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장 - 아역 명진아 (1) >
아역들만이 모이는 회식이란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청소년드라마가 아닌 이상 아역은 작품 내에서 감초 역할일 뿐이기에, 설혹 아역끼리 모이는 자리를 만든다 해봤자 작품이해를 위한 대본리딩인 경우가 많았다.
어린이드라마 주조연까지 맡아봤던 명진아 역시 그 뜬금없는 회식 소집에 꽤나 당황했다.
“어, 오빠,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거예요?”
“자주는 아니지. 나도 매니저 생활 하면서 처음인데······ 근데 심 PD 그분 성격이 좀 괴짜 같은 편이야. 이번에 작품 초반부터 아역 씬이 많으니까, 낯가리지 말고 서로 빨리 친해지라는 의미에서 편한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아, 그런 거면 마음이 좀 놓이긴 하는데요.”
명진아는 복숭앗빛 앳된 얼굴에 강아지 같은 미소를 띠었다. 그 모습을 룸미러로 일별하고, 금양기획 로드매니저 조진영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마음 놓지는 마. 아까 얘기했다시피, 남주 아역이 초짜라더라. 아예 필모가 없는 애야. 나라엔터 이군영이 마구잡이로 들이민 거겠지. 걔랑 계속 붙는 씬 찍어야 될 텐데, 제대로 연기하려면 초장부터 무드를 잘 잡고 가야지.”
“아, 무드요.”
“주도권 얘기야. 그놈······ 열두 살이랬나? 그 꼬맹이가 네 말에 꼼짝도 못하게 만들라고. 그래서 너만 보면 연기에 빡 집중이 되게 만들어야 돼. 그래야 제대로 합을 맞출 수 있어.”
“저는, 그런 거 잘 못하는데······.”
“잘해야 돼. 너도 이제 3년차잖아? 아역들 사이에선 중진이라고. 꼬맹이 하나 정도는 휘어잡아야지.”
부리부리한 매니저의 시선을 피하며 명진아는 프로필에 시선을 줬다. KBC측에서 미리 전해준 상대역 프로필이었다.
‘이찬, 12세. 카메라연기 경력은 없고, 현재 극단 별빛에서 조연으로 사랑받고 있음······. 별빛은 유호진 선배님이나 강정후 선배님처럼 대단한 배우들을 배출한 곳이니까, 실력이 없지는 않을 것 같아. 웃는 얼굴도 귀여워서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되겠지?’
금양기획의 조금양 대표는, 대부분의 배우 관계자들이 그렇듯이, 이군영 대표를 몹시 경멸했다. 나라엔터 배우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에는 자사 배우를 보내지도 않으려 할 만큼.
명진아가 <가을하늘>에 출연하게 된 건 예외적인 사례였다. 작품이 워낙 좋은데다 조혁수라는 시청률 보증수표가 있었기에, 명진아의 커리어를 위해 잠시 적대감을 접어둔 것.
그렇게 사이가 나쁜 나라엔터의 아역과 친분을 쌓는 건, 윗사람들 보기에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처음에 무드를 어떻게 잡아야 할까요?”
“아주 쉬워. 딱 보자마자 이렇게, 이런 눈으로 깔아보라고. 애가 뭘 먹고 쑥쑥 컸는지 키는 너보다 좀 더 크긴 하던데, 그래봤자 꼬맹이야. 대선배님이 이렇게 업신여기는 눈으로 보면 찔끔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그럼 그 다음에 이렇게 말해. 네가 이찬이니? 반갑다. 연기 잘해줘. 한심해서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게 만들지 말고.”
“어, 그건······ 너무한 거 아닐까요? 그쪽 매니저님도 계실 텐데.”
“뭐가 너무해? 이런 배우들끼리의 기선제압은 매니저도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이야. 네가 두 살이나 많고, 2년이나 선배고, 작품에도 먼저 캐스팅이 돼 있었어. 나라엔터 아역 따위한테 전혀 배려를 해줄 필요가 없단 말이야.”
강한 어조로 강조하는 조진영의 말에 명진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업신여기는 눈빛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
“네가 이찬이니? 반갑다. 연기 잘해줘. 한심해서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게 만들지 말고.”
아역 탤런트들의 성지라고 할 만한 금양기획의 유망주답게, 명진아는 자신에게 맡겨진 ‘쎈 선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냈다. 이찬의 곁에 선 정창영조차 눈살을 찌푸렸을 정도로.
그렇지만 막상 타겟이었던 소년은 환한 미소로 응대했다.
“반가워, 진아 누나. 누나 진짜 예쁘다!”
“어, 어? 누나? 너······ 아무리 경력이 없어도 그렇지, 선배한테 어디 막, 누나라고 부르는 거야?”
“누나, 쌈 싸는 거 잘해? 나는 아무리 해도 잘 안 되던데. 누나 누나, 나 이거 배추쌈 한 번만 싸주면 안 돼?”
“아이 참······ 이렇게 밥을 올리고, 여기에 우렁쌈장을 이렇게 해서, 이렇게 싸면 되잖아? 넌 이것도 못하니?”
“우와! 누나 따봉이야! 헤헤, 맛있겠다.”
“······맛있어?”
“움, 응! 누나가 싸줘서 대빵 맛있어!”
“그래? 잘 먹네······ 아이, 입에 다 묻었잖아?”
“나 닦아죠오.”
“아, 참. 정말 넌 애기구나? 이리 얼굴 대 봐.”
옆에서 상황을 관찰하며 조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저 마음 약한 계집애. 생각 없는 꼬맹이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버리다니. 저래서야 주도권을 잡을 수가 없잖아.’
그에 비해, 이찬이 생각 없는 꼬맹이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정창영은, 심적 충격을 감추기 위해 애썼다.
‘저런, 저런 게 가능하다니. 찬이는 정말 무서운 녀석이었구나. 나랑 수진이 대하는 걸 보고 그래도 좀 아이답게 낯을 가리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그저 상대에 맞춰서 얼마든지 태도를 바꿀 수 있는······ 닳고 닳은 사업가처럼 원숙한 생활연기력을 갖췄던 거야. 그래서 계약관계일 뿐인 나나 염수진한텐 살가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내가 잘 보여야 한다고 지목한 명진아에겐 저렇게나 정답게······ 후우. 애들 다루는 게 특기라고 하더니, 정말이었구나.’
그가 생각한 것처럼 이찬은 명진아를 가지고 노는 중이었다. 성인들의 사고마저 꿰뚫어보는 그의 눈에, 고작 2년 정도 연기를 해온 소녀 명진아의 속마음은 투명한 유리처럼 훤히 들여다보였다.
‘유약한 사람이야. 정도 많고 마음도 여린데, 선배로서 기선제압을 해야 한다고 지시를 받아서 억지로 강한 척하고 있는 거지. 그런 사람한텐 앵기는 게 최고지 뭐. 귀여운 꼬맹이인 척 달라붙으면 절대로 내치질 못하는 성격이니까.’
과연 명진아는 고작 3분이 채 못 되어 손뼉까지 치면서 환하게 웃었다. 이찬을 보는 눈은 마치 친동생을 보는 것처럼 다정해져 있었다.
“아하하, 진짜 재밌어. 찬아, 너 완전 친구 많겠다. 그치?”
“응? 친구는 별로 없는데?”
“어? 진짜? 왜? 너 엄청 재밌고 귀여운데.”
“음······ 나 학교 안 다니고 홈스쿨링 하고 있거든.”
“홈, 스쿨링? 그게 뭐야?”
“집에서 공부하는 거. 검정고시 준비하고 있어.”
“어머! 정말? 그러면, 그럼 엄청 외롭지 않아? 왜 그랬어? 학교 다니면서도 연기 할 수 있는데. 누나도 그러고 있어.”
“그냥. 그럼 누나는 친구 많아?”
“어······? 으응······ 나도 별로 없네. 연기 하면서 학교 자주 빠지고 하니까, 학교에서 봐도 데면데면하고 그래.”
“그렇구나. 그럼 내가 친구 해줄게!”
“어······?”
“친구. 나도 친구 없고 누나도 친구 없으니까, 우리 둘이 친구 해. 자, 새끼손가락 걸고, 친 구 하 자!”
얼떨결에 두 살 연하의 소년과 친구를 맺게 된 명진아는 몹시 당황했지만, 연신 이어지는 이찬의 애교폭격 속에서 금세 다시 까르르 웃게 됐다.
결국 조진영이 나서서 둘 맞은편에 새 아역을 집어넣었다.
“어흠 흠. 진아야. 여기 신혜도 인사한다고 왔다.”
“아······ 신혜야, 오랜만이야.”
“안녕하세요, 선배님. 작년보다 더 예뻐지셨어요.”
정신혜. 작중에서는 명진아의 배역과 집안이 뒤바뀌는 역할로서, 초반부의 악녀로 미움을 사야 한다. 그런지라 전형적으로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외모의 소유자였다.
‘연기력으로 보자면 그리 주목할 만한 커리어는 갖고 있지 못하고, 이번 배역 역시 주조연이라기엔 부족하고. 그럼 얘는 자연스럽게 명진아한테 업혀서 처리하면 돼.’
그렇게 생각한 이찬이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며 명진아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누나 누나, 나도 소개시켜줘······.”
“어휴. 찬이는 진짜 애기구나? 신혜야, 얘가 이찬이야.”
“······예. 혹시 선배랑 아는 사이예요?”
“그런 건 아니구-”
“우린 소중한 친구예요.”
“뭐? 친구? 진짜예요? 열두 살이라고 봤는데.”
“음······ 그렇게 됐어. 하하.”
어색하게 웃는 명진아를 힐끔 본 뒤에, 정신혜는 이찬을 향해 표독스레 눈을 흘겼다.
“잘 모르겠는데, 좀 걱정이 되긴 하네요. 이 드라마 초반에 아역 씬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이런 꼬마애가 들어와서 말이에요. 키만 컸지 완전 애기잖아요? 배역보다도 엄청 어리고, 경력도 없고. 얘 때문에 드라마 망하는 거 아닌지 몰라.”
“정신혜!”
작지만 날카로운 명진아의 외침. 정신혜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좁혔다.
“네, 네.”
“함부로 말하지 마. 찬이가 이래 보여도 낯을 좀 가릴 뿐이니까. 너 대학로 연극 무대 서본 적 있어? 없지? 얘는 방금도 거기 가서 공연을 하고 왔어. 수백 명 관객들을 앞에 두고, 유호진 선배님이 공들여 만드신 작품을 연기하고 온 참이란 말이야. 그랬는데 연기력이 걱정돼? 네가 유호진 선배님보다, 심성윤 PD님보다도 더 보는 눈이 있나봐?”
“죄, 죄송해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 자세히 한번 말해봐.”
“······죄송합니다. 입조심 할게요.”
깔끔한 정리였다. 이찬이 스스로 말했다면 분명 여러 차례 반박했을 정신혜지만, 선배이자 촉망받는 연기자인 명진아의 말에는 그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찬은 그 전개를 예상하고 일부러 한 발 물러서 있었다. 하지만 명진아의 변화에는 조금쯤 놀란 참이었다.
‘제법인데? 내 손 잡은 오른손이 잔뜩 떨리고 있는 걸 보면, 이렇게 으름장 놓는 게 익숙한 성격은 절대 아니야.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하지만 아까 나한테 그랬던 때랑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졌어. 절실한 마음가짐이 순간적으로 집중력을 끌어올려준 거지. 솔직히 지금 상황을 맥락 모른 채 봤다면, 나라도 이 중학생 누나가 정말 화를 내고 있다고 믿었을지 몰라.’
일곱 살 무렵 이후로는 한 번도 사람의 감정을 잘못 읽은 적이 없는 이찬이기에, 그건 대단한 격찬이었다. 명진아의 잠재력을 그는 누구보다 분명히 알아챘다.
‘기대가 좀 되는걸. 정신혜야 뭐 조연이니 적당히만 해줘도 될 거고, 붙는 역인 내가 제대로 시너지를 내주면, 1화 방영하자마자 스타가 될 수 있을지도.’
둘 모두 주인공의 아역이지만, 배역의 무게를 말하자면 명진아 쪽이 좀 더 무거운 편이었다.
명진아는 평생 진짜 가족이라 믿었던 사람들과 헤어지며 복잡한 감정연기를 보여줘야 한다. 동생이 뒤바뀐 상황에 가슴앓이만 하면 끝인 이찬에 비해서 임팩트가 클 게 분명했다.
‘물론 심 PD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비중은 바뀔 수도 있는 문제겠지만······ 어쨌든 명진아 역이 지금보다 가벼워질 리는 없겠지. 작품 전체에서 핵심적인 갈등구조니까. 자칫하면 나보다 이 누나가 더 뜰지도 모르겠는걸?’
그런 생각을 할 무렵에 룸의 문이 열렸다. 아역들끼리 먼저 자유롭게 식사하라고 일부러 늦게 온 심성윤 PD였다.
“아, 다들 앉아요. 앉아 앉아. 식사들은 잘하고 있었죠? 우리 소년소녀들······ 내가 아주 기대가 커요. 전에도 말했지만, 이번 드라마에서 아역 씬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기존에도 분량이 많았는데, 남자주인공 아역이 결정되면서 더 늘리기로 결정했거든.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아마 3화까지 아역 씬이 절반 이상 들어갈 거 같아요.”
들어오자마자 충격발언이었다. 아역 씬에서 가장 격한 감정 씬을 소화하며 주목받게 될 명진아가 놀라서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 매니저인 조진영은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남주 아역이 결정되면서 분량을 늘리기로 결정했다고?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한테서 대체 뭘 봤길래? 이군영한테 뭐 돈이라도 받은 건가? 그래서 남주 아역 분량을 더 늘리기로 한 거라면, 좀 곤란한데······.’
아직 이찬의 본모습을 보지 못한 그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상당한 연기력을 갖췄을 뿐 아직은 소녀인 명진아나 정신혜 역시 상황을 깊이 이해할 수 없었고.
오직 이찬의 매니저인 정창영만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됐다. 제대로 먹혔구나. 무려 조혁수와 이소연이 나오는 드라마에서 아역 분량을 확대해냈다. 고작 한 번의 미팅만으로 말이야. 그 확대된 분량에서는 당연히 명진아가 아닌 찬이가 중심이 될 터! 가족이 뒤바뀐 소녀를 바라보는 옛 오빠의 마음을 찬이가 절절하게 표현해낼 수만 있다면, 올 가을 안방극장의 주인공은 조혁수도 이소연도 명진아도 아닌, 우리 이찬이 될 거야!’
그런 생각에 들뜬 정창영이 시선을 내렸을 때, 이찬은 여유로운 손길로 우렁쌈밥을 싸고 있었다. 남의 도움 따위 필요로 할 이유가 없는 노련한 손놀림이었다.
< 7장 - 아역 명진아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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