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 아역 정신혜 (3.) >
4월도 끝이 나고 5월이 도래하자, 따뜻한 햇살이 완연한 봄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날이 풀림에 따라 야외 씬 촬영도 개시되었다.
물론 여전히 계절감은 여름. 봄꽃으로 가득한 산천의 풍경이 아니라 초반부의 핵심 갈등을 만들어내는 운동회 씬이 주가 되었다.
그 첫 번째 순서가 바로 안지성의 축구 경기 활약이었다.
“자, 며칠 전부터 얘기했다시피, 오늘은 우리 찬이가 아주 있어보이는 축구부 캡틴 역할을 해줘야 해. 기억하지?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으로서 멋있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그래서 내가 특별히 선수 한 분을 모셔왔어.”
정확하게는 선수는 아니었고, 연예인 축구단 ‘휘모리’의 멤버 중 가장 실력이 좋은 장일권이었다. 고교 축구부 활동까지 하다가 끼를 발견하고 코메디언으로 전향한 인물이었다.
“반가워, 얘들아. 나 알지? 이뤈 일이 이쑵니까아~ 이거 한 사람. 하하하, 알아봐 줘서 고맙다. 그리고 네가 찬이지? 오늘 내가 기본기 가르쳐줄 건데, 잘 한번 해보자.”
“반갑습니다, 선배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바로 연습 시작하도록 해. 자, 이거 보고.”
개략적인 콘티를 건네받은 장일권이 곧바로 이찬을 데리고 운동장으로 향하고, 심성윤은 나머지 아역들을 두고 마저 설명을 이어갔다.
“안지성은 축구부의 스타야. 공부도 잘하는 데다가 운동까지 만능이니까, 여학생들 입장에서는 눈이 확 돌 수밖에 없어. 찬이가 축구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 그렇게 대단한 솜씨를 부릴 수는 없겠지만, 그건 카메라 기법으로 어떻게든 할 거야. 너희는 어떻게 해야겠어? 진짜 멋있는 선배를 본 애들처럼 환호해야겠지? 오늘 그 씬들을 촬영할 거야. 신혜가 잘해줘야 해. 아직 고백했다가 퇴짜 맞기 전 시점이니까, 옆에 앉은 진아랑 경쟁하듯이 목소리를 높여서 열심히 응원을 해야 한다고.”
구태여 자세히 설명하는 건, 대본리딩 때 미처 검토하지 못했던 추가 씬인 까닭. 1화의 영상미에 박진감을 더할 이 장면에 배우들이 충분히 공감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 순간에 명진아가 탄성을 냈다.
“아, 와!”
“진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감독님······ 저기 찬이가.”
“찬이가 왜? 방금 뭐 했어?”
“저기, 개인기 같은 걸.”
“개인기 같은? 말을 확실하게 해. 왜 얼버무리는 거야?”
“그게 뭔지 잘 몰라서요. 되게, 멋있었는데.”
“방금 ‘사포’ 했어요.”
마지막에 정신혜가 덧붙인 한마디에, 심성윤이 당황했다.
‘사포라고 하면 힐 리프트 말하는 건데? 공을 후방에서부터 뒤꿈치로 차올려서 전방에 놓는 기술. 꼬맹이들 운동신경으로는 잘 하기 어려운 테크닉인데, 그걸 이찬이?’
궁금해져서 빤히 바라봤지만, 장일권에게 얌전히 설명을 듣고 있는 이찬은 더 뭔가를 보여주지 않았다.
“흠······ 신혜는 사포가 뭔지 알고 하는 말이야?”
“알죠. 오빠가 축구부인데요?”
“아, 그랬어? 그거 참 별일이구나. 저 찬이도 장마 뒤부터 네 오빠가 될 텐데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축구를 잘하는 오빠는 아니겠지만, 그 감정 살려서 연기해주렴.”
“감독님, 친오빠 생각하면 몰입이 안 될 것 같아요.”
“아, 그래? 그렇담-”
또 뭔가 설명하려던 때에, 이번에는 아역 소녀들 전원이 탄성을 냈다. 심성윤도 이번에는 시선을 빠르게 운동장으로 보냈다.
햇살에 흙먼지가 부서지는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이찬이 장일권을 상대로 마르세유 턴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
“축구 천재라고?”
주변을 신경 쓰며 목소리를 낮춘 심성윤의 질문에, 장일권이 음료수 병뚜껑을 닫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형님? 계속 보셨잖아요? 쟤 저거 완전 물건입니다. 아주 발을 컨트롤하는 솜씨가 어른들 못지않아요. 거기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알아서 100% 따라해버리는데, 쟤 축구 제대로 시작하면 프로 레벨도 꿈이 아니에요.”
“무슨 개소리야. 찬이는 연기 천재야.”
“에이. 연기를 아무리 잘해도 축구 재능만큼은 아닐걸요?”
“아니라니까. 너 이 자식, 찬이한테 헛바람 불어넣었다간 뒈지는 수가 있다?”
“근데······ 본인한텐 벌써 얘기했는데. 축구 정말 처음 해보는 거냐고 추궁도 했고요. 그랬는데 아무튼 확실합니다. 저 아이는 2010년 월드컵에 나가야 할 한국축구의 신성이에요. 연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성윤 형님, 축구단 서포터로서 힘 좀 보태주시죠?”
“이 자식이 진짜!”
열이 받은 심성윤이 반쯤 진심으로 장일권의 멱살까지 움켜쥘 그 무렵. 자신의 미래를 두고 어른들의 싸움이 격화되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이찬은 두 소녀에게 둘러싸였다.
“찬아! 너 아까 정말 멋있었어. 이걸로 땀 닦아, 찬아.”
“이거, 이거 마셔. 집에서 레몬에이드 만들어왔어.”
명진아가 건네는 손수건과 정신혜가 들어 올린 텀블러는, 모두 별반 필요치 않은 것들이었다. 공 몇 번 만지며 뛰어다닌 정도로는 땀 한 방울 나지 않을 만큼 발달한 육체였기에.
하지만 그런 현실에도 둘의 성의를 거절할 순 없었다. 시선이 부딪쳐 파열음을 낼 것만 같은 분위기 때문.
‘정말로 축구부 스타가 된 것 같네. 두 사람이 경쟁적으로 나한테 잘보이려고 하고 있어. 그 이유는······ 진아 누나야 내게 경외감을 가진 까닭이겠는데, 신혜 누나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자기 생각밖에 없는 사람이 말이야.’
소년이 읽는 것은 심리가 아닌 감정. 자의식으로만 가득하던 정신혜가 기대와 설렘의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진정한 이유까지는 명확하게 규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두 소녀가 서로를 견제하며 가자미눈을 뜨는 이유만큼은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축구에서도 내가 우월한 모습을 보여준 모양이야. 그런 이찬의 하나뿐인 단짝이 되기 위해 서로를 배제하려는 거지. 원래 꼬맹이들은 뛰어난 사람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어하는 법이니까. 평생 할 일 없다고 생각했던 공놀이지만, 우러러지는 기분이 나쁘진 않네. 나중에 기회 되면 제대로 해볼까?’
심성윤이 알았다면 놀라 까무러쳤을 생각.
다행히도 이찬은 스스로 그 미래를 부정했다.
‘······쓸데없는 짓이지. 스포츠신문 보면 부상도 자주 입고 그러던데, 고작 떠받들어지겠다고 스포츠 따위를 할 이유가 없어. 나한테는 안전하고 느긋한 연기가 제격이야.’
심성윤이 알았다면 안도하며 가슴 쓸어내릴 생각이었다.
‘어쨌든 이 누나들의 선망과 질투는 작품에 좋은 영향을 줄 거야. 나와 붙는 씬에서든 서로 붙는 씬에서든, 자기들 감정 덕분에 좀 더 선명한 표현이 가능해지겠지.’
그런 이찬의 생각대로, 명진아와 정신혜는 진심을 담은 연기로 극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안지성을 향한 시선에는 이전보다도 더 큰 애정이 담겼고, 서로를 대할 때에는 보다 큰 경계심이 표출됐다.
다만 작은 부작용이 있긴 했다. 이찬은 그 부작용을 점심식사 시간의 창고 뒤쪽에서 발견했다.
“너, 자꾸 찬이한테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명진아다운 부드러운 말투. 그러나 명진아답지 않은 차가운 이야기. 그 말에 정신혜가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제가 언제 접근을 했다고 그러세요?”
“어딜 모르는 척이야? 오늘도 찬이 옆에만 계속 붙어 있었으면서. 씬을 끝마쳤으면 상대역인 나랑 복기를 해야 하는 건데, 왜 쪼르르 찬이한테 가서 미주알고주알 떠드냔 거야.”
“선배님, 혹시 질투하시는 거예요? 찬이를 남자로 좋아하셔서 이러시는 거예요?”
“뭐, 뭐?! 너······ 그렇게······ 말을 막······.”
앞쪽까진 꽤 그럴싸했는데 말이지-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명진아가 억지로 무서운 선배를 연기하고 있음을 알아본 그로서는, 그저 모든 게 귀여워 보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주요 아역 둘이 척을 지면 촬영이 어려워질 건 자명한 일. 이찬은 중재를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
“아, 찬아!”
“차, 찬아, 너, 언제, 거기?”
“‘너 자꾸 찬이한테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부터 들었는데, 엿들어서 미안. 누나, 근데 그럴 필요 없어. 신혜 누나 나쁜 사람 아니라고 했잖아? 그건 나 믿어도 돼. 그리고 선배도 그렇게 대들고 그러면 못 써요. 진아 누나가 나 걱정해서 그런 건데, 이런 일로 누나 미워하고 그러진 않을 거죠? 몇 명 안되는 아역끼리 잘 지내야지, 싸우고 그러면 되겠어요? 난 마음 나쁜 선배들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고요.”
제일 어린 후배 주제에 훈계하듯이 한 말. 하지만 이찬은 자신의 이야기가 두 사람에게 잘 먹혀들 거라고 확신했다.
‘연기력에 축구 실력까지 뛰어난 날 동경하고 있는 두 사람이야. 이렇게 말해놓으면, 나한테 잘보이기 위해서라도 서로 금세 화해하게······ 어?’
그러나 생각을 맺기도 전에, 멍해져 있던 명진아의 눈가가 붉어졌다. 무의식으로부터 우러나와 북받친 눈물의 전조였다.
“진아 누나?”
“······나 갈게, 둘이 얘기 나눠. 아, 배고파.”
도시락을 만지작거리며 돌아서는 명진아는, 끝내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소년만이 알아본 순간적인 애수였다.
다만 한 사람, 표정이 아닌 태도를 통해서 명진아의 감정을 알아본 아역이 있었다.
‘와······ 맙소사. 명진아 저 선배가 진짜 찬이 남자로 좋아하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저렇게 말 한마디 안 더하고 돌아서는 게 빼도 박도 못할 증거지. 자기가 질투해서 나 혼내던 장면을 들킨 데 당황해서, 당장 변명할 방법조차 떠올리지 못한 거야. 우와. 엄청나네. 명진아가 이찬을······ 우와.’
그들 또래의 여학생들이 연하 남자를 좋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발육도 성숙도 남자에 비해 빠른 탓에, 철없는 연하 소년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
특히나 아역들의 경우에는 그런 경향이 심했다. 잘생기고 품위 있는 하이틴 남자배우들을 몇 번 보고 나면 소년들에게선 그저 풋내만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연기 잘하는 연하 남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건, 그저 귀엽다 정도가 한계였다.
정신혜 역시 이찬을 향한 관심은 그 수준을 넘지 못했다.
연기를 잘해서 도움이 되는 아이. 귀엽고 잘생긴 데다 운동까지 잘해서, 다른 여자애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장식물. 그러니 친해져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되겠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아 선배가 저럴 정도란 말이지? 이거 어쩌면, 얘 놓쳤다가 크게 후회할지도 모르겠는데? 지금이라도 여자로 어필을 해봐야겠어.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키도 크고, 성격도 어른스럽고······ 키워서 잡아먹기에 나쁘지 않잖아?’
명진아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던 탓에, 이찬은 그런 정신혜의 흉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
소년이 걱정한 것처럼 두 소녀가 촬영에 지장을 주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든 덕분인지, 명진아도 정신혜도 서로에게 더 적대감을 보이진 않았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있었다. 이찬을 바라보는 명진아의 표정이 그것.
과거에는 마치 물망초처럼 풋풋하고 맑기만 했다면, 창고의 사건 이후로는 수국 같은 애수를 띠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의심할 나위가 없는걸. 진아 누나가 날 정말 남자로 좋아하는 모양이야.’
그건 어디까지나 논리적인 귀결이었다. 키가 크고 제법 굵은 목소리를 낼 줄 알 뿐 아직 성징도 겪지 않은 소년은, 남녀 사이의 미묘한 교류를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곤란한데. 형이 얘기한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남자친구 여자친구 하는 식으로 엮이는 건 무서워.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외적인 간섭이 너무 많아질 거야. 이를테면 열애설이 난다든지, 진아 누나 부모님이 부른다든지. 미리 잘라내는 게 편할 텐데······.’
그렇게 앞서가는 생각으로 선을 그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이찬이 미래를 대비해온 방식이었다. 그는 가능한 한 멀리 보고 길을 잡았다. 가시밭길이 가장 적은 방향으로.
‘그렇지만······ 형은 내가 그러지 않길 바랄 거야.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진아 누나 마음을 받아주자. 겁내지 말고 부딪쳐보는 거야. 그래서 좀 더 행복해질 방법을- 응?’
촬영이 일찍 끝났기에 이미 돌아간 줄 알았던 정신혜가 소년의 앞을 가로막았다. 주차된 밴들의 사이라서 시선이 드문 지점이었다.
“찬아. 이거, 받아줘.”
“이게 뭐예요?”
“편지. 너한테 주고 싶었어.”
편지라기보단 다이어리를 찢어서 접은 쪽지였다. 그 안에는 달랑 하트 한 개가 그려져 있었다.
“······이미 끝난 씬 다시 연습하는 거예요? 신시라 러브레터 씬은 잘 뽑혀서 다시 찍을 일이 없을 텐데?”
“그게 아니라 진심이야. 찬아, 누나랑 사귀자. 내가 진짜 잘해줄게. 뽀뽀도 해주고, 도시락도 싸줄게. 응?”
그 고백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이찬은 정신혜 본인보다도 더욱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어디에도 이성에 대한 야릇한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 그저 귀여운 소유욕이 보였다. 명진아의 것에 비하면 훨씬 더 읽기 쉬운, 아이다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 두 감정이 얽힌 탓에 이찬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망했다. 이런 식으로 갈 줄은 예상도 못했는데. 이래선 둘 중에 한 명만 선택해야 될 판이야. 연애 그런 걸 떠나서, 한쪽이랑 가까워지면 다른 쪽이 질투할 테니까.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뭔가 잘 정리할 방법이······ 앗.’
생각이 길어지는 소년을 바라보던 정신혜가, 대뜸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고백하던 때보다도 한참 더 떨리는 발걸음으로 소년을 향해 다가섰다.
뿌리치자면 뿌리칠 수 있었겠지만, 이찬은 그러지 못했다. 거칠게 거부한다면 아무리 자의식 강한 정신혜라도 상처 입을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그렇게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아······ 하, 헤헤. 이상한 느낌이야. 너 되게, 보드라워.”
가까이서 전해지는 여자아이의 숨결. 그 향기 속에서, 이찬은 상처를 가장 적게 줄 만한 거절법을 구상해냈다.
“흠. 선배님. 죄송한데, 제 인생에는 연기 하나밖에 없습니다. 남녀 사이의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요. 아직 사춘기도 안 와서 성 정체성도 애매한 상태고요. 그러니까 죄송하게도 고백을 수락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뭐야? 무슨 대사처럼 말을 하고 있어. 알았어 그럼. 뽀뽀 했으니까, 이걸로 만족할게. 사귀는 건 천천히.”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정신혜는 정말로 그 정도에 만족한 듯이 밝게 웃었다.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멀어졌다. 둘 모두에게 첫키스였지만, 그 감상은 교환되지 않았다.
< 10장 - 아역 정신혜 (3.) > 끝
ⓒ 비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