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4화 (14/250)

< 5장 - 실장 정창영 (2) >

이찬은 정창영에 이어서 다섯 명의 여자 매니저들 가운데에서 가장 젊은 신입을 선택했다.

“이분으로 할게요. 염수진 씨요.”

“아, 수진이. 학벌이 좋은 친구지. 성격도 좋고 말이야.”

그렇게 답하면서 이군영은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예상했던 대로야. 이 요망한 꼬맹이가 자기한테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한 사람을 고른 거다. 콧대 높은 꼬맹이들의 전형적인 전략이지.’

다른 사람들이라면 열두 살 꼬마니까 그나마 나이차가 덜 나는 젊은 여성을 골랐겠거니 생각했겠지만, 이군영은 달랐다. 그야말로 천재 소년 강정후를 서포트해 스타로 키워낸 인물이었기에.

‘정후 그 녀석도 매니저한테 간섭받는 걸 정말 싫어했지. 경력이 없을 때조차도 작품 선택에 있어선 아주 까다로웠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걜 맡은 신입들이 앓는 소리를 한 번도 안 했던 건, 그 녀석이 누가 봐도 스타가 될 게 분명한 보석이었기에 그랬던 거야. 뭐 고집불통인 것만 빼면 인격적으로 모난 데가 없기도 했고 말이지. 하지만 이 꼬맹이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면이 있으니까, 염수진한테는 미리 말을 해놔야겠군.’

스물네 살의 신입 매니저는 물론 베스트 플랜이 아니었다.

아역에게는 본인의 연기력도 연기력이지만 임기응변을 도와줄 노련한 조력자들이 절실하다. 그렇기에 이군영은 기왕이면 염수진보다는 더 나이 있는 준실장급 매니저들이 선택받길 바랐다.

‘······하지만 염수진도 나쁘진 않아. 어차피 창영이가 항시 옆에 붙어 있을 테니까. 염수진의 장점은 이 꼬맹이에게 친구 같은 엄마가 돼줄 수 있다는 점이지. 고등학생 때 로맨스 소설을 쓰곤 했다지? 그렇게 감상적인 성격인데다 대가족 출신이기까지 하니, 냉막한 꼬맹이한테 아주 직격탄이 될 거야.’

그런 점에서는 정창영 역시 비슷한 인선이었다.

당사자에게는 납작 엎드리는 붙임성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군영이 그를 선택한 건 좀 더 극적인 이유. 금세 성격 버리곤 하는 매니저 업계에서 그나마 마음씨가 고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꼬마들도 알 건 다 안단 말이지. 실력파 매니저들에게 억지로 잘해주라고 시킨들, 진짜 아빠 엄마처럼 느끼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창영이와 염수진이라면 다르다. 애초에 혹시나 아역 꼬드길 일 생기면 써먹으려고 데리고 있던 애들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이군영은 이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온화하게 웃으면서.

물론 효과는 없었다. 이찬은 이미 그의 콧구멍이 씰룩거리는 미세표현을 통해서 그 작위적인 감정표현을 읽고 있었다.

“나라엔터테인먼트에 온 걸 환영한다, 찬아. 앞으로 함께 잘해보자. 내가 널 한국에서 가장 대단한 배우로 만들어줄게.”

“네, 고마워요.”

딱딱하게 답한 소년이 등받이에서 작은 등을 떼어냈다.

“그럼 이제부터 일 시작하죠. 뭐 해야 돼요?”

“응? 그러지 말고 아파트부터 먼저 살펴보지 그러니? 공실이 여러 개가 있어서 네가 마음대로 고를 수······ 아니 잠깐. 짐은 어디 있어? 창영아, 트렁크에 싣고 왔냐?”

“앗! 제가, 깜빡······.”

당황해서 입을 틀어막는 정창영과 달리 소년은 태평했다.

“짐이 뭐 있겠어요. 이 가방이 다예요.”

“어, 그 가방에 뭐가 좀 들었니? 작아 보이는데.”

“옷이요. 필요 없다는데도 형이 이것저것 사줘서. 제 사정 다 아시잖아요? 원래 집 없이 살고 있었던 거.”

“어······ 그렇지. 그렇게 듣긴 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정창영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찬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집은 안 가봐도 돼요. 아저씨가 적당한 데로 골라주세요. 오늘 밤부터 들어갈 수 있게요.”

“흠. 그래도 궁금하지 않니? 앞으로 살 집인데.”

“별로요. 한국에서 가장 대단한 배우 되려면, 어차피 집에 오래 있기 힘들 거 아녜요? 연기 레슨도 받고 오디션도 받으러 가고 바빠질 거잖아요?”

“그야 그렇긴 하지. 흐음. 그러면 아저씨가 제일 좋은 집을 골라서 꾸며놓으마. 그래, 수진이를 먼저 보내야겠다. 역시 집은 여자 손이 닿아야지. 법인카드를 주고 원하는 걸 뭐든 사서 예쁜 집안을 만들라고 시켜야겠어.”

손뼉이라도 칠 것처럼 웃으며 이군영은 생각했다.

‘지금이야 이렇게 아이다운 모습이 하나도 없는 미운 꼬맹이지만, 이것도 잠깐일 거다. 아닌 척 연기해봤자 얼마나 오래 가겠어? 외로움에 사무친 고아 주제에. 조만간 창영이랑 염수진한테 푹 빠져서 어리광도 부리고 울기도 하고 그럴 거야. 그때까지 플랜에 맞게 상품가치 키워놓기만 하면 된다.’

그런 대표이사의 생각을 이찬은 금세 꿰뚫었다. 소년의 세 배 넘는 시간을 살아왔다곤 해도, 이군영은 이찬의 기형적인 관찰력을 속일 수 있는 연기자가 못 되었다.

‘아주 엄마 행세를 시키려는 모양이네. 정창영 실장이랑 염수진 씨를 내 옆에 딱 붙여서 내가 그 사람들을 좋아하게 만든 다음에, 날 나라엔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고 싶은 모양이야. 하지만 그럴 일은 없어. 이쪽 사람들은 계약관계일 뿐이니까. 날 믿고 칼도 맞아준 형사님이 아닌 이상에는, 내가 다시 누군가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을 거야.’

상반된 생각을 품은 두 사람이지만 어쨌든 한 가지 목표만큼은 분명히 일치했다. 이찬이라는 배우를 한국 최고로 만들겠다는 것.

그렇기에 이후의 작업은 일사천리였다.

“자, 꾸며놓고 보니 아주 예쁘구나. 역시 남자애들은 2:8이 잘 어울려. 강정후 데뷔 때도 딱 이 느낌이었잖냐?”

“그렇습니다, 대표님. 찬이도 참 잘 어울리네요.”

“그렇지. 의상은 준비됐냐?”

“예. 차에 다 실어놨습니다.”

“그럼 지금 스튜디오에 연락해라, 촬영 준비하라고. 너희 프로필 찍는 동안 난 작감이랑 약속을 잡아둘 테니까 말이야.”

작감이란 메인작가와 메인PD를 일컫는 줄임말. 드라마 제작의 핵심적인 인물들인 만큼, 주연급 캐스팅이 아닌 이상 그들을 직접 만나서 배역을 이야기하는 일은 드물다.

그렇지만 배우업계의 3대기획사인 나라엔터의 수장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이군영은 공중파 방송사의 드라마 작감을 당일에 불러낼 수 있는 파워를 갖고 있었다.

거기다 그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나라엔터의 이소연이기까지 하다면, 부르자마자 달려올 게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자, 찬아. 이게 시놉이야. 네 데뷔작으로 점찍어놓은 건데, 제목은 <가을하늘>이고······ 시놉 읽는 법은 아니?”

“대충은요. 극단 분한테 배웠어요.”

“아, 그래. 그 녀석들이 웬일로 좋은 일을 했구만.”

일반적으로 극단 소속의 배우들은 TV드라마를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입에게 드라마 제작환경을 가르치는 일은 과거에도 거의 없었고, 모델 출신 배우들이 전격적으로 브라운관을 수놓기 시작한 뒤에는 그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연극.

소극장에서 기본적인 연기력을 기른 뒤에야 영화나 드라마 진출을 타진해보는 거지, 어려서부터 헛물 들어 대중매체만 쫓아다녀선 안 된다는 게 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그건 연극계에서 이군영이 존중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TV 쪽으로 길이 뚫린 뒤로는 대학로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안정록과 유호진이 이찬에게 드라마 대본은 구경도 시켜주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던 이군영은, 소년이 능숙하게 시놉시스를 살피는 모습에 꽤 당황했다.

“되게 빨리 읽는구나. 너 학교도 안 다녔다고 하지 않았니?”

“그만두긴 했는데, 한글은 뗐어요. 길거리 생활 하면서 소일거리라곤 무가지 읽어보는 것 정도였고요.”

“어린애가 무슨 신문을······.”

“조간신문은 재미없어서 잘 안 봤고요, 흥미로운 거 위주로 봤죠. 근데 대본은 꽤 읽는 맛이 있더라고요. 희재 누나가 빌려줘서 다섯 개 읽어본 거긴 하지만······ 근데 이거 재밌네요.”

“재밌어? 어떤 부분이?”

이찬은 어느덧 끝까지 다 훑은 시놉시스 열세 페이지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출생의 비밀이란 거요. 병원에서 애가 바뀌어서 수준 차 나는 집안에서 살게 됐다니, 웃겨요. 이런 일이 진짜 있어요?”

“글쎄. 그 시기면 아주 없는 일은 아니었겠지. 요즘처럼 전자적으로 환자를 관리하는 시대가 아니니까 말이야. 어찌됐든 드라마라는 건 있는 얘기가 아니라 있을 법한 얘기를 떠드는 거란다. 거기다 대중이란 원래 독특한 소재에 열광하는 법이거든. 그래서 해가 갈수록 드라마 작가들이 해괴한 것들에 집착을 하는 거야. 이제는 숫제 초능력 같은 것까지 나올 기세니까, 출생의 비밀 같은 건 우습지도 않지.”

이군영 입장에선 별 생각 없이 지론을 늘어놓은 거였지만, 그 말을 들은 이찬의 심정은 복잡해졌다.

‘그런 거라면 대중들은 내 얘길 참 좋아하겠군. 부모 얼굴도 기억 못 할 나이에 버려져서, 사람 얼굴만 보면 하고 있는 생각이 들여다보이는 꼬맹이. 혹시 내 얘기를 드라마로 쓴다면 시청률 50%도 쉽게 나오지 않을까?’

스스로의 생각에 절로 코웃음이 났다. 이찬은 시놉시스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가 맡을 배역은 남자 주인공 아역이겠네요.”

“흐음. 처음부터 주인공 아역으로? 원래 아역들은 처음엔 비중 없는 연기를 맡는 건데. 네가 그걸 잘할 수 있겠어?”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비중 없는 조연 시키려고 하는 거면 작감을 왜 부르시는데요?”

살짝 놀려주려던 의도가 무산되었다. 이군영은 인상을 구기지 않으려 애쓰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래. 우리 찬이 똑똑하기도 하구나. 아무튼 아주 좋은 작품이란다. 남자 주인공에 이미 조혁수가 들어가서 열린 전작제로 촬영 진행 중이란 말이야. 편성도 당연히 황금시간대로 갈 거고, 방송국에서도 홍보를 충실하게 해줄 게 분명해. 그래서 성인 배역은 이미 다 확정이 돼 있는데, 다행히도 방영 직전에 상황 봐서 초치기 할 생각으로 아역 파트를 뒤로 빼놨다는 거다. 그러다보니 지금 다른 기획사들도 이 배역에 자기 아역들 보내려고 혈안이 돼 있는 거야. 그 경쟁을 뚫어야 된다. 그래서 작감하고 첫 번째 미팅이 아주 중요해. 넌 이제부터 시놉을 완전히 암기해야 된단다.”

열린 전작제니 초치기니 하는 업계 용어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찬은 이군영이 <가을하늘>의 성공 가능성을 몹시 높게 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찬은 이미 자신이 시놉시스를 완전히 이해했음을 알고 있었다.

“알았어요. 공연 끝나고 미팅 하면 되겠네요.”

“응? 공연?”

“극단 공연이요. 오늘 주말이잖아요.”

단호한 소년의 말에 이군영의 표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아, 이 자식이 아직도 극단에 나갈 셈인가? 그딴 소극장 연극 나가봤자 아무 도움 안 되는데. 어제 확실히 얘기를 해둘 걸 그랬구만. 하지만······ 일단 나가는 걸로 돼 있다면 갑자기 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 꼬맹이가 기분 상할 테니까. 일단 이번 작 내릴 때까지는 거기서 연습 시킨다고 생각할까.’

그렇게 엇갈린 이해관계 속에서, 이찬의 프로필 촬영이 시작됐다.

*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게 누구야? 우리 찬이, 아주 몰라보게 달라졌네!”

소년을 향해 웃으며 달려오는 건 공식 이찬맘 임희재뿐. 그녀 외의 배우들은 영 불편한 표정으로 삐죽거렸다.

극단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대형기획사에 불려갔다는 소년이 보기 얄미운 까닭이었다.

극장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선배들 밑에 있다 해도 그들 역시 꿈 많은 청년들. 자기보다 앞서나가는 아이에겐 질투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가 아주 부잣집 소년이 됐네. 그래서 철수 역 하겠냐?”

“어제 단장님이 가발 쓰면 된다고 했는데.”

“······허접하기만 해봐라. 극 망치면 혼쭐 날 줄 알아.”

그렇게 으름장 놓기는 했지만, 정말 소년이 극을 망칠까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십여 차례의 공연을 통해서 이찬이 나이답지 않은 원숙한 연기자라는 것을 확인했기에. 다만 선배로서 뭐라도 한 소리 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신입 임희재만이 동떨어져 있었다.

“찬아, 찬아! 회사는 어땠어? 똥구······ 흠 흠.”

자신의 눈치를 보며 말 줄이는 미모의 여자에게, 정창영은 어색한 웃음으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티를 냈다.

“······어흠. 이군영 대표가 불편하게 굴진 않았어?”

“별로요. 어제 말했잖아요? 절 되게 좋게 봤다고.”

“그야 단장님도 그럴 만하다고 하셨으니까 알긴 알겠는데, 그래도 사람 속 모르는 거야. 늘 조심하란 말이야. 선배님 말씀을 항상, 이 머릿속에 담고 있으라고. 알겠어?”

그러면서 따뜻한 손길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젤을 발라놓아 끈적거릴 텐데도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근데 누나. 저 곧 드라마 들어갈 것 같은데요.”

“뭐? 정말? 오늘 계약했는데? 그게 말이 되나?”

“워낙 실력이 출중해서요.”

“뭐어? 이 자식이, 그게 다 이 선배님이 친절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준 덕분인 줄을 모르고. 내가 어려운 단어들 다 설명해줬으니까 네가 이제 대본 볼 수 있게 된 거잖아?”

“그렇긴 한데, 아무튼 나 이제 곧 데뷔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TV 쪽에선 내가 선배님 되는 거 아닌가?”

“으, 응?”

“연극도 같은 작품으로 데뷔했고, 드라마는 내가 먼저 데뷔하고. 그러면 내가 선배잖아요? 왜 자꾸 선배님이래?”

“이, 이 자식이? 그런, 그런 계산법이 어딨니? 어디까지나, 내가 먼저 하던 작품에, 네가 3회 공연부터 들어온 건데!”

선후배를 따지며 싸우는 동안의 숙녀와 키만 큰 소년.

이찬의 매니저 자격으로 객석에 앉은 채, 정창영은 그들이 하는 양을 유심히 지켜봤다.

< 5장 - 실장 정창영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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