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 - 배우 조혁수 (3.) >
“찬이 와 있었구나.”
“네, 아저씨. 어서 오세요.”
대선배 안정록의 등장에 고개만 까딱거리는 이찬의 모습은 새롭지 않았다. 시선이 책에 꽂힌 채 움직이지 않는 것 역시.
1:1 연기교습을 시작할 때 약속했던 부분이다. 강사와 학생이 아닌 서로 동등한 배우로서 연구하는 자리를 만들자고.
이찬이 자신의 제자로 알려지길 바라는 대표의 이기심 때문이었지만, 사실은 안정록 역시 바라던 바였다. 자신이 소년에게 가르칠 게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대본을 테이블 위에 덮고 나서 이찬이 건넨 질문은, 조금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조혁수가 어떤 배우냐고?”
안정록은 까끌까끌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이래저래 특별한 친구라서 말할 게 많긴 한데······ 우선은 네가 왜 그걸 물어보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은데?”
“별 건 아니고요, 그 아저씨가 아역 씬 촬영하는 거 보러 오셨더라고요.”
“그래? 그거야 특별한 일은 아니긴 하지.”
“우리 회사 이소연 아줌마도 데리고 오셨더라고요.”
“하하. 이소연 그 아이를 아줌마라고 부르는 거니?”
“누나라고 하긴 좀 그렇잖아요.”
“편하게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되지 않겠니?”
“면전에선 그렇게 했죠. 하지만 교수님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자리에서 그쪽만 선배라고 하면 언어도단이지 않을까요?”
그렇게 물으며 살짝 눈치를 보는 게, 언어도단이라는 성어의 용법이 올바른지 묻는 듯했다. 안정록은 고개를 끄덕여 적절하게 쓰였다는 신호를 줬다.
실질적으로는 그것이 이찬 개인교습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연기로는 가르칠 게 없지만, 아직 어린 이찬은 대본에 적힌 단어들을 이해할 재간이 없다. 그렇기에 작가의 어휘력까지 갖춘 안정록과의 독서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카메라연기의 구체적인 스킬이라든지 촬영장 분위기를 위해 배우가 해야 할 일이라든지 하는 사소한 팁 정도가, 안정록이 소년에게 전해줄 수 있는 선배의 지식이었다.
물론 이군영으로선 전혀 알지 못할 이야기.
그는 이찬이 정확히 어떤 연기자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잘 크면 강정후를 넘어설 수도 있을 천재라고 생각할 뿐, 설마 대배우 안정록조차 교재 없이 들어와서 말상대나 해주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할 터였다.
“흠······ 혁수가 이소연까지 데리고 아역 촬영장을 찾았다고 한다면, 그건 꽤나 자극을 받았다는 말이 되겠구나. 촬영 전에 혁수와 따로 만난 적이 있었니?”
“만난 건 아니고, 연극은 한 번 보러 오셨죠.”
“그래? 그랬구나. 그렇다면 이해가 된다. 조혁수 그 녀석은, 노력하는 천재라고 할 수 있지.”
“노력하는 천재요?”
“그래. 내가 이 얘기는 한 적이 없었던가? 찬이 너를 만나기 전에 단 두 사람, 천부적인 관찰력을 가진 배우들을 본 적이 있단다. 그 중 하나가 혁수야. 배우로서 최고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불운한 환경 탓에 오래 빛을 보지 못한 아이지. 그랬기에 일종의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그 시간들을 만회할 수 있다는······. 그래서 아주 완벽주의자처럼 굴곤 한단다. 아역 촬영장을 찾아간 건, 연극 속 아역에게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일 거야. 자기 상대역인 이소연까지 데려가서 각성시키려고 한 걸 보면 말이야.”
“각성시키기 위해 이소연 아줌마를 데려왔다고요? 흠, 재밌네요. 자기 혼자 잘하겠다는 게 아니라 성인 분량 전체를 끌어올리겠단 말이잖아요? 아주 거창한 도전이네요.”
이찬은 이미 챔피언이라도 된 것처럼 조혁수를 도전자로 인식했다.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그 조혁수 이상의 대배우인 안정록조차 소년에게 가르칠 게 없다고 확언했으니.
그렇지만 안정록은 씩 웃으며 그 착각을 수정했다.
“그게 정말 도전이라고 한다면, 찬이 너는 패배할 거란다.”
“······네?”
“혁수는 천재야. 네 재능에 비해선 손색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시작점의 차이일 뿐. 이미 그 아이는 무수한 경험을 통해서 연기를 갈고닦았어. 이제 막 시작하는 네가 극복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다.”
“아니, 왜요? 연기는 재능이 전부 아닌가요? 그 아저씨 연기라면 저도 많이 봤어요. 아주 잘하긴 하던데, 그래도 한계는 있던데요? 감정 면에서는 분명히 제가 더 정교할 거예요.”
“그래.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는 게 모두 찬이 너와 같은 위대한 관찰자들이라고 생각해선 곤란해. 그들은 대중이란다. 초인적인 눈썰미를 갖지 못한 보통 사람들이야. 그런 이들에게, 찬이 너는 천재의 정교함 말고 더 선명한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겠니?”
궤변이다- 이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교함이라는 말에 갇힐 능력이 아니다. 소년은 그 정교함을 통해서 누구도 연기임을 인식할 수 없을 만큼 사실적인 표현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마주본 안정록의 표정이 그 확신을 내리눌렀다. 대배우는, 아주 작은 기만의 징후조차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 뭔지 모르겠네. 그야 뭐 가서 보면 알 수 있겠죠.”
“가서 본다고? 너도 성인 씬 촬영장에 가볼 셈이니?”
“제가 가겠다고 한 건 아닌데, 똥구녕 아저씨가 멋대로 결정해버렸어요. 앞으로 일정 안 겹칠 때는 무조건 B팀 촬영장 나가래요. 그 아저씨 언제 한 번 혼쭐을 내줘야겠어.”
“하하하하······ 흥미롭긴 하다만, 그런 음모는 조심히 꾸며야지? 내게 말을 해버리면 어떡하니?”
“아저씨도 똥구녕 싫어하잖아요?”
“하지만 네가 이 대표와 싸우는 걸 도와줄 생각은 없단다.”
“거짓말 같은데. 근데 도와주실 필요는 없어요.”
이찬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안정록은 속으로 웃었다. 조만간 얄미운 극단 동기에게 골치깨나 썩을 일이 생기겠다고 짐작하면서.
“근데 아저씨. 조혁수 아저씨가 두 천재 중 하나라고 하셨죠? 다른 한 명은 누구예요? 강정후 아저씨?”
“······그래, 맞다. 강정후 역시 천재지. 다만 그쪽은 결이 좀 다를 거다. 즐기는 천재라고나 할까.”
“아하. 노력하는 천재가 있고 즐기는 천재가 있는 거군요? 그러면 아저씨가 볼 때 저는 뭐예요? 어떤 천재죠?”
“너는······ 그저, 천재지. 그저 한없이 완벽에 가까운······.”
안정록은 그 말을 끝으로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다.
‘뭐야? 한없이 완벽에 가깝다는 말은, 완벽하다는 거야 아닌 거야? 참 말을 복잡하게 하시네.’
근 한 달 간 수십 권의 대본을 탐독하며 어휘를 성인 수준까지 끌어올린 이찬이었지만, 아직 복잡한 사고구조에서 나오는 은연중의 뉘앙스까지 이해하기엔 손색이 있었다. 그렇기에 교수의 언급을 대충 흘려 넘겼다.
‘이 아저씨도 내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는 모르니까 하는 말이겠지. 이미 첫 촬영에서 심성윤 감독이 헤벌쭉 웃게 만들어버린 나인데 말이야. 조혁수 아저씨 연기라면 얼마든지 따라할 수 있다고. 똑같은 연기를 한다면, 나이가 어린 내 쪽이 더 대단해 보일 건 자명한 일이잖아?’
*
조혁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찬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견학하러 와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그래.”
“······감독님께서 여기서 대기하라고 하셨는데, 괜찮을까요?”
“그래.”
“······저기 앉아 있어도 돼요?”
“그래.”
하는 말이 두 음절로 뚝뚝 끊어졌다. 그 얼굴에 적대감이 담겨 있지 않음을 알아본 이찬이야 어깨 으쓱이며 의자로 이동했지만, 매니저 쪽은 당황한 듯 조혁수의 귀를 잡아당겼다.
“야, 너 왜 그래? 너 원래 연기 잘하는 애들 좋아하잖아?”
“예. 좋아합니다.”
“근데 왜 이렇게 대하는데? 애기 쫄았겠다, 야.”
“전혀 안 쫄았어요. 저 태평한 얼굴 좀 보십쇼.”
“······그래 보이긴 한다만, 치기로 그러는 거겠지. 위명 자자한 대선배가 무뚝뚝하게 대하는데 정말 안 쫄았겠냐?”
“정말 안 쫄았습니다. 저 수정해야 되니까 비켜주세요.”
매니저는 머쓱하게 몸을 돌려 이찬 쪽으로 다가갔다.
“음······ 찬이라고 했지? 나 혁수 매니저 윤강호다. 반가워.”
“안녕하세요. 어디 윤 씨세요?”
“응? 요 꼬맹이가 본관을 묻네? 파평 윤씬데, 아니?”
“네. 반갑습니다.”
“파평 윤씨를 알아? 너 혹시 본명은 윤 씨니?”
“아뇨. 그냥 세도가였다고 들었어요.”
“그렇지. 어린 녀석이 역사 공부 좀 했는걸? 하하하.”
사실은 윤대흥의 본관이라 우연히 들었을 뿐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닌 이찬은, 윤강호 매니저에게서 윤대흥과 닮은 부분이 있음을 찾아내고 흥미로워하는 중이었다.
‘여러 대 내려오면 핏줄의 특질은 사라진다고 그랬는데, 꽤나 가까운 친척인 모양이지? 흥미롭네. 그렇다고 한다면, 어딘가에서 우연히 내 핏줄을 찾아낼 수도 있을까? 부모야 죽었다고 하더라도 일가친척 정도는 있을 거 아냐?’
깊은 고민은 아니고 심심해서 해보는 생각이었다. 정창영이 담배 피운다고 주차장에 남은 상황이라, 남의 대기실에 홀로 들어와서 할 만한 일이 딱히 없었다.
그 하는 양을 물끄러미 보던 조혁수가 말을 걸기까지는.
“이찬. 대본이라도 좀 보지 그래?”
“예, 선배님. 근데 제가 대본을 다 외워서요.”
“3화 분량을 다 외웠어?”
“예, 선배님. 암기력이 좋아서요.”
“아역 대사가 아주 많지는 않더라만······ 머리가 좋구나.”
“열심히 외웠습니다, 선배님.”
“네 대본을 좀 봐도 될까?”
“차에 놓고 왔는데요, 선배님.”
“그놈의 선배님 소리 작작 하고, 가서 가져와.”
그 엄포에 매니저 윤강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재하려고 했지만, 이찬은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소년은 겁먹거나 분개하기보단 속으로 웃는 중이었다.
‘보기보다 귀여운 아저씨인데? 뭘 이렇게 대놓고 경쟁의식을 보이는 거야? 속으로는 나하고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 난 주제에, 아주 군기를 잡으려고 드는군. 뭐 이 정도야 대단히 기분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니, 잠깐 어울려줄까?’
그렇게 생각하며 차로 돌아가던 이찬은, 곧 대본을 든 매니저 정창영과 만나 대기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이고, 혁수 씨, 오늘도 아주 화사하신데요? 우리 윤강호 실장님은 요즘 아주 몸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아, 예. 자주 뵙네요, 정 실장님.”
매니저들끼리 대화하는 동안, 조혁수는 이찬에게서 대본을 건네받았다. 그걸 훑어보는 데에는 10초 정도가 걸렸다.
“······뭐냐? 왜 새 대본을 가져왔지?”
“새 대본 아닌데요? 제가 읽던 대본인데요.”
“그럼 왜 수기(手記)가 한 군데도 되어 있지 않은 거지? 이찬. 너 설마 눈으로만 보고 대본을 외웠다고 말한 거냐?”
“예. 제가 암기력이 좋아서요.”
“흥. 한심한 놈이군.”
이번에는 이찬도 꽤나 당황했다. 조혁수의 ‘한심한 놈’이라는 발언에 진심이 담겼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기에.
‘뭐지······? 정말로 한심하다고 생각하네? 그야 얼핏 노력도 안 하는 태도라고 매도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한데, 이 아저씨는 어제 내 연기를 봤잖아? 별반 노력도 없이 그렇게 완벽한 연기를 해낸 건데, 오히려 감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영 궁금했지만, 대선배에게 꼬치꼬치 따져 묻는다는 건 아역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 이찬은 호기심을 마음속에 묻은 채로 얌전히 의자로 돌아갔다. 그 뒤로는 매니저들의 수다와 스타일리스트의 작업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타타타 소리와 함께 여주인공 이소연이 뛰어들 때까지는.
“찬이 여기 왔어요? 찬아! 우리 이찬 배우, 언제 왔어?”
“안녕하세요, 선배님. 30분쯤 전에 도착했어요.”
“그럼 누나 보러 왔어야지, 왜 안 왔어! 보고 싶었잖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스타일링 하시는 데 방해될까봐요.”
“어쩜 이렇게 말도 어른스럽게 잘할까? 너 정말 열두 살 맞니? 애가 이렇게 멋있게 진중한 건 처음-”
“이소연 씨.”
“아, 네, 혁수 오빠.”
“시끄러우니까 나가세요.”
“······찬아, 우리 나가서 얘기할까?”
“애도 놓고 나가세요. 오늘 대본 숙지나 다시 하세요.”
“······네에. 알겠습니다아, 선배님.”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답한 이소연이 떠난 뒤로, 대기실은 이번에야말로 깊은 적막 속에 빠져들었다. 매니저들조차 조혁수의 기세에 놀라 찔끔해버린 탓에.
그리고 이찬은 거울을 통해 조혁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 눈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소년은 대선배의 얼굴을 관찰했다.
‘또 저 표정이군. 아련하게 바라보는 얼굴. 저건 대체 뭘까? 경외도 아니고 경멸도 아닌 이상한 표정이야. 저건 대체 어떤 감정인 걸까?’
대답을 얻지 못한 채 관찰만 이어가며 30분이 더 지난 다음에야, 이찬은 조혁수의 뒤를 따라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혁수의 연기를 처음으로 직접 관찰하게 됐다.
그 직후에, 소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건, 저건 아닌데? 대본에 지시된 게 아니잖아? 멋대로······ 멋대로 안지성을 만들어내고 있잖아? 하지만······ 이상하지 않아.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서, 안지성을 완성하고 있어. 작은 손동작부터 대사 하나하나까지, 더없이 안지성스러워······.’
만약 그간 이찬이 읽은 대본과 실제 드라마를 비교분석하는 과정을 거쳤다면, 그 연기가 충격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본에서 미진했던 캐릭터를 경륜 있는 배우가 한 단계 끌어올리는 애드립이란 흔히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많은 작품을 접하겠다며 보는 드라마와 읽는 대본의 장르를 달리했던 소년은, 그 순간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더······ 완벽하다. 내가 재현한 대본 속 안지성보다, 저 아저씨가 재창작한 안지성이 훨씬 더 선명해. 저건, 못 이겨······.’
이찬은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패배감을 경험했다.
그리고 생애 최초로, 연기라는 세계에 경외를 품게 되었다.
< 8장 - 배우 조혁수 (3.) > 끝
ⓒ 비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