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 교수 안정록 (3.) >
사무실 문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안정록은 맥컬리 컬킨을 생각했다.
‘<나 홀로 집에>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년이 된 아역 배우······. 그 아이도 결국은 저주의 희생자가 됐지. 너무도 큰 명성 때문에 집밖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상황에서, 빌어먹을 부모는 재산을 두고 법정다툼이나 벌였다고 하니까. 일전에 결혼했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그 아이는 과연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슬쩍 돌아봤지만, 여전히 문은 닫힌 채였다. 안정록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런 그의 시선을 보고 유호진이 물었다.
“선배님, 무슨 생각 하십니까?”
“······너랑 같은 생각.”
“아쉬워하고 계신 거네요.”
“그렇지. 이 못난 세상이 아쉽다. 전무후무한 연기의 신이라도 피할 수 없을 대중의 모자란 관심이 밉고, 그런 아이를 지켜줄 방법이 없는 내가 밉고.”
유호진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와 반대 방향의 아쉬움 하나가 더 컸다.
“저기, 그냥 배우 시키면 안 되겠습니까? 저런 재능인데······ 선배님이 그래도 울타리가 돼주실 수 있잖아요?”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래도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신데······.”
“나 하나 지킬 능력도 없다. 이군영 그 자식이 써달라는 대로 연기교본이나 쓰고 있단 말이야. 내 처지에 어떻게 후원자가 돼줄 수 있겠니. 그러다 저 애 인생 망치면, 난 평생 후회하면서 살게 될 거다.”
“······선배님도 고생이 많으시군요. 나쁜 똥구녕 같으니.”
“씁. 말버릇 봐라.”
“앗, 죄송합니다.”
대선배들의 대화에서 살짝 긴장감이 빠진 것을 느끼고, 임희재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저, 선배님들.”
“할 말 있냐?”
“예, 단장님. 찬이? 걔가 누군데요? 오늘 오디션 봤어요?”
“그런 셈이지. 아까 봤잖아. 재능은 전례가 없는 녀석인데, 아직 너무 어려. 성인 될 때까지 기다려줘야 될 판이다.”
“아······ 아쉽네요. 하긴, 좀 힘들긴 하겠어요. 저렇게 나이차 많은 형 있는 거 보면 집안도 복잡할 것 같고.”
그 추측에 안정록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건 해도 되는 말이 아냐. 쓸데없는 소리 마라.”
“앗, 죄송합니다, 선배님! 전 그냥, 그······ 안돼 보여서요. 그나마 서로 친해 보여서 다행이긴 한데요.”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고, 그 안에서 적응하면서 사는 거다. 누구나 그런 거지 특별한 게 아니야.”
“예, 선배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후배를 다그치면서도 안정록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소년의 사정은 꽤나 특수하겠다고.
안정록이 자부하는 관찰력은 20년의 연기공부 끝에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다.
그런 그에 비해서 이찬은 열두 살에 이미 완성된 관찰자였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연기자였다.
‘그 아이는, 그 누구보다도 이 세상을 명징하게 바라보며, 도대체 어떤 빛깔의 삶을 살아왔던 걸까? 대체 어떤 11년을 살아왔기에 나이답지 않은 애늙은이가 돼버린 걸까?’
*
안정록의 배려로 받은 10분의 유예.
무대 옆쪽의 사무실에서 윤대흥과 이찬 단둘이 마주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참 좋은 사람들이지 뭐냐. 난 아무것도 모르고 네 인생을 망칠 뻔했는데 말이야.”
“인생을 망쳐요?”
“그래. 아, 생각해보니까 정말 멍청했군.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너도 이제 학교를 다녀야 할 거 아니니? 그런데 학교생활을 하면서 배우 일을······ 그건 할 수 있다고 쳐도, 어쨌든 너는 대단한 재능이 있으니까 금세 유명해지고 말 거다. 그렇게 되면 친구들을 사귀기가 참 힘들 거야. 어린애들은 자기랑 다른 사람을 배척하곤 하니까. 길에서도 귀찮게 구는 사람이 많을 거고 말이야. 그래서야 사람답게 살 수 있겠니?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을 거다. 평범하게 행복해져야 해.”
이찬은 마흔이 된 형사의 희망사항을 상상해봤다.
그리고 잠시 후에, 킥 웃었다.
“아, 진짜. 아저······ 형. 그거 너무 웃긴 얘기 아녜요?”
“어? 웃긴 얘기라니?”
“형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제가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사귀고 하면서, 행복한 소년이 될 수 있을 거라고요?”
“······당연하지. 당연히 그렇게 돼야지. 내가 그렇게 되게 해줄 거야. 걱정하지 마라. 마누라 때문에 모아둔 돈은 거의 없지만, 요즘처럼 불경기에 형사만 한 직업도 없으니까. 따박따박 월급 나오고 수당까지 챙겨준단 말이지.”
“그런 얘기가 아니라요. 형사라도 이런 건 모르는구나? 나는 벌써 알고 계신 줄 알았죠.”
예상치 못한 반응에 윤대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니? 찬아,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저요. 저에 대해서요. 이찬이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시는 거 말이에요. 그런 거는 불가능할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이 그래? 행복해야지 당연히.”
“그러고는 싶죠. 그러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는 게 아니잖아요. 형 말대로 저 눈썰미 좋아요. 그래서······ 다른 애들보다는 세상이 좀 더 잘 보여요. 제가 고아원 몇 살에 나왔는지 얘기 안 했었죠?”
“어, 응. 말 안 했지.”
이찬은 쓸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좁혔다.
“아홉 살에 나왔어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보이는 게 많아지니까 점점 힘들더라고요. 예를 들면, 학교에서 저한테 웃어주는 친구들이, 사실은 정말 저랑 친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고아한테도 잘해주는 아이라고 인정받으려고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리고 우리 엄마······ 그러니까 원장님이, 항상 사랑한다 사랑한다 우리한테 말해주는 게 다 거짓말인 걸 알았을 때. 가끔 구청 사람들 나왔거든요. 그때쯤만 되면 더 열심히 연기를 하시는데······ 그런 게 좀 그랬어요. 그래도 어렸을 땐 믿었거든요. 진짜 엄마는 아니지만, 진짜 우릴 사랑해주는 사람일 거라고. 평생 몰랐으면 행복할 순 있었겠죠?”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년을 보며 윤대흥은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난 정말 멍청한 놈이구나. 마흔이나 먹은 놈이, 벌써 몇 주나 이 아이랑 지내고 있으면서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그저 대단한 재능이라고······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이 아이에겐 저주였구나. 억지로 평범한 환경을 안겨준다고 하더라도, 이미 일반적인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돼버린 아이였구나.’
생각에 따라서 그의 얼굴 역시 점점 무너져갔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어두워진 얼굴을 보며 이찬이 웃었다.
“하하. 그래서 아저······ 형한테는 고마워요. 형 그거 알아요? 되게 솔직한 사람이에요. 말하는 거랑 표정이랑 별로 차이가 안 나. 그게 좋았어요. 안 그랬으면 분식 사준다고 해도 안 따라갔을걸. 저 일방적인 친절 진짜 안 좋아하거든요. 거의 대부분은······ 친절이 아니라, 뭐라 그러지? 그거 있잖아요.”
“그, 가식 말이구나.”
“네, 가식. 가식적으로 웃으면서 어이구 그랬냐, 불쌍해서 어쩌냐, 이런 거 진짜 싫어요. 그래서 집시가 되고 싶었어요. 한 사람이랑 오래 볼 필요 없는 집시. 그러면 실망스러운 사람 따위 떠나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멋진 삶이죠.”
윤대흥은 처음 이찬을 만났던 날 그의 특별한 재능을 빠르게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러지 않았다면 그 역시 소년이 싫어하는 일을 했을 테니까.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친절로 자기만족감을 느끼는 그런 행동을.
“······자유로운 삶만이, 네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는 거구나.”
“그렇죠. 그니까 학교 같은 데 보낼 생각 마요. 매일매일 같은 교실에 가는 건 정말 끔찍하니까. 40명이나 모여 있으면 그중에 최소한 30명은 이상한 애들이거든요.”
“그렇구나. 그래. 미안하다 찬아. 내가 너무 몰랐어. 학교는 가지 말자. 원래는 가야 되는 거긴 하지만, 검정고시를 본다고 하면 괜찮을 거야. 그건 내가 한번 알아보마.”
“그리고 연기요, 연기는 해도 좋아요.”
그 말에 윤대흥이 또 당황했다.
“아니, 왜? 난 네가 해준 말 듣고 그게 더 싫어졌다. 연기도 매일매일 같은 사람을 봐야 하잖니? 감독이랑, 스태프랑, 동료 배우들이랑. 그 사람들도 널 힘들게 할 수 있어.”
“근데 그 사람들은 날 이찬이 아니라 윤 학생, 양 과장, 오 사장, 이렇게 볼 거 아니에요? 역할은 매번 바뀔 거고.”
“······연기를 할 때만 그렇겠지.”
“그 정도면 됐어요. 어차피 평생 집시로 사는 건 좀 힘들 테니까. 솔직히 좀 질렸거든요. 나쁜 IMF. 노숙자에 소매치기들 너무 많아져서, 길거리 생활도 갈수록 힘들어졌죠.”
아홉 살에 고아원을 나와 거리를 헤맨 소년에게 국가부도마저 고통을 줬나 싶어서, 윤대흥은 문득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잠시 후엔 허탈해졌다. 제 앞가림 할 나이의 어른들도 길바닥에 나앉는 판에, 나랏님인들 고아 소년을 챙길 수 있었으랴 싶어서.
“그니까 배우가 딱 좋을 것 같아요. 재능도 있는 것 같고, 나름 도망칠 구석도 있는 것 같고. 유명해지면 전 좋아요. 사람들이 좀 더 또렷하게 봐줄 테니까. 이상하고 음침하게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스타구나 할 테니까. 그게 더 나아-으읍.”
나이에 비해 대단히 총명한 이찬이지만, 대뜸 자신을 끌어안아버리는 윤대흥의 마음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안긴 중년의 품이 따뜻하다는 것은 분명히 느꼈다.
아주 어렸을 적, 고아원장을 완전히 믿고 있던 시절에나 느껴봤던 포근함이었다.
그리고 1분이 지나, 이찬은 스스로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저 할래요! 좀 힘들어도, 유명한 배우 될래요.”
키만 좀 클 뿐 열두 살 아이임에 분명한 소년 이찬의 외침.
그 소리에, 세 쌍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
“정말 괜찮을까요? 형사님 표정이 되게 어두워 보였는데. 뭐 사정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집안에 빚이 있다거나.”
유호진의 말에 안정록은 고개를 저었다.
“그딴 이유로 동생한테 일 시킬 사람으론 안 보였다. 성실한 형사 같았고······ 그리고 그런 쪽의 어두움이 아니었어.”
“오, 그렇습니까? 그럼 어떤······?”
“확신을 하고 있더라. 이찬, 그 애가 연기를 해야만 한다고. 어떻게든 그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다짐한 눈치였어.”
“하핫. 이거 오랜만에 들으니까 좋은데요, 심리학자 안정록 선배님의 단언.”
“저는 처음 듣는데 좋습니다! 소문으로만 많이 들었거든요.”
유호진과 임희재의 호들갑에도 안정록은 웃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이찬 한 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선은 발성 가다듬으며 극단 활동에 집중해야 되겠지만, 캐스팅이 먼 일은 아닐 거야. 이미 여의도도 충무로도 움직임이 후끈하니까. 본인도 원하고 있으니 뭔가 하긴 해야 할 텐데. 적당한 걸 골라야겠지. 얼굴은 앳되지만 키는 제법 크니 스펙트럼을 넓게 잡을 수 있겠어. 드라마에서 성인 배우의 아역 소화할 수도 있을 거고, 영화에는 두어 씬 나오는 학생 배역이 많지. 그쯤 해서 2000년엔 우선 두 작품 정도만 소화하는 거다. 아직 학교생활도 놓쳐선 안 되고, 유명세에 적응기간도 필요할 테니. 심 교수 스케줄도 알아봐야겠어. 점점 심리적으로 몰릴 텐데, 그 여자가 그쪽으론 일가견이 있다니까. 그 뒤에도 <학교> 시리즈나 가벼운 조연 정도 하면서 조금씩만 인지도 쌓아나가는 거야. 성인이 되기 전까진 그 정도만 해야 해. 너무 대작에 출연해서 전 국민이 알아볼 정도가 돼선 안 돼. 그러자면 책임감 있는 소속사가 중요한데······.’
안정록의 시선이 유호진을 향했다.
“호진아, 요즘 금양기획은 좀 어떤 것 같냐?”
“아······ 벌써 생각이 거기까지 나가신 거예요?”
“시끄럽고, 대답해봐.”
“그게, 저도 영진이 형 못 본 지 오래됐습니다. 요샌 그 아이돌이란 거 만들겠다고 바쁜 것 같긴 하던데요.”
“흠. 프로엑터스는?”
“그쪽은 이번에 실장이 공연 보러 와서 얘기 좀 나눠봤습니다. 은근히 희재한테 관심 보이던데요?”
“그래? 아역 키울 생각이 있나보네.”
“앗, 제가 아역입니까? 저 동안인가요?”
환하게 웃으며 끼어드는 신입에게 무서운 표정을 지어준 뒤, 안정록은 다시 생각을 이었다.
‘금양하고 프로 사람들을 미리 좀 만나봐야겠어. 어차피 저 아이가 알려지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달려들겠지만, 학업 배려해주면서 천천히 키워줄 만한 곳은 그 둘뿐이다. 물론······ 내가 후견인임을 알린다고 해도 어차피 계약은 보호자 책임이고, 나 몰래 은근슬쩍 헛짓거리 시킬 가능성도 있긴 한데······. 그런 면에서 내가 드나들 수 있는 나라엔터가 더 낫긴 하지만, 이군영 그 자식을 믿을 수가 없으니 원.’
그때쯤 유호진이 히죽 웃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선배님, 보기 좋으시네요.”
“뭐? 뭐라는 거야.”
“그 표정 말입니다. 아주 생기가 넘치세요. 이젠 다신 제자 안 키울 거라고 하시더니, 역시 안 되겠죠?”
“시끄러워. 제자는 무슨. 그냥 길만 잡아주려는 거야.”
“하하하, 지금 부끄러워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야. 너, 임희재. 넌 또 왜 웃냐?”
“훗, 핫,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안정록은 한 차례 혀를 찬 뒤에 유호진을 노려봤다.
“알고 있지? 잡일은 절대 시키지 말고 딱 연기만 가르쳐. 단원들 단속도 미리부터 하고. 배역은, 최대한 순수하고 따뜻한 역할만 맡겨라. 절대로 복잡하고 특이한 역은 주지 마.”
“알고 있습니다. 소년은 소년의 모습부터. 저 녀석 작은 머리가 혼란스러워질 만한 역할은 절대 안 줄게요.”
그나마 믿을 만한 단장이라 다행이라고, 안정록은 생각했다.
< 2장 - 교수 안정록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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