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29화 (29/250)

< 11장 - 미남 남태형 (1) >

5월이 하순에 이르렀을 때쯤에, 드라마 <가을하늘>의 아역 촬영 스케줄은 점차 뜸해지기 시작했다.

예정된 일은 아니었다. 스탭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한 완벽주의자는 조혁수 쪽이지만, 사실 그런 조혁수를 매번 불러서 써먹는 심성윤 감독 역시 보통은 아니었기에.

심성윤의 고무줄과도 같은 촬영 스케줄은 지금껏 늘어나지 않고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스탭들은, 적어도 초여름 장마가 그칠 때까지는 아역 씬 촬영이 계속되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고무줄이 이번에는 줄어들었다.

캐스팅이 완료된 시점부터 거의 100% 사전제작제로 진행된 촬영이다.

편성된 9월까지는 여전히 한참의 시간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두 주인공은 물론이고 악역인 정신혜까지 예상치 못한 연기력을 선보이며 어느 한 쇼트도 일곱 번 이상의 테이크가 들어가지 않았다.

자연히 촬영은 당겨지고 또 당겨졌다. 이제는 장마철과 무더위 등 여름날의 계절감이 없이는 못 찍을 씬들, 그리고 그 씬들과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씬들만이 남아 있었다.

“······사실 세트장 씬들은 지금 찍어놔도 무방하긴 한데.”

“후후. PD님도 참. 애들이랑 헤어지는 게 싫으신 거예요?”

“무슨 그런 말을. 여진 씨, 내가 그 꼬맹이들을 그리워한다 이 말이야?”

“그런 거 아니었어요? 재촬영하거나 추가할 씬 없겠냐면서 절 편집실까지 부르신 거, 무척 절실하신 거 아니에요? 그리고 보탤 거 없다고 말씀드리니까 이젠 여름에 찍을 걸 앞당겨서 찍자고까지 하시고. 독신이셔서 그런가, 아이들 보는 게 참 즐거우신가봐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명작 한 번 뽑아보고 싶다는 거지. 쳇. 됐어, 됐어. 가정의 달에 늦게나마 휴가 내준다.”

그렇게 아역 출연진의 20일 휴가가 결정됐다.

이찬에게 있어서 무척 반가운 소식이었다.

감정적인 반가움은, <가을하늘> 촬영장에서 주로 얽히는 아역들이 모두 대하기 껄끄러워진 까닭.

자신을 이성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명진아. 그런 것도 아니면서 사귀자며 고백한 정신혜. 어느 쪽도 편할 수가 없었다.

‘남녀 간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훨씬 깔끔했을 텐데 말이야. 지금은 사과를 할 수도 없고, 잘해줄 수도 없고, 이득을 줘서 거래관계로 만들 수도 없어. 뭘 어떻게 하더라도 문제는 복잡해져버려. 애들 다루는 건 정말 자신 있었는데, 그 자신감은 남자에 한정해야 될 것 같아. 사춘기 여자애들이란 도저히 컨트롤이 안 돼. 그나마 좀 나은 게 명진아 누나 쪽인데······ 그 누나랑 친하게 지내면 신혜 누나는 내게서 멀어지겠지.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거고.’

한때 고백까지 했다가 차인 남자애가 다른 여자애와 친하게 교류하는 걸 본다면, 자의식 높은 정신혜는 오히려 이찬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소심한 명진아의 경우엔, 정신혜와 이찬이 잘돼가고 있다고 느낀다면, 정말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둘을 피할 터였다.

촬영을 위해서라도 당장 그런 상황을 만들 순 없었다.

‘지금처럼 아슬아슬 줄타기를 해나가야지. 두 사람 모두 내게 인정받겠다는 경쟁심 덕에 집중력은 유지가 되고 있어. 하지만 끝내 어정쩡하게만 지낼 순 없는 노릇이야. 둘 중에서 한 명만 선택해야 한다면······ 진아 누나겠지? 연기자로서 비젼이 훨씬 더 크니까······ 아니······ 이건 취소. 그런 걸로 사람을 가르다니, 나쁜 생각이야. 그게 아니라, 진아 누나랑은 이미 친구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래서 그 누나를 선택하는 거야. 이번 촬영 끝나고 나면 신혜 누나랑은 정리를 해야지. 그러면 진아 누나랑 적당한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거야.’

애초에 명진아의 경외가 연심으로 발전한 것 자체가 정신혜의 접근 때문이었다. 그 질투의 요소만 없애고 나면 안정적인 친구 사이가 유지될 거라고, 이찬은 생각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억지로 사귀거나 그랬다간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머리 아픈 일들을 겪지 않으려고, 사람들이랑 얽히지 않으려 했던 건데······.’

조금 어른스럽다곤 해도 아직 열두 살. 게다가 이찬은 가리고 가린 악감정조차 한순간에 파악할 수 있는 천재였다.

촬영이 끝나고 나면 둘 중 한 사람에게서 미움받게 되리라는 생각은, 강인한 정신마저 옥죄는 긴고아(緊箍兒)가 됐다.

‘······그래도 해야지. 언제까지나 도망치면서 살 수는 없어. 형 말대로, 난 행복해질 거야. 그러기 위해선 다음 작품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찾아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해.’

그게 바로 장기휴가가 반가운 현실적인 이유였다.

4월에 진행한 오디션 중에서 상업영화의 주인공 역할에 캐스팅되어, 이제 슬슬 그쪽 일정도 준비해야 할 상황이었다.

영화의 제목은 <미스 스캔들>.

고아라는 사실을 숨기고 톱스타가 되어 각종 염문 속에서 살아가고 있던 여배우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남동생을 받아들이며 전개되는 가족영화다.

최근에 프로액터스로 이적한 탤런트 신수영이 여주인공 역할에 캐스팅되며 그 남동생 역할에 아역들이 상당히 몰렸는데, 필모가 없는 이찬이 그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기본적으로는 오디션에서 보여준 실력 덕분이었겠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닐 거야. 나라엔터라는 배경. 올가을 최고 기대작인 <가을하늘>. 그리고 여주인공 신수영의 추천. 그중에 하나라도 없었다면 큰 배역은 따내지 못했을지 몰라.’

아주 큰 배역은 아니었다. 하이틴스타로 브라운관을 누비던 신수영의 충무로 진출을 위해서 선별된 영화이므로, 주연이라곤 해도 남동생 역의 분량에는 제약이 있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경쟁이 치열했다. 신수영의 첫 번째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으니, 영화인들에게 얼굴을 알리기에는 최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스 스캔들>의 제작진은, 이찬이 나라엔터에서 전폭적으로 푸시하고 있는 제2의 강정후라는 점, 그리고 작품이 개봉되기 전에 방영이 개시될 <가을하늘>의 주인공 아역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신수영이 강력히 추천한 아이라는 점까지 고려해서 용단을 내렸을 터였다.

‘신수영 누나는 좋은 배우지. 하이틴스타로 시트콤과 드라마에 여러 번 나와서 인지도도 높고, 안정록 아저씨한테 제대로 배운 연기력도 꽤 훌륭하고. 그러니까 감독 입장에서도 그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투자자부터가 신수영 누나 회사인 프로액터스니까 말이지.’

깊은 인연은 아니었다. 국립한국예술대학교를 견학했던 3월, 그녀는 안정록의 애제자로서 이찬과 마주했다.

거의 팬이 되어 연극까지 보러 오기도 했지만, 단 하루였다.

그 가벼운 인연 덕분에 주목도 높은 영화에 캐스팅되었던 것이다. 동료 배우들과의 인맥도 중요하다고 했던 안정록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문이 벌컥 열렸다.

“우리 귀여운 찬이! 일어났어?”

“누나는 노크를 매번 까먹네요.”

“앗! 미, 미안해!”

로드매니저 염수진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말 미안. 오늘 밥이 너무 잘돼서 그만······.”

“이유도 다양하시네요. 나갈게요.”

일찌감치 일어나서 체력단련 중이던 이찬이 티셔츠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식탁 위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 모양을 바라보며 소년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매니저를 들인 건지 가정부를 들인 건지 원. 그야 이군영 대표가 엄마 노릇을 하라고 시켰으니 이러는 거겠지만, 이 누나는 매니저로서 어떤 꿈 같은 게 없는 건가?’

그런 궁금증을 입에 담은 건, 처음으로 염수진이 모는 밴에 올라탄 뒤였다.

“누나는 꿈이 뭐예요? 어떤 매니저가 되고 싶어요?”

“꿈? 얘는, 뭘 또 그런 걸 묻고 그래? 하지만 오늘은 누나가 수습기간 마치고 제대로 업무를 보는 첫날이니까, 기쁜 마음으로 대답해줄게. 내 꿈은, 훌륭한 배우를 만들어내는 거야.”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이찬은 곧바로 알아챘다.

사실은 염수진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는 거짓말이었다.

‘잘생긴 배우들 많이 보고 싶어서 매니저 됐다고 말하기는 너무 부끄럽잖아. 그래서 찬이 맡았을 때도 주저했던 건데. 귀여운 찬이 데리고 다니는 것도 좋지만, 나중에는 양원일이나 차영기 같은 멋진 배우들을 담당해야지. 얘를 잘 케어하고 나면 이군영 대표님도 날 높이 사실 거야.’

이군영이 그녀의 감성적인 면에 집중해 평생 아역들 뒤치다꺼리나 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알게 된다면 실망하겠지만, 아마 평생 알지 못할 일이었다.

*

영화의 제작은 일반적으로 프리프로덕션, 프로덕션, 포스트프로덕션으로 3분할 된다.

프로덕션을 촬영이라는 말로 거의 대체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이전의 사전작업을 프리, 그 뒤의 후반작업을 포스트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벼운 영화들일수록 프리와 포스트 과정은 축소되기 마련이다. 특히 대본리딩의 경우에는 영화에 따라 완전히 생략되는 경우도 많았다.

<미스 스캔들>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주연인 신수영과 이찬이 만들어가는 상황들이 극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만큼, 다른 조연들의 비중은 대부분 단역 수준. 구태여 전체가 모여서 리딩을 진행할 이유가 없었다.

그 대신 감독은 다섯 명의 주요 배우들만을 대동한 저녁식사를 기획했다. 프리프로덕션 일정을 조율하는 자리이자, 촬영장에서 어색하지 않도록 친분을 나누는 사교의 장이었다.

매부리코에 큰 키의 소유자인 오덕환 감독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 배우들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덕환입니다.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얘기는 편하게 드시고 나서 천천히 하도록 하죠.”

그걸로 끝. 간명한 인사였다.

신수영은 그 태도가 불만인지 부루퉁한 목소리로 이찬의 귓가를 간질였다.

“아, 저 감독님은 참 사람이 이상하다니까? 충무로 데뷔작이니까 대표님이 추천하시는 영화 잡긴 했는데, 감독님 때문에 마음이 좀 그래. 얘, 보면 약간 변태 같지 않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낯가림이 심하신 거예요.”

“어머? 너 저분 잘 아니?”

“잘 아는 건 아닌데, 어디서 좀 들었어요.”

거짓말이었다. 그저 오덕환이라는 감독이 은연중에 내비치는 미세표현을 통해서, 그가 심각하게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며 그것을 딱딱한 태도로 감추고 있음을 알았을 뿐.

이찬 입장에서는 감독보다도 신수영이 더 이상해 보였다.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지 모르겠어. 겨우 하루 만나봤을 뿐이고, 내 연극 한 번 본 것만으로 경외감까지 가질 만큼 눈썰미가 출중한 사람도 아닌데 말이야. 대체 왜 자기가 내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이렇게 달라붙어 있는 걸까?’

시트콤 <청춘 클래식>을 통해서 일약 스타가 되었으며 서구적인 미인을 손꼽을 때 빠지지 않는 신수영.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그녀지만, 지금 이찬에겐 그저 불편한 사람이다.

선글라스 때문이었다.

식사 자리에서조차 알 큰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데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나, 그로 인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관만 보더라도 얼추 감을 잡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보는 기분이 불편하단 말이야. 자연스레 보이던 게 보이지 않으니, 약간 장님이 된 기분까지 든달까······.’

평범한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뭔가 가려진 세상을 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은 들었지만, 당장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대하기가 영 답답했다.

무엇보다 신수영과는 이미 교분이 있는 상태. 그렇기에 그녀 외의 다른 배우들과 대화를 나눠볼까 했는데, 잘나가는 스타인 신수영과 딱 붙어 있자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신수영 외의 성인 조연은 전원이 무명 배우들이었다. 투자가 부족한 탓인지 외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고, 해외 출장 중인 이군영이 돌아오면 얘기해볼 요량이었다.

어쨌든 그 조연들은, 신수영의 네임밸류가 부담스러운 건지 인사만 한 차례 나눈 뒤 식사에 열중하고 있다.

‘한병일 아저씨나 김찬미 누나는 그렇다 쳐도, 저 남태형 아저씨랑은 좀 친해지고 싶은데. 영상자료는 본 적 없지만, 눈빛만 봐도 연기력이 영 별로일 것 같단 말이지. 작품 성공시키려면 저 사람이 활약해줘야 할 텐데.’

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가 하는 생각으로는 굉장히 오만한 것이었으나, 그 판단은 사실과 맞아떨어졌다.

남태형은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다. 그저 단 한 가지 장점으로 인해 캐스팅되었을 뿐.

그가 맡은 배역인 ‘양지환’은 신수영이 분한 ‘심유리’를 짝사랑하는 조연출로, 스캔들만 일으키는 팜므파탈 심유리를 감화시켜 내면의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이다.

그런 중요한 배역에 왜 그가 들어온 건지, 이찬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찬아, 왜 이렇게 안 먹어? 자, 여기, 고기. 누나가 주는 거니까 맛있게 꼭꼭 씹어 먹어요?”

거기 더해서 선글라스 낀 신수영의 과잉친절까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두 가지 미스터리 중 하나를 해결하게 된 것은, 답답한 심정에 화장실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아역의 매니저로서 화장실 앞까지 따르던 염수진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남태형······ 걔는, 진짜 너무 잘생기지 않았니?”

“그래요? 그 정도예요?”

“그래! 정말이지, 너무 예쁘게 생겼어. 모성본능을 너무 자극한단 말이야. 아, 촬영 내내 저 사람 얼굴을 볼 수 있다니, 너무 행복할 것······ 흠. 어, 얼른 다녀오렴. 나도 장실 좀.”

마지막에야 민망함을 느낀 듯 황급히 도망치는 로드매니저였다. 이찬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형은 잘생겨서 뽑힌 거구나. 어쩐지······. 이번 영화는 힘들겠네. <가을하늘>보다 더 힘들어질지도 모르겠어.’

감독보다도 먼저 난관을 예상한 소년의 괴로움이었다.

< 11장 - 미남 남태형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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