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1화 (11/250)

< 4장 - 대표 이군영 (2) >

야망에 수반되는 전략적인 지능은 이군영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 능력이 있었기에 바지사장 자리에서 시작해 야금야금 지분과 인맥을 삼켜나갈 수 있었고, 마침내 IMF 파동 속에서 투자자들로부터 경영권을 독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군영이 그저 협잡에만 능한 모리배는 아니었다. 그는 대단한 배우는 아니지만 성공한 배우였다.

25세에 브라운관에 진출해 약 10년간, 무려 9편의 드라마와 21편의 영화에 출연한 다작 배우.

그렇게 10년을 활동하며 연기대상에서 신인상과 조연상, 몇 번의 주연상까지 따낸 전천후 배우.

그런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투자자가 발족시킨 나라엔터테인먼트의 바지사장으로 낙점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근 10년 가까이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하지 않았다곤 하지만 그 경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이군영은 지금도 매니저들보다 자기 자신의 눈을 신뢰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정창영을 향해 질문을 내뱉었다.

“너······ 네가 볼 땐, 쟤가 어떤 것 같냐?”

“음. 발성이 참 좋은데요? 발음도 나이답지 않게 선명해요. 표정 제스처도 깔끔하고. 시선처리도 어색하지 않고요.”

“그리고?”

“어, 영입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그게 다야?”

“어, 예, 대표님.”

멍청한 자식-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며 이군영은 다시 정원으로 눈을 돌렸다. 여전히 소년의 독백이 진행 중이었다.

“자기가 이 모양 이 꼴인 게 모두 어머니 때문이라면서, 한바탕 패고 나서야 곯아떨어지는 거야. 칼로 뜸을 떠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어버렸어. 그러면 어머니는 나를 쥐어박았어. 나만 아니면 벌써 도망가서 다른 놈 만나 잘 살 텐데, 나 때문에 도망을 못 간다고 눈물 콧물까지 짜가면서······.”

연극 <벽과 창> 중 19호의 독백. 실기에서 종종 쓰이는 인기작인 만큼 이군영은 그 대사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독백을 저만큼 완전하게 표현해내는 사람은 단 한 명 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저 녀석은······ 자기 얘길 하고 있다.”

“예? 자기 얘기요? 저거, 있는 대사 아닙니까?”

“있지. 있는 대산데······ 저걸 자기 얘기처럼 말하고 있잖아? 당장 어제 아버지한테 뒤지게 맞고 엉엉 울었던 녀석처럼 말하고 있잖아? 넌 그게 안 느껴지냐?”

“그렇습니까? 정말 가정불화가 있는 집 애일까요?”

“그 소리가 아니잖냐? 제대로 연기를 하고 있단 말이야.”

“그······ 제법 잘하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꼬맹이잖아요? 어쩌다 얻어걸린 거 아닐까요?”

이군영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흔들었다. 선입견에 빠져서 연기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직원에게 실망했기에.

‘보통이 아니다. 그야말로 진짜배기야. 짧은 독백이라서 이 자식은 가볍게 받아들인 모양이지만, 저 연기가 지속적으로 브라운관을 수놓는다면? 그때는 그 어느 누구도 꼬맹이 따위 소리로 폄하할 수 없을 거야. 제2의 강정후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강정후는 천재였다.

한국예술대학교 산하의 영재원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16세에 이미 대단한 표현력을 갖고 있었고, 당시 초빙강사로 방문했던 안정록을 만난 이후로는 그 재능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개화되었다.

안정록은 그 아이를 완성된 배우로 만드는 것을 인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한국 연기사를 재편할 진짜배기 배우로 키워내고 말겠다며 포부를 드러내곤 했다.

그리고 그 소년을 이군영이 낚아챘다.

강정후는 천재인 동시에 최고의 상품이었다. 성년을 한참 앞둔 나이에도 만인을 사로잡는 미모를 뽐냈고, 거기에 더해 마력이 아로새겨진 매력적인 목소리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 소년을 20대가 될 때까지 극단에 가둬두겠다는 안정록을 이군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강정후의 부모와 접촉했다. 각종 미사여구로 그들을 구워삶아, 소년이 자신의 스승을 배신하고 나라엔터의 1호 아역배우로 출격하도록 만들었다.

그 뒤로 강정후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출연하는 드라마와 영화마다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고, CF에서도 전례 없는 판매신장률로 광고주들의 웃음을 끌어냈다. 미디어 관계자 모두가 이 최고의 하이틴스타와 친해지기 위해 애썼다.

단 한 명, 과거의 스승 안정록만이 그와 연을 끊었다.

“네 잘못은 아니다, 정후야. 내가 못난 탓이지. 그래서 보고 싶지 않은 거야. 내 부족함 때문에 찬란한 미래를 잃어버린 신동을 바라보는 게, 내게 너무 뼈저리게 아픈 까닭이다.”

96년도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조우했을 때, 안정록은 그런 말로 강정후를 밀어냈다. 그날 강정후는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고,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벌써 3년도 더 전 일이군. 하여튼 꼴통 새끼. 친아들처럼 따르던 아이가 좀 일찍 유명해졌다고 해서 그렇게 선을 그어버리다니, 성격 참 더럽단 말이지. 제가 아직도 명배우에 대단한 지도자라고 칭송받는 게 다 강정후가 인터뷰마다 이빨 털어주는 덕분인 줄도 모르고. 흥. 그 자식은 저랑 연 끊은 스승이 뭐 좋다고 맨날 안 선생님, 안 선생님······.’

어쨌든 안정록이 연기신동이라 평했던 강정후는 그렇게 나라엔터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고, 이군영은 그 소년의 연기를 처음 봤을 때의 감상을 정원의 소년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그야말로 두 손이 떨려오는 감동을.

그러나 그게 연기자로서의 감동은 아니었다.

‘최고의 상품이다. 저 녀석만 있다면 아역 시장에서도 금양과 프로를 완전히 찍어누를 수 있어. 그렇게만 되면 3강시대를 끝내고 진정한 한국 최고가 될 수 있다.’

그건 결코 설레발이 아니었다. 이군영의 머릿속에선 실질적인 플랜들이 찰나에도 몇 개씩 수립되는 중이었다.

‘저렇게 어려 보이는 녀석이 이미 열일곱 살 강정후가 보여주던 표현력을 갖추고 있어. 저런 아역은 세계적으로 봐도 많지 않을 거다. <가을하늘>에 남자애가 필요하다고 했었지? 조혁수 아역이었나? 그 자리에 들어가면 인지도 늘리는 건 순식간일 거야. 게다가 우리한텐 강정후가 있지. 20세기 최고의 아역 스타였던 그 녀석이. 지금이야 걔 이후로 제대로 된 아역을 발굴하지 못해서 시장에서 밀려나 있을 뿐, 강정후의 진정한 후계자가 나타났다는 카피프레이즈는 오직 내 회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

나이는 차이가 있다. 아무리 봐도 정원의 소년은 15세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이니, 혜성 같은 하이틴스타로서 주연부터 꿰찼던 강정후와는 전략을 달리해야 할 터.

그렇지만 안정록의 제자라는 공통점을 중점적으로 홍보한다면 빠르게 상품성을 제고할 수 있을 터였다.

‘더벅머리에 꾀죄죄한 차림이라 외모는 좀 애매하지만······ 그래도 눈은 예쁘군. 꾸미면 꽤나 볼 만할 거야. 자, 재료는 모두 준비된 셈이다. 문제가 하나 남아 있긴 한데······.’

이군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벤치의 교수를 노려봤다. 이미 한 차례 제자를 빼앗기고, 다시는 개인적으로 배우를 키우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던 옛 동료의 얼굴을.

‘꼴통이긴 하지만 바보는 아니지. 내가 대놓고 접근한다면 분명히 경계할 거야. 아니, 이미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번엔 친권자에게 뒤통수 맞지 않으려고 가족들에게 미리 각서를 받아놨을지도 모르고. 저 아일 낚아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군영의 눈이 더없이 깊어졌다.

*

첫 번째 거리연기는 대성공이었다. 임희재에게서 빌려 재생한 강정후의 <벽과 창> 독백은 이미 완성형이었고, 그걸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이찬은 뭇 학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신수영이 거의 눈물을 흘릴 것처럼 환호했다.

“잘했어, 찬아! 너무 잘했어! 넌 어쩜, 어쩜 진짜!”

“죄송한데 노터치 부탁해요옵······.”

“이렇게 귀여운 꼬마가 어쩜 그렇게 잘할까?”

이찬이 연상의 배우로부터 육탄공세를 당하고 있을 때 안정록이 학생들을 향해 총평을 시작했다.

“오늘은 좀 특별했지? 원래 너희 선배 수영이가 가벼운 TV연기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찬이한테서도 배울 점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부탁했다. 잘 봤니?”

“예!”

“최고였어요!”

“영재원 아이예요?”

“아니다. 찬이는 이미 극단에서 일하고 있어. ‘별빛’이 이번에 올린 <떠돌이의 죽음> 아직 다들 못 봤나?”

“저희 초연 때 갔었는데, 찬이 없었는데요?”

“아, 그래. 다들 보러 가줬구나. 초연 땐 없었어. 지금도 주역을 맡고 있는 건 아니고. 하지만 다음에는 TV나 영화에서 이 아일 볼 수도 있을 거다. 다들 이름 기억해놓으렴.”

“이찬!”

“찬아, 형 얼굴 까먹으면 안 된다?”

소란 속에서 학생들과 한참 인사를 나눈 뒤에야 안정록의 차로 이동할 수 있었다. 당장 연극도 보고 싶다며 적극적으로 따라온 신수영과 함께.

그렇지만 조수석에 올라타서 바라본 안정록의 표정은 어째선지 몹시 어두웠다.

“교수님, 저 별로였어요?”

“아니다. 잘했어.”

“그래요······?”

“······정후 영상을 봤니?”

“아, 예. 희재 누나가 그 사람이 제일 잘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맞는 말이지. 잘했다.”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분위기에 이찬의 볼을 또 만지려던 신수영마저 움찔했다.

“찬아. 너는······ 내가 생각할 때, 너는 이미 완성된 배우다.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완벽해. 이제는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레 익히게 될 몇 가지 표현법들만 소화하고 나면, 존재 자체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될 거야. 그래서 널 당장 무대에 올리겠다는 호진이를 막지 않은 거다. 다른 아역들과는 달리······ 어른의 간섭이 필요치 않은 배우니까.”

“와, 와아! 교수님께서 이런 극찬을?”

“수영이 넌 잠깐만 조용. 그래서 묻고 싶구나. 찬이 넌,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냐?”

“어떤 배우요? 배우에 종류가 있어요?”

“있지. 실력 있는 사람들만 놓고 말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오직 영화만 파고, 어떤 사람은 TV 드라마 위주로 얼굴을 비치지. 또 다른 사람은, 오락 프로그램에도 나가고 팬싸인회도 하면서 자기 인지도를 높이곤 한단다.”

그건 이찬도 어느 정도 아는 얘기였다. 서울역 대합실의 TV가 늘 뉴스 채널만 틀어놓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이 지긋한 여행객들도 연예계 소식에는 꽤 관심을 보이곤 했는데, 그들이 연예정보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쟤가 어떤 영화에 나왔고 어떤 오락 프로그램에 나왔고 하는 이야기를 떠들곤 했었다.

“흠······ 영화랑 드라마는 하고 싶어요. 근데 오락 프로그램은 뭐 하는 거예요?”

“그야말로 이것저것 하지. 코메디언들이나 아나운서들이 진행하는 인터뷰에 우스꽝스런 대답도 해주고, 같이 게임도 하고, 그런 거란다.”

“아하. 연기자 조혁수를 묻는다, 뭐 그런 거요?”

“그래. 인기를 얻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지.”

“그건 하기 싫어요. 난 그냥 배우가 되고 싶은 거니까. 이찬에 대해서 떠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근데 영화랑 드라마는 다 해도 좋을 것 같아요. 나쁜 건 아니죠?”

“······아니지. 당연히 해야지, 암. 하하! 이찬의 연기를, 이찬이 연기하는 배역을, 한 사람이라도 더 볼 수 있게 해야지.”

신이 난 듯 껄껄 웃는 안정록을 보며 이찬은 황당해졌다.

‘왜 저래? 오락 프로그램을 싫어하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옆자리 사람이 웃고 있으니 그의 기분도 꽤나 좋아졌다.

“찬아! 우리 찬이, 진짜 참배우구나? 너무 예뻐!”

거의 조수석으로 건너올 듯 몸을 들이미는 신수영 때문에 금세 불편해지긴 했지만.

*

<떠돌이의 죽음> 17회차 공연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대성황을 기록했다. 신수영이 극장까지 이동하는 동안 전화로 친구들에게 연락을 마구 돌린 까닭이었다.

알 사람은 다 아는 탤런트가 됐음에도 여전히 마당발처럼 친구들을 이끌고 다니는 신수영인지라, 소극장은 주말 공연 이상의 만석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찬은 관객 한 명 한 명을 모두 기억했다. 인간의 동작을 지문판독기 수준으로 구분해내는 천부적인 관찰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연극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와 신수영의 친구들에게 한참 시달린 뒤에 뛰어간 화장실에서 만난 사람을,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안녕, 꼬마야.”

“예의가 없으시네요. 꼬마가 아니라 배우 이찬이에요. 연극도 보셨으면서.”

“······내가 연극 본 사람인 걸 기억하니? 백 명이 넘었는데.”

“기억하죠. 세상에, 깜깜한 객석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아저씨를 어떻게 기억을 못 하겠어요?”

이군영은 당황해서 눈가를 쓸어내렸다. 이미 선글라스는 주머니에 들어가 있다.

‘희한한 꼬맹이군. 그냥 찍어본 건가? 뭐, 어떻든 무관하지.’

이군영에게 소년의 개성과 인격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건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연기력을 선보인 최고의 상품이었다.

“미안하다, 이찬 배우님. 난 기획사 사람이란다. 나라엔터라고 들어봤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배우 기획사야. 거기서 내가 사장직을 맡고 있지. 사장이 뭔지 아니?”

그 말에, 이찬이 흥미롭다는 듯 눈동자를 빛냈다.

< 4장 - 대표 이군영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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