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 실장 정창영 (1) >
“저보고 맡으라고요? 그 꼬마를요?”
당황스러운 얘길 들었기에, 정창영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태도에 이군영의 얼굴도 찌푸려졌다.
“왜? 문제 있냐?”
“아이고······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제가 좀 바쁘잖습니까? 원일이 형 곧 작품 들어갈 텐데, 보모 역할까지 하는 건 좀.”
“보모 같은 소리 하네. 로드 하나 더 붙여줄 거야.”
“어쨌든 제가 책임자가 되는 거 아닙니까. 대표님, 우리 아역은 신인개발팀에서 맡는 게 원칙 아니었습니까?”
“보통 아역이면 그렇게 할 건데, 보통이 아니라서 그래.”
“보통이 아니라고요?”
“천재란 말이다. 제2의 강정후가 될 녀석이야. 실장 하나 정도는 전담으로 붙여줘야 될 거 아니냐. 그 뭐냐, 태스크포스 같은 거라고 생각해라. 잘되면 팀장까지 올려줄 테니까.”
딴에는 친절하게 당근을 안겨주려는 눈치긴 한데, 정창영이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해당했다.
‘세상에. 연기 경력도 별로 없는 꼬맹이를 전담으로 맡으라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야? 원일이 형 데리고 다니면서 기세등등하던 내가 갑자기 보모라니. 아역 데리고 방송국 드나들었다간 매니저들이고 스탭들이고 다 날 무시할 텐데.’
매니저의 위신은 직급이 아닌 담당 배우가 만들어내는 것. 양원일이라는 톱스타의 실장에서 소년 이찬의 팀장으로 승진하는 건, 영전이 아닌 좌천에 해당할 터였다.
“대표님, 저 좀 봐주십쇼.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뭐? 뭔 소릴 지껄이는 거야?”
“그니까······ 애들 야식 시켜먹는 거 눈감아줬던 거요. 그거랑, 원일이 형 여가수랑 호텔 가는 거 못 막은 거요. 제가 진짜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더 열심히 관리할게요······.”
“이 자식이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있네. 야, 멍청한 새끼야. 너 지금 줄 제대로 잡은 거야. 새끼가 영전을 시켜주려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거기까지 듣고 나자 정창영도 살짝 의아한 심정이 됐다.
“저기, 그러니까, 그 꼬마가 원일이 형보다도 더 중요한 배우가 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인마. 제2의 강정후라고 한 거 농담 아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제1의 이찬으로 만들 거야. 한국 최고의 배우로 키울 거라고.”
“어······ 안정록 선생님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왜? 나라고 그런 말 못 하란 법 있냐? 나도 연기자다.”
“알죠, 대표님. 근데······ 그만큼 큰 가능성을 보신 거예요?”
“넌 안정록이가 걔 옆에 찰싹 붙어있던 거 봤으면서, 상황파악이 그렇게 안 되냐? 강정후 뺏기고 제자 안 키우겠다고 했던 그 인간이 눈독 들인 놈이야. 그만큼 대단한 자질을 갖고 있다는 거지. 걔를 내가 전폭적으로 지원해서 키울 거고, 그 치프매니저를 네가 맡는 거다. 절 안 하냐?”
절 대신 어색하게 헤헤 웃어 보인 뒤에, 정창영은 머릿속으로 염두를 굴렸다.
‘정말 그 말대로만 되면 이게 꽤 행운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원일이 형이야 이미 잘나가고 있을 때부터 맡은 거라 내 공이라고 말하기 뭐한데, 열두 살 아역을 데리고 다니면서 스타로 만든다면 내 이름값도 꽤 높아지겠지. 나이가 어리니까 스타가 된다 해도 내 공로를 오랫동안 기억할 거고, 나중에 회사에서 독립할 때 데리고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아직 모를 일이지만, 생각하고 보니 상당히 구미가 당겼다.
“어······ 대표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분골쇄신을 해보겠습니다.”
“그래야지. 평생의 은혜라는 걸 곧 알게 될 거다.”
“헤헤. 대표님, 그런데 여쭤볼 게 있습니다. 왜 접니까? 저는 아역 케어는 해본 적이 없는데요.”
“야, 내가 널 왜 계속 데리고 있는 것 같냐?”
“음······ 제 입으로 일 잘한다고 답하긴 좀 민망한데요.”
“일도 나무랄 데 없이 하긴 하는데, 그거라면 너보다 더 똑똑하고 빠릿한 놈들 많아. 근데 넌 애가 싹싹하잖냐. 나한테도 그러지만 배우들한테도 언제나 납작납작 하지. 단지 돈 때문에 못 그만두는 게 아니라, 원래 애가 하도 긍정적이라서 욕먹고 뺨 맞고 하더라도 끝까지 비위 맞춰주는 거고. 그런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란 말이야.”
분명히 칭찬을 듣고 있는데도 어째선지 가슴이 아파진 정창영은, 울상을 지으며 짧게 대꾸했다.
“예에. 제가 한 납작 하지요.”
“그게 중요한 포인트야. 그 꼬맹이, 속에 능구렁이가 여러 마리 들어 있더라. 어지간한 어른들 찜쪄먹을 것처럼 머리 회전이 빨라. 그래봤자 꼬맹이긴 해도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줘야 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네가 제격이란 거야.”
“아······ 그 아이한테 정말 신경을 많이 쓰시네요?”
“당연하지. 나 이군영이의 1호 제자다. 그러니까 제일 믿는 놈한테 맡기고 싶은 거야. 그리고- 아 씨발, 벌써 아홉 시 넘었네. 야, 빨리 출발해라. 내 차로 가고, 여기가 주소. 미리 얘기하는데 걔한테 충심으로 잘보여야 된다? 걔가 직접 매니저 고를 거니까 말이야. 혹시라도 꼬투리 잡혀서 걔가 다른 놈 선택하면, 팀장이고 뭐고 너 모가지야. 알간?”
“아,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차량에 올라타 수원으로 향하는 내내, 정창영은 고민했다.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 녀석일까? 내가 봐도 열두 살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연기를 잘하긴 했는데, 그래도 애기잖아? 그게 실력인지 뽀록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인데. 이거 대표님한테도 나한테도 상당한 도박수가 되겠는걸. 그 녀석이 터져주면 우리 모두 해피해지는 거고, 아니면······ 대표님은 몰라도 나는 완전히 쪽박 차게 되겠군. 그렇다고 일부러 밉보였다간 똥구녕한테 완전히 찍힐 테니, 그럴 수도 없고.’
속으로나마 대표를 똥구녕이라 부르며 킥킥대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군영이 말한 대로 참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
윤대흥은 몇 차례나 이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렸다 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어물쩍거리는 모습에 소년의 입가가 절로 길어졌다.
“아저······ 형. 좀 그러지 좀 마요. 동생이 잘돼서 독립한다는데 표정이 왜 그런대?”
“아, 휴. 으으. 넌 정말이지 괴짜 같은 녀석이다. 그야, 믿을 만한 회사에서 아파트까지 마련해준다는 거니까 나도 기쁘기는 하다만,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혼자 생활을 하겠다고.”
“혼자가 아니라 매니저들이 돌봐준다고 했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인석아. 그 사람들이 네 가족도 아닌데, 어떻게 생활을 일일이 챙겨줄 수 있겠니.”
“그렇게 따지자면 형도 가족은 아닌데요?”
그 말에 윤대흥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 것은, 총명한 이찬조차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 아니, 형이 남 같다는 게 아니라, 그런 뜻은 아니고요. 그냥 저는 원래 가족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형은 또 형사라서 워낙 바쁘기도 하고요.”
“그렇지. 무슨 말인지 안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그런 거 아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표정은 어두웠다. 이찬은 아직 채 다 못 얼린 눈으로 그의 마음을 바라봤다.
‘나랑 헤어지는 게 아쉬운 거겠지. 마치 친아들처럼 잘해주려고 애썼는데, 그 마음이 내게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아서 슬프기도 할 거고.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나는 집시니까. 언제까지나 신세만 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 결론에 따라 이찬은 애써 쾌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형, 아무튼 삼천만원은 받아요. 그간 돌봐준 값이니까.”
“······필요 없다. 내가 그걸 왜 받니.”
“받으시라니까요. 그럼 그걸 누굴 주겠어요.”
“네가 가지면 되잖니. 보호자도 없는데, 돈이라도 있어야지.”
“에이, 무슨 섭섭한 소릴. 똥······ 아니, 이군영 그 아저씨가 무슨 자선사업가라고 돈을 막 주겠어요? 자 봐요. 적어도 몇 년 안에 그 이상으로 회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한테 아파트도 사주고 현금도 주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담 적어도 그것보다 열 배는 더 벌어들일 거고, 그중에서 절반이 나한테 들어오게 된다고요. 아마 성인 되기 전에 내가 형보다 더 부자 될걸? 그때쯤엔 나한테 삼천만원은 돈도 아닐 거예요. 근데 형은 아니잖아요. 그 돈이면, 일 그만두고 편하게 살 수 있잖아요.”
“······어휴. 정말이지 머리는 무지하게 좋아서는.”
그렇게 혀를 내두르면서도 윤대흥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싫다. 돈 같은 걸 바라고 너 들인 거 아니야. 네가 나중에, 좋은 작품으로 TV나 영화에 나오게 되면, 그거면 나는 만족한다.”
“아, 고집쟁이. 알았어요. 그 얘긴 다음에 다시 해요. 경찰서 종종 들를 테니까.”
평행선을 달릴 게 뻔한 대화를 이찬은 길게 이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소년은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윤대흥의 투박하고 커다란 왼손을 쥐었다.
“고마웠어요. 진짜로요. 내가 배우로 성공하게 되면 그건 다 형 덕분인 거예요.”
“······네가 잘난 덕이지 뭘.”
“그게 크긴 하지만요.”
“하핫. 요 맹랑한 녀석.”
“아무튼 형한테 고마운 건 진짜예요. 그러니까 슬퍼하지 말아요. 나 드라마나 영화 나오면 동료들한테 자랑도 많이 하시고요. 쟤를 내가 키웠어, 그렇게 말해도 괜찮아요.”
“참, 아주 말은 청산유수······ 음.”
대화 중에 단칸방의 벨이 울렸다. 비번인 형사를 따로 방문할 만한 사람은 없으니, 필시 나라엔터 쪽 사람일 터였다.
두 사람은 손을 쥔 채로 현관으로 나섰다. 만면에 미소를 띤 정창영이 연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윤대흥 형사님 맞으시죠? 그리고 우리 기대주, 이찬 배우님? 하하하, 반가워 반가워. 나는 정창영이라고 한다. 우리 회사 창립 때부터 일해왔고, 지금은 실장으로 있고. 자, 형사님. 이게 제 명함입니다.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 그리고 삼천만원 입금은-”
“그건 필요 없습니다.”
“예? 어, 하지만 그게-”
“됐어요, 실장님. 제가 나중에 설득할 거예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고개 갸웃거리는 정창영을 세워둔 채로, 이찬은 윤대흥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또 봐요, 형. 몸 좀 사리시고요. 나중에 경찰서 갔는데 범인한테 칼 맞아서 다쳤다는 얘기 또 들리기만 해봐.”
“······형사가 칼 좀 맞을 수도 있지. 당연한 거야.”
“아무튼 그런 얘기 들리면 내가 병원 찾아가서 또 칼침 놓아줄 테니까, 알아서 해요. 가요, 실장님. 날이 아직 춥네요.”
칭얼거리는 아이 같은 이찬의 말에 씩 웃은 정창영이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그 모양을 끝까지 지켜본 뒤, 윤대흥은 이찬의 손에 쪽지를 쥐어줬다.
“내 전화번호랑 동료 형사들 번호랑······ 다 적어놨다. 극단장이 거짓말은 안 치는 대표라고 하긴 했지만, 세상 일 모르는 거야. 혹시라도 문제 생길 것 같으면 바로 연락해라.”
“네 네. 들어가요, 형. 갈게요.”
이찬은 작은 미소를 남기고 차에 올랐다. 그 뒤로는 창밖을 바라보지도 않고 정면만을 쳐다봤다.
“자, 출발하겠습니다, 배우님. 아이고, 안전벨트도 잘 차네.”
“실장님. 조용히 가죠.”
“어, 응?”
“생각할 게 좀 있으니까 말 걸지 마시라고요.”
“어······ 어. 그, 그럴게.”
윤대흥과 함께 있을 때와는 터무니없이 달라진 태도에 정창영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게 참, 뭐 이렇게 확 바뀌나? 요즘 애들이 다 이런가? 아, 대표님이 능구렁이 잡아먹은 꼬맹이라고 했었지. 친해지는 작업은 좀 이따 해야 되겠다. 원래 어리고 능력 있을수록 자기 의견 존중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생각했기에 정창영은 입을 닫고 운전에 집중했다.
그리고, 서울 사옥에 도착할 때까지 그가 친해지는 작업에 성공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찬은 단 한 순간도 표정을 풀지 않았고, 정창영이 말만 걸라치면 고개를 젓곤 했다.
‘도대체 무슨 애가 이런담? 고아였으면 외로움에 아주 사무쳤을 텐데 말이야. 잘해주는 사람한테 기대기도 하고 어리광도 피우는 게 당연한데, 나한텐 전혀 그럴 기미가 없으니 원.’
그렇지만 정창영은 뒷일을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꼬맹이가 한 말을 끝까지 지켜준 어른이니, 아마 그런 면에서 점수를 딸 수는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런 그의 생각대로, 이군영과 마주한 이찬은 담당 매니저로 정창영을 지목했다.
다만 그 내용만큼은 상당히 의외였다.
“정 실장님으로 할게요. 처음부터 저한테 붙이려고 보내신 사람이죠?”
“응? 어이고. 창영이가 그런 이상한 소릴 했어?”
“아뇨, 실장님이 말한 게 아니라 상황이 그렇잖아요. 실장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회사 만들 때부터 일한 사람을 운전기사로 보낸다는 게요. 당연히 무슨 생각이 있으셨던 거겠지. 전 괜찮아요. 비싼 돈 주고 데려온 꼬맹이한테 감시역 붙이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
“어, 허허허! 아이고, 이 재밌는 녀석 같으니. 네가 드라마를 참 많이 본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런 거 아니다. 감시역이라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제일 일 잘하는 내 오른팔이야.”
“네 네, 그런 걸로 해요.”
정창영은 그제야 자기 대표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열두 살 꼬맹이 주제에, 어른들이나 할 법한 생각을 하고 있어. 보통은 생각 많은 아이들이라고 해도 저 나이엔 표면적인 것에만 집중하게 마련인데 말이지. 그런 면에서 좀 불편할 것 같긴 하지만······ 이거 어쩌면 정말 대단한 배우를 맡게 된 걸지도 모르겠는데?’
윤대흥을 대할 때와 자신을 대할 때 보인 이찬의 180도 변신은, 결코 아이의 치기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냉랭한 태도가 차 안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런 게 가능한 열두 살이라면, 연기 면에서도 분명 다른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를 터였다.
‘잘하면······ 정말 평생의 은혜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정창영의 입가에 진심어린 미소가 피어났다.
< 5장 - 실장 정창영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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