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 - 배우 조혁수 (1) >
드라마 <가을하늘> 촬영을 하루 앞둔 날에도 이찬은 <떠돌이의 죽음> 공연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 완벽한 연기에 관객들은 커튼콜의 기립박수로 보답해줬다.
그 뒤에, 이찬은 극단 멤버들에게 둘러싸였다. 환하게 웃는 얼굴들이 마치 좀비처럼 포위망을 좁혀온다.
“으, 뭐예요? 왜들 이래요?”
“우리 이찬 배우님! 오늘은 빠져나갈 생각 마라.”
“아 쫌! 순재 아저씨, 나 졸리다고요. 집 갈래.”
“졸려도 치킨은 먹고 싶을걸? 신입아, 주문해놨지?”
“선배, 치킨에 피자까지 더해서 시켜버렸지요.”
“거기에 맥주까지······는 안 되겠구나. 애기가 있으니.”
“음료수로 때워. 신입들은 빨리 상 펴라. 찬이 넌 이쪽으로 오고. 자, 크랭크인을 앞두고 계신 대배우 이찬님 나가신다!”
비록 이미 성인 배역 씬의 촬영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작품의 첫 촬영을 의미하는 크랭크인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작품의 문을 열 3화 분량을 촬영하게 되는 거다. 그리고 이찬은 그 초반부에 주인공으로서 활약하게 된다.
소년에 대한 사감을 떠나서, 동고동락했던 극단원들 모두가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이찬이 유명세를 얻는다면 그를 데뷔시킨 극단 역시 명성을 얻게 된다. 소년 스타가 극단에서 나가고 나서 떨어질 수익도 다시 올라올 거고, 어떤 극단이기에 그런 인물을 키워냈나 하면서 캐스팅매니저들이 극장에 몰려올 수도 있을 거고.
그렇기에 소년을 위한 축하연은 자발적이었다.
질시의 감정도 이제는 희미했다. 가장 눈치 없는 신입들조차도 이찬이 그들과 감히 견줄 수 없는 천재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거기에는 이찬과 붙는 역으로서 물오른 연기력을 자랑한 이찬맘 임희재의 공이 컸다. 거지들이 출연하는 장면의 발전을 칭찬하는 선배들에게 언제나 찬이 덕분이라고 답하면서, 이찬의 대단한 존재감을 어필했던 것이다.
원래 그 역할을 맡았어야 할 유호진이 당황할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극단장 유호진으로 말하자면, 소년의 안방극장 데뷔에 가장 마음이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는 촬영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까지도 이찬의 소속사 선택에 대해서 곱씹고 있었다.
‘이군영의 나라엔터······. 똥구녕 그 인간이 무슨 언론플레이로 생색을 낼지 훤히 보인단 말이지. 이미 완성되어 있던 애를 제가 키워낸 것처럼 꾸며대겠지. 역겨운 자식 같으니.’
한참 연상인 극단 창립단원을 두고 하는 생각으로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그게 어쩔 수 없는 그의 진심이었다. 유호진은 처음부터 소년의 나라엔터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찬의 결정을 막지 않고 안정록에게 연락하는 선에서 그친 건, 소년을 곁에 두고 절감한 현실인식 탓이었다.
‘똥구녕에게 휘둘릴 만한 재목이 아냐. 제멋대로인 임희재를 완전히 구워삶고 배우들의 질시마저 웃어넘기는 열두 살 꼬마가, 이군영의 조잡한 수작에 당할 리 없지. 무엇보다 저 아이는 이미 완성된 배우다. 단 한 번의 시범을 보고 발성법까지 스스로 깨우쳤어. 찬이는 더 많은 것을 보고 겪어야 해. 그래야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어. 이 좁은 극단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돼.’
오직 연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단원들과 달리 단장은 시야가 넓을 수밖에 없다. 그런 유호진이 보기에 이찬의 능력은 굉장한 범용성을 갖고 있었다.
반드시 연기가 아니더라도, 소년은 접하는 모든 일을 천재적으로 수행할 터였다.
이를테면 운동을 할 수도 있다.
철수 역의 아주 짧은 액션 씬을 수행하기 위해서 가볍게 진행한 액션 수업에서 이찬은 믿을 수 없는 운동신경을 보여줬다. 그것이야말로 몸의 근육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소년의 특장점이라고 할 만했다.
노래를 부른다면?
이찬은 가장 위대한 가수들을 벤치마킹할 수도 있다. 지금은 얇고 길기만 한 몸 때문에 물리적인 울림통이 작지만, 성장 방향에 따라서 최고의 록스타나 오페라 싱어조차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녀석이니까······ 더 넓은 물을 만나야만 하는 거지. 최고의 연기자들과 만나 제대로 된 경쟁을 펼쳐야 해. 그런 의미에서, 강정후가 소속돼 있는 나라엔터는 현실적으로 최선의 행선지지. 똥구녕 한 명만 제외하자면 인프라가 최고 수준이고, 안 선배님께서 레슨을 진행하실 곳이기도 하니까.’
그렇기에 유호진은 소년을 막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이찬이 앞으로 촬영에 지장을 겪지 않게끔 공연 일정까지 조정해줬다.
다른 신입이 연기하는 철수 역할을 그 스스로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나마 20대 중에서 정후와 비견할 만한 연기자를 꼽자면 조혁수 정도가 있겠지. 그쪽은 성인 단역부터 차근차근 올라간 거라 임팩트가 크진 않았지만, 실력으로 보자면 강정후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아. 그렇지만 기획사가 영세해서 찬이를 보내기는 애매했는데······ 이렇게 나라엔터에 들어가 조혁수의 아역으로 데뷔하는 거야말로 결과적으론 최선이지. 터프가이 조혁수를 겪고, 그 다음엔 미소년 강정후의 남동생 역할 같은 걸로 영화에 출연하고. 그렇게 세기의 천재들과 붙어서 연기하다보면······ 저 오만한 꼬맹이도 비로소 연기에 재미를 붙이게 될 거야. 아직은 전혀 아니지만······.’
그게 핵심이었다.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소년 이찬은, 연기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오직 유호진만이 알고 있는 사실.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는 것으로 유명한 안정록조차도 이찬에게서 그런 심리를 읽어내지는 못했다. 오직 무대 뒤에서 이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던 유호진만이 그 어렴풋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너무 쉬운 거지. 저 빌어먹을 오만한 꼬맹이한테는, 다른 사람들이 평생을 들여 파고드는 끝없는 연기의 길조차 대수롭지가 않은 거야. 겉모습을 완벽히 꾸며내 누구보다 뛰어난 연기를 할 수 있으니까. 쟤가 지금 연기를 하는 건 그저 필요에 의한 선택. 그 필요를 욕구로 바꿔줘야 해. 그러려면 강정후의 나라엔터가 최선인 게 맞아. 더 골치 썩을 거 없다.’
이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유호진은 생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서 무대 위에 준비된 연회장으로 향했다.
마치 최후의 만찬처럼 긴 테이블 위에, 미리 구입해둔 음료수와 과자가 세팅되고 있다.
그렇게 단원들이고 단장이고 이찬 한 명에게 집중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막 뒤의 층계참에 머플러로 얼굴을 감은 조혁수가 서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축하연이 거창한걸. 저럴 거면 뷔페 같은 데를 가지, 꼭 극단 애들은 극장에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한다니까. 찬이 덕분에 티켓도 잘 팔려서 요즘 수입 좋을 텐데도 말이야.”
PD 심성윤이 키득대며 한 말에 조혁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막을 바라본 채 눈썹을 여러 차례 꿈틀거렸다.
“어쩔 거야? 자기들끼리 하는 축하연을 파토내긴 좀 그런데, 저기 낄까? 아니면 인사만 하고 갈래?”
“······그냥 돌아가시죠. 저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얼굴 드러내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 아쉽네. 오늘 미리 만나게 하고 싶었는데. 자, 그럼 올라가자고. 우리도 가서 조촐하게 술이나 하자. 꼬맹이가 없어서 편하게 술 들이킬 수 있겠구만.”
원래 계획은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 이찬을 데리고 삼겹살집에 가는 것이었다. 심성윤은 그곳에서 조혁수가 자신의 아역을 마주하게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꼭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아. 찬이가 겨우 여섯 장면 등장한 연극을 감상한 것만으로, 이 자식 이미 충분한 충격을 받은 것 같단 말이지.’
그의 생각대로였다. 조혁수는 봄바람 부는 거리로 나서 삼겹살집으로 향하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속마음이 어떨지 추론하며 심성윤은 자주 웃었다.
‘충격이 컸겠지. 이제껏 저토록 어린 나이에 저만 한 연기력을 보여준 아역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연기 하나만 보고 사는 놈이니, 나보다도 얼이 빠져버리는 게 당연해. 대체 무슨 말로 서두를 뗄지 너무 궁금한걸?’
그런 PD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조혁수는 오래 침묵을 지켰다. 심성윤이 끙 소리를 내면서 몇 차례나 술잔을 비운 뒤에야 그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감독님. 그 녀석 말입니다.”
“어, 그래 혁수야. 고기가 지글지글 익기 전에 말을 해봐라.”
“특이하던데요.”
“특이하다?”
“예. 이상한 연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그러니까······ 참 진짜 같은 연기를 하더군요.”
연기에 있어선 늘 확실한 답을 내리던 까탈스런 배우가, 괴상하게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그 모습이 심성윤에게 무척 이상하게 보였다.
“무슨 소리야? 진짜 같은 연기라는 게 뭐냐? 연기란 게 어차피 진짜가 아닌데, 진짜 같다는 건 최고라는 뜻 맞지?”
“······그렇죠.”
“그러면 최고의 연기라고 하면 될 것이지, 왜 진짜 같다는 둥 이상하게 둘러서 말해?”
“진짜가 아니니까요.”
“진짜가 아닌 게 당연한 거잖냐?”
“그러니까······ 아, 참, 죽겠네요. 한 잔 하시죠.”
내리 두 잔을 비운 뒤에야 조혁수는 말을 이었다.
“그 자식······ 눈이 죽어 있었습니다.”
“눈이? 이 자식은 뭔 소리야? 유호진이한테 들킬까봐 맨 뒷자리에서 봤으면서 눈을 어떻게 봤다는 거야?”
“눈빛이요. 분명히 배역에 맞는 연기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관객들도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그 연기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아주 이상하게도 홀로 공허한 눈을 하고 있었어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 자식 답답하게 구네. 그래서, 네 아역으로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릴 하는 거냐?”
“······아닙니다. 최고예요. 최고의 연기자입니다. 내로라하는 기성배우들보다도 더 좋습니다. 분명히 시청자들도 그 아이에게 끝없이 감탄하며 드라마를 홍보해줄 겁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좀 말을 해라. 왜 사람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거야? 야, 고기 먹어라. 다 익었다.”
심성윤이 투덜거리며 건넨 삼겹살을 입으로 가져가며, 조혁수는 말로 꺼내기 힘든 감정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분명히 최고의 연기자지만······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 그래도 괜찮은 걸까? 훌륭한 연기를 펼치면서도 스스로 전혀 기뻐하지 않는 그 아이는, 배우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소년은 그저 철수였다. 너무도 완벽하게 배역에 스며들어 거지 철수로만 기능했다.
그 얼굴에는 배우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기 연기에 대한 자긍심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괴리감이 조혁수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그렇지만 조금도 노력하지 않고, 그 과정을 즐기지도 않는 어떤 천재가, 그 모든 종류의 인간들보다도 더 뛰어난 결과를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됐을 때 그 천재는 인간으로서 행복할 수 있을까? 그저 완벽이라는 결론으로만 존재하는 천재가······ 진정한 연기자라고 할 수 있을까?’
소주 두 병이 비워지고 불판이 한 번 갈렸을 무렵. 스물한 살에 데뷔한 이래 단 한 순간도 연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잃어본 적 없는 청년 배우는, 마침내 결심했다.
‘보여줘야 한다. 그 아이에게 연기의 행복을 알려줘야 한다. 어쩌면 그게 내가 하류인생을 정리하고 연기자로서 살아가게 된 이유일지도 몰라. 저 천재가 마침내 처음으로 좌절하고 연기를 직시하게 만드는 역할로서······ 연기의 신이, 나를 선택한 것일지도 몰라.’
술 때문에 감상에 빠졌다는 자기인식도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조혁수는 잔에 따르려던 술병을 내려놓고 말했다.
“B팀도 감독님이 맡아주시죠.”
“······응? 얘가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람. 혁수야, 스탭들이 최고의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게 더블 스탭을 꾸리는 거다. 내가 어떻게 두 팀을 다 감독을 해?”
“시간상 가능할 때만 그렇게 해주십쇼.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저 꼬마애도 데려와주세요. 해주셔야 됩니다. 그래야 이찬이란 아이가 진짜 배우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최고의 배우라고 했으면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여튼 성격 이상한 녀석이라니까.”
투덜거리며 잔을 비운 심성윤은 그러나 끝끝내 거절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더블 스탭을 구성한다 하더라도 총감독은 메인PD의 역할. 시간 빌 때 B팀을 찾는 게 이상할 건 없었다.
그리고 늘 연기자로서 노력하고 즐기는 조혁수가, 이튿날 촬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만 마시자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아역 씬의 크랭크인을 위해 속초 로케이션에 집결한 스탭들은, 촬영 준비도 팽개쳐둔 채 삼삼오오 모여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촬영 스케줄 변경된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오늘 B팀이었어? 우리 A팀 아니었어?”
“이게 참······ 형님, 아역들도 와 있는 거 확인했어요.”
“그랬어? 아니 그러면······ 주연들이 여길 왜 와 있어?”
그들이 바라보는 분교의 벤치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다. 이번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인 조혁수와 이소연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일 만큼 근접한 스탭들은 이내 알 수 있었다. 조혁수 쪽은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있고, 이소연 쪽은 환하게 웃으며 키득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진짜죠? 오빠, 진짜 약속 지킬 거죠? 아, 진정 감독님 <저격>에 출연할 수 있다니, 완전 기뻐요. 그 영화, 시놉 단계에서부터 최고라고 명성이 자자했잖아요? 그렇지만 남주에 혁수 오빠 말고는 계속 캐스팅이 미뤄져서, 대체 언제 크랭크인하려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랬는데 이번 가을이란 말이죠?”
“이제 그 얘긴 좀 그만하죠.”
“어떻게 그만해요? 완전 신나는데. 우리 대표님이랑 진정 감독님 사이 안 좋아서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혁수 오빠가 거기에 추천을 해준다니! 너무 기뻐요.”
“조건이 두 가지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아, 당연하죠. 저 바보 아니에요. 첫째, 오늘 아역들 첫 씬 촬영에 와서 눈 떼지 말고 견학할 것. 그리고 작품에서 연기력 논란 나오지 않을 만큼 대본 숙지 충분히 할 것. 맞죠?”
“그래요. 판단은 시청자들이 해줄 겁니다. 3화와 4화 시청평 보고 진 감독님한테 연락드릴 거예요.”
“나이스! 꼭 해내겠어요. 꼭 해내서 나도 ‘진정’한 배우가 되겠어!”
서로 다른 마음을 품은 남녀주인공이 바라보는 가운데, 마침내 아역 씬의 첫 촬영이 개시되었다.
< 8장 - 배우 조혁수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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