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9화 (9/250)

< 3장 - 선배 임희재 (3.) >

하숙집 주인은 이찬의 방문을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운 사촌동생이 있었니? 똘망똘망한 거 봐. 얘, 잘 왔어. 이모가 뭐 맛있는 거 해줄까?”

“아뇨. 저녁밥 먹었어요.”

“그러니? 그럼 이모가 과일 좀 깎아줄게. 사과 좋아하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주방으로 몸을 옮기는 중년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임희재는 이를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어휴. 동기 데려왔을 때는 그렇게 학을 떼시더니.”

“남자였어요?”

“뭐? 미쳤어? 하숙집에 남자를 어떻게 들여?”

“그래요? 근데 나도 남잔데.”

“너야 꼬맹이지, 남자는 무슨.”

그렇게 구시렁대며 계단을 오른 임희재의 하숙방. 작고 좁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었는데, 그 점이 문제긴 했다.

“엄청 지저분하네요. 청소 안 해요?”

“청소할 시간이 어딨니? 연기 연습할 시간도 부족한데. 여기서는 잠만 자니까 상관없어. 오늘도 너 때문에 일찍 나온 거지, 원래는 밤 10시까지는 극장에 있는단 말이야.”

“왜 그렇게 열심히 해요? 연기가 그렇게 좋아요?”

“좋냐고? 연기는 내 인생이야. 내가 20년 동안 꿈꿔온 일이고, 앞으로 80년 동안 해나갈 일이고. 좋고 나쁘고 그런 게 아니야.”

별난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이찬은 고개를 젓지 않았다. 그 대신 외투를 벗어 옷더미들 위에 던져놓으며 질문을 이었다.

“왜 그렇게 정했는데요? 뭐 때문에?”

“······이 자식은 아주 제 집처럼 행동하네.”

“그것도 독백이에요? 반응하면 안 되는?”

“그런 건 아닌데.”

“대답하자면, 반대로 초대한 사람이 ‘네 집이라고 생각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보통 그러던데.”

“넌 뭐 초대 많이 받아본 사람처럼 얘기한다?”

“많이 받아봤어요. 제가 인기가 좀 많아야죠.”

“아, 그래? 거 되게 부럽네. 난 친구 별로 없었는데.”

뜻밖의 얘기였다. 이찬은 침대에 앉으며 또 질문했다.

“아까 보러 왔던 건 친구들 아니에요?”

“봤어? 걔들은 대학 동기들. OT 때 만나서 친해지긴 했는데 아직 친구라고 하긴 좀 그렇고, 그냥 동기가 연기를 한다니까 호기심에 놀러온 거야. 그런 애들도 서울 오기 전까진 거의 없었지만. 아버지 직장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녔거든.”

“무슨 직장 다니시는데요?”

“장교셔. 충성! 알지?”

“네. 근데 군인이면 이사를 자주 다녀요?”

“아무래도 그렇지. 특별한 보직이 아니면, 한 부대에 오래 머무는 게 금기래. 순환근무라고 그랬나······.”

나랑 비슷하구나- 이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유는 전혀 다르지만, 그 역시 아홉 살 이후로 끊임없이 잠잘 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그래서 초등학생 때 학교 세 개 다니고, 중2때, 고2때도 이사를 가야 됐어. 그러다보니까 친구가 생기겠니? 좀 친해질 만하다 싶으면 떠나게 되는 건데. 우리가 어른들처럼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래서 그런 게 좀 있긴 했지. 같이 놀 친구가 없으니까 집에서 TV만 주구장창 봤는데, 드라마에 푹 빠졌던 거야. 연기란 걸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 그 뒤로 소극장 찾아다니면서 꿈을 키워왔지. 학교에서 연극 동아리도 들어갔고.”

“거기 친구들이랑은 친하게 지냈겠네요?”

“······그렇지도 않아.”

그 무렵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고, 곧 집주인이 접시에 소복이 담은 사과와 함께 등장했다.

“자, 여기. 1층 신원이네 농장에서 보내온 건데, 아주 맛이 좋더라. 이게 하숙집 하는 재미기도 해. 다양한 아이들이 들어와서 다양한 지역 얘기도 전해주고, 때마다 선물도 보내주고. 우리 희재는 그런 거 하나 없더라마는.”

“아, 쫌. 아줌마 대놓고 속물이에요.”

“어머, 속물이라니? 너도 참 너무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줌마가 희재 제일 예뻐한다고 말하는 거잖니? 찬아, 부족하면 말하렴. 이모 1층에서 TV 보고 있을 테니까.”

“고마워요, 이모. 잘 먹을게요.”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하는지. 후후후.”

환하게 웃은 집주인이 방을 나선 뒤, 임희재는 혀를 찼다.

“너한테 완전 푹 빠지셨네. 야, 후배. 너 아주 눈웃음 살살 치더라? 어른 꼬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나라도 그렇게 해야 누나가 욕 안 먹죠. 나까지 까칠하게 굴면 아줌마가 얼마나 기분 상했겠어요? 받은 만큼 베풀어야죠. 그게 사람 사이의 예의인 거예요.”

“······어······ 그렇긴 하네.”

가르치듯 말했으나, 이찬의 속마음은 그와 달랐다.

겉으로는 투닥거리는 임희재와 아줌마지만 사실은 서로 마음이 잘 맞는다는 게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구태여 이찬이 억지 애교를 부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소년은 그 사이에 녹아들고 싶었다. 거짓말로 만들어진 사촌동생 신분으로, 잠깐이라도 진심어린 그 호의 속에서 마음을 녹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며 킥 웃은 이찬은, 이내 사과를 두 조각이나 입 속에 밀어 넣었다.

“······야, 천천히 먹어라. 누가 뺏어먹는다니?”

“음, 움. 연극 동아리 친구들이랑은 왜 안 친했는데요?”

“어? 어, 그 얘기 하고 있었지. 그냥 별 거 아냐.”

“누나가 못 살게 굴었어요?”

“뭐? 내가 그렇게 나쁜 년처럼 보이냐?”

“반대구나. 친구들이 누나 괴롭힌 거네요? 이유는······ 연기를 너무 잘해서? 동네에 친구도 없는 누나가 연극의 중심이 돼버리니까, 다들 질투를 한 거네. 근데 눈치 없는 누나는 연기 잘하는 것만 생각해서 걔네 마음은 싹 무시한 거고.”

“어? 뭐야? 너 뭐, 신기 있냐?”

신기는 아니지만, 이미 이찬은 임희재를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남에게 관심 없는 그녀가 학생 무리에서 어떻게 따돌려졌을지는 유추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극단 들어온 게 참 다행이네요, 누나는. 여기 사람들은 누나가 잘하면 잘할수록 좋아할 테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넌 진짜 열두 살 맞니? 뭐가 이렇게 애늙은이야? 어른들도 안 할 소리를 하네.”

“내가 열두 살 맞길 빌어야 되는 거 아녜요?”

“내가 왜?”

“만약에 내가 키만 작은 어른이라고 하면······ 누나는 지금 외간남자랑 단둘이 방에 있는 건데. 안 무서워요?”

일부러 음흉한 표정을 지어 보인 이찬을 한참 빤히 바라보다가, 임희재가 몸을 날렸다.

“으, 악, 읍, 왜 이래욥!”

“아유, 귀여워! 어쩜 이렇게 귀엽지? 아······ 진짜, 너 같은 동생 진짜로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으면 TV 드라마도 많이 안 봤을 거고, 지금처럼 연기 잘하게 되지 못했을걸요?”

“바보니? 같이 드라마 보면 되지. 원래 혼자 볼 때보다 같이 볼 때 재밌는 거야. 아, 생각난 김에 같이 드라마 볼래? 대본 몇 개 있는데.”

“드라마 대본은 됐고, <떠돌이의 죽음>이나 보죠? 나 숙제 있단 말이에요.”

“어머, 숙제. 처음으로 애다운 얘길 하네. 좋아, 그러자.”

두 사람은 침대에 엎드려 사과를 먹으며 함께 대본을 봤다. 주로 읽는 건 임희재였고, 이찬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잘해. 시끄럽게 떠들면 안 되니까 조곤조곤 말하는 상황이긴 한데, 그래서 그런지 카메라연기에 맞는 투가 됐어. 당장 드라마 같은 거 찍어도 어지간한 배우만큼 할 것 같은데. 친구가 없어서 그런지 ’쪼‘도 별로 없고 말이야.’

대본을 세 차례나 읽어준 뒤에 몸을 뒤집은 임희재는, 뭐가 재밌는지 혼자 낄낄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갑자기 미쳤어요?”

“히힛, 힛. 아······ 좀 재밌어서. 애기한테 잘 자라고 동화 읽어주는 엄마 같았어. 얘, 너 누나 아들 할래?”

“후배랬다가 아들이랬다가,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그렇게 성차별적인 말을 하면 못써요. 그냥, 그리워서. 어렸을 때 엄마가 이렇게 같이 누워서 책 읽어주곤 했는데.”

“종종 또 읽어달라고 하세요. 체면 차리면 뭐해?”

“그럴 수가 없어. 돌아가셨거든. 암. 아, 무서운 암. 나쁜 병이 우리 엄마 잡아먹어버렸거든. 하하핫.”

암이라는 질병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이찬이지만, 임희재가 깊은 비애를 웃음으로 덮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그리울 만도 하네요. 결혼 빨리 해요.”

“뭐? 하하핫, 왜 얘기가 그렇게 되니?”

“결혼해서 엄마 되면 되죠. 그러면 덜 외로울 거야.”

“그러려나? 근데 안 돼. 이 선배님은 최고의 배우가 될 거거든. 최고의 배우가 일찍 결혼하는 거 봤니? 내가 꿈꾸는 필모 완성하려면 마흔도 일러. 그때까진 연기랑 결혼해야지. 그냥 네가 누나 아들 해주라. 아들, 귀여운 우리 아드을.”

“아, 끌어안지 마요. 변태.”

“변태가 아니라······ 히히. 이제 자자. 졸려. 오늘은 우리 아들 꼭 안고 자야지.”

불을 끄고 돌아와 또 자신을 끌어안는 임희재가 이찬은 몹시 못마땅했다.

그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에 자신이 녹고 있는 것만 같아서.

‘이런 건 잠깐일 뿐이야. 내가 어리고 귀엽게 생겨서 좋아해주는 거지, 절대로 진짜 가족이 아니라고. 빠지지 마라, 이찬. 넌 집시야. 집시는 함부로 마음을 주지 않아······.’

그런 마음조차도 흔들릴 만큼의 포근함으로 그를 가슴에 파묻으며, 임희재는 잠꼬대처럼 말했다.

“넌 참······ 대단해. 대단한 배우가 될 거야. 연기 천재, 연기의 신······ 안정록 선배님 말씀이 맞았어. 그래도, 안 질 거야. 난 천재는 아니지만, 연기의 딸이니까. 네가 유명해지기 전에 먼저 내가 최고의 배우가 될 거라고. 그러니까······ 너도 빨리 따라와. 내가 이찬의 스승이다, 그렇게 자랑할 수 있게.”

“······이기적이시네. 남의 노력을 자기 경력으로 쓰려고 하다니. 뭘 제대로 가르쳐주고 스승이라고 말하시죠?”

“으으응, 좋아. 너 참 부드럽구나? 애기피부······.”

볼에 닿는 하얀 여인의 손길을 느끼며 이찬은 생각했다.

이 모든 게 잠깐일 뿐이겠지만······

참 행복한 잠깐인 것 같다고.

*

이튿날, 아침부터 손 꼭 잡고 나타난 임희재와 이찬을 보며 유호진은 꽤나 당황한 듯 보였다.

“뭐야? 둘이 왜 같이 오냐?”

“어제 제 방에서 재웠거든요. 선배님 일찍 나오셨네요?”

“오전에 해놔야 할 게 좀 있어서······ 아니, 뭐 방에서 재워? 남의 집 애를 네가 왜 재우고 난리야? 납치범이냐?”

“사정이 있었어요. 아침에 전화해서 애는 무사하니까 협상금 가지고 오라고 얘기해뒀구요.”

“그래? 그럼 한 500 정도 받을 수 있으려나.”

누가 배우들 아니랄까봐 금세 대화가 상황극으로 치달았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잘됐다. 내가 낮에 좀 바쁠 것 같은데, 찬이 너 지금 숙제 검사하자. 희재 넌 연습하고.”

“예, 선배님. 우리 아들, 엄마가 응원할 테니까 잘하렴?”

“아, 참 진짜······ 저리 좀 가요.”

“후후후, 얘가 사춘기인가? 후후후.”

끝내 웃으면서 사무실을 나서는 임희재의 뒷모습을 황당한 듯 바라보던 유호진이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에휴, 정상이 아냐. 하기사 요즘 같은 때 연기에 미쳐 있는 녀석이 정상인일 리가 없지. 자, 찬아. 한번 얘기해봐라. 카메라연기와 무대연기의 차이랑, 어제 본 연극의 감상에 대해.”

“······그거 생각해봤는데요, 제가 말로 설명하는 게 좀 자신이 없어요. 무대에서 보여드려도 돼요?”

“무대에서? 너 설마 어제 본 연극 고스란히 따라하겠다 그런 말이라면, 넣어둬라. 네가 그걸 잘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그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연기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려는 거야.”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더 나은 걸 보여드릴게요. 어제 보니까 건달 역이 제일 어색해 보이더라고요. 그거, 제가 생각하는 무대연기에 맞게 더 낫게 해보려고요.”

순간 유호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건달 역 맡은 성재가 체구 빼면 역할에 제대로 어울리지 않는 건 사실이지. 그걸 억지로 맡긴 건 마땅한 배우가 따로 없어서였고. 그런데 그걸······ 발전시키겠다는 건가? 어색하다곤 해도 경력이 3년을 넘긴 배우의 연기를?’

긴 이야기는 필요치 않았다. 유호진은 그대로 이찬을 데리고 임희재가 목을 가다듬고 있는 무대로 나갔다.

“엥? 선배님, 숙제 검사 안 하세요?”

“무대에서 들어보려고. 너도 앉아라. 얘 하는 것 좀 보자.”

그리고 3분 정도가 지난 뒤.

체구와 목소리만을 제외하자면, 두 사람의 앞에는 세상 그 어떤 배우보다도 완벽한 ‘건달’이 서 있었다.

“뭐라구! 내가 그 떠돌이를 죽였을 거라구? 야, 하하! 정말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군. 내가 왜? 내가 주먹 쓰면서 산다구 해서 아주 개차반일 거라구 생각하는 건가? 왜 뭐든 문제만 생기면 다 나한테 지랄이냔 말이야. 이번 기회에 이 골목에서 날 쫓아내겠다는 심보겠지! 안 되지 안 돼. 이 썩을 놈들의 수작에 당할쏘냐. 지들이야말로 이 골목을 더럽히고 있는 버러지인 주제에, 감히 날 모략한다 이거지!”

“······희재야.”

“예, 선배님.”

“네가 가르쳤냐? 건달 역······ 어떻게 보완할지?”

“아뇨, 전혀요. 근데 뭘 놀라고 그러세요? 잊으셨어요, 쟤 천재인 거?”

어제까지만 해도 입술 삐죽이던 임희재가 이미 치마폭 넓은 이찬맘이 되어 있었다. 유호진은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안 되겠네. 좀 시간 들여서 가르쳐볼까 했는데······ 이건 뭐 가르치고 자시고 할 게 없구나. 성량 작은 것만 빼면 완벽했어. 관객 상정한 시선처리에 제스처까지, 완벽해. 당장 무대에 올린다고 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겠어.”

마침내 유호진이 이찬의 무대 데뷔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 3장 - 선배 임희재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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