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 선배 임희재 (2) >
암전된 객석에 앉은 채, 소년은 햄릿의 독백을 생각했다.
‘니오베나 헤르쿨레스는 그냥 다른 사람들 이름인 것 같고, 중요한 건 어머니인 것 같아. 아빠 죽고 나서 엄마가 바람이 나서 아빠 친동생이랑 결혼해버린 모양이지? 그래서 울며불며 화를 내는 거야.’
이찬 입장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에게는 애초에 아빠도 엄마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조금 빗대어서 생각을 해보면 유추는 가능하다. 예를 들면, 윤대흥 아저씨가 죽고 나서 김순영 형사가 다른 형사와 파트너가 되는 걸 본다든가.
‘······좀 다르려나. 아 뭐 됐어. 중요한 거 아니니까. 그런 것보다 무대연기라는 걸 좀 생각해봐야 해. 희재 누나가 이상하게 한 게 아니라, 원래 카메라연기하곤 다르단 말이지?’
이른 저녁을 먹으며 물어봤을 때 유호진이 답해준 말이다. 현실적인 표현을 추구하면 되는 카메라연기와 관객을 향해서 펼치는 무대연기는 전혀 다르다고.
오늘 공연을 직접 관람하며 그 차이를 이해하라는 게 그가 내준 첫 번째 숙제였다.
‘일단 극장이 크니까 목소리를 크게 내야 된다는 건 알겠어. 그러려면 그······ 복식호흡? 그런 게 필요한 거야. 안 그러면 끝에 앉은 사람한텐 잘 안 들릴 테니까. 근데 여기 봤다 저기 봤다 하면서 손을 휘젓는 건 왜 그런지 모르겠어.’
연극 무대의 시선처리와 제스쳐 하나하나에는 극의 흐름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한 의도들이 담겨 있다. 그런 걸 관람 경험이 없는 이찬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조명이 켜지고 공연이 시작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극단 관계자로서 맨 앞줄에 앉아서, 종종 뒤를 돌아보며 관중의 표정을 살필 수 있었기에.
‘아······ 이런 거구나. 배우들이랑 관객들이랑 호흡을 맞추고 있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관객들 앞에서 사건이 새로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래서 그걸 보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주고, 말하려는 게 더 확 보이게 몸짓도 크게 하는 모양이야. 저렇게 둘러보는 건······ 관객들이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 사건의 목격자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거지.’
일반적인 열두 살 아이가 연극을 본다면, 기껏해야 광대 롤을 맡은 배우의 우스꽝스런 행동에나 관심을 주며 일차원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근대극이든 고전이든 연극은 아이가 보기에 재밌는 내용을 추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무수한 인간의 거짓에서 도망치며 살아온 이찬은, 연극의 내용이 아닌 극장 전체의 공기를 살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호흡의 공감을 느꼈다.
‘재밌네. 여기서 배우들은 틈에 걸쳐 있는 거야. 반쯤은 가상이고 반쯤은 현실이지. 그래서 대본 속을 살아가면서도 관객들한테 그걸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그게 무대연기인 거야. 그에 비하면 카메라연기라는 건 100% 가상인 거지. 관객을 고려하지 않고 대본 속 얘길 재현하기만 하면 돼. 그래서 연기 방법에도 차이가 생기는 건가봐. 독백이란 것도 그렇지. 카메라 앞이라면 표정으로 보여주면 그만이지만 무대 위에선 그걸로 충분하지가 않아. 그러니까 혼잣말을 크게 하는 독백이 들어가는 거지. 과장된 손짓도 하고 목소리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등장인물의 심정을 전달하는 거야.’
한 인간의 미세표현을 2초에 모두 파악해내는 관찰력은, 그 대상이 광범위할 때에도 문제없이 발현됐다. 이찬의 궁리가 숙제를 맡긴 유호진이 바라지도 않은 수준까지 진행됐다.
그 타이밍에, 임희재가 무대에 올랐다.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이게 무슨 냄새지? 정육점에 갔을 때 맡았던 그런 냄새가 나. 음식물쓰레기 냄새만 나던 이 뒷골목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아, 아! 이건 피 냄새구나. 피비린내야. 대체 여기서 누가 피를 흘리고 있는 걸까?”
관객에게 들려주기 위한 방백. 마치 함께 골목에 들어선 친구들에게 말을 건네듯 임희재는 객석을 향해 소리쳤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찬은 조용히 웃었다.
‘잘하네. 호진 아저씨가 괜히 저 누나한테 날 맡긴 게 아니었어. 자기 연기에 빠져 있어서 남한테 관심이 없긴 하지만, 제대로 배우면 도움이 될 거야. 그나마 나랑 몸집이 비슷하기도 하고.’
열의를 담은 소년의 시선을 임희재도 눈치 챘다.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시와 호기심을 누르기 위해 애썼다. 지금은 골목 거지 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시선은 아주 잠깐만 얽혔을 뿐이었다.
시체가 된 남자배우를 발견한 임희재의 외침을 1막의 커튼씬으로 장식한 연극 <떠돌이의 죽음>은 2막 이후로 추리극의 형식을 띠었다.
물론 형식만 그럴 뿐이다. 단서를 추적하기보다는 사건에서 이익을 얻고자 범인을 몰아가는 사람들. 그러는 과정에서 감정이 부딪치고 혼란이 가중된다.
클라이막스는 갈등 끝에 발생한 또 하나의 살인사건.
그 뒤에 사실 원래의 죽음이 생을 비관한 남자의 자살이었음을 암시하면서, 극은 천민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시대의식을 드러냈다.
연출자 유호진의 그 세세한 의도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소년은 처음 관람한 극에 꽤 만족했다. 연극이 끝나고 막이 내린 뒤 웃으며 자리를 비우는 관객들을 봤기에.
‘다들 즐거워하네. 다행이다. 나만 재밌게 본 건가 싶었는데. 그렇지만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현실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사건을 배우들의 연기로 관람하고 나서, 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죽음이란 건 이찬에게 있어서 현실이었다. 수원에 내려와 다리 밑에서 잠을 청하던 날 목격한 살인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집시를 꿈꾸며 고아원을 나온 뒤로 늘 죽음이란 가능성과 벗하며 살아왔다.
추위. 텃세. 폭력. 그런 것들이 이찬에게 죽음을 일깨웠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다르겠지. 비싼 표 사서 연극을 볼 정도로 여유로운 사람들은 그런 일을 겪을 일이 없을 거고, 거기에 공감을 하진 않았을 거야. 그냥 신선하고 자극적인 얘기에 흥미를 느낀 거겠지.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을 한 것도 있겠고.’
커튼콜을 위해 무대에 나와 있는 배우들에게 던져지는 찬사들이 그 추측을 긍정해줬다. 주로 시체와 회상으로 등장한 남자배우를 바라보며 이찬은 죽음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소년에게 때로 꽤나 매력적으로 보였던 그 개념으로.
‘사실 죽는 거야말로 제일 집시다운 일이야. 더 이상 어디에도 매일 필요가 없으니까. 더는 사람한테서 상처를 받을 일도 없어질 거고. 하지만······ 배우가 되는 건 꽤 괜찮은 것 같아. 배역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집시. 연극을 한다면 다들 나보다 내 절반인 배역에 관심을 가질 거야. 지금도 봐, 배우들을 이름이 아니라 배역으로 부르면서 잘 봤다고 말하잖아. TV에 나오는 배우들은 더하겠지. 이름이야 알겠지만, 실제로 볼 수 있는 건 가상의 배역뿐일 테니까.’
그때쯤에 세 명의 여자가 무대를 향해 다가섰다. 커튼콜을 위해 배우들이 서 있는 자리였다.
“희재야, 잘 봤어! 진짜 잘하더라.”
“헤헤. 멀리까지 와줘서 고마워. 재미있었어?”
“완전! 배우님들 엄청 멋있어. 너 여기 정리 언제 끝나? 우리 이제 술 마시러 갈 건데.”
“오······ 여기 좀 걸려. 내가 막내잖아. 아쉽지만 난 빠지고, 다음에 내가 쏠게.”
“그렇구나······ 힘내, 희재야. 다음에 또 보러 올게.”
친구들이 계단을 올라간다. 그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던 임희재는 오래지 않아 결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찬은 조금 감탄했다.
‘친구들이랑 마음껏 놀 수 없는 게 아쉬운 것 같았는데, 금세 마음을 다잡네. 연기가 진짜 좋은가보다. 궁금하네.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은 걸까? 나처럼 집시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닐 텐데.’
이찬이 처음으로 임희재라는 개인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는 동안 마침내 관객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그리고 무대 뒤쪽에서 유호진이 몸을 드러냈다.
“자, 다들 집중. 오늘도 고생 많았다. 지적할 게 많긴 한데 내일 오전에 하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만 하고, 공연에 지장 없게 휴식해. 오늘 뒷정리는 희재였나?”
“예, 선배님.”
“잘 정리하고······ 찬이 형 올 때까지 보고 있어.”
“하하, 희재 완전 보모인데?”
나잇살 있는 배우의 놀림에 임희재가 표정을 팍 구겼다.
배우들은 빠르게 빠져나갔다. 일부는 술자리로, 일부는 집으로, 일부는 또 다른 일터로 이동하는 것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유호진은 매체 인터뷰를 위해 차량에 탈 터였다.
홀로 남은 임희재가 무대와 소품을 정리하는 걸 보면서 이찬은 머릿속으로 연극의 내용을 복기했다. 그 안에서 자신이 배역을 맡는다면 어떤 걸 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어떤 역이든 똑같이 할 순 있을 것 같은데······ 분장을 해도 덩치 큰 남자 역은 안 되겠지. 노인 역할도 별로일 거고. 그러면 남는 건 영자 친구들 역할밖에 없네.’
대사도 별로 없는 집단이다. 주로 영자 역의 임희재가 이끌어가고, 다른 이들은 적당히 맞장구나 쳐주면 된다. 그런 거라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하고 있는 배우들보다 더 잘.
‘너무 별로야. 말 더듬는 거야 개성이라고 치면 되겠지만, 목소리가 떨려서 전달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시선도 계속 이상한 데로 가서 집중 깨뜨리기도 했고. 내가 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어. 철수 역을 맡는다고 하면, 길에서 봤던 거지 특징에다가 여기 배우들 기술을 섞으면 돼. 그러면 자연스러우면서도 잘 전달되는 연기가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가상의 연기를 펼치길 수십 분. 이찬은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쯤 임희재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야, 후배! 너희 형 언제 오냐?”
막 물청소를 마치고 내려오며 물어보는 말. 그 질문에 이찬은 입맛을 다셨다.
“사건 터졌나봐요. 여덟 시까지 온다고 했는데.”
“아, 형사랬지. 너 그럼 혼자 집 찾아갈 수 있어?”
“네.”
“어딘데?”
“수원이요.”
“······수원까지 간다고? 너 혼자? 야, 그게 말이 되냐? 전화번호 줘봐.”
이찬의 주머니에서 나온 종이를 갖고 사무실로 들어간 임희재는, 5분쯤 뒤에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걸어나왔다.
“거 되게 불친절하네. 전화를 몇 번 돌리는 건지.”
“뭐래요?”
“잘 모르겠어. 아무튼 상황이 급해서 딴 순경 보냈다는데, 그냥 오지 말라고 했어. 내가 데리고 있는다고.”
“누나가 뭘 데리고 있어요?”
“너. 너 오늘 내 방에서 자고 가. 꼬맹이가 뭘 혼자 수원까지 간다는 거야? 어차피 내일도 극단 와야 되면서. 그냥 나랑 자고 바로 여기로 오면 돼. 침대 넓어.”
열두 살 먹은 꼬마를 유혹하는 건 아닐 거고, 그저 하룻밤 잠자리를 내줄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태도에 이찬은 꽤나 감명을 받았다.
‘동정심도 아니고 가식도 아니고. 저게 뭐지?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식으로 하는데······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자기한테 뭐 해준 게 있다고?’
그 점이 궁금했기에, 혼자서도 얼마든지 수원까지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감추고 정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후······ 야, 후배. 정리 끝났으니까 외투 입어.”
“네. 누나 집 가까워요? 하숙한다고 그랬죠?”
“그래. 근데 좀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냐? 쪼막만한 게 어딜 계속 누나래?”
“아줌마라고 할까요?”
“아, 짜증나! 넌 오늘밤에 눈 크게 뜨고 자라. 내가 언제 꿀밤 때릴지 모르니까.”
겁을 주려는 듯 무섭게 말하지만, 이찬의 눈에는 그게 거짓말인 게 빤히 들여다보였다.
선배의 위엄을 연기하는 임희재와 함께 거리로 나오자 이미 한밤이었다. 아직 해가 짧은 2월인 까닭.
“어우, 춥다. 야, 지퍼 올려. 감기 든다.”
“안 걸려요.”
“뭐래? 니가 히포크라테스니?”
“히포크라테스가 누구예요?”
“몰라. 의사일걸.”
“모르면서 말하는 거 웃기지 않아요?”
“아, 짜증나!”
뱉듯이 말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임희재를 따라 걸어가며 이찬은 씩 웃었다. 참 흥미로운 사람이라 생각하며.
그리고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 씩씩거리는 임희재의 옆에 도달한 뒤에, 그녀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헉. 헉. 뭘 보냐?”
“누나. 나한테 왜 잘해줘요?”
“뭐? 내가 언제, 잘해줬다고. 근데 넌, 숨도 안 차?”
“애들은 원래 힘이 넘치는 법이라고요.”
솔직한 대답은 아니었다. 사실은 타인의 특징마저 고스란히 구현할 정도로 잘 발달한 전신의 운동신경 덕분이니.
“누나, 왜 재워주냐고요. 집에 남 들이는 거 귀찮지 않나?”
“당연히 귀찮지. 주인아줌마한테 설명도 해야 되고.”
“근데 왜 같이 가자고 그래요? 나 집 갈 수 있는데.”
“아, 바보니? 그러다 잘못되면 안 되니까 그러지.”
“내가 잘못되는 게 누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상관이 왜 없냐? 그래도 내가······ 네 연기 스승님인데. 제자 챙기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안 그럼 욕먹는다고.”
그것도 솔직한 대답은 아니었다. 사실은 연기의 천재인 것으로 보이는 소년이 잘못되길 바라지 않는 까닭.
“······고마워요.”
“뭐래니? 야, 건너. 파란불이야.”
거짓말 끝에, 그렇게 작은 진심이 섞였다.
< 3장 - 선배 임희재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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