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26화 (26/250)

< 10장 - 아역 정신혜 (1) >

하루만 휴식하고 다시 촬영장에 복귀하라는 지시를 내린 건 물론 이군영 대표였다.

그리고 그 지시에 이찬이 동의했을 때, 정창영은 당황했다.

“아니, 찬아! 너는 지금 그럴 상태가 아니야.”

“정 실장, 조용히 해. 잘 생각했다, 찬아. 그 슬픔까지 연기를 위한 동력으로 쓰는 거야. 너는 정말 천생 배우구나. 역시 내가 선택한 재목이야.”

“대표님, 제발 그런 말씀 마십쇼. 지금 얘가 촬영장에 나갈 정신이 있겠어요? 가깝던 사람이 그렇게 되셨는데 말입니다.”

“······이 자식이 눈을 똑바로 뜨고?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그만들 하세요. 시끄러워요.”

소년의 버릇없는 지적에 이군영조차 찔끔했다는 사실이 정창영을 또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찬의 비극을 활용한 홍보를 상상하며 너그러움을 극도로 끌어올린 그의 대표는, 양면성을 과시하듯 실실 웃고 있었다.

“미안하다, 우리 배우 찬이. 아저씨들도 마음이 아파서 그래요. 네가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지 아니까 말이다.”

“예, 그러시겠죠.”

“그럼. 이 아저씨는 네가 행복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는데, 이런 비극이 생겨서 정말 안타깝구나. 하지만 네가 생각한 대로란다. 돌아가신 그 형사님도 네가 자기 때문에 손해를 겪지 않기를 바랄 거야. 넌 아직 신인이잖니? 많은 배우와 스탭들이 스케줄을 맞췄는데, 가능하면 미루지 않는 게 좋지. 물론 네가 할 수 있을 때 얘기지만 말이다.”

“가능해요. 해내겠습니다.”

타인의 입발림 속에 담긴 마음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은 아니었다. 소년은 이군영의 탐욕스런 얼굴에서 진상을 파악하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몹쓸 아저씨 같으니. 이번 일을 나중에 홍보용으로 쓸 생각인 모양이지? 사랑하는 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완성을 위해 촬영장에 나온 아역배우, 그런 식으로 말이야. 거기다 이번 촬영부터는 안지성이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내면의 애수를 보여줘야 하는 씬들이 나와. 그러니 가족을 잃은 내가 더욱 진실한 연기를 보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정말 나쁜 사람. 하지만 저게 보통의 인간이지. 나는 저러지 않을 거야. 형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살 거야.’

그 뜻은, 이찬이 촬영을 더 미루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와도 상통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빨리 윤대흥의 유지를 이루고 싶었다.

‘형은 나한테 행복해지라고 그랬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힘을 가져야 해. 그래야지 소중한 사람들과 멀어지지 않을 수 있어. 이제는 겁내고 피하지 않을 거야. 함께할 수 있는 시간들을 뺏기지 않을 거야. 그러려면 이군영 이 사람한테 빚을 지워둘 필요가 있어.’

빚이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단어. 이찬은 두 가지 빚을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는 마음의 빚.

그가 소년에게 죄책감을 갖게 만들면, 거래관계에 한해서는 제법 양심적인 이 사업가는, 이찬에게 몹시 불리한 일은 획책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는 강제의 빚.

혹시라도 마음의 빚을 걷어낼 수 있을 정도의 이득이 사업가의 탐욕을 자극할 때 그를 강제할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을 테니.

‘이 아저씨도 사람은 사람이야. 가족을 잃은 소년을 촬영장에 보낸다는 데에서 최소한의 죄책감은 느끼고 있어. 정창영 아저씨한테 버럭 소리친 것도 사실 내면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함인 것 같고. 양심보다 탐욕이 훨씬 커서 나쁜 소리만 하고 있지만, 첫 번째는 얼추 된 셈이야. 그리고 두 번째 빚은······ 조만간 만들어봐야지.’

열두 살 소년이다. 대표가 됐든 실장이 됐든 그 앞에서는 긴장감을 일부 풀 수밖에 없다. 그런 순간이 오면 이찬은 쉽게도 그의 역린을 손에 쥘 수 있을 터였다.

‘원래는 형한테 부탁해서 비리 같은 걸 포착하려 했었지. 뭔가 캥키는 구석이 있어서 그게 표정에서 드러나면, 형사인 그분에게 힌트를 주면 될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똑같은 놈인 거야. 그토록 나를 아껴주던 사람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려 했으니. 그런 주제에 혼자 잘난 척, 그 사람의 마음이 변할까만 의심했던 거야.’

이제는 이룰 수 없게 된 흉계.

약은 어른들의 수법을 관조하며 조숙해진 이찬에게, 이군영을 겁박하기 위해 윤대흥을 이용한다는 건 별달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용하려던 대상을 잃어버리고 나자, 소년이 알고 있던 어두운 상식들이 무너졌다.

‘절대로, 그렇게는 안 살아. 형이 보고 슬퍼할 만한 짓은 안 할 거야. 그러면서도 나쁜 사람들한테 안 질 거야. 나라면 할 수 있어.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니까.’

오직 윤대흥만이 인정해준 축복의 재능.

이찬은 반짝이는 눈으로 이군영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

4월 27일의 촬영장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날의 촬영이 취소된 이유는 굳이 핵심 스탭이 아니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으니.

어느 아역이 가족상을 당해 일정이 하루 미뤄졌다는 얘기가 매니저들의 귀까지 금세 전파되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정신혜는 큰 충격을 받았다.

가족을 잃은 것이 이찬일 것이라고 직감했기에.

그녀와 같은 조연격인 세 명의 아역이 가족상을 당했다면 당일에 촬영이 취소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일정의 대부분은 남녀 주인공의 투샷이고, 그 외의 장면은 소수. 함께 걸리는 씬만 나중으로 미루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가족상일 텐데, 명진아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배우다. 그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면 촬영 연기 공지보다 먼저 기사가 떴을 터였다.

그렇다고 하면 남는 건 이찬뿐. 귀여운 얼굴에 키만 큰 그 소년이 가족을 잃은 게 분명했다.

그 추론에, 정신혜는 마음이 찢어지는 절망감을 느꼈다.

‘나 때문이야. 내가 걔를 질투해서, 나쁜 일이 생기라고 저주했던 것 때문이야. 그래서 가족을 잃게 된······ 그런······ 걸 리가 없잖아? 정신혜, 정신 차려. 네가 왜 죄책감을 느껴?’

객관적으로 보면 이성이 외친 뒤쪽 생각이 옳았다. 그녀가 초능력자도 무속인도 아닌 이상, 대본리딩 전에 잠깐 마음에 품었던 질투로 사람을 죽게 할 수 있었을 리 없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세 살. 초등학교 6학년에 진학해 이제야 최고학년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는 정신혜는, 머릿속을 잠식한 죄책감을 빠르게 걷어내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됐어. 생각으로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아, 젠장! 미치겠네. 어떡하지? 그 애 얼굴을 어떻게 보지? 만나서 대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는 거야?!’

그렇게 마음이 조각 난 상태로 속초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폐교의 양호실을 개조한 대기실에 앉아 있던 이찬은, 찡그린 얼굴로 들어선 정신혜를 보며 고개만 까딱거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순간적으로 죄책감마저 사라질 정도의 불손함이었다.

‘저, 저, 까딱까딱 인사하는 것 좀 봐! 어쩜 신인 주제에 저렇게 오만방자······ 아니지. 아니야. 정신혜, 넌 나쁜 애야. 어떻게 가족을 잃은 애한테 그런 생각을 해?’

복식 심호흡으로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 정신혜는 부드러운 말을 건넸다.

“찬아. 나 들었어. 가족상을 당했다구······.”

“네.”

“마음이 많이 아팠겠다. 나도 작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너무 놀라고 많이 슬펐어. 너도······ 그랬지?”

“그랬죠.”

“······괜찮아? 표정이 되게 안 좋아.”

“괜찮아요. 연기에는 지장 없을 겁니다.”

“아, 그런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참지 못하고 언성이 높아졌다. 이찬의 매니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돌아보는 것을 느끼고, 정신혜는 다시 한 번 깊이 심호흡했다.

“후우. 그런 게 아니라, 마음을 물어보는 거잖아. 연기는 잘하겠지. 넌 워낙 잘하는 애니까. 근데 그게 아니라, 마음이 아플까봐 물어보는 거잖아. 이걸 왜 모르니?”

“어······ 그렇구나. 고마워요.”

“어?”

“고맙다고요.”

“고맙다고? 내, 나한테?”

“네. 진심으로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좀 놀랐어요.”

“왜······ 왜 놀랐는데?”

“선배님은 나 별로 걱정 안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도 붙는 씬에서 연기 잘하라고 당부하러 오신 줄 알았죠. 퉁명스럽게 대답해서 죄송해요.”

정신혜는 그 진솔한 사과에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래서 정창영 실장이 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이찬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 뒤에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미안해, 찬아, 미안해. 내가, 내가 나빴어. 내가 너한테 질투를 해서, 너한테 나쁜 일이 생기라고 빌었어. 물론 그래서 너한테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치만 나는, 나쁜 애야. 다시는 안 그럴게. 정말 잘못했어.”

그렇게 눈물까지 뽑아내며 이찬의 세팅된 머리를 헝클어뜨린 뒤에야, 소녀는 도망치듯 대기실을 떠나갔다.

남겨진 이찬의 마음은 그 머리카락처럼 혼잡했다.

‘아니 뭔······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는 거야? 순수하다고 해야 하나,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그야 속으로 저주를 했다면 죄책감을 가질 수도 있는 일이긴 한데, 그걸 가족 잃은 지 하루 된 사람한테 대놓고 말을 하다니. 진짜 이상한 누나네.’

미신의 현실성을 떼어놓고 보더라도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어. 자기 유명해질 것만 생각하고 남들 마음엔 관심도 없는 새침데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속정이 있는 편이구나. 그리 친하지도 않은 나를 위해서 눈물까지 흘리다니.’

원래였다면 그런 따뜻함에 감동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고아라는 이유로 뜻 모를 동정을 사며, 이찬은 타인의 동정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

그렇지만 윤대흥과 관련해서는 마음이 달라졌다. 그를 잃은 건 오히려 가족이 없다는 사실보다도 가슴 아픈, 동정 받아 마땅한 일이었기에.

‘그렇지만······ 신혜 누나의 저 감정은 연기에 지장을 줄 수도 있어. 안지성을 짝사랑하는 역할이긴 해도, 집안의 차이 때문에 열등감을 갖고 있어야 하니까. 저 누나가 자기 감정을 감추고 연기를 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런 이찬의 생각과는 달리, 처음으로 이찬과 붙는 씬의 숄더샷(카메라 프레임의 단계 중, 앞사람의 어깨 너머로 인물의 얼굴이 보이는 거리감)을 연기한 정신혜는 네 번 만에 OK를 받았다.

심성윤 감독이 꽤나 만족한 표정으로 장면을 뒤집으라 지시한다. 배우들은 그대로 서 있고 카메라가 반대쪽으로 돌아가 상대역을 촬영하는 것이다.

다만 견학 중이던 조혁수가 급히 그 어깨를 잡았다.

“감독님, 잠시만요. 방금 전엔 표현이 좀 어색했습니다.”

“어색했다고? 어깨 걸린 찬이가?”

“예? 아뇨. 신시라 쪽입니다. 뭐라고 해야 될진 모르겠는데······ 안지성을 바라보는 게 너무 애틋합니다. 아직 짝사랑하는 선배일 뿐인데 동정심까지 담고 보는 느낌이에요. 혹시, 이찬이 가족상을 당했다는 얘기가 전파된 겁니까?”

“그렇지. 연출팀이 입방정을 떤 모양이야.”

“그래서 그런 거군요. 이대로 OK 가시면 안 됩니다.”

“이 자식은, 아주 월권이 취미가 됐구나? 그럼 어쩌라고? 알고 있는 사실을 잊어버리라고 할 수도 없고, 고작 조연 한 명 연기 바로잡겠다고 밤샘촬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냐.”

심성윤의 말은 정론이었다.

신시라 역의 정신혜는 주조연도 아니다. 성인 배역으로는 꽤 복잡한 감정들을 연기할 예정이지만, 아역 씬에선 그저 미움만 받으면 되는 악역.

시청자들의 시선을 받지 못할 캐릭터에 집중해서 주연들의 집중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군요. 안 되겠네요.”

“그런 거야, 이 녀석아. 근데 넌 참 별일이다? 오늘은 신시라 성인역 데려온 것도 아니면서, 아역 씬 조연한테 왜 신경을 써주고 그러냐? 찬이 때문이야?”

“예. 저 녀석이, 감정을 담고 있어서요.”

“감정을 담고 있다? 이찬 쟤 감정표현 잘하는 거 몰랐어?”

“그게 아니라······ 처음으로 자기 감정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요. 어떤 차이인지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그런 느낌입니다. 그런데 상대역이 저 모양이니, 좀 아쉬웠습니다.”

그 얘기에 심성윤은 아리송한 표정밖에 지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감독과 견학 온 주연의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이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쪽도 느꼈나본데. 이거 내가 컨트롤을 좀 해야 되나.”

“컨트롤? 찬아, 무슨 얘기야?”

혼잣말을 들은 상대역을 보며 이찬이 고민했다.

‘조혁수 저 아저씨는 자기 상대역의 향상을 위해서 아역 촬영장까지 끌고 왔었지. 나야 그저 내 연기만 잘할 생각이었지만······ 거기서 만족하고 싶진 않아. 명진아 누나 연기력도 생각보다 괜찮고, 심성윤 감독도 자연스러운 장면들을 잘 뽑아내는 느낌이고, 이 드라마는 확실히 기대가 돼. 거기다 내 참여로 아역 분량이 3화까지 확대된 상황이야. 단순히 좋은 드라마에 출연한 최고의 아역보다는······ 최고의 드라마에 출연한 최고의 아역 쪽이 더 좋지 않을까 싶단 말이야. 정말로 최고의 드라마가 되면, 어쩌면 하늘에서도 신호가 수신될지 모르니까······. 아, 이건 좀 꼬맹이 같은 생각인가.’

속으로 픽 웃긴 했지만, 이미 마음은 움직였다. 이찬은 진지한 눈으로 정신혜를 바라봤다.

“누나. 나 미안한데 연기 지적 좀 할게요.”

“엑. 어딜 선배한테······ 지적질을 한대?”

“신시라의 어머니는 거친 뱃사람들한테 성희롱이나 당하는 불행한 과부예요. 그리고 신시라는, 그런 집안 때문에 따돌림 당할까봐 철저하게 가족을 숨기고 강한 척하는 여자애고요. 지역 유지의 아들인 안지성을 부러워하는 동시에 짝사랑하는 소녀라고요. 그 열등감을 좀 표현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 누가 그걸 몰라? 이 싸가지 없는 꼬맹이야. 내가 평생 열등감 같은 거 느껴본 적이 없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냔 말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천재인 줄 알아?”

세상 사람들이 다 천재인 건 아니다. 그렇기에 때로 천재의 조언은 범재들을 돕기보단 좌절감만 심어주곤 한다.

그렇지만 이찬은, 천재라는 말조차 무색한 인물이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요.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조금만 신경 쓰면 감독님한테 엄청 칭찬 받으실 거예요. 저 믿고 그렇게 한번만 해주세요. 부탁합니다.”

연기할 때를 제외하면 늘 생기 없이 내려다보기만 하던 소년의 오만한 눈이 진지해졌다.

죄책감 속 열세 살 소녀는,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 10장 - 아역 정신혜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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