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2화 (12/250)

< 4장 - 대표 이군영 (3.) >

이군영에게 있어서 안정록은 오랜 동료였다.

20세에 처음 만난 이후로 두 사람은 5년 동안 한 극단에서 동고동락했다. 대학로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청년 스타로 함께 유명해져, 20대로선 이례적인 티켓파워로 극단 ‘별빛’을 먹여살렸다.

그렇지만 동시에 안정록은 이군영에게 거대한 벽이었다.

같은 나이, 같은 커리어를 갖고 있었지만, 안정록은 언제나 한 발 앞서서 새 지평을 개척하는 대학로의 모차르트였다. 비범했으나 위대하지 못했던 이군영은, 그를 존경하며 질시하는 살리에리였다.

그렇기에, 연기가 완성되지 않으면 극단을 떠나지 않겠다는 안정록을 피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브라운관으로 진출했다.

그 이후로 승승장구하여 신인상과 남우조연상을 꿰차게 되었다. 덕분에 카메라연기에서는 자신이 안정록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자신감까지 생겨났다.

그렇지만 그것이 착각이었음은 금세 드러났다.

88년 드라마 ‘한 사람’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안정록이 남우주연상 경쟁자로 떠올랐을 때. 모든 사람들은 신인이나 다름없는 그를 이군영보다 훨씬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여론 그대로 남우주연상은 안정록에게 돌아갔다.

이군영은 이후 몇몇 좋은 작품에 출연하며 남우주연상의 한을 풀었지만, 그러는 동안 안정록은 몇 차례나 연기대상을 차지하며 범접할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갔다.

그런 경험들이 이군영으로 하여금 개인의 연기가 아닌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게끔 만들었다.

개인으로서 안 된다면, 집단을 이끌겠다. 최고의 연기자들을 모아 그 수장이 되어, 안정록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존재가 되고야 말겠다.

그런 생각으로 투자자들 앞에서 나이에 안 맞는 재롱까지 부리며 신생 나라엔터의 사장직에 올랐던 것이다.

그 뒤로 오연진, 양원일, 이소연, 차영기와 같은 스타들을 배출하며 나라엔터를 3대기획사 반열에 올려놓았고, 강정후라는 전무후무한 하이틴스타를 발굴해 그 셋 중에서도 우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은 안정록을 이야기했다. 끽해야 2년에 한 작품 정도 찍는 그 한량을 한국 최고의 배우로 꼽으며, 강정후의 성공까지도 안정록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소급하곤 했다.

한국예술대학에선 나라엔터의 수장 이군영보다도 연극원 교수 안정록의 한마디에 더 귀를 기울이곤 했다.

‘빌어먹을 일이지. 내가 직접 가르친 제자가 없는 탓이야. 강정후 그놈한테 기대를 걸었는데, 누굴 닮았는지 고집이 더럽게 세서 남 좋은 일만 시켜주고 말았고.’

안정록의 바래지 않는 명성이 오직 강정후의 지속적인 스승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군영 입장에서는 그 가시적인 양다리가 영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찬을 보는 이군영의 눈은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안정록이 키워낸 비밀병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고작 올해 2월에 처음 만났다니 말이야. 대학까지 데려가는 걸 보면 몇 마디 지도 정도는 해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관계는 아닐 거야. 안정록도 아니면 대체 누구한테 그런 연기력을 사사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아직 꼬맹이다. 지금 이놈을 낚아챌 수만 있다면 이후에 내 제자라고 불러버려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으리라!’

나라엔터의 정보력을 총동원해 급히 조사한 소년의 신원. 이찬은 올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고아였으며, 수원경찰서 강력반 형사 집에 들여져 보호받고 있다고 했다. 안정록과 만난 지는 이제 고작 한 달이었고.

그러니 그야말로 주인 없는 귀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안정록이가 그 형사한테 각서 같은 걸 받아놨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그쪽은 친권자가 아냐. 결정권은 이 꼬맹이의 의사에 달려 있다. 그러니 이 아이를 각종 사탕발림으로 꼬실 수만 있다면, 나는 제2의 강정후······ 아니, 제1의 이찬을 만들어낸 이군영으로서 이름을 떨칠 수 있는 거지.’

당초엔 제2의 강정후 정도로 만족하려 했었다. 최고의 투자대비 수익을 뽑아낼 수 있는 마케팅수단이니까.

하지만 소속 없는 FA라는 점이 확인되자 생각이 좀 더 나아갔다. 자신의 제자로 불릴 이 소년을 무한정의 투자를 통해서 강정후 이상의 스타로 만든다면? 성공한다면 이군영 자신의 명성 역시 안정록을 능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이군영은 소년에게 마치 투자자들을 상대할 때처럼 열성적으로 굴었다. 나라엔터와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며, 어린 나이에 매력을 느낄 법한 각종 당근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이찬의 반응은 놀랍게도 냉랭했다.

“말씀은 잘 알겠어요. 오연진, 양원일, 이소연, 차영기, 강정후가 유명한 배우들이라는 거 알고, 그 사람들을 키워낸 회사라면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제 입장에선 서울에 숙소랑 연습실 마련해주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겠단 얘기도 상당히 솔깃하고 말이죠.”

“음. 자, 찬아. 그냥 숙소가 아니라 최고급 아파트고, 다른 아역들과 다르게 오직 너 혼자만을 위한 매니저팀을 운영하겠다는 얘기야. 어떤 회사에서도 해줄 수 없는 지원이라구.”

“네 네. 그것도 잘 알아요.”

이군영은 속으로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뭘 이렇게 말을 어른스럽게 하는 거야? 정말이지 희한한 꼬맹이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배워온 애들 중에 애늙은이가 많긴 하던데······ 뭐 상관없어. 고아 강동일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는 이제 묻어야 할 과거니까.’

그렇게 생각한 뒤에는 다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이찬을 내려다봤다. 이번 사탕발림이야말로 외롭게 자라난 소년에게 직격탄이 될 거라 확신하며.

“가장 중요한 건, 세상에서 오직 내 회사만이 네게 최고의 가족을 선사해줄 수 있다는 점이다. 마음씨 좋고 능력 있는 매니저들을 네가 직접 고를 수 있게 해줄게. 그래서 그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는 거야. 얼마나 멋지겠니? 정말 최고겠지? 아, 널 보호해주고 있다는 형사 분한테도 원한다면 큰 도움을 드릴 거야. 돈을 드리거나, 위험한 직종에서 은퇴해서 앞으로······ 그래, 보안업체 사장님이 될 수 있게 해주마. 정말로 너한테 고마워하실 거야.”

“그렇게까지 하려면 돈 많이 들지 않아요?”

“뭐가 문제겠니! 나한텐 돈이 많고, 너는 내가 봤던 두 번째- 아니, 최고의 천재야. 뭔들 못 해줄까!”

그 말에 이찬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게 마치 코웃음처럼 보여서 살짝 당황하던 이군영은, 잠시 후에 그럴 리 없다고 웃어버렸고.

물론, 사실은 코웃음이 맞았다.

‘재밌는 아저씨네. 아주 욕심이 많은 사람이야.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냐. 확신은 못하고 있지만 나한테서 상당한 가능성을 본 게 맞고, 지금 말한 모든 지원을 해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게 해서 얻으려는 건······ 돈보다도 명예 쪽인 것 같아. 이미 내 뒷조사까지 마친 걸 보면, 아마 최고의 배우를 키워낸 사람이라는 얘길 듣고 싶은 거겠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통찰력은, 사회생활 경험이 없는 소년의 머리가 진실에 근접한 답을 도출하도록 만들어줬다. 그런 이해 속에서 이찬은 며칠 전을 떠올렸다.

임희재가 나라엔터의 똥구녕을 언급했을 때의 기억을.

‘안정록 아저씨랑 동기였다고 했지. 아주 성격 더럽게 꼬인 인간이라 안 보는 데서는 똥구녕이라고 부른다고. 안정록 아저씨에 대한 질투 때문인지 아주 꼴같잖게 굴곤 하는데, 그래도 극단 배우들을 영화에 꽂아주는 등 도움을 주고 있댔고. 무엇보다······ 이 사람의 나라엔터야말로, 내가 가장 잘 클 수 있는 소속사라고 단언했었단 말이야.’

물론 바로 다음 순간 임희재는 자신의 말을 철회했다.

방금 말한 건 사람을 배제했을 때의 얘기일 뿐이고, 똥구녕 그 자식 한 놈 때문에라도 절대로 나라엔터는 안 된다고. 똥구녕은 이찬을 연기자가 아닌 상품으로 대하면서 뽕을 뽑아먹으려 들 거고,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안정록 선배님께서 다른 좋은 소속사를 찾아주실 거라고.

‘걱정해주는 거니까 고맙긴 한데······ 사실 무의미한 거란 말이지. 배우 이찬은 나한테도 상품일 뿐인데 뭐. 사람들의 지저분한 감정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 내 연기를 판매하는 거야. 집시답게 아주 공정한 거래지. 그러니 날 사람으로 보건 상품으로 보건 그런 건 관심 없어.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결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이면 충분해.’

그런 면에서, 이군영은 꽤나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눈치를 보니 자신을 알게 된 게 오늘인 건 분명한데, 이미 철저하게 뒷조사까지 마치고 나서 손수 화장실까지 따라왔다. 대기업 대표가, 고작 열두 살 꼬맹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그런 철저한 사업가적 기질은 이군영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나라엔터에 대한 신뢰감으로 이어졌다.

‘꼬시는 장소가 좁은 화장실이라는 게 좀 그렇긴 한데······ 그거야 극단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을 거고. 결과적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야. 딱 일만 하고 인간적으로 엮이지 않을 사람이라는 점에서 특히.’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하는 데 약 1초 정도가 걸렸다. 이찬은 마침내 씩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네요, 아저씨. 계약해요.”

“어? 하하하! 아주 좋은 선택이야. 자 보렴. 아저씨가 너를 정말 열심히 지원해주기 위해서, 벌써 계약서까지 써왔어. 원래는 청소년보호법이니 뭐니 해서 보호자한테 받아야 하는데······ 우린 약식으로 하자꾸나. 아, 불법적인 게 아니라 철저하게 너한테 유리한 거야. 왜냐하면, 보호자를 안 끼고 너한테 계약서를 쓰게 한 건 순전히 내 잘못이거든. 그러니까 뭔가 문제가 생기면 모든 걸 다 내가 뒤집어쓰게 된다는 거란다. 그 윤대흥 형사한테 물어봐도 좋아. 지금 전화해볼래?”

이군영의 핸드폰으로 윤대흥에게 전화를 걸 필요는 없었다. 이찬은 이군영의 얼굴을 일별한 것만으로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됐어요, 아저씨. 계약서 내용 마음에 드네요.”

“으, 응? 그걸 다 읽었다고?”

“네. 어려운 부분만 좀 설명해줘요. 이거, 이익금 산정 비율은 5:5로 한다? 이건 뭐예요?”

“어······ 수익이 나오면 그걸 나눈다는 거야. 네가 절반을 갖고, 나머지 절반을 너 도와주는 매니저들 나눠주는 거지. 이거 정말 좋은 조건이란다! 너처럼 경력 없는 아역들은 2:8, 1:9 같은 조건으로도 계약을 못 해서 안달이란 말이야. 연기경험 쌓기 위해서지.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매니저들이 해주는 게 많으니, 그 사람들한테도 월급을 줘야 하는 거야.”

이찬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말 참 잘하네. 매니저들 나눠준다기보단 자기가 거의 꿀꺽 하는 모양인데······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5:5가 좋은 조건이란 얘기는 거짓말 아닌 것 같고.’

이찬의 판단은 사실과 맞닿아 있었다. TV에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비쳐서 인지도를 얻어야 하는 신인들은, 나라엔터 정도의 대형기획사와 계약하기 위해서라면 한참 더 나쁜 조건에도 감사하곤 했다.

“근데 아저씨. 저 거기에 추가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응? 어떤 게 더 필요해? 아까 말했던 조건들이 여기 뒷장에 다 들어가 있다. 여기, 이쪽을 읽어보면, 윤대흥 형사 얘기도 다 써놨어. 을은 갑이 지정하는 인물에게 삼천만원에 상당하는 현물을 지원한다. 이거, 정말 큰 돈이란다.”

“그거 다 봤고요, 하나만 추가했으면 좋겠어요. 딴 건 아니고······ 오락 프로그램은 출연 안 한다. 그것만 써줘요.”

“어? 오락 프로그램이 싫으니?”

“네. 전 최고의 배우가 될 거예요. 다른 일에 시간 뺏기기 싫어요. 괜찮죠?”

“괜찮지! 요즘은 또 신비주의라고 해서, 연기만 잘한다면 오히려 대중적인 프로그램엔 안 나가는 게 더 이득일 수 있어.”

그 말이 이군영의 지론은 아니었지만, 이찬이 말한 최고의 배우라는 말은 이군영의 야망과 맞닿았다. 다른 상품들과 달리 이 소년만큼은 연기만 파게 해도 무방했다.

‘오히려 애늙은이 소년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이미지에 해가 될지도 모르지. 가만히 있으면 귀여운 천재소년인데, 어째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내가 키 작은 어른과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도대체가 알 수가 없는 녀석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민활하게 움직여, 이내 계약서 끄트머리에 새로운 조항을 추가해냈다.

“좋아. 여기, 다 썼다. 어때? 확실하지? 이제 여기에 네 지장만 찍으면 돼. 그러면 계약 완성이다. 이후에 네 주변 사람들이······ 이런 건 더 잘 알아보고 계약해야 된다, 미성년자랑 계약한 거니까 사기다, 무효다, 그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신경 쓰면 안 돼. 너한테 이만큼 좋은 조건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그러니까 나랑 바로 아파트를 보러 가자. 네 매니저들도 고르고 말이야.”

“어휴, 납치를 하실 기세네. 그러실 거 없어요. 안정록 아저씨 때문에 하는 말이죠? 걱정 마요. 그 아저씨도 내가 설득할 수 있으니까.”

“어······ 어?”

“두 분 사이 안 좋다면서요? 근데 괜찮아요. 그 아저씨가 내 아빠는 아니니까. 애초부터 회사는 내가 선택하려고 했어요.”

“그, 그······ 그래. 그렇구나. 아주, 잘 생각했다.”

이군영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대화의 상대방이 열두 살 꼬마라는 생물학적 사실을 배제하고 본다면, 전개되는 대화가 무척 긍정적인 흐름인 건 명백했으니까.

“계약서 사본은 내일 네가 회사로 나오면 그때 주마. 그럼, 이제, 어······ 수원 집으로 갈 거니? 아저씨가 데려다줄까?”

“됐어요. 극단 사람들이랑 작별인사는 해야죠. 형······이 데리러 오고 있기도 하고요.”

“어, 그렇구나. 그렇담 방해할 수 없지.”

“내일 수원 집으로 데리러 오세요. 설마 첫 출근을 대중교통으로 해야 되는 건 아니죠?”

“어? 아, 아니지. 내가 바로 매니저 차를 보내줄 거다. 몇 시쯤이 괜찮니? 아침에 가도 되겠어?”

“네. 10시쯤 출발하게 해주세요. 아파트랑 매니저들 리스트도 준비해주시고요.”

“그래······ 알겠다. 참, 어린데도 아주 똑부러졌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 앞으로 같이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하하.”

그렇게 말하고 떠나가면서도 이군영은 연신 뒤를 돌아봤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다는 생각을 무심결에 떠올리면서.

이찬은 그의 뒷모습 대신 창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끝낼 때가 됐지. 따뜻하고 포근한 날은, 딱 여기까지.’

아이답지 않은 한숨이, 그 생각의 뒤를 이었다.

< 4장 - 대표 이군영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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