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 선배 임희재 (1) >
이찬이라는 아이를 바라보는 임희재의 입장은, 좀 복잡했다.
인간적으로는 호감이 갔다. 일단 외견이 귀염상이었고, 처지가 좀 안된 것 같기도 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긋생긋 웃는 게 보기 좋았다.
그렇지만 하필 자신이 그 아이의 교습담당이 된 게 마뜩찮았다.
“연기여신의 등장을 세상이 시샘하는가······.”
“누나 얘기예요? 누나 여신이에요?”
“······독백에 반응하는 건 좋은 관객 아니야.”
“독백이 혼잣말 말하는 거예요? 근데 관객이 아니라 후배 아니에요? 근데 그건 됐고, 연기 가르쳐준다면서요?”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가르쳐줄게.”
“에이, 자기도 신입이면서.”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져드는 면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대가족 안에서 막내로 자라나며, 짜증나는 녀석이라도 좋으니 동생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으니까.
‘하지만 이 녀석은 동생이 아니라 짐덩어리지. 흔들리지 말자, 임희재. 이런 애한테 시간 쏟다가 공연 망치면 손해야.’
임희재는 꿈이 있는 배우였다. 언젠가 가장 커다란 대극장에서 당당하게 주연으로 서고 말겠다는.
10대 때는 집안의 반대로 인해 연극동아리 활동조차 조심스러웠지만, 이제는 서울의 대학교에 진학해 그토록 염원하던 하숙을 시작한 상황이고.
그러니 임희재의 머리는 연기 하나로 가득 찬 상태였다. 경력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꼬마 신입을 맡아 가르치는 일에 의욕을 가질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일단 이거나 좀 읽고 있어.”
“이게 뭔데요? 손글씨네. 누나가 쓴 거예요?”
“그래. 햄릿 독백 필사한 거야. 그거 외우고 있어.”
“테스트하는 거예요? 어제 충분히 한 것 같은데.”
“근데 뭐? 내가 못 봤잖아. 선배님들이 연기 잘한다고 치켜세워 주셔서 콧대가 높아진 모양인데, 나 네 선배야. 시키는 건 군말 없이 한다. 이게 극단의 기본이야.”
“그런 규칙은 못 들었는데. 근데 이게 뭔지도 모르고 외우기만 해요? 니오베? 헤르쿨레스? 하나도 모르겠는데. 누나가 보여주면 안 돼요? 한 번만요.”
분홍색 입술을 삐죽거린 뒤에 임희재가 독백을 준비했다.
적어놓은 종이를 돌려받을 건 없었다. 머릿속에 내용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 그만큼 유명한 구절이며 오래 연습했던 독백이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한 달 만에, 니오베처럼 울며불며 가엾은 아버님의 시신을 따라갈 때 신었던 그 신발이 닳기도 전에, 어째서 어머니는, 왜 어머니는-아, 신이시여. 이성 없는 짐승이라도 그보다는 오래 애도했으리-숙부와 결혼하셨을까? 친형제이지만, 내가 헤르쿨레스와 닮지 않은 것만큼이나 아버지를 닮지 않은 그와.”
“······되게 열심히 하시네요?”
“당연하지. 배우한텐 순간순간이 미래를 향한 디딤돌이야. 너한테 보여주는 거랑 무관하게 이건 대단히 소중한 모놀로그고. 그러니까 넌······ 일단 외우고나 있어. 연극 한다는 애가 햄릿도 모르면 엄청 욕먹으니까.”
사실은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소년에게 위압감을 주려고 과하게 열심히 보여준 시범이지만, 사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귀염상의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잠깐 보다가, 임희재는 콧방귀를 뀌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
‘대하기 편한 사람이네.’
홀로 남자마자 이찬은 종이를 내려놨다.
몇 번이나 들춰본 건지 꽤나 낡은 종이였다. 옮겨 쓰지도 않고 계속 갖고 있었던 건, 아마 손때에 소중한 추억도 함께 묻어 있는 까닭일 터였다.
그 종이 대신 사무실 벽을 주시하며, 이찬은 임희재의 태도를 생각했다.
‘텃세라는 건 아닐 거야. 내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저 마음을 누르고 있는 듯한······ 그 역무원 아저씨 같았지.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데 되게 바쁘다고 자기를 설득하면서, 남들이 귀찮아하는 일들을 자꾸 벌이는.’
임희재가 소년을 귀찮아하면서도 싫어하지 않는 것처럼, 이찬 역시 그런 그녀의 데면데면함이 밉지 않았다.
‘저런 사람들은 대하기 편하지. 자기 자신한테 너무 집중해서 남한텐 별 관심이 없으니까. 세상에 그런 사람들만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특이한 꼬맹이는 언제나 시선을 끌게 마련이니까.’
단순한 임희재와 달리 다른 단원들의 시선은 복합적이었다.
공연 준비에 바쁜 단원들을 불러 모은 단장 유호진이 이찬을 소개했을 때, 그들 중 일부는 황당함을, 일부는 짜증을, 일부는 의심을 보였다.
마지막 부류가 유호진이 돈 받고 아역을 키워주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찬은 그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남들은 수십 년을 연마해야 얻을 수 있을 천부적인 관찰력을 통해서.
‘그나마 호진 아저씨가 내 편이라 다행이긴 한데. 이렇게 사무실에서 혼자 놀 수 있게 해주니까 말이야. 서로 얼굴 마주칠 일 없으면 감정이 더 나빠질 일도 없을 거고, 귀찮은 가식을 떨 필요도 없을 거고. 근데 희재 누나는 왜 그런 식으로 연기를 하는 거지?’
여전히 종이엔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이찬은 의구했다.
‘아무리 봐도 목소리가 이상했어. 동작도 너무 과한 거 같고. 그런 식으로 연기하면 어색하지 않나? 나 시험해보는 건가? 이걸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면 호진 아저씨도 나한테 실망하게 되고 그런 걸까? 그러면 좀 곤란한데······.’
고민 속에서, 소년은 벽에 묻어 있는 얼룩을 세기 시작했다.
*
“뭐? 햄릿 독백 외우라고 시켰다고?”
소도구를 옮기던 중에 마주친 유호진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 얼굴은 답답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임희재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옙. 기초 중의 기초잖아요? 감정선도 선명해서 공부하기 좋고.”
“그래서 걔한테 햄릿을 줬다고? 어휴, 이 답답아.”
“왜요? 셰익스피어로 시작하는 게 뭐 어때서요?”
“그런 걸 가르치라고 맡긴 게 아니니까 그러지. 찬이가 연극만 팔 애도 아니고, 햄릿을 외우면 뭐하겠냐? 걔한텐 감정 같은 거야말로 제일 가르칠 필요가 없는 거란 말이야.”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초심자한테 제일 어려운 요소잖아요?”
진심으로 황당해져서 되물은 임희재에게 유호진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후배의 손목을 붙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그래, 이건 내 실수다. 네가 어제 제대로 보질 못해서 그러는 거지. 너한테 기초 가르치라고 시킨 건 그냥 발성이랑 무대 올랐을 때 동선이랑······ 그런 거 알려주란 말이었어.”
“그걸 그 꼬맹이한테요? 캐릭터분석이 먼저 아니에요?”
“걔한텐 그게 먼저야. 다른 건 이미 할 줄 알거든. 순서가 뒤바뀐 거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범재와 천재의 차이인 거니까.”
그 말에 임희재는 순간적으로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나한테는 천재 그런 말 한 번도 안 해주셨으면서. 대체 그 꼬맹이가 뭘 할 줄 안다고 그러시는 거야? 사람 흉내 좀 내는 게 뭐 대순가?’
임희재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찬에게서 본 거라곤 그녀 자신을 따라하는 짧은 연기뿐이었기에.
일반적으로 사람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다. 타인이 자신을 흉내 냈을 때 감탄하기보다 황당해하는 사람이 많은 게 그런 까닭.
아무리 정교하게 따라한다 해도 본인은 그걸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많았다.
물론 임희재는 일반인과 달리 거울을 앞에 두고 무수한 대사를 쳐본 숙련자다. 만약 이찬이 따라한 것이 그녀의 무대연기였다면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전날 소년이 보여준 건 일상의 모습이었다. 타인이라 해도 유호진 정도의 관록이 없다면 세밀하게 파악할 수가 없는.
그러니 임희재로선 그저 끼 좀 있는 꼬마 정도의 인상밖에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무실 문 앞에 섰을 때엔 상황이 달라졌다.
얇은 나무문을 사이에 두고 더없이 확연한 무대연기가 들려왔기에.
“어째서 어머니는, 왜 어머니는-아, 신이시여. 이성 없는 짐승이라도 그보다는 오래 애도했으리- 이렇게 하는 건가?”
“······야. 너 대본만 주고 나온 게 아니었어?”
“그게, 그냥, 시범 한 번 보여줬는데요.”
“시범? 복식호흡은 안 가르쳤고?”
“예, 예. 전혀요. 원래 발성 배운 애 아니에요?”
“아냐. 전혀 아냐. 와, 이거 돌겠네.”
복식호흡이란 목소리를 업으로 삼는 모든 직종에서 교육되는 기본기다.
기본적으로 성대는 소리를 낼 때마다 마찰에 의해 피로를 느끼게 되는데, 그걸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멀리까지 소리를 전달시킬 수 있는 스킬인 까닭.
하지만 유호진이 들은 바에 따르면, 소년은 그걸 배워본 이력이 없었다. 전날 한참 대화하면서도 목소리를 단련한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렇지만 지금 문을 뚫고 나온 음성은 어린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1년 이상 발성을 단련한 이의 목소리였다.
“어흠. 친형제이지만, 내가 헤르쿨레스와 닮지 않은 것만큼이나 아버지를 닮지 않은 그와······ 아, 아. 아, 목소리 진짜 이렇게 내야 되나? 어색한데.”
안쪽에서는 여전히 소년의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신입 단원들로서는 쉽게 내지 못할 정도의 정교한 발성으로.
“······희재 너, 시범 보였다고 했지?”
“예, 선배님. 대사 주고 한 번 읽어줬어요.”
“젠장. 아니, 맙소사. 그걸 복사했다는 거네.”
“예? 복사요?”
“네가 보여준 시범을 고스란히 배웠다는 거야. 대사의 감정은 물론이고, 배우의 발성까지도. 돌겠네. 미치겠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천재지? 아무리 얇은 옷 입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한 번 본 무대연기에서 발성법까지 익혀버릴 수 있는 거야? 그런 게 진짜 가능하긴 한 건가? 정말로 저 녀석은······ 연기의 신이 내려준 아이일까?”
그런 단장의 독백을 듣고, 임희재도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가 수긍을 동반하지는 않았다.
‘내 시범을 보고 발성을 익혔다고? 연습할 시간은 둘째 치고, 뭐 하나 체계적으로 알려준 게 없는데?’
생각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유호진이 곧바로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기에.
“어? 아저씨?”
“아저씨 말고 선배님이라고 하라니까.”
“네, 선배님. 왜요? 저 너무 시끄러웠어요?”
“아냐. 잘했어. 밥때 됐는데 밥 먹자고.”
“아, 네. 나가서 먹고 올게요.”
“같이 가. 꼬마애가 혼자서 어딜 간다고. 가자, 임희재. 보모도 같이 움직여야지. 불백이나 먹자고.”
혼자 결정하고 앞장선 단장의 뒤를 따르며, 임희재는 연신 뒤를 돌아봤다. 그 모습에 이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나? 왜 그래요?”
“······누나 말고 선배님이라고 하라니까.”
“저 혼자서도 잘 걸어요. 그리고 그렇게 뒤 보면서 계단 올라가면 넘어진다고요. 누나가 앞에서 넘어져서 나까지 다치면 책임질 거예요?”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읏.”
유호진이 계단 끝 출구의 암막을 젖히자 햇살이 확 쏟아졌다. 그 빛에 눈살 찡그린 임희재의 생각이, 곧 본론으로 돌아왔다.
‘지금 호칭이 중요한 게 아니지. 내 시범을 따라했다고? 정말로 그걸 따라했다고? 내가 윗도리를 홀딱 벗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래도 셔츠를 두 겹 입고 있었는데, 그냥 보는 걸로 복식호흡이 됐다고······? 하하하. 정말 그런 거면, 안정록 선배님이 그렇게 감탄하신 것도 말이 되긴 하지. 그런 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니까. 말도 안 되는 거니까. 그게 어떻게 연기냐구. 그건 그냥, 그냥······ 사기잖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연기자인지 사기꾼인지 헷갈리는 꼬마가 임희재의 왼손을 덥석 쥐었다.
“아, 누나! 차 오잖아요. 정신 좀 차려요. 대낮부터 송장 치울 뻔했네.”
“어, 어엇. 응, 고마워······.”
거의 코앞으로 쌩 지나가는 택시를 본 뒤에는, 순순히 감사를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근데 넌 뭔 말투가 참, 좀 그렇다.”
“별로예요? 자연스러웠는데.”
“자연스러운 게 문제가 아니라, 열두 살 먹은 애가 송장 어쩌고 하는 게 이상하잖아. 애가 그러면, 이상하지.”
“내가 애처럼 굴었으면 좋겠어요? 그럴 수도 있긴 한데.”
“······해봐.”
“흐, 흐에이······ 시러여! 누나 아야 하면 시러여! 얼른 가여. 아저씨 저기서 기다리자나여······ 나 배고파여!”
순간적인 변신. 초면의 임희재 자신을 따라했을 때처럼 소년은 너무도 순식간에 스스로의 모습을 뒤바꿨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기존의 이미지 때문에 어색하고 불편하게 여겨졌어야 할 일상연기지만, 그런 느낌조차 없었다. 앞쪽의 이찬도 뒤쪽의 이찬도 터무니없이 자연스러웠기에.
‘······연기의 신이 내린 천재.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구나.’
임희재는 마침내 그 소년의 비정상을 받아들였다.
< 3장 - 선배 임희재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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