, 상대와 깊이 소통하는 것에 관심을 잃었다는 제스쳐에 해당했다.
“흠. 모사가 수준급이구나. 그쪽 분야에서는 일가를 이룰 것 같아. 내가 볼 땐······ 코메디언을 하면 잘할 것 같은데.”
“서, 선배님?”
“조용. 어떠니? 연기보다 그쪽이 더 나을 것 같은데. 내가 방송국에 소개해줄 수 있어. 성대모사 영재 소년이라고 하면 상당히 인기가 있을 거거든.”
그 반응에 실망한 윤대흥이 헛바람을 내며 따지려 했을 때, 이찬이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연기 잘하시네요. 감탄하셨으면서 안 그런 척. 근데 살짝 티 나요. ‘정말 모사가 수준급이군’ 하실 때 입을 좀 더 작게 벌리셨다면 덜 어색했을 것 같은데.”
윤대흥과 유호진이 충격 받은 얼굴로 이찬을 돌아봤다.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면서.
이찬의 말은 마치 연기지도 같았다. 고작 열두 살 먹은 소년이 이미 대배우의 반열에 오른 안정록을 향해서 연기에 실수가 있었다고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안정록의 놀람은 그 둘과 다른 지점을 향했다.
‘연기라는 걸, 알아챘어? 그것도 왜 그게 실패한 연기인지를 지적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신을 했다고?’
안정록은 결국 몸을 통제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열심히 내리누르고 감추려 한 그의 진짜 표정은, 경악과 감탄이었다.
“맙소사. 허허허. 맙소사. 진짜였어. 넌······ 정말 관찰력이 좋구나. 미세표현을 다 읽어낼 수가 있는 거야. 내 말이 맞니?”
“미새표현이 뭔데요?”
“네가 방금 말한 거! 입을 좀 더 작게 벌렸다면 덜 어색했을 거란 충고 말이다. 그런 걸, 넌 어떻게 알 수 있는 거냐?”
“······그냥 어색하잖아요. 진짜 관심이 식었으면 등받이에 등 대면서 팔짱을 끼든 눈동자를 굴리든 했을 텐데, 그게 없었거든요. 그나마 입 떡 벌어지는 거라도 참으셨으면, 개성이라고 생각해서 믿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이야기가 거기까지 진전되자 마침내 유호진도 상황을 파악했다.
“선배님, 연기로 하신 말씀이었어요? 아, 그럼 그렇지. 이런 인재를 코메디언을 시킨다는 건······ 아니······ 근데, 선배님이 연기를 하셨단 걸, 지금 얘가 알아본 겁니까?”
윤대흥도 그 말을 듣곤 입을 떡 벌리고 안정록을 쳐다봤다. 그렇지만 안정록은 그 둘에게 작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얘······ 이름이 찬이랬지? 찬아. 네가 본 사람을 따라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니? 방금 그 모사는 정말 자연스러웠어. 내가 봐도 어색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따라하는 데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는 거니?”
“한 2초? 그렇게 걸리던데.”
“······완벽하게 따라하는 데?”
“파악하는 데요. 따라하는 거야 쉬운데.”
“그러니까, 2초쯤 보면 파악이 되고, 파악을 하면 바로 따라할 수 있단 말이지······? 호진아, 단원 누구 있냐? 근처 사는 애.”
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유호진이 그저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신입 희재가, 근처에 하숙합니다.”
“불러. 바로 확인해봐야 되니까.”
“아, 예, 예.”
유호진이 통화를 위해 사무실 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안정록은 말없이 손가락만 꼼지락댔다. 그에게서 무겁고도 강렬한 희열 같은 것을 본 윤대흥도 감히 말을 못 꺼냈고.
오직 이찬만이 몸을 꼬며 귓속말을 건넸다.
“저기요, 형.”
“어? 어, 찬아.”
“이게 이럴 일이에요?”
“이럴 일?”
“엄청 놀라고 반가워할 일이요. 저분 너무 흥분했는데. 내가 그렇게 이상한 걸 한 거예요?”
“음······ 전에 말했지? 넌 아주 눈썰미가 좋아. 형사인 내가 놀랄 정도니까 말이야. 이상한 게 아니라 대단한 거지.”
이찬이 그런가 하고 으쓱거릴 때, 안정록의 입이 열렸다.
“그쪽이 아닙니다.”
“어이쿠. 들으셨어요?”
“여긴 소리가 잘 퍼지니까요. 아무튼······ 그런 게 아닙니다. 눈이 좋은 사람은 그래도 간혹 있어요. 이 바닥 20년 구르면서 딱 두 명 봤을 뿐이지만. 그런데······ 그런데 본 걸 단숨에 따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니까.”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고요?”
“예. 관찰력이 좋으면 여러 가지를 잡아낼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그 여러 가지를 몸으로 표현한다는 건, 정말 길고 고단한 연습이 필요한 연기입니다. 내 몸에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니까. 그 대상의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배우들이 감정을 단련하는 겁니다. 남의 방식을 모조리 터득하는 것보다는 일부분만 따낸 뒤에 거기에 내 자아를 섞는 게 더 쉬우니까요. 그래서 명배우조차 ‘쪼’를 갖게 되는 거죠.”
풀어서 설명하니 윤대흥도 이해할 수 있는 얘기가 됐다.
‘그러니까 배역에 맞는 인물을 따로 특정해서 완벽히 구현하는 것보다는, 그냥 배역과 자신을 뒤섞는 게 쉽단 말이군. 그게 내가 한번 봤던 배우들을 또 보기 힘든 이유기도 하고.’
눈썰미가 좋은 윤대흥의 고충.
한번 봤던 사람의 행동양식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베테랑 형사는, 다른 배역으로 나서서도 미세하게 자신의 ‘쪼’를 유지하는 배우들을 보는 게 고역이었다.
그렇기에 집에 있는 고물 TV로 대하드라마를 보기보다는 대여점에서 가져온 무협지를 읽는 걸 더 즐겼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런 메소드 연기만 해도 대단히 존경받을 만한 것이지만, 사실은······ 사실은 부족하죠. 완전히 다른 인물을 연기한 게 못 되니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안정록이가 연기한 배역들은 결국 다 안정록이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배역의 상황에 빠져들어 그 감정을 가져온대도, 결국 안정록이만의 특색이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변호사 안정록, 무인 안정록, 소리꾼 안정록, 대왕 안정록······. 다중인격 정도로 자아가 깨지지 않은 이상에는 결국 거기까지인 거예요. 인간 연기의 한계라는 것이죠.”
윤대흥은 그 타이밍에 침을 꿀꺽 삼켰다. 어렴풋이 희망했던 것보다도 일이 훨씬 커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안정록이 이찬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선언했다.
“그런데, 그 타인의 미세표현마저 순식간에 훔칠 수 있다? 그건 그야말로 연기의······ 연기의 신이죠. 어떤 배역을 맡든, 자기 자신을 완전히 지우고 극 속에만 존재하는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마치 창조주처럼! 그런 존재를, 신 말고 다른 어떤 말로 부르겠습니까?”
그렇게 말을 마친 안정록과 충격에 빠진 윤대흥이 함께 정적을 지킨 5분. 이찬은 머릿속으로 별별 생각을 떠올렸다.
‘아, 참 거창하시군. 하지만 진심인 것 같아. 이렇게 유명한 배우까지 나한테서 연기를 기대한다고 하면······ 난 정말로 대단한 배우가 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연극 무대에도 오르고, 영화에도 출연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되면 재밌을 것 같긴 한데. 영화관이란 데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다들 굉장히 즐거워 보였단 말이지. 아저씨가 날 보면서 행복해했던 것처럼 말이야. 그럼 나도······ 그렇게 사람들이 웃으면서 나가게 만들어줄 수 있는 걸까? 굉장히 집시다운 일이겠는걸?’
거기까지 생각하며 작은 미소를 입에 머금었을 때.
다시 한 번 극장의 문이 열리고, 아까 전 안정록이 그랬듯 숨을 헐떡이는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극단 신입 임희재입니다!”
“기억하고 있다. 와서 여기 앉아라. 그리고 찬이 넌······.”
이찬은 이미 안정록이 기대하는 바를 행하고 있었다.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발소리마저 조심해서 걸어 내려오는 임희재. 그렇지만 그녀는 한 명이 아니었다. 앉아 있는 소년이 그녀를 고스란히 복사하고 있었다.
“······임희재. 자기소개를 해봐.”
“아, 예! 저는 스무 살 임희재입니다. 연희대학교 재학 중이고, 중학생 시절부터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바로 대학로에서 일하고 싶어서 하숙을 이쪽에 구했습니다. 그리고-”
“오케이, 거기까지. 찬아. 네 차례다. 일어서서 따라해봐.”
“네. 아, 예! 저는 스무 살 임희재입니다. 연희대학교 재학 중이고, 중학생 시절부터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바로 대학로에서 일하고 싶어서 하숙을 이쪽에 구했습니다.”
윤대흥은 이찬을 바라보며 거의 흐물흐물해졌다. 지금껏 여러 차례 확인한 재능이지만, 성별부터 다른 인물을 완전하게 따라할 수 있을 줄은 몰랐기에.
그리고 안정록 역시 그와 비슷한 상태였다. 이젠 미세표현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정말이었어······ 정말 잠깐의 시간도 필요치 않군. 얼굴의 자잘한 표정부터 몸의 모든 근육까지 마음먹은 대로 조절할 수 있는 거야. 아······ 정말로, 연기의 신이 태어났구나.”
또 튀어나온 거창한 말에 어색해하며, 이찬이 임희재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찬입니다.”
“어. 오. 와우.”
“반가워요 누나.”
“와······ 변신소년이네? 갑자기 딴 사람이 됐는데? 방금 전엔 좀······ 나 같았는데.”
“좀이 아니라 완벽했다. 그대로 임희재였어.”
“앗, 넵, 선배님. 근데 저,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녀에게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저마다의 상념으로 머리가 복잡했기에.
그나마 맡은 책임이 있는 유호진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선배님. 저도 이렇게까지 가능하리라곤 생각을 못했지만······ 보고 나니 더 혼란스럽네요. 이 아일 제가 키워도 괜찮겠습니까?”
“욕심은 나지?”
“그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하지만 두렵기도 하네요. 혹시라도 잘못될까봐요. 소년 극단원이라는 건 너무 튑니다.”
일반적으로 자기의 나이에 맞는 연기를 펼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그렇기에 TV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아역을 포함해 넓은 연령대의 배우를 섭외한다.
그러나 연극은 얘기가 달랐다. 어린아이나 노인이 대학로에 출퇴근하며 극단 스케줄을 수행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렇기에 몸집이 작은 극단원이 소년과 노인 연기를 수행하는 게 당연시되었다.
“분명히 화제가 될 겁니다. TV프로에서 인터뷰가 올지도 모르고, 종종 신인 발굴하러 나오는 관계자들이 눈독을 들일 수도 있죠. 그렇게 되면, 이제 열두 살 된 이 아이가······ 평생을 공인의 저주에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겠지. 분명히 그렇게 될 거야. 발성 연습과 과장하는 방법만 좀 익히면, 연극판에서 이 아이보다 나은 사람을 찾기가 힘들 테니까.”
극찬 속에 염려가 녹아 있었다. 그에, 윤대흥이 안정록을 향해 조바심 어린 목소리를 냈다.
“공인의 저주가 뭡니까? 제가 이쪽을 잘 몰라서.”
“아까도 말했다시피, 찬이는 연극판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아이가 아닙니다. 분명히 아역으로 캐스팅이 될 거예요. 적절한 배역을 맡는다면 스타가 되는 것도 금세일 거고요. 그렇게 된 이후의 삶을 생각해보셨습니까?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할 겁니다. 길을 다니고 어딜 들를 때마다 사람들이 알아보는 건 처음에만 즐거운 일이죠. 개중에 배려심 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고작 열두 살 어린 나이부터 말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일반적인 행복이라는 것과는 평생 멀어지게 됩니다. 그게 미디어 계통 사람들이 감수해야 하는 공인의 저주이죠.”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얘기에 윤대흥은 기겁했다. 그가 바란 건 이찬의 재능에 세상이 열광하는 지점까지였다.
“맙소사. 아,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제 아인, 안 됩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 그······ 동생이라고 들었는데요.”
“예, 제 동생입니다. 찬이는······ 그러면 안 돼요. 그렇게 될 거라면 안 시키겠습니다. 절대로요. 그건 안 되지요.”
중년인의 동생사랑을 보며, 극단원들은 복잡한 표정이 됐다.
< 2장 - 교수 안정록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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